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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회에 뜨는 달


                                                                                                      손정모(孫廷模)

  밤 8시 무렵이다. 11월의 밤 하늘에 별들이 하얗게 눈을 휩뜨고 깨어나고 있다. 몇 줄기의 바람결이 허공에 매달려 지치도록 파랗게 춤을 추고 있다. 인천 남구의 수봉 공원이다. 반 시간 전부터 차가운 밤 공기를 마시며,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 이제 잠시 후면, 수려한 미모의 수빈이 약속대로 나타날 것이다. 언제 보아도 그녀의 눈빛에는 따사로운 정감이 남실거린다. 수빈의 얼굴을 보고 있을라치면, 미풍에 나부끼는 잎새 같은 싱그러움에 젖곤 한다. 어디를 봐도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여인이다. 이러한 수빈과의 '의미 있는' 만남을 위해, 나는 벤치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벤치에 앉아 하늘을 우러러보노라니까, 슬며시 기억 속으로 과거의 상념이 밀려든다.
  
  넉 달 전, 내가 동양화학에 근무하던 7월 하순의 일이었다. 퇴근 후 단짝인 진과장과 함께 모처럼 술집에 들러 회포를 풀었다.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다가, 단골인 은하노래방에 들렀을 때였다. 노래방 입구에는 파괴된 시설물들이 널브러졌고, 주인과 남자 종업원들의 종적은 묘연했다. 단지 수빈만이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껴 울고 있었다. 수빈을 보는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갔다. 내가 수빈과 알고 지낸 지는 석 달만이었다. 나는 택시를 불러 그녀의 자취방에 닿았다. 불안에 떠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녀를 반듯이 드러눕혔다. 다행히 찢긴 상처는 없었지만, 종아리 부위에서부터 허벅지 부위까지가 온통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수빈은 계속 입을 덜덜거리며 떨어댔다. 받은 충격이 강렬했음인지 시선도 불안정하여 그저 어름거리며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이불을 펴서 그녀를 다독거려 주면서 나는 말했다. 일단은 잡념을 떨쳐 버리고 한잠 푹 자 두는 게 좋을 거라고 말이다.
  머리가 맑아질 때면 나는 언제나 현실 속의 나의 위치를 떠올리게 된다. 석 달 전인, 지난 8월 초순의 일이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격으로, 생산과장인 나마저도 명퇴 처분을 받으리라고는 미처 몰랐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나의 평판은 명문대 출신의 인간성 괜찮은 일벌레였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을 내 집처럼 일하던 회사로부터의 명퇴 처분이라니 ? 지금 생각해도 정말 모를 일이었다.  정리를 마치고 회사를 떠나던 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한 심정이었다. 어쨌든 나는 내게 드리워진 답답하고도 암담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수빈의 7월의 사고가 있기 전에, 내가 수빈을 알고 지낸 것은 석 달째였다. 하지만, 그다지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다. 쌓이는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려고 진과장과 나는 자주 은하노래방을 찾았었고, 수빈은 노래방의 여종업원이었을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그저 거리에서 만나면 얼굴 정도만 알아볼 수 있는 처지였다. 그 날 상처 입은 수빈을 그녀의 거처로 데려다 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을 뿐. 추호도 다른 뜻은 없었다. 수빈의 이불을 다독거려 주고는 곧장 등을 돌리며 일어설 때였다.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수빈의 가냘픈 음성이 들렸다.
  "한과장님, 잠깐만요. 불안해서 잠들 수가 없거든요. 제가 잠들 때까지만 있  다가 가시면 안 돼요 ? 부탁을 들어 주시는 거죠 ? 고마워요 …… "
  그녀의 물음에 나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거린 모양이다.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는 너무나 미약하여 들리는 듯 마는 듯했다. 노래방 주인에게 건네준 명함을 보고, 용케도 나의 이름을 기억해 둔 모양이었다.

  공원의 벤치 곳곳마다 젊은 연인들이 토해 내는 속삭임이 실연기처럼 퍼져 흐른다. 밤 시간의 공원이란 으례 연인들의 밀회 장소쯤으로 통하고 있다. 북쪽 하늘에 걸려 있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유난히도 밝게 빛난다. 카시오페아의 성좌(星座)가 내뿜는 별빛에는 은은한 기품마저 실린 듯하다. 카시오페아 왕녀의 얼굴에 겹쳐, 올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간암으로 입원 6개월째를 맞던 날이었다. 탈진한 상태의 어머니는 밤중에 가만히 형과 나를 침상 옆으로 불렀다. 그러더니만, 눈물을 글썽이며 하소연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눈을 감고 싶다고 했다. 기력이라곤 전혀 없던 어머니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혼신의 힘을 다해 말했다.
  "야들아, 정말 산다는 것은 한 순간에 불과한 것 같애. 내 나이 칠십을 넘었  고, 너희들도 다 뿌리를 내렸으니, 이제 무슨 걱정이 있겠노 ? 다만 창준이    너를 짝지워 주지도 못하고 먼 길을 갈 일이 ……"
  어머니는 급기야는 눈물을 쏟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형과 나는 어머니를 진정시키며, 물수건으로 이마를 닦아 주었다. 한참이 지난 후, 어머니는 다시 마지막 기력을 다해 말을 이었다.
  "너희들도 잘 알고 있제 ? 아마 그 때가 너희들이 중학교에 다닐 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집 앞 논 두렁에 섰던 두 그루의 명자나무 말이다. 핏빛처럼  타오르던 꽃송이를 들여다보며 세 모자가 탄성을 지르던 그 황홀한 석양을  기억하제 ? 그 날의 섬세한 감동을 영원히 너희들에게 일깨워 주고 싶어. 현실이 고달플지라도 그 날의 감동처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너희들에게 ……"
  말을 하다 말고 의식을 잃은 어머니였다. 다음 날 새벽에, 어머니는 평온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에 명자나무를 옮겨 심던 날, 형제는 사무치는 설움으로 목이 메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스러져 가면서, 미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문사 교열부 기자인 미현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여름의 속초 해수욕장에서였다. 알고 보니, 둘 다 직장인 단체의 일원으로 놀러간 처지였다. 대열에서 이탈한 그녀와 나는 한 두 마디를 인사 치레로 건네다가 마음이 통했다. 대화를 나눠 본즉, 둘 다 그 때까지 애인이 없는 처지였다. 둘 다 제 잘난 멋으로 산 소치였고, 다분히 돈키호테적인 기질이 깔려 있었다. 게다가 둘의 학력 조건까지 거의 비슷했으므로, 둘은 만나자마자 금세 가까워졌다. 그리하여 해수욕장을 떠나기 전에, 미현과 나는 해변에서 악수를 나누면서부터 연인이 되었다.
  
