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Return)

변산 해변의 연가

손 정 모 (孫廷模 )

솔숲길 언저리 어디에도 인적은 없다. 먹빛 하늘에 안개가 하얗게 일어선 새벽이다. 들리는 거라곤 오로지 파도 소리와 달빛에 부서지는 솔바람 소리일 뿐. 파도 소리는 하염없이 8월의 새벽 바다를 가르며, 지치도록 울부짖고 있다. 분명 그랬다. 파도 소리가 밀려들 때면, 수많은 혼백들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리곤 했다. 해안선을 따라 포장 도로가 펼쳐진 채석강 북쪽의 솔숲길이다. 주차되어 있던 승용차의 문이 열리며, 여인이 솔숲길에 들어선다. 소복 차림의 여인은 상자 하나를 받쳐 들고는 천천히 해안선으로 내려서고 있다. 먼 발치였지만, 여인은 분명 미정의 언니인 미선이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은 연방 여인의 치맛자락을 휘말아 올리고 있다. 여인은 절벽 아래에 선 나를 알아보고는 손을 흔든다. 덩달아 나도 손을 들어 올리며, 여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틀 전 밤중이었다. 전화기를 들며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자정에 가까운 시점이었다. 나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전화기의 음성을 듣고 있었다. 깊은 잠에서 미처 깨어나지 못한 상태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여보세요, 동수씨 ? 저예요. 미선이라구요. 유언에 따라 동생을 화장했거든 요. 동생의 유골함을 찾아 방금 도착했기에, 지금 전화를 하게 된 거예요. 모레 새벽 다섯 시쯤 채석강 남쪽의 방파제로 오세요. 이장에게 부탁해서, 거룻배 하나를 빌려 놓았거든요. 배 잘 젓는 동수씨를 믿고 빌린 거니까, 부담스럽지는 않으시겠죠 ? 새벽에 배를 저어서, 변산 바다의 품으로 동생을 ……"
  말을 하다 말고 그녀는 소리 죽여 흐느끼며, 전화기를 놓았다. 한밤중에 걸려 온 통화의 여운으로 가슴이 시려 왔다. 그녀의 흐느낌 소리에 미정을 잃은 아픔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웠다. 잠시 깨어났던 의식이 허물어져 내리면서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유골함을 받쳐 든 미선을 향해 걸으며, 나는 어느 새 상념에 잠겨 든다. 새벽이라 아직도 잠이 덜 깬 탓일까 ? 어제 하루 동안의 생활이 파노라마처럼 시차를 두고 생생하게 떠오른다. 달려드는 새벽 안개 사이로, 어제 아침 나절부터의 일정이 머릿속에 자막처럼 펼쳐진다.

  도처에 맑은 햇살이 나부끼던 어제 아침이었다. 나는 진료실 창 밖으로 펼쳐진 전주 시가지의 아침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골목 가득히 아침 햇살이 들어차고 있었다. 건물들의 상공에는 가을 호수의 물빛처럼 맑은 하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담청색의 하늘 가장자리에는 흰 구름 몇 조각이 한가로이 흘러가고 있었다. 건물의 유리창마다 반짝이는 햇살로 눈이 부셨다.
  문득 다음 날 새벽의 정경이 연상되었다. 덩달아 바닷바람에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유골함을 받쳐 든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근의 진료 병동을 돌아 환자 서넛이 걸어온다. 그들의 동작을 지켜 보면, 대개는 병세를 알아낼 수 있다. 눈빛이 날카롭고 하관이 빠른 40대 후반의 사내가 진료실로 들어선다. 병력 일지를 넘겨 보니, 간경화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이다. 첨부된 단층 사진을 훑어 보니, 우측 상엽의 사분의 일 가량이 굳어 있다. 사내의 얼굴에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다. 사흘 전 그 날 밤의 땀방울에 생각이 미쳤다. 미정의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해맑은 땀방울. 천천히 흘러내리다가 말고 광대뼈 언저리에 매달려 떨던 땀방울이었다.

  미정이 병실에서 눈을 감던 그 날은 나에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슬픔의 날이었다. 병원의 뜨락에 석양이 내리깔리던 무렵이었다. 돌풍이 일며 아스팔트 위로 흙먼지를 마구 휘말아 올리고 있었다. 미선의 연락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대각선 방향의 별동 건물인 암 병동으로 달려갔다. 내과 전문의인 안교수는 나를 보자마자 그의 연구실로 불러들였다.
  그의 연구실의 사방으로는 서가(書架)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60세의 안교수는 가운 차림으로 뒷짐을 진 채 실내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 보며 손에 쥐고 있던 뭔가를 내밀었다. 내 손바닥 위에 놓인 그것은 오리의 하얀 깃털이었다. 깃대의 길이가 가운뎃손가락보다 조금 긴, 눈부시게 하얀 깃털이었다. 너무나 섬세한 깃털이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부드러운 솜털이 하얗게 일어서서 나부꼈다. 나는 의중(意中)을 몰라, 그저 안교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침내 신음에 가까운 그의 목소리가 나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양군 ! 이 오리털은 나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기 하루 전에 내게 주신 귀한 선물일세. 이것을 내게 주면서 어머니는 말씀하셨지. 당신의 삶의 자취는 바람에 나부끼는 깃털처럼 시린 한평생이었다고 말이다. 왠지 '시리다'는 말을 듣는 순간에 목이 꽉 잠겨오는 느낌이었어. 나는 깃털을 받아들던 날 밤에, 경건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몸소 목욕시켜 드렸어.

