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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의 화성인
                           
                                                                                                           손정모(孫廷模)

  달빛이 눈부신 밤 9시 무렵이었다.  '쏴아'하는 맑은 음향을 토해 내며, 솔바람이 또 다시 산자락을 타넘어 왔다. 선학은 솔바람에 으스스한 한기를 느꼈다. 9월의 냉기에 절어 바늘처럼 곧추선 솔잎들이었다. 바람이 일 때마다, 솔잎들은 허공을 향해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그는 이제야 지리산의 하봉에 접어들었다. 먼 발치로 중봉이 치솟아 있었다. 중봉은 늘상 구름에 뒤덮인 관계로, 운중봉(雲中峰)으로 더 잘 알려졌다. 노고단을 지나 동쪽 능선길만을 타 넘어온 지 7시간만이었다. 만장애(萬丈崖)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하봉의 비룡 능선으로부터 1킬로는 더 남쪽으로 걸어야 했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새들만이 날아 넘을 수 있다는 만장애였다. 만장애를 향한 하봉에서 중봉까지의 능선길을 세인들은 비룡능선(飛龍稜線)이라 불렀다.  

  회사 건물 바깥으로는 수원 성곽의 줄지은 돌덮개들이 펼쳐져 있었다. 돌덮개들은 하나같이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렇게 온 세상이 얼어 붙던 지난 정월 초엿새의 일이었다.
  "장 과장 ! 알다시피 우리 태웅 건설의 경영 상태가  야속하단 생각일랑 말고 명예롭게 퇴사해 주기를 간곡히 비네."
  창졸간에 찬 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선학의 얼굴에는 핏기가 바래져 갔다. 그간 사장실의 호출로 울먹이며 회사를 떠난 사람이 벌써 몇 십 명째였던가 ? 일시에 단말마에 가까운 전율감이 그를 엄습해 왔다. 순식간에 그의 뇌신경이란 뇌신경은 온통 엉망으로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다. 곧바로 그의 머릿속을 파란 빛줄기가 섬광을 뿌리며 헤집고 다녔다. 그러더니만, 연분홍색의 빛줄기가 연이어 나래를 파득거리며 의식의 궁전을 날아 올랐다.
 
  이제 만장애의 모습이 먼 발치로 바라보이는 지점에 이르렀다. 만장애는 희뿌연 안개 속에서 북쪽 하늘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만장애의 모습이 드러나자마자, 선학은 찌르르 감전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온 몸에 한기가 쭉쭉 뻗쳐 올랐다. 어쩌면 그에겐 숙명적인 등정(登程)일 듯도 했다.

  3년 전의 삼풍 사고를 떠올릴 때면 선학은 언제나 치를 떨었다. 바로 그 사고로 가정을 잃었으며, 자신마저도 하마터면 불귀의 객이 될 뻔했다. 게다가 올해 벽두엔 회사로부터 일방적인 명퇴 처분까지 받은 선학이었다. 이래저래 선학에겐 형벌에 가까운 시련의 연속이었다. 허공을 휩쓰는 바람에 관한 한 그의 의식은 복잡했다. 가히 무엇으로도 형용 못할 만큼이었다. 같은 바람결만 해도 그랬다. 기쁠 때와 슬플 때의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 미묘한 감정의 흐름만큼이나 바람결은 섬세하고도 복잡했다. 어쩌면 불변의 진리와도 같은 사실이 아닐까 ? 실직한 날의 일이었다. 액자 속의 아내와 자식들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이었다. 세 모자의 동공으로부터 불어 나오는 잔잔한 바람결의 소용돌이를 그는 느꼈다. 완공 직전의 댐이 무너져 내리듯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성채(城砦)가 무너져 내렸다. 함몰된 주위로는 암울한 적막감만 감돌았다. 갯벌을 할퀴고 가는 바닷게떼들처럼 온갖 상념이 색채로 치장되어 펼쳐졌다. 분명히 한 시간에도 몇 번씩이었다. 뼈 아린 절망감과 상실감이 그의 온 몸을 짓눌러 왔다. 몸과 마음의 통제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여차하면 발가벗고 군중 속을 질주하고픈 충동마저 일었다. 이렇게 답답하고 갑갑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창 밖을 나다니는 행인들의 눈빛마저도 그를 괴롭혔다.그들의 눈빛은 모두 선학을 비웃고, 그들의 잡담 소리는 하나같이 비난으로 들렸다. 이러한 느낌이 환청으로 다가오면서, 갑자기 넌더리가 나도록 자신이 싫어졌다.
  실직 후 며칠 동안은 마냥 번민으로 몸살을 앓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와중에서였다. 절망의 구렁텅이로부터 치솟아 오르는, 한 동안 잊고 있었던 맑은 바람 줄기를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학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하여, 지난 2월에는 퇴직금으로 천호동에 식품 가게를 차리며 마음을 추스렸다. 더 이상은 방황을 말자며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이제부터는 견실한 상인으로서의 도를 닦아 나가기로 했다.