  수빈이 겁간을 당한 지 사흘째가 되던 지난 7월말이었다. 열가소성 수지의 생산 공정을 둘러본 뒤, 막 책상에 앉을 때였다. 전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에, 무심코 수화기를 들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동양화학입니다."
  "한과장님이시죠 ? 저 김수빈이예요. 은하노래방 여종업원 말이예요. 다름   이 아니라,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저녁에 시간 좀 내 주시겠어요 ? "
  약속 시간인 8시에 조금 못 미쳐, 수빈이 멋적은 듯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대뜸 도움이 필요하다며 입을 열었다. 쌍화차를 마시며, 나는 수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경기도 시골의 여상을 졸업한 뒤, 3년 동안은 홀어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21세의 나이로 어머니를 여읜 수빈은 그 때부터 은하노래방의 여종원이 되었다. 그런데, 노래방 주인과 주변의 폭력배들과의 무슨 알력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했다. 급기야는 지난 번에 대여섯 명의 폭력배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주인과 남자 종업원들을 묶어서는 그들의  승용차에 옮겨 실었다. 그들은 뒷문으로 도망치는 수빈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그녀를 발가벗겨 윤간을 했다. 겁간을 당하는 그녀가 발버둥질칠 때마다 둘러섰던 폭력배들이 사정없이 발길질을 해댔다. 그녀는 처음 당하는 수모라, 충격과 놀라움으로 인해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하도 설워 실내 바닥에 주저앉아 마냥 흐느껴 울기만 했다. 바로 그 무렵에, 진과장과 내가 노래방으로 들어서면서 그녀를 발견한 거였다. 그녀는 두려운 나머지 다음 날부터, 다른 일자리를 찾아 다녔다. 이틀만에 숯불 갈비집의 카운터로 직장은 옮겼지만, 거처가 문제였다. 겁간을 당한 뒤부터는 옆에 누군가가 없으면 불안하여 도무지 잠들 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날더러 제발 도와 달라고 하소연이었다.
  "오빠 ! 이제부터는 오빠라고 부를게요. 저는 아무래도 정신과 치료를 받아  야 할 것 같아요. 오빠가 지난 번에 저를 돌봐 주셨기에, 또 다시 매달리게    되나봐요. 부디 저를 여동생으로 봐 주시고, 저의 부탁을 들어 주셨으면 해요. 제가 치료를 받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때까지만 말이예요. 저를 오빠댁에 머물게 해 주지 않을레요 ? 절대로 제가 불편하게 해 드리지는 않을게요. 제발 부탁이예요."
  나는 뭔가 악몽을 꾸는 느낌이었지만, 선선히 그녀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그 날 밤에 수빈을 나의 전셋집으로 데려왔다.
  "그래, 수빈아 ! 우린 오늘부터 의남매(義男妹)가 되는 거다. 네가 쾌유될   때까지, 편안히 여기서 함께 지내자꾸나. 잘 자거라."
  단간방이라 그녀를 침대에 재우고, 나는 마루에 나가 잠을 청했다. 나는 잠이 들기에 앞서,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날이 밝는 대로 수빈을 정신과 진료를 받게 해 주겠다고 말이다.
  실직 2주째를 맞는 8월 중순의 일이었다. 밤이 이슥할 때까지 진과장과 술을 마시고 돌아온 새벽 무렵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불 꺼진 마루에 앉아 수빈이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불을 켜고 내가 마루에 들어섰어도 여전히 수빈은 넋을 잃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마시다 남은 소줏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속살이 훤히 다 비치는 잠옷 차림의 그녀는 유난히 추워 보였다. 순간적으로 측은한 마음이 일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를 안아 들고는 방의 침대에 눕혔다. 그녀를 내려 놓고 막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수빈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나의 목을 껴안았다. 순간적으로 성숙한 여인의 향내가 콧속을 찔러 왔다. 하마터면 성적 충동에 휘말려 버릴 것만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나는 연민의 정을 느끼며, 그녀를 조심스레 다독거려 준 뒤, 조용히 마루로 나왔다. 창 밖에 걸린 새벽 달에 한기를 느끼며 나는 살며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수빈은 마루에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정신과 의사의 말로는 수빈의 정신 건강은 지극히 양호하다고 했다. 다만 상황이 달라지면 심각해질 수도 있는 문제이므로, 당분간은 현상태대로 유지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공원을 찾는 연인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밤이 되자, 연로한 노인들도 담배를 입에 문 채 공원을 산책하며 도란거린다. 아직도 약속 시간까지는 십여분쯤 남은 시점이다. 나는 시각을 확인한 뒤에, 벤치에서 일어나 공원을 가볍게 달리며, 수빈의 얼굴을 떠올린다. 나와 대략 한 달간을 동거 아닌 동거 생활을 해 오던 수빈이다. 동거 아닌 동거 생활이란, 분명 같은 방을 쓰되, 잠자리는 함께 않는 생활을 말함이다. 그럼에도 말이다. 나는 그녀의 간청에 따라, 그녀가 잠들 때까지는 그녀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점차 공원 내로 저녁 안개가 밀려들며, 한결 운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연이어 나의 뇌리로 과거를 향한  상념의 세계가 자연스럽게 파고든다.