  언제나 상냥스런 얼굴의 간호사인 현주가 환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백인숙님, 들어오세요."
라며, 현주가 환자로부터 고개를 돌려, 생끗 미소짓는다. 이 번에는 내시경 검사를 받고, 촬영 사진을 지참한 여인이 들어섰다. 30대 후반의 환자이다. 촬영 사진을 조영해 보니, 위벽이 심하게 헐어 있다. 환자를 진료대 위에 누우라고 말하며, 손바닥으로는 위장 부위를 세심하게 더듬어 나간다.

비로자나불의 봉안식이 있던 작년 봄날의 석양 무렵이었다. 선운사의 법당을 떠나던 날 자운 스님은 나와 미정에게 말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난관이 있는 법이라고. 난관을 극복해야만이 삶의 의미를 알 수 있다고 말이다. 난관을 극복하지 않고도 구할 수 있는 깨달음은 많지만 말이다. 난관 없는 깨달음이란 그 자체가 새로운 난관의 불씨일 수 있다고 말이다. 31개 성상을 살아온 나의 정신적 지주였던 자운 스님이었다. 벚꽃잎이 꽃비가 되어 바람에 나부끼던 그 날의 말씀이 유언이 되리라고는 미처 몰랐었다. 자운 스님의 말은 잊혀져 가는 세월 속에서도 내 가슴에 잠언으로 살아 있다.

미정을 사귀어 온 지 3년째다. 서른 하나의 나이에 연인을 사별하고는 짙은 외로움에 몸을 떤다. 이제 나의 가슴으로부터 그리움이란 세계는 자취를 감추었다. 대자연에 생명체로 태어난 것이 다시 없는 축복이라면, 원초적인 설움의 근원은 무엇인가 ? 젊은 나이에 생명을 날려 보낸 미정의 전생은 무엇이었을까 ? 그리고, 미정의 산화되는 생명을 지켜 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던 나의 존재의 의미는 뭐였을까 ? 의학에 미쳐 생명을 건져 보겠노라고 뛰어든 나의 삶의 지표는 안정된 걸까 ? 연이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마구 혼란스러워졌다.
문득 미선이 채석강 포구를 걸어 내려오는, 다음 날 새벽의 장면이 머리에 떠올랐다. 달빛처럼 훤한 미모의 여인은 언제 보아도 청순한 모습이다. 그녀가 해변을 거닐 새벽 무렵이면 서늘한 바닷바람이 눈을 휩뜨고 일어날 것이다. 새벽 바다를 향해 달려온 바람은 핏발 선 눈으로 여인의 옷자락을 들출지도 모른다. 살색이 고운 그녀의 얼굴은 언제 보아도 갸름하면서도 매끄러웠다.

안교수는 눈을 지긋이 감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목욕이 끝난 다음 날 새벽이었어. 나는 꿈결에 형형색색으로 만발한 목화 꽃잎에 자꾸만 얼굴을 부비시는 어머니를 보았어. 꿈 속에서 어머니를 찾던 나는 보리 고개의 풀기 없는 유년기의 소년이었어. 어머니는 어린 나를 얼싸안으시고는 가녀린 목화 꽃잎에 하염없이 나의 뺨을 자꾸만 부비셨어. 목화 꽃잎에 닿는 횟수가 높아질 무렵에, 나의 눈엔 뭔가 뜨거운 액체가 떨어지기 시작했어. 어머니의 맑은 눈물 방울이 볼을 적시며 흘러내린 거였지. 어린 가슴에도 뭔가 심상찮음을 느꼈든지 나는 즉시 어머니께 물었어. '엄마, 혹시 내가 엄마한테 잘못한 게 있어, 응 ?' 나의 물음에는 고개를 흔드시며 어머니는 한없이 맑은 눈빛으로 말씀하셨어. '아가, 배고프지 ? 저기 밭 머리에 가서 조금만 앉아 놀거라. 한 고랑만 다듬고 금방 일어나 갈게, 응 ?' 꿈 속의 어머니는 나의 유년기의 어머니셨고, 나는 자꾸만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었었다네. 마치 영원히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말이야. 나는 꿈을 꾸며, 자꾸만 설움이 북받쳐 훌쩍거렸다네.

  두 달 전 오후 3시 무렵이었다. 스물 여섯의 간호사인 현주가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내가 의뢰했던 자료를 내놓는다. 제시된 자료들은 한결같이 암 진료의 베테랑급인 내과 교수들이 소장했던 것들이다.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마자 현주는 반가운 듯이 입을 열었다.
  "양선생님, 제게 부탁하신 자료를 구하느라고 …… 어머, 정말 제 수고를 충 분히 아신다구요 ? 말로만 그러시면 뭘 해요 ? 뭐라구요 ? 내일쯤 저녁을 사신다구요 ? 역시 양선생님이세요. "
  현주가 등을 돌려 외래 창구로 나간 사이에, 나는 자료들을 펼쳐 보았다. 김경철(남, 49세)을 비롯한 두 사람에 대한 병력 일지와 촬영 사진의 복사본이었다. 이들은 모두 미정이 앓고 있던 간암의 병력을 지닌 환자들이었다. 한 때, 이들 환자들은 하나같이 중환자들로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예상을 뒤엎은 일이 벌어진 거였다. 이들 두 명의 환자들이 건강을 회복하고는 완전한 정상인이 된 거였다. 나는 이들의 병력 일지를 면밀히 살펴 나갔다. 아울러 첨부된 엑스(X)선 사진 및 단층 사진도 함께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초기의 사진에는 분명히 종양 세포가 창궐해 있었다. 반면에, 말기의 사진에는 종양의 과립이 어느 부위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배운 의학 지식을 총동원하여 거듭거듭 병력 일지와 사진들을 점검해 보았다. 이것은 틀림없는 이변이었다. 가끔씩 이러한 이변이 의학계에 보고되곤 했다. 과연 무엇이 암세포를 근원적으로 파괴시켜 버렸을까 ?

