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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운대 해변의 낙조


                                   `                                                                    손정모(孫廷模)

  석양의 갯벌 어디에도 물은 없다. 소금기조차 말라붙어, 모래 바람 자욱한 백사장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바다를 향한 길목쯤에서 선혜는 백색 구두를 벗어든다.

  새벽에 장교수의 연락을 받기 전서부터 나에겐 선혜가 광막한 갯벌을 하염없이 배회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래 바람 나부끼는 몰운대의 갯벌 위에 설마 선혜가 있으리라고는 미처 장교수도 생각 못한 모양이다. 잠이 덜 깬 탓인지 머리가 너무나 지끈거렸다. 선혜의 방랑벽이 도졌음을 때 맞춰 알려 준 장교수의 음성을 듣고는 부쩍 더 그랬다. 선혜가 길을 나서면 다시는 돌아오기 어려울 거라고, 혹시 만나게 되면 거처나 좀 알려 달라는 하소연이었다. 전화의 여운 탓인지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 잠시 깨어났던 의식이 스러진 뒤엔 곧바로 깊은 새벽 잠에 빠져 들었다.

  나는 이용실 판유리를 통하여 다대포의 아침 전경을 바라보고 있다. 포구 가득히 밀물이 들어차고 있다. 청록의 짙은 색조로 물든 바닷물이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에는 힘이 실려 있다. 문득 광막한 갯벌이 연상되었다. 모랫바람에 치맛자락을 싸쥐며 출구를 찾는 선혜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아까부터 두 마리의 갈매기가 번갈아가며 물살을 가른다. 갈매기의 나래짓에는 무한한 자유가 깃들어 보인다. 파도가 드세질수록 나래짓은 바람을 가르며 날렵해진다. 빗속에 움츠러드는 들짐승처럼 마냥 졸아들기만 하던 장교수의 목소리였다. 내뱉는 목소리마다 체념과 한숨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인근의 여관 건물을 돌아 행인 서넛이 걸어온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어보면 대개는 감이 잡힌다. 아니나 다를까 한 사내가 이발소에 들어선다. 머리카락이 텁수룩하다. 넉 달마다 한 번씩 오는 사내다. 가볍게 목례를 하는 듯 마는 듯 출입문에서 세 번째 의자에 앉는다. 짧게 해 줘요라며 눈을 감는다. 나는 머리카락에 스프레이질을 하고는 멀리 수평선을 내다본다. 사내의 머리카락에 물방울이 돌돌 말린다. 지난 정월말 그 날 밤의 물방울에 생각이 미쳤다. 선혜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던 청결한 물방울. 돌돌 말려 흐르다가 그녀의 무릎에 멈춰 물방울이 떨고 있었다.
  
  선혜가 여관에서 옷을 벗던 그 날은 언제나 추억 속에 새롭다. 그 날 저녁 무렵이었다. 한 떼의 눈발이 어지럽게 나부끼고 있었다. 입술을 파랗게 떨며, 얼굴이 갸름한 여인이 이발소에 들어섰다. 스물 너댓으로 보이는 미니 스커트의 여인은 첫 눈에 혹할 만큼의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 그녀는 곧장 쪽지를 건네고는 유리문을 나섰다. 쪽지에는 장교수의 소개로 왔노라며, 골목 옆 카페에서 기다리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 날 따라 바다는 변덕이 심했다. 통통거리는 발동선의 엔진음에 묻혀 바다는 신열을 앓고 있었다. 금세 눈발이 나부끼다가 굵은 빗줄기로 변하였다가는 다시 펑펑 눈이 쏟아졌다. 눈발이 휘몰아칠 때마다 유리문이 덜컥거렸고, 곧바로 냉기가 엄습해 왔다.
  약속 시간인 밤 9시였다. 카페의 손님으로는 그녀와 나 둘뿐이었다. 창 밖은 휘몰아치는 폭설로 윙윙거렸고, 카페 안은 다뉴브강의 물결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첫 마디에 그녀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연이어 수줍은 표정을 짓더니, 그녀는 술을 마시고 싶다고 했다. 주점을 거쳐 여관에 든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머리를 감겨 주자, 사내는 미란을 따라 밀실로 들어간다. 미란의 몸매를 훑어 보는 눈빛이 탐욕스럽다. 커텐이 드리워진 밀실에서는 이내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 번에는 40대 중반의 사내가 이발소로 들어선다. 아예 반바지에 슬리퍼를 착용한 간편한 차림새다. 흑곰이라는 사내다. 미란의 말로는 단전 부위에 흑곰의 문신을 새긴 사내였다. 미란은 사내의 흉물스런 문신을 볼 때마다 전신이 오그라드는 느낌이라고 했다. 미란의 말에 의하면 사내는 지독한 변태임에 틀림없다. 올 때마다 요구하는 체위가 달라, 곤혹스럽다고 한다. 하지만, 사내는 한 달에 두 번씩 이발소를 찾는 단골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내가 가입한 금정 산악회와 누드 포토회의 상임 고문으로서 인기가 대단한 사업가다. 그의 소개로 많은 회원들이 나의 이발소를 찾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설사 그가 변태라 할지라도 미란과 나에게는 괄세할 수 없는 단골임에 틀림없다.