  9월 중순 무렵이었다. 나는 통영고 총동창회와 통영 향우회 재향 지부를 알아냈다. 괜히 반겨 줄 것만 같은 마음이 들어, 몇몇 유지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내가 찾아 나섰던 동문이나 향우회로부터는 여지껏 단 한 건의 연락도 없었다. 경험으로 또 다시 허탕을 친 느낌이었다. 씁쓸하고도 허전한 분위기에 젖어, 내딛는 발걸음마다 자꾸만 함몰되는 자신을 느꼈다.
  어깨에 힘이 빠져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수빈이 오랜만에 외식으로, 저녁을 사겠다고 제안했다. 워낙 심신이 고단해진 상태라, 내키지는 않았지만 따라나섰다. 그녀는 대뜸 택시를 잡더니, 월미도의 유람선 선착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말했다. 괜히 바다가 보고 싶더라고 했다. 유람선 선착장 해변을 거닐며,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가슴도 울적하던 참이라, 나는 잠시 근심을 잊고, 그녀와 함께 해변을 거닐기로 했다.
  저녁 7시 무렵의 해안선은 또렷했다. 근해는 물색이 황톳빛으로 칙칙했지만, 먼 해역에는 그런 대로 바다의 운치가 물씬 풍겼다. 귓전을 파고 드는 뱃고동 소리부터가 심신을 쾌청하게 해 주었다. 물 무늬지는 수면 위로 발동선의 엔진음이 빛살처럼 쏟아져 내리곤 했다. 보통 키에 날씬한 몸매를 지닌 수빈은 한 마디로 빼어난 미모의 여인이었다. 수빈을 보게 되면, 누구든 첫 눈에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수빈은 긴 머리카락을 바닷바람에 휘날리며, 착 감겨 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옛 날에 학교에서 배운 기억인데, 생명체가 바다에서 처음으로 출현  했다면서요 ? 저 바다의 물결 어디쯤에 아득한 선조들의 영혼이 실려 있을까요 ? 오늘 따라 바다로 자꾸만 마음이 끌렸어요. 얼굴도 모르는 먼 조상들이 나의 얼굴을 보자고 불렀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너무나 동떨어진 생각을 했나요 ? "
  저녁놀에 잠긴 바다를 지켜 보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떡거렸다. 분명 바다에는 언제나 숱한 파동 에너지가 어우러져 꿈틀거린다. 그래서, 그 에너지들 중에선 선조들의 숨결이 실린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이 들면서부터였다. 바닷물 속에서는 세상 떠난 부모님이 나의 현실을 애닯아하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자꾸만 목이 메어, 저무는 바다를 향해, 연신 헛 웃음을 피워 올렸다.
  수빈과 선착장을 다녀온 뒤, 삼일째 되던 날 새벽이었다. 잠에서 채 깨어나지도 못한 채, 나는 전화를 받았다. 작년 여름 이후로 한 달에 한 번 꼴로 만나던 미현이었다.
  "창준씨 ! 오늘 문득 생각해 보니, 내가 꽤 멍청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여지껏 창준씨의 집을 방문할 생각도 못 하고 있었으니 말이예요. 모레쯤 한  번 들를까 해요."
  나는 화들짝 놀라, 순식간에 잠이 다 달아나 버린 상태였다. 결국 다음 날 오후에 수빈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날 수빈을 같은 건물의 한 층 아래의 월셋방으로 이사시켰다. 이사를 가던 날 수빈은 이민을 가는 친여동생이나 되는 듯 아침부터 눈물이 글썽거렸다. 나는 수빈의 고요하고도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에 곧잘 빠져들곤 했다. 정말 놀랍게도 말이다. 명자꽃에서 느끼던 그 섬세한 감동을 수빈의 눈매로부터 문득문득 느낄 때가 있었다. 내가 눈을 뜬 시계(視界)의 저쪽에는 언제나 미풍에 나부끼는 명자꽃과 어머니의 미소가 어우러졌다. 어머니의 미소가 스러질 때면, 언제나 청순한 수빈의 미소가 샘물처럼 차 오르곤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전 10시쯤 되어 미현이 도착했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체육복으로 갈아입고는 나의 방을 소제하기 시작했다. 청소를 마치고, 사 온 꽃을 꽃병에 꽂고 창문을 여니, 금세 환경이 달라졌다. 나는 미현의 손놀림에 내심 크게 놀랐다. 그녀의 손길이 스쳐 지난 자리마다 금세 분위기가 새롭게 달라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아파트의 문이 잠겼나를 확인하고는 달려와 나에게 안겼다. 나는 이렇게 적극적인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나와 그녀는 마루에 선 채로 달뜬 포옹을 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만났지만, 이렇게 격정적인 포옹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랬으니까, 서로간의 애무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다. 수빈의 미모가 첫 눈에 사람을 아찔하게 하는 매력이라면, 미현의 미모는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이었다. 표정과 동작 및 심지어 몸매까지도 저녁 안개와 같은 신비한 요소가 배어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포옹을 풀지 않은 채 있더니만, 상기된 얼굴로 떨어지며 말했다.
  "창준씨, 지금까지는 너무 점잖게만 만났던 것 같아요. 오늘은 제게도 스킨쉽(skinship)이 필요하거든요. 이제부터는 우리 서로 애무를 하고 지내도록  해요. "
  "좋아요. 그렇게 하기로 하죠. 내가 너무 뜸을 들이고 있었던 모양이네요.  사실 나는 실직 상태에 있어서, 정신이 없었거든요.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직장을 찾아 헤매느라고 허둥댔으니까 말이에요."
  애무하기로 마음 먹자, 서서히 몸이 달아올랐다. 나는 그녀의 체육복 상의를 벗기며, 그녀의 볼록한 젖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도 자연스레 손을 뻗어 나의 혁대를 풀며 사타구니 부위를 더듬기 시작했다. 우리는 평온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서로가 달아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주변은 정적 속에 정지된 화면으로 비쳐져 왔다. 간혹 스쳐가는 창 밖의 바람만이 창문을 덜컹거리며 울려 주곤 했다. 문득 미현이 왜 애무를 원했던가를 더듬어 생각해 봤다. 피부와 피부와의 접촉에서 저녁놀처럼 황홀하게 타오르던 그녀였다. 하얀 속살 곳곳에 나의 입김이 스칠 때마다 섬광처럼 전율하며 홍조를 피우던 그녀였다. 미풍에 나부끼는 꽃잎들처럼 그렇게 섬세하게 파동져 흐르던 살갗의 떨림이었다. 결국 미현이 애무를 원했던 것은 섬세한 감성의