  수업을 하다가 말고, 미정이 병원에 실려 온 것은 지난 3월 중순의 일이었다. 미정은 전주고에 재직중이던 영어 교사였다. 그녀는 수업을 하다가 말고, 느닷없이 기력이 쇠진하여 병원으로 실려 왔다. 그 전에도 그녀는 더러 나에게 말하곤 했다. 근래에 들어,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피곤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는 거였다. 그래도, 입원할 당시에만 해도 그녀는 금방 회복되어 나가려니 믿었다. 그녀가 간암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나는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미정이 눈을 감을 때까지 그녀에게는 비밀로 하리라 마음먹고 치료를 시도했다. 방사선 치료와 약물 치료를 병용하는 중에 그녀는 자신의 병을 눈치채고 말았다. 절망하는 그녀를 위로할 방법이 내겐 없었다. 그녀 스스로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까지의 시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요 괴로움이었다.

  안교수는 걸음을 멈춘 채,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자네의 연인인 미정의 경우에만 하더라도 말일세. 내 사랑하는 제자의 연인이라는 점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네. 하지만, 바람에 나부끼는 깃털처럼, 시린 한이 다시금 나의 가슴을 저며 오는 느낌일세.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눈시울에는 이슬 방울이 그렁그렁 맺혀, 푸른 빛으로 반짝였다. 나는 너무나 섬세한 그의 감각에 몸을 떨며, 미선의 임종이 임박했음을 예견했다. 등줄기를 연거푸 스쳐 가는 긴장감에 나는 자꾸만 몸을 떨었다. 나는 냉동 인간이 된 듯, 퍼렇게 물든 안색으로 안교수의 손을 잡았다. 안교수의 실핏줄을 타고, 목화 꽃잎으로 번져 흐르던 서슬 퍼런 슬픔이 빛살처럼 날아 올랐다. 나는 연신 허탈감에 몸을 떨며, 안교수의 손등에 나의 손을 부벼대기 시작했다. 마치 음습한 거대한 냉동 창고에 갇혀, 점차 하얗게 냉동인이 되는 느낌이었다.

"아 ! 아파요. 살살 좀 해 주세요."
나는 청진기를 내려 놓고는 천천히 손끝을 세워 환자의 위장 부위를 촉진해 나갔다. 여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시울에서는 눈물이 맺혀 반짝거리고 있었다. 차마 더 이상은 애걸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눈빛이었다. 위 궤양 환자의 진료를 마치니, 점심 시간이었다. 가운을 벗어 놓고 손을 씻는데, 현주가 식사하러 가자고 했다.

  질식할 듯한 침묵이 한동안 흐른 뒤였다. 안교수는 침중하지만 애정이 실린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양군 ! 미안하네. 자네의 각별한 요청에 따라 최선을 다해 봤지만, 현대 의 학으로도 어쩔 수가 없었어. 대학원생에다가 전문의인 자네인지라, 누구보다도 더 잘 알 걸세. 자네 친구 미정이는 아마 내일 새벽을 넘기기는 어려울 걸세. 마음을 굳게 먹고 뒷수습을 잘 해 주게나. 그럼, 이만."
  안교수가 복도로 불러낼 때부터 예감한 바였다. 그렇지만 말이다. 일루의 기대감은 남아 있지 않았던가 ? 어쩜 이렇게 인생이 덧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 안교수의 말을 듣고서야, 어떻게 천연덕스럽게 병실로 들어선단 말인가 ? 나는 4층 난간에 기대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너무나 맑아, 올려다볼수록 눈이 시큰거려 오며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식사를 하면서 바라보니, 원래 미인형인 현주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이뻐 보인다. 미정이 암 병동에 입원한 후부터 사망할 때까지 지극 정성으로 미정을 돌보던 그녀였다. 그러면서 미선과도 그럴 수 없이 잘 지내던 현주였다. 설렁탕 국 그릇에서는 연방 하얀 김이 피어 올랐다. 뽀얀 증기를 바라보자, 변산 앞 바다의 첫 뱃놀이 장면이 떠올랐다.