  고향인 동해시를 떠나던 날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새에게는 돌아갈 둥지가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둥지가 없어도 날 수는 있지만, 둥지 없는 비상은 나는 것 자체가 슬픔일 수 있다고 말이다. 어머니의 그 말이 유언이 되던 날 고향 언덕에서 내가 뿌린 눈물은 얼마였던가 ? 그 때는 정말 몰랐었다. 어머니의 그 말이 유언이 되리라고는. 세월이 흐를수록 어머니의 말은 나의 가슴에 잠언으로 다가온다.
  어느덧 고향을 떠나온 지 3년만이다. 서른 하나에 미혼으로 남은 혈혈단신이다. 여지껏 내겐 돌아갈 둥지 하나 없다. 해변 언저리에는 해묵은 포플러나무가 두 그루 섰다. 멀리서도 까치 둥지들이 쉽게 눈에 띈다. 무성한 가지들마다 까치 둥지들이 벌려서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조화라면, 내 어이 돌아갈 둥지 하나 없을까 ? 둥지 하나 없는 전생의 나는 무엇이었을까 ? 혹시 날개 찢어진 갈매기는 아니었을까 ? 어쩌다가 부산에까지 흘러와 이발 가위에 인생을 걸게 된 걸까 ? 생각할수록 만감이 교차하여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불현듯 미니 스커트 차림의 선혜가 갯벌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머리에 자막처럼 펼쳐졌다. 살색이 고운 그녀의 다리는 곧고도 매끄러웠다. 지금쯤 갯벌의 모래 바람은 그녀의 치맛자락을 훌렁 휘말아 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는가, 다대포 몰운대의 모래 바람을 ? 모래 사장에 섰던 사람이라면 모래 바람의 위력을 알 것이다. 좁쌀 같은 모래 알갱이가 얼굴을 향해 들이붓듯이 마구 쏟아진다. 따끔거리는 얼굴을 추스릴 새도 없다. 훅하고 숨을 들이키는 사이에 모래 사장 언저리로부터 새로운 바람이 눈을 휩뜨고 일어난다. 불에 덴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만져서는 안 된다. 만지면 만질수록 살갗의 시달림은 강도를 더해갈 뿐이다.

  샤워를 하고 알몸으로 마주앉았을 때였다. 4번을 누르니, 여관의 비디오답게 포르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혜는 말했다.
  "아저씨, 우리 얘기부터 먼저 해요."
  소주를 한 병 가까이 마신 얼굴이지만 도무지 취기라곤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녀의 두 눈이 더 말똥말똥해진다.
  "먼저 궁금한 게 있거든요. 아저씬 장교수님과 어떤 관계세요 ? 아저씨의   시골 중학교 선배이자 금정 산악회의 회원으로서 그저 자주 만나는 사이라구요 ? 제가 듣기로는요, 그보다도 훨씬 절친한, 허물없는 사이라고 들었거든요. 아뭏든 그쯤 알면 된다구요 ? 다소 어정쩡한 대답이지만, 수긍하는 것으로 받아들일게요. 저는 유선혠데요, 장교수님 밑에서 공부하는 석사 과정의 학생이예요. 덤으로 주당 2번씩은 본교의 누드 모델로 나서고 있죠. 어머, 놀라시는 표정이네요. 요즘 미대생들 중에서 누드 경험이 없는 여학생들도 별로 없어요. 오늘 밤에 아저씨를 찾은건요, 아저씨와의 절실한 상담이 필요해서예요."

  유리창을 파고드는 해변의 바람결은 늘상 시원하다. 아침 나절 내내 해풍은 미풍으로 나부낀다. 흑곰이 밀실로 들어간 후에도 세 사람의 머리를 더 깎았지만, 아직도 밀실에선 기척이 없다. 아마도 전무후무한 장면들이 속속 펼쳐지는 모양이다. 관심은 없지만 신경은 쓰인다. 여름철이선지 대다수의 손님들은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다. 간혹 중국산의 누런 부채를 들고 오는 축도 몇몇 눈에 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부채는 역시 중국 사천성의 부채가 으뜸이라고 으시댄다.

  재작년 여름이었어요. 2학기의 유급 조교 배정 문제로 잠시 만나자면서 장교수는 연구실로 저를 불렀어요. 둘만 달랑 남은 밤 10시 무렵의 연구실이었어요. 장교수는 양줏잔을 들어 제게 술을 권했죠. 저는요, 술은 좀 마시는 편이거든요. 부담 없이 몇 순배의 술잔을 나누었죠. 얼굴에 홍조를 띤 장교수는 문득 저의 알몸을 그리고 싶다며 보챘어요. 저는 다소 황당한 느낌이었지만, 누드 모델 본연의 자세를 취하며, 알몸으로 좌대에 올랐죠. 술이 문제였는지 뭐가 문제였는지는 몰라도 지극히 묘한 일이 그 때 벌어졌죠. 그림을 그리다 말고 장교수는 느닷없이 손바닥으로 저의 사타구니를 애무해대기 시작했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미처 놀라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었죠. 그 날 이후로 장교수와 저는 수시로 밀애를 즐기는 관계로 발전했죠. 장교수로부터 심한 상실감을 느끼지는 않았냐구요 ? 천만의 말씀이예요. 누드 모델로 진출한 일부의 여성들은 남자 경험이 많거나 끼가 센 경우도 더러 있나 봐요. 또한 제 경우도 장교수가 첫 대상은 아니었죠. 솔직히 말하면, 저의 몸에도 색정이 줄줄 넘쳐 흐를 거예요.