 교류를 원했던 탓이라고 여겨졌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외로움이란 그늘에서 수시로 몸달아하는 미약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현은 밤까지 같이 보내고픈 눈치를 비쳤으나, 그럴 만한 심사가 아니어서,돌려 보냈다. 그녀를 돌려 보낸 뒤에,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경기 침체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될지 모를 일이었다. 사방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마땅한 취업 자리는 나지 않고, 절망감만 가중될 따름이었다. 여지껏 살아온 삶의 방식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새삼스럽게 반추도 해 보았다.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온갖 잡념이 끓어올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침대의 배열이 흐트러진 느낌이어서, 침구 정리를 하기 위해 침대를 밀칠 때였다. 침대 밑에서 두꺼운 종이 상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펼쳐본즉, 수빈이 짬짬이 그렸던 그림 몇 쪽이 나왔다. 다 같이 수묵(水墨)이 주가 되고, 색채가 엷게 깔린 수묵 담채화였다. 그림의 제목은 쌍계상춘(雙溪賞春)이었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한 쌍계사 입구의 경치가 너무나도 절묘했다. 간결한 운필법임에도 불구하고, 바람에 나부끼는 벚꽃의 형용은 너무나도 생동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화선지에 그려진 7장의 그림들을 천천히 감상하고 갈무리해 두려고 할 때였다. 유독 하나의 그림 뒤에서였다. 뭔가 깨알 같은 낙서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훑어 보다가 점차 눈을 크게 뜨면서 읽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날은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이었다. 유년기에 부모님의 손을 잡고 바라보던 쌍계사 입구의 벚꽃들만큼이나 눈부신 인상이었다. 귀티가 서린 얼굴에 정이 담뿍 어린 얼굴이라, 말을 붙이고파 며칠 밤을 망설였던가 ? 근래에 날마다 같은 집에서 눈을 떠 생활하지만 말이다. 왠지 얼음처럼 두터운 벽을 느낀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벽이며, 두께를 헤아릴 수 없는 벽이다. 내가 만약 벽을 허물고자 달려든다면, 그는 어떻게 나를 대할까 ? 어디를 봐도 결점 하나 없는 그이기에, 자꾸만 범접하고픈 용기가 소진되는 것이다. 나의 뜨거운 가슴으로도 녹일 수 없는 벽이라면 말이다. 나는 벚꽃 그늘 아래에서 꿈만 들이키고 있는 한 마리의 흰 나비에 불과할까 ?
 