  나에겐 미정을 만나기 전에는 연인이 없었다. 공중보건의(公衆保健醫)의 생활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몹시 바빴던 탓이라면 너무나 궁색한 변명일까 ? 내가 미정을 처음 사귄 것은 재작년 겨울 방학 때였다. 당시에 나는 대학원 과정에 막 진학했던 스물 아홉의 의학도였다. 반면에, 그녀는 고등학교에 재직중이던 스물 일곱의 영어 교사였다.
  미정이 내게 최초의 뱃놀이를 제안한 것은 작년 6월 하순 무렵이었다. 또한 첫 만남이 있고서부터 6개월째에 접어들던 시점이었다. 낮의 길이가 최대로 길어지는 하지점을 향해 치닫는 시점이기도 했다. 마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듯 미정은 유난히 흐르는 시간을 아까워했다. 미정의 자매가 처음으로 거룻배에 오른 것은 각각 초등학교의 3학년과 6학년 시점이었다. 어촌 출신이라, 아버지를 졸라 저녁놀이 곱게 물든 서해의 낙조를 바라보며 바다를 달렸다. 수백 만의 물고기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듯이 금빛 은빛으로 파득거리던 서해 바다였다. 물결은 쉬임 없이 파득거리는데, 수평선 끝자락에선 낙조가 핏빛으로 불타며 끓어 올랐다. 그러다가 세 부녀가 변산 반도를 감돌아 나갈 때였다. 햇살에 반사되어 남색으로 물든 변산 반도의 절경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말로만 듣던 선경(仙境)이 정녕 여기로구나하고 여겨지면서, 손뼉을 치며 그저 환호성을 질러댔었다. 그 날 이후로 세 부녀는 곧잘 변산의 낙조에 취하곤 했다. 하지만, 즐거움도 길진 못했다. 이듬해의 여름철이라고 했었다. 연평도 해역으로 공동 조업을 나갔던 어선이 침몰되면서 자매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거였다. 그 뒤 한 달만에 어머니마저도 잠수 도중의 조난 사고로 세상을 떠나 버렸다. 창졸간에 고아가 된 두 자매는 같은 어촌의 이모의 품에서 자라며 유년을 보냈었다. 그리하여, 애절한 설움이 끓어 오를 때면, 핏빛으로 불타는 변산을 찾고는 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유년기에 놓아 보낸 부모님의 품이 점차로 그리워지는 그들 자매였다. 가슴 속이 공허하고 쓸쓸할 때면, 언제나 자매는 즐겨 바다에 배를 띄웠다. 그러면서 가슴 깊숙히 묻어 두었던 처절한 슬픔을 변산의 바람결에다가 날려 보내곤 했었다. 그러다가 미정이 나를 만난 거였다. 추측컨대, 미정은 새로운 인연을 과거의 슬픔에 잇대어 보려고 했었던 모양이었다. 미정은 나에게 신중하게 뱃놀이를 제안했었고, 나는 흔쾌히 그녀의 요청을 들어 주었다. 뱃놀이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만나기 전에 미정은 전화로 나에게 말했다. 자신의 언니인 미선과 함께 오겠다는 거였다. 미선은 어릴 적부터 거룻배를 저어가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고 했다. 그래서, 뱃놀이엔 아무래도 전문가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언니를 동행하겠다는 의도였다.
  그 날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채석강 남쪽의 방파제에서 미정의 자매와 나는 변산바다의 거룻배에 몸을 실었다. 미정의 미모에 첫 눈에 반한 나였지만, 미선을 보는 순간엔 숨이 멎을 듯했다. 지금껏 나의 눈에 비친 여인의 얼굴들 중에서, 미정의 자매만큼 빼어난 미인은 없었다. 미정의 자매를 볼 때마다, 본 적 없는 월궁 항아를 떠올리게 된다. 뱃놀이에는 한복이 제격이라는 자매의 말에 따라, 셋은 모두 고운 한복 차림으로 승선했다. 배는 곧장 채석강을 지나 격포 해수욕장 근해로 일직선으로 달려나갔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미선의 노 젓는 자세는 가히 일품이었다. 미선의 양 팔꿈치가 옆구리에 착 달라붙더니, 양 팔이 바람개비처럼 돌아갔다. 미선이 지칠 때마다, 내가 번갈아 노를 저었다. 나의 노 젓는 자세를 바라보더니, 미선은 놀란 듯한 표정이다. 나는 개의치 않고 죽죽 앞으로 노를 저어갔다. 이제 남포 해수욕장 근해에까지 저어 갔을 때였다. 미선은 뱃머리로부터 닻을 풀어 내렸다. 잠시 후에 배는 안정한 상태로 바다 위에 떠 있게 되었다. 이 때부터 자매는 보자기를 풀어 과일이며 안주와 함께 조촐한 술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구내 식구들이 점차 식당의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현주는 이마에 송글송글하게 맺힌 땀 방울을 손수건으로 지우면서 숟가락을 막 놓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도 점심 시간이 끝나려면 30여분이나 남았다. 갑자기 뿌연 안개에 갇힌 듯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현주와 함께 식당을 떠나면서 나는 자연스레 상념에 젖어 들었다. 왜 삶에는 걸핏하면 시련기와 난관이 찾아와 사람을 괴롭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일찌기 내게는 연인과의 사별만큼 슬펐던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내일이면 미정을 변산 바다의 품으로 돌려보내야 하다니 ?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또 다시 콧날이 시큰거렸다.