  유리문 밖의 길섶에는 방풍림으로 조성된 동백나무와 사철나무의 숲이 줄지어 섰다. 쉬임없이 불어오는 7월의 바람결에 방풍림의 잎새들이 깨어나고 있다. 파르륵거리는 잎새들의 진동음에서 아침 바다의 활기를 느낀다.
  이제 바람이 강풍으로 변하면, 잎새들은 자지러질 듯이 몸부림을 칠 것이고, 사이사이로 새들의 둥지가 드러날 것이다. 바람이 불 때면 왠지 둥지가 그리워진다. 불법인 줄 알면서, 언제까지 상납을 해 가며 퇴폐 이발소를 운영하겠는가 말이다. 정말 나도 이젠 떳떳한 자유인이고 싶다. 날개를 펼치고 자유롭게 한 번 날아보고 싶다. 날다가 매서운 바람을 만나면 잠시 날개를 접었다가, 바람이 잔잔해지면 저녁 안개처럼 가볍게 하늘을 날고 싶다. 날다가 지치면 언제라도 포근하게 잠들 수 있는 둥지를 갖고 싶다. 하늘을 나는 새에게 둥지보다 더 절실한 것이 또 있을까 ?
  포구에서 수시로 들끓는 파도는 언제라도 해일이 되어 이발소를 송두리째 삼켜 버릴 것 같다. 하루라도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 제 때에 못 벗어나면, 파도 더미에 고스란히 압사당해 버리고 말 것 같다. 더러 그랬었다. 강풍이 불 때면, 유리문에는 해풍에 실려온 포말들이 줄줄이 흘러내리곤 했다. 언제부터였을까,기억이 아슴푸레하다. 판유리의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볼라치면 더러 절망의 눈물로 비쳐지곤 했다.

  장교수와의 밀애가 지속될수록 저는 점차 그를 발정한 수컷으로 여기게 되었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암내를 풍기는 암컷이 아니고 뭐겠어요 ? 6개월쯤 정신 없이 육체적 환락에 몸닳아하며 시간을 보냈죠. 그러다가 작년 늦가을에 하준홍이란 애인을 만나게 되었죠. 과내 친구들이 주선한 소개팅이었죠. 별로 기대하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저는 상대를 너무 잘 골랐다고 확신하거든요. 애인을 만난 지 3주쯤 되었을 때였어요. 느닷없이 그는 교수님과 저의 관계를 자세히 털어 놓으라는 거였어요. 다 알고 묻는다면서 마구 윽박질렀어요.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오르기에, 저도 숨김 없이 다 털어 놓아 버렸죠. 그랬더니, 그는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밖으로 나가 버렸어요. 그로부터 한 달이 다 되어 갈 때까지 줄곧 연락 두절이었다가, 지난 주말에야 저를 만나자고 불렀어요. 만나자마자 그는 저와 장교수의 육체 관계를 청산하라고 말했죠. 앞으로 더 이상의 관계만 없으면 과거의 일은 일체 묻지 않겠다는 거였죠. 그리하여, 사흘 전에 연구실에서 장교수를 만나 전후 사정을 얘기했죠. 선혜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는 사그라든 나의 성기를 손으로 가볍게 주물러댔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마자 나의 물건은 즉각적으로 고개를 처들며 부풀어 올랐다.

  어느 결에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다. 점심 무렵에 접어들자 식사를 하는지 손님의 발길이 뜸하다. 창 밖의 수평선을 내다보며, 미란과 나는 식사를 마친 뒤,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미란의 얼굴에 겹쳐서 선혜의 모습이 떠올랐다. 장교수의 말로는 어젯밤에 작별 인사를 하고는 기약없이 떠났다는 거였다. 지금쯤 선혜는 정처없는 여행의 길에 올라 있을 거라고 덧붙였다. 만날 때마다 선혜는 미니 스커트 차림이었고, 특히 해변의 석양을 그리워했다.오늘도 선혜는 필시 석양을 찾아, 몰운대의 갯벌을 찾아오리라는 확신이 섰다. 미란은 3년 전에 이발소를 개업하면서부터 나와 함께 일해 온 종업원이자 동업자이다. 종업원이라 함은 내가 그녀를 고용했기 때문이며, 동업자라 함은 미란과 나의 역할 분담이 다르고, 서로 공생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올해 스물 셋인 미란은 면도사이자 안마사이다. 그리고, 손님이 원할 때엔 육체까지도 기꺼이 열어 주곤 한다. 귀염성스런 얼굴에 언제 보아도 미란의 표정은 밝은 모습이다. 미란은 어떤 옷을 입어도 선정적으로 보이는 면이 있다. 언제 보아도 서글서글한 눈매가 미모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근래에 미란은 자주 나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내곤 한다. 애써 고개를 돌려 모른 척해 보지만, 그녀의 눈빛은 집요하다. 미란은 인간적으로는 좋지만, 배우자감으로는 질색이다. 나는 아무래도 전통적인 남자인 모양이다. 설사 내가 중졸 학력의 바람둥이랄지라도, 정조 관념이 헤픈 여자 따위는 딱 질색이다.