 
  암흑을 가르며 쏟아져 나오는 섬광처럼 선학은 회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피부에 와 닿는 위기감을 느낀 때는 언제였던가 ? 아마도 대학 생활을 누리던 1980년 5월 20일의 밤이었을 것이다. 광주사태(후에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 했지만, 그 당시에는 이렇게 불렀다)가 발발하여 시내 곳곳에서 화염이 충천했다. 더불어, 무장 군인들의 총포 소리로 5월의 광주가 펑펑 구멍이 뚫려 나갈 때였다. 시위를 마친 뒤, 귀향 버스를 타려고 막금남로를 벗어날 때였다. '빠바방'하는 불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페퍼포그가 연속적으로 터져 올랐다. 당시 전남대 3년생이던 선학은 밤 10시 30분에야 아슬아슬하게 섬진강을 건넜다. 전라 경상을 잇는 남해안 고속도로와 철도가 완전히 봉쇄되기 바로 직전이었다. 섬진강을 건너면서부터 그는 느꼈다.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숨 구멍처럼 열려 있는 바람 줄기의 존재를 말함이었다.  
  근래에 그는 눈을 감기만 하면, 곧장 아내를 만나곤 했다. 아내는 달빛 속에 만발한 배꽃처럼 환한 얼굴이었다. 통상적으로 꿈에서조차 아내는 자식들에게 에워싸인 채, 방긋거리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곤 했다. 아내의 영상이 사라질 때면 꼭 그랬다. 선학의 가슴을 뚫고 울려오는 외침이 있었다. 외침은 한 무더기의 날아오르는 새떼들로부터 터져 나오는 지저귐처럼 또렷했다. '지금은 분명 살아 있는 거냐고 ?' '쨍'하고 울리며 갈라져 나가는 얼음장처럼 순식간에  귓전을 파고드는 멍멍한 울림이었다. 그것은 귀의 고막이 터져 나갈 듯한 세찬 울림이었다. 바르르 떨고 있는 귓전에 매달린 것은 여전히 변함 없는 멍멍한 울림이었다. 선학은 차디찬 내면의 눈을 떴다. 가족의 상실을 절망이라고 한다면, 실직을 당한 일은 틀림 없는 좌절이었다. 분명히 그것은 멍멍한 울림이었고, 이따금씩 그의 의식계를 들쑤셔 놓고는 슬그머니 사라지곤 했다. 참으로 답답하고도 삭막한 심사였다. 그런데도, 어려울 때마다 그의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것은 맑은 바람 줄기였다.  

  이제 만장애의 수직 경사벽체가 멀리서도 바라보이는 지점에 도달했다. 앞으로 반 시간 정도만 걸어 가면 수직 벽체에 닿으리라고 여겨졌다. 하늘을 가로막아 우뚝 치솟은 위용은 만장애라는 이름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지금의 이 거리쯤에서는 만장애는 그냥 시커먼 형상으로만 바라보일 따름이었다. 오늘 밤중이 아니고서는, 다시 6개월을 기다려야만 하는 사연이 있었다.

  단절의 상징으로 바라보이는 만장애의 출현과 더불어, 삼풍 사고가 떠올랐다. 그 날 선학은 퇴근하여, 일가족과 함께 백화점 2층에서 쇼핑을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굉음과 더불어 의식을 잃고는 암흑 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길로 꼬박 9일간을 묻혀 그는 외부의 구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혼미한 의식으로 비몽사몽간을 넘나들 무렵이었다.
  "누구신지 정신을 차리고 안정을 취하세요 !"
맑은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뭔가 부드러운 선율이 들렸다. 어찌 들으면, 대금이나 단소에 가까운 소리 같기도 했다. 선율이 울려 퍼지는가 싶자 쌓여 있던 건물 더미가 마구 날아 올랐다. 그와 동시에 몰려온 강렬한 빛살로 선학은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차렸을 때는 눈이 가려진 채로 병상에 누워 있는 신세였다. 병상에 누워 처음으로 눈뜨면서 그는 신문을 펼쳤다. 불길한 예감대로였다. 아내와 두 자식의 이름이 사망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사망 사실을 확인한 순간 다시 까무러진 채 이틀을 보냈다. 사고 후 좀처럼 안 펴지던 왼 손이었다. 나흘만에 펼쳐진 손바닥에서는 놀랍게도 뭔가가 있었다. 그건 바로 자주색의 공작 깃털과 노란 비단 쪽지였다. 비단 쪽지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달필로 적혀 있었다.

     그대, 혹시 연분이 닿는다면, 지리산의 운중봉으로 ……
                                  - 백화선녀 -

  마침내 만장애의 발치에 도착했다. 벌써 자정을 헤아리는 달빛이 푸른 비단결처럼 남실거렸다. 지금까지의 광활한 초목대의 연장이었던 비룡 능선면이 끝나는 부위였다. 70여 미터의 높이로 치솟은 수직 암벽이 바로 만장애였다.
  아무리 면밀히 살펴보아도 만장애는 험난한 절벽이었다. 자일과 등산 장비가 없고서는 타넘지 못할 지형이었다. 바위 틈마다 이끼와 스며나온 물기로 반들거렸다. 이런 지형에 발을 내딛다간 그대로 미끄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수십여 그루의 다복솔과 칡덩굴이 뒤엉켜 절벽면을 뒤덮었다. 말라 빠진 구상나무의 잔해도 더러 절벽에 매달려 있었다.
  