  수빈의 글을 읽던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온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나는 수빈의 글과 그림을 봉투에 넣어 원래대로 만든 다음,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 바람이 나의 답답한 가슴을 씻어 주기라도 할 듯 매섭게 달려들었다. 베란다에 길길이 자란 동백나무 잎새가 바람을 맞아 바르르 떨고 있다. 잎새의 떨림을 보노라니까, 명자나무꽃 그늘 아래에서의 어머니의 미소가 바람처럼 피어 올랐다. 이래저래 콧날이 시큰거리며, 자꾸만 목이 잠겨 들었다. 나는 넋을 잃은 채, 차가운 대기에 몸을 노출시키며, 자꾸만 고개를 젓고 있었다.
  어느덧 9월 하순이었다. 수빈이 이사를 한 지도 벌써 일 주일째였다. 학원 강사나 할까 하고 돌아다녀 보았으나, 영수 교과가 아니래서 연속 퇴짜였다. 뜻 밖에도 누가 특허 법률 사무소를 권했다. 몇 군데를 휘젓고 다녔더니, 강남역 부근의 특허 법률 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에이포(A4) 용지 크기의 영문 특허물을 주면서, 우리 말 번역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번역한 문장을 주면서 원문으로 전환시키라고 했다. 15분 가량의 시간이 흘러, 제출하였더니 통과되었다며, 바로 부서 배정을 해 주었다. 고용주는 고작 80만원을 준다면서 온갖 생색을 내며 난리였다. 어쨌거나 백의종군하는 기분으로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출근했다. 대다수가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이었고, 드물게도 40대들은 몇 명만이 눈에 띄었다. 누가 뭐래도 일단은 겸허해지기로 했다. 나의 마음이 전달된 셈인지 금세 주변에서 마음을 열어주며 격려해 주었다. 주변의 미미한 움직임이었지만, 동료 집단으로서의 격려의 분위기는 내게 적지 않은 감명을 주었다.
  출근 3일째 되던 저녁 무렵이었다. 화공과장이 주관한 회식에 참석한 뒤, 자리에서 일어서니 밤 9시 무렵이었다. 집에 도착하여, 한잠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니 새벽 1시였다. 취업 전까지는 매일 새벽 1시까지는 이력서를 작성하느라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단했을 텐데도 깨어나 눈을 뜨니, 정신이 또렷하게 살아났다. 막 신문을 주워 드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창준아, 나 남종현이다. 아직 안 자고 있었구나. 어떻게 실직자를 면했다며  ? 우선 축하해. 내가 하는 전자 부품 사업도 경기 변화에 꽤나 민감한 편이   더라구. 하여간 난 너 때문에, 좀 걱정을 많이 했었다. 기분도 풀 겸, 이 번    토요일에 양평의 남한강가에 낚시질이나 하러 가자구. 그럼, 양평군 세월리    강가의 새로 난 선착장 부근에서 오후 4시에 만나자구. 그럼, 이만."
  언제나 종현의 전화는 이런 식이다. 남의 동의는 구할 필요도 없다는 듯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끊는다. 그래도 종현은 내가 사귄 가장 절친한 나의 친구였다. 나를 위해 배려해 주는 그를 위해, 어느덧 나는 낚시 도구를 점검하고 있었다. 세월리의 유람선 선착장 부지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강변에서 종현과 나는 낚싯대를 드리웠다. 붕어와 끄리가 주종을 이루었고, 이따금씩 쏘가리가 입질을 해대곤 했다. 각자 네 개씩의 낚싯대를 벌려 놓고는 어신에 따라 낚아 올리곤 했다. 오후 4시부터 시작된 낚시였다. 저녁 6시 무렵이 되자, 제법 어망이 그들먹하게 잡혔다. 강물은 석양빛을 받아 현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섬세한 빛줄기가 뒤엉켜 하나의 파동을 이루며, 수면을 통해 빠져 나가고 있었다. 종현과 나는 잡힌 물고기들을 씻어 냄비에 앉히고는 버어너를 켰다. 금세 매운탕이 보글보글 끓어 오르며 냄비 두껑이 덜썩거렸다. 술잔을 꺼내, 마주보며 술잔을 나누려 할 때였다. 돌연 강가에 승용차가 한 대 정차하더니,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인들이 둘 내렸다. 웬 일일까하고 눈을 멀뚱거리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종현이가 중얼거렸다.
  "어디 가나 파리 떼들로 극성이라더니 ? 여긴 또 어찌 알고 왔지 ?"
  "아니 파리 떼라니 ? 저 기혼녀들이 몸을 파는 여인들이란 말이야 ?"
  "아이구, 참 답답하기도 해라. 해수욕장이나 유원지, 낚시터 등지에서 관광  객들을 상대로 비밀리에 매춘을 하는 가정 주부들이란 말일세. 경기 침체가   들이닥치고부터는 유명한 관광지 어디에서나 극성이래잖아 ?"
  하이힐에 미니 스커트 차림의 두 여인이 다가와서는 말을 건넸다. 우선 차림새와 얼굴 표정을 살펴보니, 밉지 않은 인상이다. 게다가 그녀들의 표정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머나, 매운탕을 끓이시네. 차 있는 술잔에 매운탕까지 갖춰졌으니, 이제  여자만 있으면 되겠군요. 저희들도 잠시 좀 끼어 앉아도 되죠 ?"
  종현은 힐끔 나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만, 이동식 돗자리의 빈 곳을 가리켰다. 그녀들 중의 흰 미니가 내 옆에 앉았고, 남색 미니가 종현의 옆에 앉았다. 륙색을 풀어, 잔을 두 개 더 꺼냈다. 오늘의 만남을 축하한다는 건배를 한 후,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흰 미니가 좌중을 둘러보며 생끗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말이예요. 눈을 뜨고 일어나면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실직자들이   늘어나는지 모를 지경이예요. 아저씨들은 설마 실직자들은 아니시겠죠 ?  경제 불황에 아저씨들더러 그냥 도와 달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이렇게 꾸미고 나왔죠."
  그녀의 미소가 차라리 예리한 비숫날인 양 나의 가슴이 아려 왔다. 갑자기 세상살이가 서글퍼지는 느낌이었다. 이 세상 누구에랄 것이 없이 그저 답답하고 가슴 속이 울먹거렸다. 술잔을 돌린 지 한 시간쯤 경과되었을 때였다. 여인들은 앉은 자세가 불편하다며, 미니스커트를 걷어 올리며 편한 자세를 취했다.
  내 걸린 낚싯대에서는 연이은 입질이 계속되었지만, 누구도 낚싯대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모두들 취기로 얼굴이 불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서서히 넷은 몽환의 상태로 빠져 들었다. 나는 뭔가 알 수 없는 요인으로 가슴 속이 자꾸만 끓어 올랐다. 그러면서 '98년의 양자강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 가던 새끼 돼지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나무 판자 위에 올라탄 새끼 돼지들의 신문 사진을 보고서는 모두들 심란해 했다.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양자강의 물이 대세라면 말이다. 지금의 나는 돼지 새끼와 다를 바 없는 신세라고 여겨져 자꾸만 비감스러워졌다. 사방은 밀어닥친 강 안개로 금세 희뿌옇게 내리덮였다. 이제 땅거미가 몰려와 십여 미터 바깥의 정물조차도 식별되기 어려운 상태였었다.
  먼저, 흥분 상태에 이른 종현이가 남색 미니를 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만, 내게 갈숲을 가리키고선, 곧장 강가의 갈대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흰 미니가 익숙한 동작으로 나의 바지 지퍼를 내리며 사타구니를 더듬어 왔다. 나도 흰 미니를 품에 안고는 그녀의 하얀 속옷을 벗겨 내리기 시작했다. 혼란의 극점에서도 나는 운치를 생각했다. 나는 흰 미니에게 말했다. 사방이 어둠 속에 잠긴, 인적 드문 곳이 여기 말고 또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미소를 띤 채,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곱상한 얼굴에 귀염기조차 드러나 보이는 그녀는 눈을 빛내며 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세월의 궤적을 잊는 셈치고 말이다. 전라의 몸으로 어깨 동무를 한 채, 강변을 거닐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녀는 봉곳한 가슴을 나의 가슴에 밀착한 채, 동의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신발마저도 벗어 던진 완전 알몸으로 그녀와 나는 양평의 남한강변을 거닐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온통 구름장이 짙게 깔렸던 모양으로, 별빛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칠흑 같은 밤의 강변을 전라의 여인과 함께 거니는 느낌은 분명 환상적인 아늑함이었다. 여인은 내게 말했다.