  막 찻잔을 내려놓자마자 전화벨이 요란하다. 전화기를 드니, 낚싯배인 수영호의 선주 차종명이다.
  "동준아, 오늘 포구 앞 장자도 부근에서 밤 낚시 어때 ? 괜찮다면 미란이하  고 같이 와. 나도 희정이를 데리고 갈 테니까. 희정이 알지 ? 접때 만난 우리 집 음식점 여종업원 말이야. 그럼 7시 무렵에 배 가지고 포구로 갈게."
  종명이는 낮에는 대중 음식점을 열고, 밤에는 낚싯배를 띄우곤 하는 오랜 나의 고향 친구이다.
  유리문이 열리며 두 명의 사내가 들어선다. 자리를 권하기도 전에 빈 의자에 척척 앉는다. 장교수의 음성에 묻어 있던 복잡한 감정의 기류가 자꾸만 가슴에 걸린다. 통화중인 그의 목소리엔 간간히 터질 듯한 울음의 색조가 반짝이곤 했다. 때로는 소중한 보물을 상실했을 때의 비통함 같은 것이 배어 있기도 했다. 선혜의 발걸음이 남기는 궤적이 문득 눈에 떠오른다. 아마도 그녀는 다대포의 광막한 갯벌에 묻힌 세월의 숨소리를 더듬어내고 있을 것이다. 세월의 숨소리라 ? 해변의 석양에 취하여, 나랑 둘이서 보냈던 시간들의 숨소리를 아마도 그녀는 듣고 있을 거였다. 문득 하얀 속옷에 서린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하다. 하여간 선혜의 발길이 닿는 곳 그 어디에서나 그녀의 향긋한 체취는 서려 있었다.
  
  사내의 뒤통수를 다듬질한 뒤, 흘낏 수평선을 바라본다.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한 날씨이다. 바다는 한없이 푸르고, 하늘은 눈부시게 맑다. 뚜우하고 뱃고동이 울릴 적마다 사람들의 눈길은 일제히 바다를 본다. 바다는 언제나 깨어 있다.
  일 주일 전의 중년 부인의 울음 소리마저도 바다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남편이 상무라는 여인은 남편의 바람기를 잠재울 방법이 없었다. 바람둥이 상무의 부인은 자꾸만 잦아지는 남편의 바람기를 더 이상은 못 견뎌했다. 속치마만 걸친 채 바다로 몸을 던진 그녀였다. 안개 속에서 낚시를 하다 말고 나는 그녀를 구했다.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여관으로 데려달라고 했다. 밤 중에 그녀는 교접을 원했고, 나는 조심스레 그녀를 가졌다. 그리고 난 뒤에, 여인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다물어진 그녀의 잇발 사이로는 섧디설운 울음 소리가 핏발처럼 새어 나왔다. 품으로 파고든 그녀를 안고 달래다가 얼핏 잠이 들었나 보다. 새벽에 눈을 뜨니, 여인은 떠나 버리고, 체온만이 남았다. 그렇게 그녀는 떠나간 거였다. 며칠 동안은 그녀의 울음 소리가 환청으로 귓전을 맴돌았다.
  내가 여관에서 돌아오던 새벽에 미란은 석상처럼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다.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서도 그녀는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바다에는 통통거리는 어선의 불빛만이 가물거렸고, 별도 찾을 수 없는 칠흑 같은 새벽이었다. 못 다 잔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웠을 때 미란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얼굴 가득히 창백한 빛이었고, 미란은 울먹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놀라 그녀를 주시했다. 미란의 오른손엔 양주병이 들렸었고, 그녀는 이미 취한 상태였다. 그녀를 침입자라고 내쫓을 상황은 아니라고 여겨졌다. 말없이 침대를 그녀에게 내주고는 곧바로 나는 방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다. 동이 틀 때까지 이따금씩 중얼거리는 미란의 잠꼬대가 귓전을 울려 주곤 했다.

  선혜는 말했다. 준홍이와의 관계를 들려준 직후였어요. 장교수는 느닷없이 저의 머리채를 휘감더니만 사정없이 태질치는 거였어요. 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요. 장교수가 손찌검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거든요. 경황이 없는 중에서도 저는 그가 돌지 않았나하고 그를 위해 걱정까지 했었죠. 하지만, 상황은 너무나 복잡한 거였어요. 확실히 말씀 드리지만, 저는 지금도 장교수를 따르고 존경하고 있어요. 사모님은 겉 모습과는 달리 다른 사내와 눈이 맞아 벌써부터 장교수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있었대요. 자녀 문제와 사회적 위신 때문에 갖은 노력으로 만류해 보았지만, 끝내 사모님은 막무가내라는 거였어요. 그리하여, 장교수의 마음이 점차 제게로 기울어지고 있는 마당에 웬 날벼락이냐는 거였어요. 장교수는 자신과 준홍이 중 하나만을 택하라고 윽박질렀어요. 하지만, 제겐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죠. 장교수를 택한다면 학문적인 미래는 보장되지만, 십오 년이나 되는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금세 치가 떨려요. 제겐 준홍이가 딱 어울리거든요. 그렇다고 장교수를 거절한다면……  제게 조언을 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 조언을 구하는 대가로 기꺼이 몸을 주겠다고 했다. 정색을 하며 말리는 체해 보려고도 했지만, 나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이미 그녀가 교접 행위에 있어서, 자유 분방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나신을 본 나의 마음은 벌써부터 흥분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애써 정절을 지키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유혹이 주어졌을 때,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도 인생의 좋은 멋이 아닐까도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아귀에 든 나의 귀두에서는 맑은 분비액이 한 방울 살짝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 날 밤 나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장교수는 내가 설득할 테니까, 준홍이를 택하는 게 나아 보인다고 말이다. 준홍이를 택하고, 계속 학업을 하더라도 절대 문제는 없을 거라고. 결코 장교수가 안면을 바꾸거나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을 거라고. 장교수가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던 것은 한 때의 좌절감과 울분의 단순한 표시였을 뿐, 결코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닐 거라고 그녀에게 설명했다.