  마침내 자매는 아기자기한 술상을 마련했다. 개다리소반 둘레로 셋이 앉아 국화주를 기울여 가며 세상 사는 얘기를 풀어 나갔다.
  "동수씨, 동생과의 오붓한 분위기에 끼어 들어 뭣하지만, 동생이 자랑하는   연인이라 만나 뵙고 싶었어요."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너무나 황송한데요. 솔직히 저는 미래의 처형을 만나는 것이 심사를 받는 기분이라 두려웠거든요. 정작 만나고 보니,   너무나 빼어난 미인이시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광으로 느껴집니다. "
  "동수씨, 나중에 술에 취하여, 언니와 나를 구별 못 하면 안 돼요. 술잔을   천천히 기울이면서, 말씀을 나누시죠."
  "흥, 맹랑한 계집애 같으니라구. 벌써부터 챙기기는 ? 동수씨 ! 긴장하지 마 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드세요.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를 때쯤이면, 춘향가를 거문고로 탄주하여 분위기를 맞춰 드릴게요."
  동쪽 하늘에 떠오른 태양은 진홍색의 빛으로 곱디고운 햇살을 나부끼고 있었다. 졸리운 듯한 평온함에 잠긴 바다였지만, 바다엔 언제나 힘이 실려 있었다. 파드득거리는 갈매기의 나래짓 소리와 수평선을 넘나드는 발동선의 엔진음이 수시로 빛살처럼 날아 오르곤 했다. 미정은 옥잔을 들어 내게 건네주며, 향긋한 국화주를 채웠다. 미정의 맑은 눈빛과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쳐 잠시 눈이 부셨다. 볼 때마다 청량한 눈빛으로 와 닿는 맑은 눈빛이었다.

  현주와 함께 걸어 나가면서도, 상념의 구름장에 떠밀려 생각은 더욱 깊어만 갔다. 텔레비전으로 본 동물의 세계에서였다. 상처 입은 암사자 한 마리를 보호하기 위해, 수사자 한 마리가 혈전을 벌였다. 에워싼 다섯 마리의 하이에나를 죽이고 나자, 수사자도 과다 출혈로 결국은 죽어 나뒹굴었다. 광막한 초원의 냉혹한 모래 바람 속에서였다. 살아 남은 암사자만이 연방 다리를 절면서, 수사자의 콧잔등을 하염없이 핥고 있었다. 애잔하게 부서지는 석양빛을 받으며, 그렇게 하염없이 암사자는 수사자를 핥고 있었다.
  명색이 의사라는 내가 수사자만도 못하여, 속수무책으로 연인을 떠나 보내야만 했다니 ? 연인 하나를 못 구하는 나의 의학 지식이며 의술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생각할수록 자괴지심(自愧之心)으로 가슴 속이 끓어 올랐다. 설움이 핏빛으로 끓어 오르면서, 나는 가슴 속으로 절규했다. '수사자, 수사자 ! '
  어젯밤중에 들려온 미선의 흐느낌은 너무나 애절하여 금세 콧잔등이 시큰거릴 정도였다. 피붙이라곤 자매밖에 없던 그녀였다.

나는 미정의 눈빛이 불타 오를 때마다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다름 아닌 곁에 있는 미선이 때문이었다. 혹시 미정과의 친밀한 동작이 미선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고려대 국문과 출신인 미선은 나보다 한 살 많은, 잡지사에 근무하는 여류 작가였다. 그녀는 문학가인 만큼 정서가 섬세하여, 연인도 많을 듯했지만 실상은 연인 하나 없었다. 그녀는 다만 동생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기를 좋아할 따름이었다. 배에 오르면서부터 미선은 거문고를, 미정은 대금을 배에 실었다. 판소리의 넷째 마당인 적벽가의 연주에 자매는 하나같이 뛰어난 솜씨를 갖고 있었다. 둘 다 취미로 국립 국악원을 드나들면서, 국악인으로부터 사사를 받은 경력이 있었다.
술잔이 서너 차례 오가며, 셋이서 풀어 놓은 화제는 무궁무진했다. 어느덧 태양은 중천에 떠올랐다. 바다라는 것을 환기시키려 함인지 오가는 발동선의 뱃고동이 간헐적으로 울려 퍼지곤 했다. 임수도를 향해 들어가는 여객선에서는 꿈꾸는 백마강의 노랫가락이 구성지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룻배로부터 30여 미터쯤 떨어진 서쪽 바다가 갑자기 번뜻번뜻해지더니 물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자마자 사방에서 갈매기 떼가 몰려 와 그대로 곤두박질쳐 내리기 시작했다. 멸치 떼가 이동해 가고 있었다. 모두들 어디에서 날아온 걸까 ? 수천 수만 마리의 갈매기 떼가 일시에 끼루룩거리며 곤두박질치는 장면은 일대 장관이었다. 마치 널브러진 고궁의 뜨락에 강풍이 불어, 수천 송이의 목련꽃이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선상에 있던 셋은 일제히 환상적인 장면을 지켜 보며 넋을 잃었다.