  "워낙 어둠이 짙어서, 심지어 내가 벗고 있다는 느낌마저 없어요. 어쩜 이런  산책을 생각해 내셨나요 ? 강물과 모래가 던져 주는 청량함이 우리의 체온을 통해, 고스란히 녹아 내리는 느낌이예요. 오늘 같은 밤은 갖은 정감을 다해, 기성 시인들의 시편을 낭송하고 싶은 심정이라구요. 괜히 응석을 부리고 싶네요. 날 좀 업어 주지 않을레요 ?"
  나도 여인을 향해 말했다.
  "좋소 !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해 드리죠. 펼쳐진 세계, 광막한 강변을 향  해 갑시다 ."
  나는 단숨에 등을 돌려 그녀를 업었다. 순간적으로 물컹 와 닿는 느낌이 들며, 그녀의 젖가슴이 나의 등을 압박해 왔다. 나는 한동안 말 없이 그녀를 업은 채 강변을 서서히 걸었다. 간혹 차디찬 강바람이 눈을 휩뜨고 달려들긴 했지만, 그 바람결마저도 포근하게 느껴졌다. 북쪽 하늘을 바라보니, 카시오페아의 왕녀가 깨어나면서 하늘의 별빛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가득 메웠던 구름장의 일부가 자리를 비껴 간 탓인 모양이다. 나는 등의 여인에게 물었다.
  "혹시 카시오페아의 왕녀를 아시나요 ?"
  "아뇨. 그저 저기 북쪽 하늘에서 빛나는 더블류(W)자 모양의 별 자리 정도  로만 알 뿐이예요."
  "오늘 우리의 만남과 교접도 밀애(密愛)의 하나임에 틀림없겠죠 ?"
  "물론이죠. 하지만, 진리는 그 시대의 가치관에 따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분명한 건 말이죠. 오늘 우리의 만남은 확실히 여느 다른 만남과는 격조가  달리 느껴져요. 한 마디로, 묘하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에요. 우리 너무 현   실을 아파하지 말기로 해요. 당분간 고개를 돌려 원시 사회의 인류로 돌아    갔다고 생각하고 오늘을 함께 보내기로 해요. 대신 오늘 이후론 저도 충실한 가정 주부로 돌아가기로 작정했어요. 당신을 만나고부터, 그 동안의 나의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을 통렬하게 느꼈어요. 저는 당신을, 저를 깨닫게 해 준  스승이라고 생각해요. 깨끗한 마음으로 저의 몸을 드릴게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에 피부로 느꼈다. 나의 등에 업힌 여인이야말로 바로 카시오페아의 왕녀임을. 또한 그녀야말로 나의 진정한 스승으로 느껴졌다. 나는 서서히 그녀를 등에서 내려 놓았다. 그러면서, 왕자가 된 경건한 마음으로 그녀의 입술에 입맞추었다. 순간적으로 경련이 일 듯한 느낌이 전해져 오며, 그녀와 나는 깊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런 뒤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모래 바닥에 눕혔다. 그녀의 눈은 별빛처럼 깨어나 초롱거렸으며, 시종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어느 순간이었다. 눈과 눈이 맞부딪혀 숨이 멎을 듯한 청순함에 휩싸였다. 이윽고 그녀는 드런누운 채, 입술을 쫑긋거리며 손을 뻗어 나의 사타구니를 더듬어 왔다. 나도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그녀의 유두에 입술을 가져 가며, 손으로는 그녀의 하반신을 더듬어 내려갔다. 또 다시 하늘의 일부가 허물어져 내리며 머리 위로부터는 별빛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나의 피부는 고순도의 감광판인 양, 그녀의 어떠한 몸짓도 다 읽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점차 몸이 달아올라 가쁜 숨결을 토해 내며 나를 받아들이려고 몸부림쳤다. 오랜만에 영혼과 마음이 일치된 듯한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뜨거운 격정이 전신을 엄습해 왔다. 마침내 나도 절정감에 휩싸여,  그녀를 끌어 안으며, 그녀의 하복부에 나의 체중을 실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텅 비어 오며, 짜릿한 전율감만이 경련처럼 전신을 타고 흘렀다. 점차 강바람이 기승을 부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나는 발가숭이의 카시오페아를 업은 채, 돗자리로 돌아갔다. 이미 종현과 남색 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기다리고 있었다. 종현과 나는 여인들을 승용차 있는 곳까지 배웅해 주었다. 여인들은 방긋 미소짓는 얼굴로 풍성한 밤 낚시가 되길 빈다면서 승용차에 올랐다. 종현과 나는 떠나가는 그녀들의 모습을 넋을 잃은 채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들을 보내고 나서였다. 종현과 나는 낚싯대는 그대로 펼쳐 둔 채 강변을 따라 말없이 거닐었다. 세상은 강에서 피어오른 밤 안개로 자우룩히 뒤덮여 어디를 둘러보아도 허허롭기만 했다.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반 시간 쯤 걸었을까 ? 강으로 돌출된 하나의 커다란 암벽이 나타나 더 이상의 산책이 어려웠다. 발길을 돌리던 참에 나의 눈에 글자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회중전 등을 비추어 보니, 암벽 중앙에 은곡동천(銀谷洞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동천이란 신선들이 사는 별천지를 말함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암벽을 찬찬히 살폈다. 종현이 뭔가를 발견한 듯 소리를 질렀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강물쪽으로 돌출된 수직에 가까운 암벽 밑에서였다.
  "창준아, 이리로 와 봐. 뭔가 글귀가 새겨진 것 같은데, 도대체 뭔 소린지   읽어 봐. "
  이끼 낀 암벽의 하단부에는 분명 음각으로 한자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음각의 글씨체는 예서체로 정교했으며, 음각의 깊이도 집게 손가락 길이만큼이었다. 이것은 필시 전문 석공이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 글귀를 새긴 것임에 틀림없었다.