  흑곰으로부터 소개를 받고 온 손님들은 대개 그냥 가는 법이 없다. 머리를 감겨 주고 나면 으례히 미란을 따라 밀실로 들어간다. 표면상의 이유는 안마를 받는 거지만 안마를 받은 뒤엔 하나같이 미란의 몸을 원한다. 심성이 다양한 사내들을 상대하면서도 미란은 한결같이 맑고 서글서글한 표정이다. 미인형의 얼굴에 늘씬한 몸매까지 갖춘 미란을 사내들은 한결같이 몸닳아하며 찾아든다. 게다가 언제나 쌩긋 미소짓는 표정이라니, 이 아니 금상 첨화일까 ? 근래에 미란은 안마사가 한 명은 더 있어야겠다는 눈치를 내비친다. 미란은 힘들 때마다 담배를 꺼내 문다. 더러는 내게도 비흡연가인 줄 알면서도 담배를 권하곤 한다. 그녀는 근래에 들어 간혹 피로하다고 응석을 부리곤 한다. 유리문을 밀고 한 명의 손님이 들어서고 있다.

  이야기를 마친 뒤 선혜는 서서히 일어섰다.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으로부터 흘러내린 물방울이 허벅지를 거쳐 무릎 위에까지 돌돌 말려 내려오더니, 반짝거리며 매달렸다. 매달린 물방울마다 청결한 느낌을 자아낸다. 덩달아 일어나서는 그녀를 안아올려 침대에 눕혔다. 선홍색의 돌출한 유두에 입술을 가져가며, 그녀의 사타구니께를 손으로 더듬어 내려갔다. 이 때부터 그녀는 서서히 달아오르며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눈 바람으로 덜컹대는 창 밖으로는 폭설만이 쉬임없이 나부끼고 있었다. 세상 천지의 모든 가식과 허물이 폭설로 묻혀 버리고, 오로지 그녀와 나만이 우주에 살아남은 느낌이었다.

  시계를 흘낏 보니, 저녁 6시다. 바다 가득히 황금 햇살이 눈부시게 파득거리고 있다. 나는 미란에게 눈짓을 보냈다. 오늘은 일찍 문을 닫아 걸자는 신호다. 의외라는 듯 미란은 반짝 눈을 빛낸다.
  "아까 전화 왔었어. 종명이란 친구 있잖아 ? 낚시하러 너랑 같이 나오라고  했어."
  "아, 알았어요. 수영호 선주 아저씨 말이죠 ? 정말 잘 됐네요. 그렇잖아도   오늘은 왠지 자꾸만 따분한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그럼 문닫고 셔터 내릴 준비할게요."
  미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레를 들고는 밀실로 들어선다.

  내가 선혜를 처음 만난 이후,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석양 무렵이었다. 방파제 끝에 앉아, 혼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노라니까, 구두 소리를 내며 그녀가 다가왔다. 몹시 보고 싶었노라며, 다가오자마자 나의 등에 얼굴을 갖다대며 허리를 껴안았다.
  그 날은 종명이의 개업 기념일이었다. 3년 전부터 나와 종명이는 개업 기념일에 맞춰 밤 바다에 배를 띄워 놓고는 자축연을 벌여 왔다. 종명이의 제의로 희정이와 미란이 및 선혜까지 끌여들여 장자도 앞의 밤 바다에서 조촐한 자축연을 벌였다. 자축연이랬자 소주 몇 병에 떡과 과일을 갖춘 횟감 몇 접시가 고작이었다. 자축연이 진행될 때면 우린 언제나 보배로운 과거의 추억담에 열을 올리곤 했다.

  헌데 그 날은 모두들 과음으로 인하여 제 정신이 아닌 듯했다. 밤 중에 배에서 내리자마자 나의 이발소로 모두 모여 들었다. 회상컨대, 그 때는 정말 모두 엉망으로 취한 상태였다. 누구의 제안이었던지, 문을 닫아 걸고는 다섯이 둘러앉아 밤중에 고스톱을 치게 되었다. 분명히 엉뚱한 발상이었다. 즉흥적으로 만든 규정대로 상하 두 겹씩의 옷만을 입고 둘러앉았다. 종명이가 말했다.