  높다란 만장애 위로는 은가루를 뿌린 듯 별빛이 눈부셨다. 수없이 반짝거리는 별들을 볼 때였다. 공작 깃털의 단서가 제공된 소백산 구인사의 일이 떠올랐다. 삼풍 사고로부터는 2년이 지난 봄철 무렵이었다. 경내 참선각에서 수행을 하는 3분의 고승들과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백화선녀(白花仙女)라고 불리우는 지리산의 여자 도인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두드러진 소문은 그녀의 놀라운 대금 주법에 관한 것이었다. 가령 그녀의 대금 소리를 들으면 중대한 변화가 온다고 했다. 넋 나간 사람은 제 정신을 찾는다고 했다. 정신이 쇠진한 사람은 천병 만마를 다스리는 장군과 같은 기상을 찾게 된다고 했다. 또한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사람도 건강을 완전 회복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더욱 기묘한 점이 또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 만나려는 사람은 그녀가 준 자줏빛의 공작 깃털을 지녀야 한다는 거였다.
  
  바람결에 실려 나부끼는 달빛이 태고의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밤이었다. 마음으로 구하면, 만상이 다 호응하여 어우러질 듯한 밤이기도 했다. 그가출생되기 훨씬 이전부터 달려온 별빛이었다. 눈부신 별빛에 취해 선학은 전율할 정도의 황홀감을 느꼈다. 그의 노출된 피부는 순도 높은 감광판인 듯했다.아무리 먼 곳의 빛줄기라도 남김 없이 빨아 들일 것만 같았다. 선학은 팔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자정을 2   3분 가량 남겨 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구인사에서의 수소문 이후로, 선학은 백화선녀에 관해 좀더 알고 싶었다.  이러한 소망은 인천의 송도 유원지에서 마침내 이루어졌다. 지리산 등반을 수행하기 두 달 전의 일이었다. 태권 7단으로 한국 무술계가 공인하는 무예의 달인이기도 한 선학이었다. 그가 때마침 부두에서 난동을 부리던 부랑배들을 퇴치하는 과정에서였다. 유선도(流仙道)의 달인인 40대 중반의 사내를 사귀게 되었다. 인천지부의 유선도 관장인 사내는 선학을 도와, 즉시에 부랑배들을 내쫓아 버렸다. 유선도란 주로 귀족과 승려들을 통하여 전승되어 온 한국 고유의 무술이었다.
  사내와 함께 유원지 입구의 주점에 들렀다. 술잔을 나누며, 공작 깃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공작 깃털은 유선도(流仙道)를 수련하는 무도인들의 상징이었다. 선학이 지닌 공작 깃털의 깃대 부분에는 3줄의 노랑 줄 무늬가 있었다. 줄 무늬 3개는 바로 유선도 제일의 달인의 신분으로 통했다. 현존하는 유선도 최고의 달인은 유일하게 9단의 품위를 지닌 백화선녀였다. 선학이 지닌 공작 깃털은 분명 백화선녀의 공작선을 이루던 깃털임에 틀림없었다. 그녀가 깃털을 남겼을 때에는 상당한 사연이 있었을 거라고 사내는 추정했다. 사내의 말로는 그랬다. 유선도의 무술인은 전국적으로 십여만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공작선을 휴대할 만한 신분은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다. 만장애는 지리산 운중봉의 북쪽 절벽을 말함이었다. 백화선녀는 만장애 정상의 청련암(靑蓮庵)에서 도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신비한 소문을 세상에 흘려 보냈다. 매년 양력 3월 중순과 9월 중순이 아니면 일체 외부인을 안 만난다는 거였다. 무슨 연유인지는 사내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녀를 찾을 때에는 자정에 맞추어 휘파람을 크게 불라고 했다. 그러면, 절벽을 올라갈 길을 그녀로부터 안내받을 수 있다는 거였다.