  松影握瀑水不留(송영악폭수불류)
  日光透沼魚無痍(일광투소어무이)
                      - 柚林子(유림자) -

  한시(漢詩)상의 운율이 지켜진 문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쉬운 한자라 뜻은 통했다.
  
솔 그림자가 폭포수를 붙잡으려고 해 보지만, 물은 멈추지 않고,
햇살은 곧장 물 속을 꿰뚫지만, 물고기는 전혀 상처를 입지 않네.

  추측컨대, 한 때 이 곳에서 은거 생활을 하던 유림자(柚林子)라는 기인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기인의 귀에 들렸던 모든 풍정(風情)이 나의 피부로 고스란히 느껴져 왔다. 우선 햇살에 비친 솔 그림자의 몸짓과 폭포수의 도도한 흐름이 그랬었다. 다음으론, 날카로운 햇살에도 은은하게 유영하는 물고기 떼들의 숨소리가 그대로 느껴져 왔다. 왠지 유년기에 어머니와 함께 바라보던 명자꽃의 화사하고도 여린 감흥과 어우러지는 느낌이었다. 글귀 중에도 폭포라는 용어가 나왔지만, 분명 폭포수가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가파른 바위 저쪽편 어딘가에 폭포 줄기가 내리꽂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층암 절벽에 사시사철 폭포가 흘러내리고, 솔향기가 부드러운 이 곳이야말로 분명 동천이었다. 종현과 나는 한동안 감동에 젖어 암벽을 우러러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이 때 나의 뇌리에는 새로운 삶의 각오가 차 올랐다. 지금까지의 방종에 가까웠던 삶의 방식을 청산하고 말이다. 유림자처럼 자연의 멋을 생활화하여 격조와 기품 있는 삶을 살아 가겠노라고 말이다.