  "인생은 어차피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댔지 ? 씨팔, 태어날 때 누가 옷  을 입고 태어났어 ? 자, 지금부터 옷 벗기 고스톱 어때 ?"
  여자들은 일시에 소리를 지르며 놀란 척하더니, 이내 깔깔거리며 동의했다. 이 정도이니, 하나같이 비슷한 속성을 가진 속물 다섯이 용케도 호흡을 맞추어 모여든 셈이었다.
  "잠시 주목 ! 판이 돌아서, 지는 사람은 무조건 한 꺼풀씩 벗어야 된다 이  말이야, 알았어 ?"
  그리하여, 우린 그 날 팬티 차림의 반나체 춤을 추며, 광란의 하룻밤을 보냈다. 취해서 쓰러지기 직전에 선혜는 말했다.
  "준홍이도 장교수도 모두 싫어. 내게 필요한 건 바로 당신이란 말이예요."    

   선혜의 입을 통해, 나는 졸지에 아저씨에서 당신으로 둔갑을 하게 된 터였다. 지나고 보니, 선혜의 말은 확실히 진실이 담긴 사랑의 고백이었다. 헌데도 그 날 밤의 나에겐 단순한 술주정쯤으로 들렸을 정도로 나는 몹시 취해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녀의 눈빛에서 내가 읽은 것은 모든 굴레로부터 진정으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의자 정렬과 바닥 정리를 마치고 일어서니, 미란이 밀실 청소를 끝내고 나온다. 오늘 따라 더욱 앳되고 미색이 돋보인다. 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를 채우고는 포구를 향해 돌아섰다. 이제 해는 마지막 햇살을 내뿜으며 수평선에 걸려 있다. 수면은 온통 울긋불긋한 빛으로 파득거리고 있다. 번져 오는 물무늬에 실려, 포구를 향해 돌아오는 어선들의 뱃그림자가 흔들린다.
  포구를 향해 두어 걸음을 옮기다 말고 미란에게 말했다. 먼저 선착장으로 나가 종명이를 기다리라고 했다. 그가 묻거든 잠시 볼 일 때문에 늦을지도 모른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만약 약속 시간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그대로 출발해도 좋다고 말했다.
  바다는 썰물 무렵이라, 끝없이 밀려나고 있다. 미란과 헤어져서는 곧장 선혜가 서성거리리라고 예상되는 몰운대의 갯벌을 향해 걷는다. 아예 슬리퍼 차림이라 걷는 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 발 밑의 감촉으로 모래는 바싹 말라 있다. 바닷물이 빠져 나가자마자 갯벌은 급속도로 말라붙고 있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모래 사장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펼쳐져 있다. 일몰이라 곳곳에서 습기를 머금은 저녁 안개가 백사장을 누벼 흐르고 있다. 나는 곧장 부지런히 갯벌 서쪽으로 걸어나갔다. 발 아래로 사각거리는 흰 모래의 감촉이 평온한 느낌을 던져 준다. 이제 햇살은 여명으로 남고 땅거미가 연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햇살이 잔광으로 바뀌면서 차가운 기운이 일며 모래 바람이 피어 오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저녁 안개는 자우룩해지고, 모래 바람은 강도를 더해 간다.
  