  파르스름한 달빛에 비추어 보니, 이제 막 자정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대관절 이 험난한 절벽을 무슨 재주로 올라간단 말인가 ? 이 절벽 위에 마치 신화나 전설에서나 나옴직한 암자가 과연 있기나 있는 것일까 ? 암자에 머문다는 백화선녀는 과연 오늘 밤에도 암자에 머물면서 수도를 하고 있는 것일까 ? 으스스한 한기를 뿜어 내는 산바람이 골짜기를 간헐적으로 내리훑곤 한다. 하늘이 너무나 맑아, 그로 하여금 짙은 설움에 젖게 한다.  
  이윽고, 선학은 입에 두 손가락을 넣었다. 예리한 휘파람 소리가 밤의 정적을 찢으며 골짜기를 뒤흔들었다. 긴 메아리를 끌며, 휘파람 소리가 솔숲으로 잠겨드는가 싶은 순간이었다. 곧장 가늘면서도 힘이 실린 맑은 응답의 소리가 정상에서 울려 퍼졌다. 진동음의 파장을 가늠해 보니, 분명히 여인이 토해 낸 휘파람 소리였다. 순간 사방을 쥐죽은 듯이 얼어 붙게 만드는 정적이 감돌았다. 허나 그것도 잠깐 동안이었다. 놀랍게도 만장애의 정상에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눈부시게 흰 한복 차림이었다. 여인은 선학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손님은 청련암을 찾아 오신 거죠 ? 눈을 꽉 감고 2분쯤 기다렸다가   눈을 갑자기 뜨세요. 그러면, 녹색 형광 물질로 빛나는 발판이 수없이 보일  거예요. 그 발판을 밟고 올라오시면 꼭대기로 오를 수 있어요."
  선학은 알았다는 뜻으로 손을 크게 한 번 휘저었다. 그리고는 얌전히 두 눈을 꽉 감았다. 온 우주가 정밀 속에 잠겨드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선학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만장애의 꼭대기에 올라섰다. 오백여 평의 공지 중앙에는 암자가 우뚝 섰다. 편액에는 청련암(靑蓮庵)이라고 적혀 있었다. 만장애를 오르기 전에는 아무도 못 믿을 터였다. 꼭대기에 이렇게 아담한 공지와 암자가 있으리라는 사실을.
  청련암 건물 내의 수련방에서, 선학과 백화선녀는 가부좌를 하고 마주앉았다. 선학의 눈에 비친 그녀는 아무래도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목구비가 반듯한, 드물게 보는 미모의 얼굴을 지녔다. 얼굴의 모습과 연출되는 분위기에서 선학은 완전히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백화선녀'라는 별호에 조금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그녀에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찬탄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분위기와 기품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무릎 위에 한 자루의 대금을 얹어 놓았다. 그리고는 눈감은 상태로 단정히 가부좌를 취하고 있었다.  
  선학은 이제 확연히 알았다. 조금 전에 치른 5분 가량의 무술 대결의 결과를 음미해 보았다. 무예의 달인이라고 자부하던 그도 그녀와의 대결에서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는 진실로 통감했다. 달빛과 반딧불의 차이만큼이나 현저한 무예의 차를 느꼈다. 지금까지 그가 겨루어 보았던 사람들만을 놓고 쳐도 그랬다. 그녀만큼의 탁월한 무술 실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이제 그녀와 마주앉은 것은 그녀의 대금이 일으킬 조화를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그녀는 수련방의 정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로 2미터쯤의 반경에는 수십 자루의 양초가 동심원으로 벌려 섰다. 양초에는 촛불이 대낮처럼 빛을 뿜어 내고 있었다. 마침내 물 흐르듯 대금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한없이 부드럽고 평온한 듯한 음조가 실내를 채웠다. 느닷없이 천군만마가 휘몰려 오는 듯한 격한 음률이 느껴졌다. 잇달아 천둥 번개가 치는 격렬한 상황마저도 피부에 와 닿았다. 결코 그 곡은 그녀가 창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여, 중국의 고사에나 나오는 신비한 전승곡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건 대금 연주곡에서 가장 흔한 유초신지곡 중의 상영산이라는 점이었다.
  선학은 대금을 불면서부터 눈을 뜬 그녀의 우아한 자태를 지켜 보았다. 그러면서, 그녀의 자태와 음률이 빚어 내는 조화를 음미하고 있었다. 음률은 이제 한없이 기뻐 어디를 어루만져도 따스함으로 답할 듯했다. 때로는 수면 위를 미끄러져 가는 별빛 같은 활달함에 젖기도 했다. 연주음이 돌연히 흐느끼는 듯한 음조로 치달았을 때였다. 양초들의 불꽃들이 휘청 허리를 꺾으며,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마치 갑작스레 폭풍우를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흐느끼는 듯한 정도가 세어질수록 불꽃들이 요란한 진동음을 토해 내었다. 그러더니만, 대금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불꽃들이 일제히 드러누워 버리는 거였다.  선학은 지금의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를 모를 지경이었다. 살갗을 꼬집어도 보았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말하자면, 조선 중종조의 최병훈(崔炳熏)의 전승음률도해(傳承音律圖解)에 나오는 이음치명(以音治命)이었다. 즉, 소리로써 생명을 다스릴 수 있다는 이음치명의 위력이 유감 없이 펼쳐진 장면이었다.
  이러한 이음치명에 관한 과학자들이 제시한 이론적인 근거는 파동의 간섭 효과였다. 기주 진동 음파가 대금 구멍의 여러 음파들과 합성되어 나타나는 간섭 효과의 총화였다. 과학자들은 한결같이 설명한다. 에너지가 큰 합성파가 형성되는 경우에는 주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높은 에너지를 갖는 합성파는 물체를 진동시키거나 파괴시킬 수도 있다. 대금을 불어서 높은 합성파를 내기 위해선 부단한 수련이 필요하다. 연주중에는 잡념이 배제된 상태라야 하며, 기의 순환이 순조로와야 한다고 말이다.
  새벽 1시를 조금 지나 대금의 연주가 끝났다. 선학과 백화선녀는 자리를 옮겨, 청련암의 객방에서 서안(書案)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그녀가 건네준 향긋한 내음의 작설차를 마시며, 선학은 그녀의 과거사에 귀를 기울였다.