  긴 머리를 나풀거리며 수빈이 오른 손을 치켜든 채, 내게로 걸어온다. 나도 벤치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달려간다. 그녀와 만나자마자 나는 손을 내민다. 수빈은 악수를 하며, 두 손으로 나의 오른 손을 소중하게 감싸 쥔다. 그녀와 나는 사람들이 뜸한 잔디밭에 가서 나란히 앉는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다. 그녀는 내게 바싹 붙어 앉으며, 고백할 말이 있다고 한다. 조심스러운 듯 수빈은 말끄러미 나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한다.
  "오빠, 혹시 사귀시는 연인 있으세요 ? 오, 그랬구나 ! 어쩜 그렇게 아무런  내색도 없으셨어요 ? 여지껏 오빠를 지켜 본 느낌으로, 오빠한테는 연인이    없는 줄로 알았어요. 오빠, 전 오빠를 만난 첫 날부터 오빠에게 빨려 드는  느낌이었어요. 그 후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오빠에게 사랑을 고백하고픈 충동으로 달아올랐어요. 그 때마다 부랑배들에게 당한 일이 떠올라, 차마 고백할 용기를 못 냈다구요. 오늘 밤에는 말이예요. 도저히 털어 놓지 않으면 병이 될 것만 같아서, 이렇게 말씀 드리는 거예요. 이제 오빠한테는 연인이 있고, 저는 오빠만을 사랑하는데 어떡하죠 ? 왜 이렇게 세상살이가 힘든지 모르겠네요."
  수빈의 눈 시울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더니, 급기야 뽀얀 안개가 서리며 이슬이 맺힌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지우며, 하염없이 입술을 질겅거리며 깨물고 있다. 나도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대관절 수빈이 왜 나에게 연정을 품었는지가 애닯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재산도 없는 준실직자인 내게 무슨 호감을 가졌었던가가 마냥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다. 비록 이전에 쌍계상춘(雙溪賞春)이란 그림에서 수빈의 연정을 알긴 했었지만 말이다.
  "수빈아, 너의 상대는 분명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일 거야. 우린 의남매지간  이잖니 ? 나는 오빠로서 현실에 어려워하는 너를 지켜 보았을 따름이다. 이전에도 그랬 듯이, 앞으로도 변함 없는 남매간으로서 열심히 살아 가자꾸나.  수빈아, 의남매가 어쩌면 친동기간보다 더 가까울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 않니 ? 오빠로서, 너의 청순한 사랑과 열정을 모두 사랑해. 부디, 행복한 여인이 되길 빈다."
  작별의 뜻으로 나는 수빈에게 손을 내민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만, 나의 손을 감싸쥐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한다.
  "오빠 ! 하나만 대답해 줘. 오빠 보고 싶을 땐 언제라도 오빠댁으로 가도 되  는 거지, 응 ? 그리고, 내가 필요할 땐 언제라도 내 곁에 있어 주는 거지, 응 ? 오빠, 보고 싶을 때마다 연락할게, 안녕."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공원을 떠나가고 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밤 9시 무렵이다. 나는 머리가 터져 버릴 듯한 괴로움으로 벤치에 앉아 머리를 싸 쥐며 고개를 숙인다. 부지불식간의 일이었다. 나의 의식계로 문득 암벽의 글귀가 서늘하게 와 닿았다. '햇살은 곧장 물 속을 꿰뚫지만, 물고기는 전혀 상처를 …… ' 왠지 복잡한 상념들이 후련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분명 과거엔 정리하려고 했어도 정리 못했던 상황들이 부지기수였다. 찰나간에 양평 폭포수의 형상이 머릿속에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수면으로 내리꽂히는 폭포 줄기와 햇살이 또렷이 떠올랐다. 햇살과 폭포수는 강렬한 힘을 지녔지만, 유영하는 물고기들에게는 일체의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따스한 햇살을 나의 삶에 비유한다면 말이다. 미현의 몸짓과 수빈의 미소는 흐르는 강물의 물고기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리하여, 이후부터의 나의 삶은, 청량한 폭포 줄기를 닮고 싶은 것이다. 자유롭게 흐르되, 다른 생명체의 흐름에도 활력을 줄 수 있는 삶이고 싶은 것이다. 뭔가 하나의 깨달음인 듯도 하여, 곧바로 나의 전신이 후련해져 왔다. 고개를 숙여 한참 상념에 잠겨 있을 때다. 돌연히 나의 어깨 위로 여인의 손이 살며시 얹힌다. 섬칫 놀라 돌아보니, 미현이 측은한 표정을 짓고 내려다보고 있다.

 애초에 미현과는 밤 9시에 공원 입구에서 만나, 심야 영화를 보기로 했다. 미현은 조금 일찍 도착했기에, 공원의 여기저기를 거닐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수빈과 나를 발견하고는 수빈이 떠날 때까지를 기다렸다가 나타난 거였다. 미현은 수빈과 나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에, 미현에겐 다른 설명이 필요가 없을 듯했다. 나는 일어서서 그녀의 따스한 손을 잡고는 함께 공원을 떠난다. 점차 밤 바람이 이빨을 곤두세우며 날카롭게 옷깃을 파고든다. 때 마침 동쪽 지평선으로부터 파리한 모습의 하현에 가까운 반달이 떠오르고 있다. 달빛마저도 시름에 잠긴 듯, 내뿜는 빛줄기마다 애잔하게 흩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