  내가 선혜를 두 번째로 만나고 나서부터 그녀는 수시로 나와 함께 밤을 보냈다. 그녀는 내게 털어 놓았다. 표정과는 달리 그녀는 때때로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말이다. 또한, 나의 눈에 비친 그녀의 우울증도 결코 가벼운 정도는 아니었다. 더러 그녀는 촉촉한 손길로 나의 알몸을 애무하며 말하곤 했다.
 "제겐요, 전혀 우울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왔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  어요. 근래에 들어선 부쩍 가슴이 답답해져 오며, 마음이 자꾸만 무거워지곤   해요. 처음엔 무슨 걱정이 생기나 보다 했죠. 하지만, 제겐 처음부터 걱정  같은 건 없었어요."
  걱정이 없다는 그녀의 표정을 보는 것 자체가 걱정이었다. 근래의 그녀의 얼굴에는 얇은 살얼음이 잔뜩 깔린 듯했다. 살얼음이란 말에 연이어, 바이칼호의 항공기 불시착 사고가 떠올랐다. 지금 걷고 있는 현실은 살얼음보다 안전한 걸까 ? 빛살이 조금만 강해져도 일시에 무너져 내릴 운명은 아닐까 ? 부지불식간에 나는 뇌까리고 있었다. ' 무자격 조종사 ! ' 나는 지금 어느 하늘을 날고 있을까 ? 나는 항공 지도와 항법 장치마저도 없이 무조건 앞으로만 돌진하는 무자격 조종사다. 안개 너머엔 절벽이 있는지 산악이 있는지도 모른 채, 가는 데까지 무작정 몰아 보는 거다. 그러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폭발해 버리겠지. 폭발을 생각하자 전신에 한기가 뻗쳐 오른다. 내가 무자격 조종사로 이발소에서 이리저리 조종간을 잡고 놀려대다가 운무에 휩싸여 버리면, 그 때는 끝이다. 막다른 상황에서 운무에 가려진 둥지를 찾아내 줄 미지의 조종사가 있기나 할까 ? 연못 밑 바닥으로부터 끓어 오르는 기포들마냥 머릿속은 온통 혼란의 극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종명이와의 약속 시간은 아직도 20분 가량이나 남아 있다. 이 때야말로 문명의 이기를 쓸 때라고 여겨졌다. 핸드폰을 꺼내 종명이와 통화를 시도했다. 발신음이 두 번째로 울리자 종명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종명아, 나야. 나한테 지금 개인적인 볼 일이 있거든. 용무가 끝나는 대로   연락할게. 늦더라도 전화할 테니까, 오늘 밤은 술 좀 마시자구. 그럼 나중에   봐."
  구름장을 빨아 삼킬 것 같이 장중한 일몰의 모습을 보여 주던 몰운대였다. 아직도 은은한 햇살이 남았지만, 모래 사장은 온통 안개로 뒤덮여 십여 미터의 전방밖에는 볼 수 없는 상황이다. 끝없이 펼쳐진 흰 모래와 저녁 안개로 어디가 어딘지 방향마저도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어디를 더 찾아 봐야 할까를 생각하는 중에 여인의 기침 소리가 안갯발 너머에서 들려왔다. 겹겹으로 둘러싸인 안갯발이라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기침 소리에서 직감적으로 선혜가 느껴졌다. 나는 다짜고짜로 고함쳐 불렀다.
  " 선혜야 ! 선혜 너 어디 있니 ? "
  " 어머, 동준씨. 나 막 울려던 참이었어. 이 쪽이야 ! "
  선혜와 나는 두 번째 만남 이후로는 편하게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선 지점에서 남쪽으로 이십여 미터쯤 달려가니 미니 스커트의 선혜가 백색 구두를 신고 달려온다. 영화 속의 연인처럼 그대로 달려나가 그녀를 껴안아 든 채 한 바퀴를 돌았다. 왠지 가슴이 쿵쿵거리며, 서로의 뺨이 불에 덴 것처럼 달아올랐다. 밑도 끝도 없이 선혜는 말했다. 동준씨, 나는 세 시간째 여기서 맴돌고 또 맴돌았어. 나의 질긴 껍질을 벗으려고 말이야. 나의 껍질을 생각하자, 도대체 처음부터 내게 껍질이란 것이 있었던 건지 갑자기 당혹스러웠었어. 소위 나의 껍질이란 것에 대해 고심하다가 막 해답을 얻으려는 참이었어. 바로 이 때 동준씨의 목소리가 들렸어. 세 시간씩을 바닷 바람을 쐬면서부터 거짓의 허울에 엉망으로 휘감겨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 거였어. 도대체 산다는 게 뭔지, 난 늘상 이렇게 허상과 가식 속에서만 살아온 건지 막 눈물이 나오려고 해. 동준씨, 정말 날 아내로 삼고 싶지 않았어 ? 동준씨가 날 걸레로 본다면야 더 할 말 없지만. 그래도 난 말야, 한 번쯤은 아내가 되어 달라고 고백해 올 줄 알았어. 하지만, 이젠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단 말이야. 난 이제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정신이 망가져 버렸단 말이야. 무슨 말이냐구 ? 사랑에 몸닳아하며 감동할 만큼의 순수한 영혼이 내겐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야. 난 이제 세상의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애.

  이야기를 하며 걸어나가던 그녀가 어느 새 백색 구두를 벗어 손에 들었다. 키득키득 웃음을 흘리며 그녀는 맨 발로 모래 갯벌을 달려간다.
  그녀의 말은 내게 너무나 뜻 밖이었다. 내심으로 그녀를 아내로 갖고 싶은 마음이 그 얼마나 사무쳤던가 ? 학력차가 난다는 자격지심만으로, 내 스스로 넘지 못할 벽을 만들어 놓았던 터였다. 그녀를 가질 때마다 장교수와 준홍이의 영상이 어른거렸다. 그녀를 아내로 갖고 싶은 염원만큼이나 그녀가 나를 놀이개로만 갖고 놀 거라는 불신이 커졌다. 그래서 그녀를 볼 때마다 교접에만 열을 올렸을 뿐, 사랑하노라고 고백 한 번 못 하였다. 섣부른 고백을 하다가 그녀로부터 냉혹한 거절을 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문득 나에게 어떤 영감이 떠올랐다. 무작정 그녀를 뒤쫓기로 했다. 오늘의 이 순간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혜는 뒤쫓는 나를 향해 구두를 던지더니만, 갑자기 멈춰 서서 나를 응시했다.

  최근에 장교수를 만난 것은 3주 전 토요일 밤이었다. 그는 술잔을 들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결국에는 이혼하고야 말았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선혜를 놓고 준홍이와 드잡이질까지 벌여, 둘 다 선혜로부터 사랑을 잃었노라는 푸념이었다. 이래저래 처절할 정도로 가슴이 짓이겨진 상태라고 했다. 그러면서, 선혜를 그의 품으로 보내 달라고 하소연했다. 그 때 나는 잘라 말했다. 때때로 선혜와 함께 시간을 보낼지라도, 그녀의 의사에 영향을 줄 아무런 역량이 내겐 없노라고 답했다. 장교수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의기소침하여 내내 울먹이며 하소연이 늘어졌다.