  백화선녀의 이름은 강유정(姜柳情)이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서른 아홉을 맞는 중년 여인이었다. 전남 해남이 고향인 그녀는 대학 2학년 때에 광주에서 광주사태를 맞았다. 1980년 5월 21일의 밤이었다. 살벌한 시내로부터 어떻게 해서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조선대의 학과 선배이자 연인인 규철이와 함께 시외버스 터미널 앞을 지날 때였다. 불시에 세 명의 무장 군인으로부터 검문을 받게 되었다. 혐의가 있어 보인다며, 군인들은 그들 일행을 붙잡았다. 규철이는 청색 화물차에 실려 먼저 떠났다. 그녀는 전남대 여대생 두 명과 함께 군지프로 금남로 뒷골목으로 끌려갔다. 군인들은 불온 유인물의 배포 혐의로 몸 수색을 하겠다고 했다. 대검을 빼어 든 그들에 게 알몸으로 유린되던 그 날은 통렬했다. 그 날은 그녀에게 중대한 인생의 전환기가 되어 버린 날이었다. 겨우 대학을 졸업하고는 줄곧 계룡산의 마표 선사 밑에서 수행해 왔다. 마표는 불교의 유명한 선사였을 뿐 아니라, 유선도 제일의 무술인이기도 했다. 선사는 심성이 고운 그녀에게 틈나는 대로 불성을 심어 주었다. 선사는 자신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했다. 자신이 쌓아 온 무예의 전수자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백화선녀의 몸놀림으로부터 천부적인 운동 소질을 발견해 낸 선사는 결심했다. 자신이 쌓아온 모든 무예의 진수를 그녀에게로 전수하기로 말이다. 3년 전의 비내리던 가을 밤이었다. 불전에서 선사가 입멸하자, 다비식을 끝내고는 곧장 계룡산을 떠났다. 그 후로는 지리산의 만장애에 자리잡고는 수도 생활을 계속해 왔다. 지리산에 입산한 이후로 백화선녀는 숱한 잡념을 떨쳐 버렸다. 그리고는 두 가지의 일에만 몰두했다. 그 중 하나가 경문을 통한 심성의 수련이었다. 다른 하나는 대금을 이용한 이음치명의 기공 수련이었다. 몰두를 한다고 해도 세상의 움직임에 완전히 초연해질 수는 없었다. 세인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마구잡이로 만나는 것은 싫었다. 생각해 낸 것이 신비한 소문을 흘려 보내는 거였다. 백화선녀는 일 년에 두 번씩만 외부인을 만난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늦게라도 인연에 닿는 반려자를 그녀는 진정으로 찾고 싶었다.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어서 선학은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1995년의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때에 어디에 있었는가를 물었다. 그녀는 고운 얼굴에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사고 당시에, 그녀는 서울의 고모댁에서 체류하던 중이었다. 사고 9일째에 접어들던 날이었다. 전라도의 모교수를 위시하여 잔류 생존의 가능성에 대한 의견이 끓어 오르고 있었다. 상당한 경지의 기 수련자로서의 영감이 발동했다. 마음을 정하자 그녀는 이른 새벽에 사고 현장에 닿았다. 중장비를 동원한 함몰된 콘크리이트 더미의 제거 작업이 한창이었다. 제거 작업은 철야 교대를 해 가며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현장의 주변을 구조 대원들의 눈에 띄지 않게 둘러보았다. 이 때였다. 돌연 건물의 중앙에서 남서쪽으로 치우친 땅 속 지점에서였다. 강한 기파(氣波)가 섬칫할 정도로 그녀의 피부에 와 닿았다. 그녀는 지체 없이 구조대를 향해 달려갔다. 땅 속 지점을 가리키며 서둘러 달라고 재촉했다. 땅 속을 향하여 기운을 차리라고 기력을 실어 얘기했다. 그리고는 곧장 대금을 통해 잔류 기력을 실어 보냈다.  
  이윽고 콘크리이트 더미가 크레인에 의하여 파헤쳐지며, 흙투성이 상태의 중년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강한 빛살에 맞아 곧바로 실신해 쓰러지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문득 운명의 예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녀는 구조 대원들이 알아 차리지 못하게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노란 손수건을 찢어 간략히 글귀를 새긴 다음 깃털에 묶었다.깃털을 사내의 왼손에 쥐어놓고는 기력을 실어 사내의 상박(上膊) 근육을 문질렀다. 근육에 실린 기가 풀어질 무렵이라야 왼손이 펼쳐지도록 만든 조처였다. 그녀는 흙투성이 상태로 실신해 쓰러지는 순간의 사내의 모습을 또렷이 떠올렸다. 이제껏 소설에서나 봄직한 선풍도골형(仙風道骨形)의 영준한 얼굴 모습이었다. 그녀는 사고 현장을 떠나오면서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사내가 그녀를 찾아올 확률은 희박하다고 느꼈다. 확률적으로는 희박하지만 말이다.사내가 찾아올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녀는 생각했다. 사내가 그녀를 찾아온다면, 사내는 사고 현장에서 어쩜 아내를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럴 경우에는 기꺼이 그녀 자신이 그의 새로운 배필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연한 듯한 그녀의 예감은 현실로 드러났다. 이제 선학은 만장애의 그녀를 찾아온 거였다. 서안을 사이에 두고 선학을 마주 대할 때부터였다. 그녀의 마음은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영롱한 눈빛이 닿을 때마다 그녀의 피부는 간지러움을 탔다. 그의 눈길이 스쳐 지나는 자리마다 그녀의 속살이 황홀하게 젖어 들었다. 설사 술에 취한다고 하더라도 이럴 정도는 아닐 터였다. 더구나 그들은 작설차를 마시며 이야기의 꽃을 피워 나갔을 따름이었다. 흔들리는 심중에서도 대관절 선학의 어떤 점이 그녀의 마음을 뒤설레게 하는가를 따져 보았다. 확실히 빼어난 용모다. 선학의 빼어난 용모란 외형적인 영준함에다가 고아한 기품까지 곁들여진 절묘한 조화를 말함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아, 그가 이렇게 짜릿한 황홀감을 던져 줄 줄이야 ? 외모가 아닌 마음의 심연으로부터 치솟아 오르는 강력한 심상이었다. 그는 지금 눈빛만으로 그녀를 짜릿하게 취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거듭 생각해 보았다. 이 남자라면,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몸을 주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평생을 의탁하게 된다면, 지고지대한 생의 즐거움이 되리라 확신했다.