  현주는 식당을 빠져 나오면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양선생님, 지리산에서 채취한 참나리난초를 보러 가지 않겠어요 ?"
  나는 곧장 고개를 끄떡거리며, 현주와 함께 구내 건물 중의 온실로 향했다. 거기에는 지리산 법계사 계곡에서 1개월 전에 채취해 온 참나리난초가 자라고 있었다. 식물 도감에 따르면, 참나리난초는 한국의 특산 식물이었다. 이 식물에는 포기마다 두 장씩의 두꺼운 잎이 마주 달려 있었다. 또한 뿌리 부분에는 마늘쪽만큼의 비늘 줄기가 가지런한 치아처럼 발육되어 있었다. 20 센티미터에 달하는 키에 하늘거리는 작은 배꽃 같은 꽃망울을 매단 식물이기도 했다. 남한에서의 분포 지역은 지리산의 천왕천과 제석천 및 법계사 계곡의 일부였다.
  10개의 화분에 심겨진 참나리난초들은 잘디잔 꽃송이마다 그윽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나와 현주는 허리를 굽혀 식물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관리가 잘 된 탓에 화분마다 생기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두 달 전에 현주가 건네준 자료를 2주일째 분석하던 날이었다. 정오 무렵에 마침내 나는 이들에 대한 특이한 사실을 발견해 내었다. 이들은 병원 밖에서 약물 치료를 했었고, 사용된 약초들 중에는 참나리난초도 끼어 있었다. 다른 약초들의 성분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참나리난초의 경우에는 별다른 연구가 없었다. 우선은 참나리난초의 단독 약효였는지 아니면 다른 약초들과의 복합 효과였는지도 미지수였다. 하지만, 참나리난초의 성분 연구는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일단 참나리난초를 채집한 뒤에 재배하여 약리 작용을 연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굳혔다. 이에 따라, 한 달 전인 7월 초에는 지리산 등반을 계획했다. 현주까지 따라 나서겠다고 자청하여, 법계사 계곡을 뒤져 10여 포기를 겨우 채집했었다. 밤 늦은 작업으로, 현주와 나는 법계사의 객방 신세를 져야 했다. 곤혹스럽게도 빈 방은 하나뿐이었다. 쑥스러움과 여독을 몰아 내느라고, 몇 잔의 술잔을 나누었다. 그리고는 속살이 다 비치는 잠옷 차림의 현주와는 일부러 거리를 두고서 잠이 들었다. 밤중에 현주가 비음(鼻音)을 흘리며, 두어 차례 나의 가슴을 더듬어 왔다. 그 때마다 잠결인 양 돌아누우며,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되돌려 보냈다. 이 날 이후로 현주는 보다 접근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참나리난초의 채취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 새벽 무렵이었다. 병실에 들어서니, 미정은 기력이 쇠진하여 잠들어 있었다. 나는 잠시 미선과 함께 병실 앞의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은 가루를 뿌린 듯 별들이 반짝거리며, 앞 다투어 깨어나고 있었다.
  "동수씨, 미정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셔서, 너무나 고마워요. 제발 미정 이가 살아날 수 있었으면 해요. 혈연이라곤 자매 둘뿐이라, 제 마음이 너무    나 암담하고 외로워요."
  "계속 환자 시중을 하느라고 너무나 힘드시죠 ? 조금씩 휴식을 취하면서 간 호하셔야죠. 그러다가 미선씨까지 쓰러질까 봐 걱정이예요. "
  간호용 벤치로 되돌아와, 잠든 미정을 지켜 보았다. 이내 코 고는 소리가 들리면서 벤치에 기대어 앉은 미선이 내게로 기울어져 왔다. 나는 보호자가 된 듯한 순수한 심정으로, 팔을 둘러 그녀를 쓰러지지 않게 받쳤다. 그러자, 그녀는 나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보다 편안한 자세로 체중을 실어 왔다. 품에 안긴 여인의 향긋한 체취가 나의 후각을 자극해 오며, 평온함을 안겨 주었다.

갈매기들의 화려한 공중 곡예가 시작된 지 대략 5분쯤 경과되었을 때였다. 두 여인은 거문고와 대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대금과 거문고의 환상적인 배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금과 거문고의 음률의 배합을 통해, 삶의 애환이 뒤엉키며 하나로 승화되는 느낌이었다. 연주가 끝날 때까지, 그들 자매의 눈빛은 몽환의 상태로 변산의 바람결을 더듬고 있었다. 나는 뱃놀이가 단순한 유람이 아님을 확연히 느꼈다. 자매의 과거의 애환을 승화하는 자리였으며, 나를 새로운 연분으로 맞아들이는 경건한 의식이었던 거였다. 채석강을 지나칠 무렵이었다. 정말로 만권의 서책을 쌓아 올린 듯한 형상이었다. 달리 보면, 차가운 퇴적암층일 뿐인 바윗돌이었지만 말이다. 내 만약에 노를 젓다가 이태백처럼 물 속으로 뛰어든다면 말이다. 후세에 나를 기억해 줄 이 그 누구일까 ?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흔들려졌다. 취중에 서너 번쯤은 변산의 앞 바다를 오갔을 터였다. 두 미인과 더불어 변산의 절경을 감상할 동안만큼은 정녕 내가 신선이 된 느낌이었다. 두고두고 내 가슴 속에 잊혀지지 않을 변산의 뱃놀이었다.