  서로가 서로를 응시한 채 뭔가 입을 열 듯 말 듯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돌연히 한 바퀴를 제 자리에서 돌더니만 갯벌 위에서 옷을 벗어 던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잔광으로 갯벌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짙은 안개로 인하여 지척을 분간키 어려웠다. 이제 주위는 갯벌에서 피어오른 안개로 인해 온통 희뿌옇게 뒤덮여 있었다. 어느 새 그녀는 하얀 속치마만 걸친 채, 몸을 흔들어댔다. 반라의 미녀가 모랫바람을 가르며 춤을 추고 있는 거였다. 모랫바람이 일 때마다 속치마 자락이 휘말려 올라가, 그녀의 하얀 엉덩이와 치모가 연방 드러나곤 했다. 언젠가 관악 교정에서 본 모여교수의 씻김굿의 동작을 많이 닮은 춤이었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처음에는 제지할까도 망설였지만, 내처 지켜 보기로 했다. 이윽고 그녀는 반라의 몸으로 모래 사장을 정처 없이 달려나갔다. 나는 그녀의 옷을 챙겨 들고는 광활한 갯벌을 향해 정신없이 뒤쫓아 갔다. 십여분을 그렇게 달리던 그녀는 모래 더미에 픽 쓰러져 나뒹굴었다.

  바람 부는 모래 사장엔 그녀의 쌔근거리는 숨소리만이 높았다. 쓰러진 채 그녀는 제발 자신을 내버려 달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면서 끝없이 널브러진 갯벌이 시야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밀려나갔던 바닷물이 수평선 너머로부터 서서히 갯벌을 향해 밀려들었다.
  지극히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가까스로 그녀를 달래 옷을 입혀 주고는 그녀와 함께 갯벌 남쪽의 선착장을 향해 걸어나갔다. 걸어가면서 선혜는 말했다. 난 아무래도 여기를 떠나야 할 것 같애.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내 가슴엔 오로지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야. 이젠 아무도 날 붙잡을 수 없단 말이야. 조금 전의 내 행동에 대해선 알려고 하지 마. 너무나 암담한 현실이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발광할 지경이라니깐.
  불현듯 나는 없던 용기를 내어 물었다.
 "선혜야, 내가 지금이라도 청혼하면 안 되겠니 ? 난 차마 학력 차이 때문에  ……"
  이 때 선혜가 손으로 나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됐어, 동준씨. 두 번째의 만남에서만 고백해 주었더라도 난 당신의 아내로  살 수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이젠 아니야. 난 그 동안 세상의 못 볼 것을    너무 많이 본 것 같애. 이제는 정말 매사에 염증을 느껴. 한 마디로 진절머리난단 말이야."
  그녀는 살며시 손을 떼며 물러섰다.
  "선혜야, 결국은 우려했던 대로 네게 거절당하고 말았구나. 정 네가 싫다면  야 어쩌겠니 ? 그럼 너는 어디로 가서 뭘 하고 지낼 거니 ?"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 보고는 처량한 어조로 말했다.
  "생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 내가 갈 만한 곳이 어디겠니 ? 그냥 조용한 산골  에 묻혀, 그림이나 그리며 인생을 살고 싶을 뿐이야. 그 후의 삶은 나도 잘  모르겠어. 어쩌면 동준씨가 영원히 그리워질지라도 난 이젠 머물고 싶지가    ……"
  말을 미처 끝내지도 못한 그녀의 눈에는 방울방울 이슬이 맺혀 흘렀다.
 
  방파제에 못 미쳐 헤어지기 직전이었다. 나는 선혜에게 말했다.
  "그래 구속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네가 날고 싶은 만큼 나  역시 자유로워지고 싶거든. 다만 너의 선택에 후회가 없기를 빈다. 그리고  말이다. 혹시라도 마음이 변하거들랑 잊지 말고 연락해 줘, 안녕."
  그녀는 작별에 앞서 포옹을 한 뒤,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보자, 콧날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핑 돌았다. 견디기에는 너무나 서슬 퍼런 아픔이었다. 불길처럼 번지는 설움을 삭이며, 그녀의 손을 소중하게 감싸쥐었다. 마주보는 그녀의 눈에도 뽀얀 안개가 서렸다. 이윽고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져 갈 때까지 지켜 보다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음이 통했던지 모래 능선을 넘어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는 등을 돌려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가슴에 구멍이 펑 뚫린 듯한 느낌에 빠져 들었다. 돌연히 휙휙거리며 모랫바람이 인다. 날개 찢어진 두 마리의 갈매기가 폭풍에 떠밀려 소리없이 백사장에 묻히고 있다. 겨우 형체를 드러내려던 둥지는 모랫바람을 맞아 풍비박산이 되고 만다. 회오리 바람이 부는 갯벌의 상공에는 온통 새 둥지들의 파편으로 뒤덮여 있다. 끝없이 끓어오르던 환상을 뚫고, 뱃고동 소리가 귓전을 파고든다.
  선착장 입구로 종명이의 동력선이 막 다가서고 있었다. 먼 발치로 희정이와 더불어 종명이와 미란이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석에 끌리기라도 하듯 나는 넋을 잃은 채,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바닷바람이 점차 나의 옷깃을 휘말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