  이심전심이었을까 ? 선학도 백화선녀를 처음 대할 때부터 찌르르 가슴이 울려 왔다. 그러면서, 파장이 큰 감정의 너울에 휩쓸려 가는 자신을 느꼈다. 그녀는 첫 눈에서부터 그랬다. 귀티가 나는 얼굴에 이목구비의 윤곽은 가히 조화의 극치였다. 수면에 반짝이는 별빛처럼 영롱한 눈동자는 보는 이의 마음을 마구 뒤흔들었다. 그녀의 고운 얼굴에 겹쳐서, 어둡고 암울했던 선학의 과거가 떠올랐다.
  " 장과장 ! 돈이 안 되는 아이디어는 아이디어가 아니라구, 알아 ? 근십년   을 과장으로 있으면서도 왜 그걸 여지껏 모르느냐 이 말이야. "
  " 최상무님, 말씀이 좀 지나치십니다. 이것이 최근 일본의 혼께이사가 고안  한 건설 공정 프로젝틉니다. 제가 제안한 것이 훨씬 실용적이며 경제성이  높지 않습니까 ? 제 얘기는요, 무조건 역정을 내실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르면 왜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지는 않고 우기기만 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됩니다. "
  " 장과장, 이 사람 눈에 뵈는 게 없어 ? 그러면, 책임 연구원인 자네만 전문가이고, 다른 사람은 문외한이란 말이야 ? 내 원참 별스런 착각도 다하고  있어, 정말 ! "
  배불뚝이인 상무이사란 자의 면상을 쏘아 보는 선학의 정맥 혈관이 경련처럼 꿈틀거렸다. 창의적인 의견이랍시고 안건을 제출할라치면, 상무이사란 자는 검토도 않은 채 엉뚱한 소리만 해댔다. 아무래도 그에겐 상무이사가 학력차에서 오는 강한 열등감에서 버둥거리는 것으로 보였다. 왠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피가 달아 있다고 느껴졌다. 영하의 온도로 식혀, 혜안(慧眼)을 얻고 싶은 절박할 때가 종종 있었다.
  삼풍 사고 이후로는 곧잘 그랬다. 그는 밤이면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곧잘 몸부림치곤 했다.
  " 여보 우리 칠십이 되면, 성찬이 성준이가 우리를 잘 보살펴 줄까 ? 당신  은 막내 성준이한테 가고, 나는 성찬이한테 가면 걔들이 뭐라고 할지 모르겠네. "
  동갑인 그의 아내는 언제나 그랬다. 눈만 뜨면, 봄바람에 교태를 부리는 목련꽃처럼 우아한 모습으로 말을 건네왔다. 바람이 드센 겨울 날이면, 그의 아내는 곧잘 애교를 부렸다. 아이 참, 너무 추운 거 있지 안 그래, 여보 ? 어쩌구저쩌구하며 곧잘 그의 품에 얼굴을 묻던 그의 아내였었다.
  과거의 상념으로부터 되돌아왔다. 삼풍 사고시에 백화선녀가 공작 깃털을 쥐어 주었다는 설명을 듣고서였다. 부쩍 그녀가 남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선학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생각을 더듬어 나갔다. 내가 만난을 무릅쓰고 지리산에 온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 단순히 공작 깃털에 관한 그녀의 설명을 듣고자 함이었을까 ? 아니면 그녀의 무예 실력과 대금을 이용한 기공 시연을 보고자 함이었을까 ? 몇 번을 반추해 보았지만, 분명히 그것들만은 아닌 것 같았다. 공작 깃털을 손에 쥐면서부터였다. 선학은 무언가 자신을 끌어 당기는 듯한 흡인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백화선녀에게도 과거로 치닫는 창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그녀는 눈만 감으면 그랬다. 눈이 부리부리한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유린당하던 악몽으로 시달려야 했다. 유린당하던 날이었다. 눈을 감고 있노라니까, 건방진 년이 조뺀다고 하여, 귀싸대기를 얻어 맞았다. 눈을 뜨고 있노라니까, 뻔뻔스런 계집이 어쩌구저쩌구하며, 뺨따귀를 두들겨 맞았다. 그 날 이후부터서였다. 이 세상의 남자들이란 다 그런가 하여 한없이 치가 떨렸다. 그로 인하여, 사랑하던 규철이와도 갈라서 버리게 된 터였다. 생각할수록 설움이 북받쳐, 그녀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녀는 줄곧 진심으로 바랬었다. 가령 만장애를 찾아오는 남자라면 말이다. 그녀의 뼈아픈 과거조차도 포근하게 감싸 줄 수 있는 남성이기를. 불안과 초조함을 감춘 채, 선학의 눈동자를 대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바다를 느꼈다. 끝없이 펼쳐져, 장중하면서도 온화한 모습의 바다를 말함이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따뜻이 품어 줄 수 있는 바다를 말함이었다. 그를 보았을 때, 그녀의 오랜 소망이 이루어진 듯한 예감이 들었다. 기쁜 마음 한 켠으로, 슬며시 와 닿는 것은 엄연한 불안감이었다. 찾아온 사내가 유부남이어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라면 ? 또한 그녀가 마음을 주고자 하여도 상대가 싫다고 한다면 ? 연못의 밑바닥으로부터 치솟는 기포들마냥 불안감이 가중되면서, 그녀는 번민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참담한 느낌에 휩싸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나이에 질문을 던져, 그가 가정이 있노라고 대답해 오면 말이다. 나의 가슴은 얼마나 참담해질 것인가 ? 아무리 대범한 척하더라도, 그런 대답을 듣게 된다면 말이다. 또 다시 좌절의 아픔에 눈시울을 적시게 될 자신이 아닌가 ? 두려움이 싫었다. 긴장으로 입술이 타오르며, 속살이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알몸으로 허공에 내던져진 듯한 처연한 심정이 되며 그녀는 숨을 죽였다. 마침내 그녀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가정이 있느냐고 물었다. 한 때는 있었노라고 그가 답했다. 그럼 현재는 없는 상태냐고 그녀는 다그쳐 물었다. 선학은 질문을 받자마자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의 영상이 떠올랐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걷잡을 수 없는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그리하여, 감은 두 눈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샘솟듯이 흘러 내렸다. 아내와 자식들의 영혼은 지금쯤 어느 하늘을 날고 있을까 ? 지금은 어느 하늘의 별자리를 지키는 선남선녀가 되어 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을까 ? 가슴이 미어질 것 같던 격렬한 진통이 심장을 훑으며 지나갔다. 눈만 뜨면, 목련꽃처럼 우아한 미소를 짓던 아내였다. 언제나 지극 정성으로 그를 사랑해 주던 아내였다. 넉넉지 못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쾌활한 모습을 짓던 두 자식들이었다. 언제 보아도 대견하고도 기특하게 보이던 두 아들 녀석들이었다. 그들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무엇으로 달랜단 말인가 ? 가슴이 터져 나갈 것 같다. 생각할수록 비감스러워져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선학은 대금을 바라보며, 대금의 열린 구멍을 타넘어 일어서는 상념에 휩싸였다. 열린 구멍마다 다섯 음계로 비상해 오르는 파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파동의 너울이 점차 강도를 더해 오며, 선학의 머릿속을 빛살처럼 파고들었다.