창 밖에 걸린 해를 보니, 상당히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오후 다섯 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는 환자의 수가 좀 줄어든 셈이다. 나는 고개를 앞뒤로 젖히며, 피로에서 깨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현주의 눈빛에도 상당히 피로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어젯밤에 미선은 내게 말했다. 미정의 유골함을 가져 올 때에는 한복을 차려 입고 오겠노라고 말이다. 날더러도 한복을 입고 오라고 했다. 나는 변산 해변의 뱃놀이 장면을 떠올리며 망설이지 않고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미정과 더욱 오붓한 정이 깊어진 것은 대둔산을 오르면서부터였다. 뱃놀이를 한 후 한 달쯤 되던 토요일이었다. 그녀는 대둔사의 천불상 앞에 나아가 축원을 하고 싶다고 했다. 무슨 축원이냐고 물었더니, 그녀와 내가 영원히 오래토록 사랑할 수 있도록 빌겠다는 거였다. 대둔사의 법당에 들어서서 그녀와 나는 삼배를 경건히 올리며, 영원한 사랑을 기원했다. 삼배를 끝내고 불상을 올려다보는 미정의 눈빛이 그렇게 간절할 수가 없었다. 마치 금세라도 그녀의 눈동자가 맑은 눈물로 변하여 떨어져 내릴 듯한 간절함이었다. 이렇게 여인의 간절한 사랑을 받는구나 싶자, 콧등이 시큰거려 오며, 진한 감동에 휩싸였다. 법당을 나와서는 절 뒤쪽을 돌아 대둔산 등정에 나섰다. 대둔산 중턱의 허여멀쑥한 너럭바위를 지나, 하나의 작은 준령에 올라섰다. 준령의 정점에서 내려다보이는 수목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녹색과 연두색이 색도를 달리해 가며 숲을 이룬 색채의 정교함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나도 그랬지만, 그녀도 아름다움에 취해, 연방 떠오르는 감흥을 얘기하기에 바빴다. 내게는 아름다움에 취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그녀의 모습이 더 없이 아름다웠다. 자연의 감흥과 더불어 법당에서의 감동이 되살아나, 나는 그녀를 포옹하며 말했다.
  "미정씨, 언제나 변함 없는 청순함으로 당신을 사랑할게요."
  그러자 그녀도 가볍게 몸을 떨며, 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뺨과 나의 뺨이 맞닿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불에 덴 것처럼 그녀의 뺨에 열기가 달아오르면서, 나의 뺨에도 홍조가 일었다. 몇 차례의 서늘한 산바람이 지나간 다음에야, 그녀와 나는 서로를 풀어 주며 물러섰다. 이 때부터 그녀와 나는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벽시계를 보니, 오후 6시를 막 지난 시점이었다. 오늘의 마지막 환자의 진료를 끝낸 뒤에, 나는 서류와 자료 뭉치를 정리했다. 현주가 인사를 하고 나간 뒤에 나는 진료실 문을 걸어 잠그고는 생각에 잠겼다. 업무는 끝났지만, 갈 곳이 막막했다. 미정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미정의 병실이라는 목적지가 있었다. 그냥 나의 집으로 바로 들어가기엔 가슴이 너무도 허전하였다. 허전한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냥 진료실에 머물고 싶었다. 미정이 숨을 거둔 후부터 입에 대기 시작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구수한 냄새를 피워 올리며 담배가 타들어갔다. 나는 담배를 길게 쭉 빨아 들였다간 코로 연기를 술술 내뿜었다. 그러면서, 담배의 맛을 음미해 보려고 애썼다. 담배의 연기가 피어오르자, 사흘 전 미정의 임종 장면이 떠올랐다.

  안교수의 말을 듣고 난 뒤엔 근무조를 바꾸어 미정의 임종을 지켜 보기로 했다. 벽시계가 밤 8시 부위를 가리키고 있는 시점이었다. 병실문을 열고 들어서니, 미정의 곁에서 눈물을 글썽이던 미선이 눈물을 지우며 일어섰다. 퀭한 눈에 입술을 혀로 축이며, 미정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가서, 그녀의 왼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손에서는 열이 펄펄 끓어 올랐다. 기력이 딸리는지 말을 하는 도중에도 그녀의 실눈은 자꾸 감기곤 했다. 창 밖은 불어오는 바람결로 인하여, 목련나무의 잎새들이 심하게 떨고 있었다. 목련잎에 부서진 달빛이 하염없이 창을 넘어 나부끼고 있었다. 달빛에 떠는 공기처럼 미정의 손을 잡은 나의 마음도 큰 진폭으로 떨고 있었다. 미정은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크게 뜨면서, 미선과 나에게 말했다.
  "불가항력이라는 말의 의미를 근래에 들어서야 깨달았어요. 저의 생명이 이 제 얼마 안 남은 예감이 들어요. 두 분께 부탁 드릴게요. 제가 죽거들랑 화    장을 해서, 변산 바다에 저의 유골을 뿌려 주세요. 변산에 저의 영혼을 띄워 뱃놀이하던 그 날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요. 부디 저의 부탁을 잊지 마세요."
  말을 마치는 듯 마는 듯 미정은 의식을 잃었다. 점차 입은 벌어졌고, 내쉬는 숨소리가 커졌다. 입 안에서는 침이 하얗게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땀이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미정의 이마 위로부터 타내려 오던 땀 방울은 그녀의 광대뼈 언저리에 매달려 떨고 있었다. 이슬처럼 맑은 땀 방울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하얗게 끓어 오르는 침은 속세와의 인연을 청산하려는 몸부림으로 느껴졌다. 그 길로 미정의 의식은 깨어나지 못했다. 하얗게 새벽 달이 사위어 가던 새벽 네 시 무렵이었다.