  아스라한 기억의 시발점은 역시 광주였다. 선학이 위기를 넘겼던 바로 그 광주에서, 마구잡이로 유린되어 실신해 쓰러졌던 그녀였다. 과거에 그가 터뜨렸던 안도의 환호성의 실체는 뭐였을까 ? 그녀의 나신을 타고 흘러 내린 핏빛 절규의 또 다른 얼굴은 아니었을까 ? 기나긴 세월의 방황의 굽이에서, 그녀가 뿌린 눈물과 한숨의 양은 그 얼마였을까 ? 영육(靈肉)으로 성숙한 푸른 바람결 같은 여인이여 ! 이제껏 버둥거리던 불신의 늪에서, 마지막 혼신의 정열로 타오르는가, 여인이여 !  그대의 영혼을 부르는 나의 내면의 소리가 들리는가 ? 지금껏 나의 가슴을 짓이겨 온 아픔이 사별과 실직의 슬픔임을 아는가, 그대여 ! 그녀와 서안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을 때부터였다. 그에겐 그녀의 내면 세계와의 대화를 향한 욕망이 밀물처럼 밀려 들었다. 가령 켜켜이 둘러싸인 꽃잎을 펼치며 목련이 얼굴을 내밀 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암울한 과거사로부터 초연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서로의 교감을 나누기란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아직도 눈만 감으면 아내와 자식들의 모습이 밀물처럼 밀려들곤 했다. 가족에 대한 회상으로 상당한 시간이 침묵 속에 흘렀다. 선학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내게 가정이 있느냐고 묻다니 ? 처음 만나는 사내에게 가정이 있느냐고 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볼수록 기품이 돋보이는 그대, 백화선녀여 !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인고의 시간으로 지새워 왔던가 ? 그대의 대금 구멍으로부터 빠져 나온 숱한 파동들처럼 말이다. 그대와 나의 과거가 간섭 현상을 일으켜 반듯한 미래의 궁전을 세울 수는 없을까 ? 할 수만 있다면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속의 슬픔을 견디느라고 긴 시간의 터널을 끝없이 허우적거렸다.
  창호지 밖의 달빛이 점차 사위어 갔다. 솔바람 소리도 열린 방문을 뚫고 더욱 세차게 와 닿았다. 둘 사이엔 마냥 질식할 듯한 정적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났다. 하르르 번져 오르는 불길처럼 그녀의 내면을 옭아매는  무형의 그물이 있었다. 망설임이라는 무형의 그물을 지켜 보며, 그녀는 꼴깍하고 침을 삼켰다. 그녀는 녹색과 하늘색이 뒤엉켜 자아내는 색채의 현란함 으로 떨고 있는 시신경을 느꼈다. 그녀의 생각으로 이제 눈도 믿을 바가 못 되었다. 선홍색으로 달구어졌다가는 파랑색으로 식어 가곤 하는 첨예한 시각의 변화를 두고서였다. 정말이지 이제 그녀 혼자서만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차다고 느꼈다. 오로지 기댈 곳은 확실한 피부에 의한 감각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손을 뻗어 눈물 젖은 그의 뺨에 갖다댄다면    그래, 그의 뺨에 갖다댄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 경멸의 눈빛을 가득 실어 보내며 사정 없이 두 손을 떨쳐 버릴 것인가 ? 아니면, 나른해진 몸체를 한 뭉치의 솜처럼 그녀의 품으로 쓰러져 내릴 것인가 ? 그도 저도 아니면, 석상처럼 굳은 모습일까 ? 그것도 아니라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을까 ? 선학의 흐르는 눈물은 그녀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느껴졌다. 사내의 가슴 속에도 저렇게 설운 눈물이 솟구치구나하는 생각으로 그녀의 가슴은 저려 왔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그녀는 마침내 결단을 내릴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도화선의 불꽃인 양 온 몸이 타오르면서 선학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물기 어린 눈빛으로, 서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선학의 두 뺨을 어루더듬으며 말했다.
  "선학씨, 지난 날의 아픔이 어찌 일 순간인들 잊혀지겠어요 ? 때로는 세월  의 흐름이 가져다 주는 지혜를 기다려야 할까 봐요. 혹시 제가 당신의 새로   운 반려자가 될 수는 없을까요 ?"
  선학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은 아닌가 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볼 때는 그게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과 눈빛에는 온통 진실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유정씨, 혹시 후회하지는 않으시겠어요 ? 저를 그처럼 높이 봐 주시다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저의 아내가 되어 주신다면 평생의 반려자로서 당신께 변함 없는 존경과 사랑을 바치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일어나서 서로를 힘껏 껴안으면서, 서로의 뺨을 맞대었다. 남녀의 뺨은 곧장 불에 덴 듯이 화끈 달아올랐다. 게다가 쿵쿵거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가슴을 맞댄 남녀의 정서를 고조시켜 가고 있었다. 하늘에는 은가루를 뿌린 듯 별들이 현란하게 깨어나고 있었다. 덩달아 머리를 풀어 헤친 구름장들이 하얗게 이빨을 드러내며, 허공으로 흩어져 가고 있었다. 실내의 촛불도 창 밖으로 들려오는 솔바람 소리에 떨며 다소곳이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 두 사람에게 문제될 것은 없노라고 그녀는 말했다. 청련암에서 뭔가 하나의 도를 구한 다음에 하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그녀가 제안했다. 백화선녀의 신비한 분위기와 빼어난 미색에 이끌려, 선학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끄떡거렸다.
             
  시월도 다 저물어 가는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쾌청한 아침이었다. 선학은 다섯 시에 기상하여, 청련암 앞의 바위 위에 올라 앉았다. 대금을 불기 시작한 십여 분쯤 지난  시점이었다. 선학의 의식계에 느닷없이 현란한 영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영상의 화폭 위로 끝없이 널브러진 능선의 바다가 펼쳐졌다. 능선의 바다 위로 붉은 태양이 막 치솟아 올랐다. 태양은 어느 사이엔지 한 마리의 학이 되었다가 다시 선인(仙人)이 되었다. 선인은 구름장을 밟으며 하늘을 유유자적히 거닐고 있었다. 구름장은 어느 새 교태를 부리는 목련꽃이 되었다가 환한 얼굴의 아내로 변하였다. 그러다가 금세 한 마리의 갈매기로 변하여 먼 우주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덩달아 선학의 마음도 너무나도 따사로우며 평온하고 아늑해졌다. 어느 결에 자신이 한 마리의 갈매기로 날아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야말로 선학은 과거의 시련기마다 그를 일깨웠던 맑은 바람 줄기의 실체를 알았다. 바로 융합(融合)을 동경하는 그의 내면적인 갈망이었음을 깨닫게 된 터였다. 그의 의식이 황홀경에서 깨어나 현실의 상태로 돌아왔을 때였다. 청련암의 뜨락을 흰 한복 차림으로 뒷짐을 진 채 백화선녀가 거닐고 있었다. 백화선녀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선학을 향해 담뿍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  
  " 마침내 새로운 세계를 보셨군요. "
입술이 열릴 듯 말 듯한 그녀의 작은 속삭임이었다. 하지만, 선학에게는 맥놀이치는 커다란 산울림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청련암에 머문 지 두 달만에 일어난 변화였다. 과거에 그를 짓눌러 왔던 일체의 번민과 고뇌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하여, 청순하고도 패기에 넘치는 모습으로 거듭나고 싶었다. 이제 그 어디서나 새로운 활력으로 충만된 생명을 느끼고 싶었다. 그에겐 과거의 온갖 번민과 고뇌를 태워 버릴 무대로서의 화성의 존재가 필요했다. 또한 그의 정신의 새로운 활력의 근원지로서의 화성이 필요했다. 과거의 숱한 망상과 번민의 늪으로부터 이제 그는 새롭게 태어난 느낌이었다. 비유컨대, 오랜 전에 화성의 불길 속에서 타 버린 화성의 물줄기 같다고나 할까 ? 이제 더 이상 그의 가슴을 짓누르는, 과거로부터의 속박과 굴레는 없었다.
  깊은 산 속 사슴의 눈처럼 선량해 보이는 백화선녀였다. 선학은 영겁의 우주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화성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화성의 표면에 첫 발을 내딛는 화성인이 된 심정이었다. 선학은 백화선녀와의 포옹을 끝내고, 그녀와 함께 만장애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의 안개가 만장애를 잔뜩 뒤덮고 있었다. 그들은 만장애 위의 청련암 건물을 향해 일제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나란히 손을 맞잡고 비룡 능선의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풋잠에서 깨어난 산새들의 소리가 장중한 관현악이 되어 꿈결처럼 흘렀다. 마침 깨어나는 산바람도 산새들의 소리와 더불어 비룡 능선의 솔숲을 어루더듬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