  병원에서 승용차로 30분 거리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누워 잠이 들었다. 하루의 일정이 매우 피로했기도 했거니와 다음 날 새벽에 미선을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새벽에 눈을 뜬 뒤에 한복을 찾아 입고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지만, 안개가 해상을 자욱하게 뒤덮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욱하기만 하던 안갯발이 신속히 걷히기 시작했다.
  격포 해수욕장의 해변을 지나, 채석강쪽으로 걸어오는 미선의 소복은 눈부셨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딛는 그녀의 가슴에는 흰 보자기에 싼 유골함이 들려 있었다. 나는 달려가서 그녀의 손에 들린 유골함을 받아들었다. 그녀와 함께 배를 띄우고 나니, 새벽 5시를 갓 넘어서고 있었다. 바다는 잔잔했다. 불어오는 바람결도 미풍으로 흐르고 있었다. 나는 쌍노를 저어, 채석강 해안을 지나, 상록 해수욕장 해역으로 배를 몰았다. 미선은 유골함을 안은 채, 넋을 잃고 뱃머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미선에게 말했다.
  "미선씨, 이제 동생을 변산 바다의 품으로 돌려 보내야죠 ? 동생의 명복을 빌며, 바닷물에 재를 날려 보내시죠."
  석상처럼 굳어 있던 미선이었다. 내 말을 듣자마자 흑흑 흐느끼면서 재를 뿌리기 시작했다.
  이제 배는 남포 해수욕장 해역에까지 이르렀다. 그 곳은 미정과 첫 뱃놀이를 했던 자리였다. 그랬기에, 사무치게 그리움이 끓어 올랐다. 가능한 한 그 해역을 떠돌며, 천천히 유분을 바람결에 휘날렸다. 파도는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는 잿가루를 흔적 없이 삼켜 가고 있었다. 20여분쯤의 시간이 흘렀을까 ? 마침내 유골함은 텅 빈 상자로 남겨졌다.
  이 때 미선은 배에 실려 있던 거문고를 그녀의 무릎에 올렸다. 그리고는 사무치는 정한을 담아, 적벽가를 탄주하기 시작했다. 뚱기둥 뚱 뚱 뚜웅 ! 파도 소리를 가르며 적벽가는 처연하면서도 장중한 음색으로 퍼져 나갔다. 언제나처럼 적벽대전의 원혼이 사무친 곡조에서, 선율은 통곡이라도 하는 듯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이 때 내 귀를 스쳐 가는 목소리가 있었다.
  "얘야, 난관을 극복해야만이 도(道)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느니라. 어떠한 슬픈 상황에서도 굳세게 일어설 수 있겠는고 ?"
  부지불식간에 선운사의 자운 노스님의 말이 번갯불처럼 나의 의식계에 떠올랐다. 오늘 따라, 세상을 떠난 자운 스님이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이제 지평선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햇살이 퍼져 올랐다. 아침 바다를 가르며, 갈매기 떼가 수면 위로 날아 올랐다. 미선의 입에서 탄식처럼 짧은 말이 흘러나왔다.
  "아, 갈매기 떼다."
  듣고 보니 그랬다. 언제나 기억 속에 새로운 첫 뱃놀이에서였다. 멸치 떼를 향해 장관을 이루며 곤두박질치던 갈매기 떼가 아니었던가 ? 갑자기 수많은 갈매기 떼가 거룻배를 뒤덮다시피하며 지나갔다. 갈매기들의 나래짓은, 수천 송이의 목련 꽃잎이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장관으로 비쳤다. 돌연한 갈매기 떼들의 출현에, 미선과 나는 숨을 죽인 채, 하늘을 우러렀다. 이 때였다. 미정의 미소짓는 얼굴이 잠시 푸른 하늘에 환영이 되어 펼쳐졌다가는 이내 사라졌다. 혹시 미정의 영혼이 갈매기 떼의 인도를 받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근해의 '부우웅'하고 들려온 뱃고동 소리에 놀라, 나는 환영에서 깨어나 심호흡을 했다. 미선과 나는 갈매기 떼가 사라져 갈 때까지 숙연한 자세로 하늘을 우러렀다. 햇살이 더욱 뚜렷해지면서, 상대적으로 달빛은 점차 사위어 갔다.
  미선의 눈빛을 좇아, 나는 변산 해변을 바라보며 배를 몰아 갔다. 아침놀이 곱게 깔리며 바다의 수면이 선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배가 변산 해안을 거쳐, 채석강에 이르도록 아무도 말이 없었다. 오로지 해안으로 밀려 드는 파도와 바람에 실린 미정의 목소리만이 환청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붉으스럼하게 빛나는 아침놀에서도, 또한 일출 직전의 햇살에서도 그랬다. 촉촉히 젖은 미정의 목소리가 바다를 건너, 맑은 바람이 되어 부서지고 있었다.

  뱃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배가 선착장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이대로 뭍에 오르면, 다시는 변산을 못 볼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변산 해역으로 배를 되돌리고도 싶었다. 나는 변산의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떨리는 가슴으로 멀리 수평선을 응시했다. 이제 세상 어디에서도 미정을 볼 수는 없는 거였다. 그녀의 청초한 눈빛, 맑은 미소가 말할 수 없이 그리워졌다. 지난 3년간의 사랑이 변산의 바람 속으로 휩쓸려 가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과거의 시간에서 멈춘 채 화석으로 굳어 버리고 싶었다. 진한 상실감이 점차 전신을 엄습해 오며,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울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어느 새 뜨거운 눈물이 상채기로부터 스며 나오는 핏물처럼 방울져 흘러 내렸다. 문득 변산의 바람 속에서 나를 지켜 보는 미정의 영혼을 떠올렸다. 떠나는 마당에 눈물을 보여 그녀의 마음을 슬프게 할세라,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속삭였다.
  "미정아, 이제야 너를 놓아 보낸다. 네가 그토록 좋아하던 변산의 바람 속으로……. 한 많고 설움 많은 세상을 떠나 ……. 그래, 너와의 추억이 변산의 바람이 될 때까지만 너를 기억할게. 절대 외로워하지 마, 응 ? 그럼, 안녕 ! "
  여지껏 신음을 삼키며 요동질치던 바다였다. 그 바다 위로, 해풍이 점차 눈을 눈을 휩뜨고 나부대기 시작했다. 이제 바다는 온통 선홍색으로 물든 채, 수만 갈래의 빛살로 부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