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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도 해변의 밀어
손정모(孫廷模)
새벽 바다 어디에도 불빛은 없었다. 썰물 때라, 소금기조차 말라붙은 자갈돌만이 끝없이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바다로 뚫린 자갈밭 길을 쓰러질 듯이 위태롭게 창수가 걸어가고 있었다.
감미롭던 잠이 유리 파편처럼 박살나 버린, 지난 한밤중이었다. 여인의 전화를 받는 순간에, 나는 창수가 또 해변의 자갈밭을 헤매는 광경을 떠올렸다. 널브러진 자갈밭 위를 곡예를 넘듯 창수가 허청거리고 있음을 여인은 상상조차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잠을 설친 탓인지 자꾸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창수가 또 여인으로부터 떠났다고 실토한 여인의 목소리에선 진한 설움이 묻어 나왔다. 나의 두통에 여인의 설움이 휘감겨 들며, 더욱 머리가 빠개지는 느낌이었다. 혹시 창수가 찾아들면, 꼭 연락을 바란다며 읍소(泣訴)하던 여인이었다. 나는 같은 여자로서, 여인의 목소리가 영 가슴에 걸렸다. 불편한 심기를 추스르느라고 아예 귀를 틀어 막아도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나는 전화기를 놓자마자, 잠시 잘려 나갔던 새벽 잠 속으로 이내 빨려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장사도 분교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하염없이 바라다보고 있었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달빛으로 빛나는 길이었다. 문득 썰물에 하얗게 드러난 해변의 자갈밭이 떠올랐다. 동글동글한 자갈돌에 갇혀 끝내 돌파구를 찾지 못해 버둥거리는 창수의 모습이 환영으로 떠올랐다. 동백산장의 안내실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시계(視界)의 범위는 넓었다. 섬의 북서쪽 암벽 정상에 자리잡은 산장의 지형 탓이었다. 조망의 범위로는 분교로 이어지는 능선길과 남쪽 선착장으로 이어지는 경사길이 보이는 바다까지였었다. 솜털 같은 풀잎을 빗질하는 바람 소리에, 잠시 중단되었던 빗질하는 여인의 환영이 떠올랐다. 왠지 창수의 발목을 옭아맨 밧줄의 여주인이 나일까봐 두려워진다는 여인의 넋두리였다. 내뱉는 숨길들 사이로 내비치는, 여인의 흐느끼는 음조에는 처절한 절망감이 뒤엉킨 듯이 느껴졌다.
초인종 소리가 울리는 데에도 나는 시선을 바다로 던진 채,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습도가 높은 새벽 무렵에는 더러 초인종이 오작동되어 소리를 내지르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섬을 찾은 방문객들은 시도 때도 없이 초인종을 눌러대곤 했었다. 초인종 소리에 귀가 따가울 때면, 아예 전기 코오드를 뽑아 버릴까도 싶었다.
종소리. 종소리를 뒤흔드는 푸른 바람 줄기. 나는 머리를 부딪혀
종소리를 내어 나그네를 구했다는 이야기 속의 까치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까치의
몸피에 대한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뱀을 죽여 새끼를 구해 준 은공에 보답하겠다고,
피를 뿌리는 까치. 길조의 상징인 까치의 몸 속에 정말 그런 기개가 서려 있었을까
? 비상하는 까치의 영상은 여행객들의 발자국 소리와 초인종 소리에 놀라 흩어지고
말았다.
창수가 산장을 찾아들던 석 달 전의 그 날은 언제나 기억 속에 새로웠다.
그 날도 나는 안내실 바닥에 꽃꽂이 교본을 펼쳐 놓고는 졸고 있었을 터였다. 아니면,
여행객들의 발자국 소리로 낚시꾼일까 난(蘭) 수집가일까를 습관적으로 판별해 보려고
했을 터였다. 만약 그것조차도 지겨웠다면, 섬 모퉁이를 돌아나오는 뱃고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터였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날의 바닷바람과 창수의 넋 잃은
표정뿐이었다. 스러진 망각의 세월을 걷어 내면, 눈부신 5월에 창수의 첫 날은 숨쉬고
있었다.
5월의 그 날, 여객선의 구성진 뱃노래가 사라져 갈 무렵이었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산장의 안내실을 찾는 여행객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습관적으로
책을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차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안내창
밖을 내다본다. 여덟 번째의 손님을 안내하고는 마지막 손님을 맞는 순간이었다.
저녁 안개가 일어서는 언덕배기로 고뇌에 찌든 얼굴의, 한 사내가 올라왔다. 이어
초인종이 울렸고, 짙은 고뇌의 그림자를 드리운 20대 후반의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은
전망이 좋은 방을 달라고 했다. 나는 북서쪽 벼랑 위에 자리잡은 동백실(冬柏室)을
주었고, 청년은 반색하며 무척 고마워했다. 청년의 눈빛은 너무나 그윽하여,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을 연상케 했다. 나는 청년의 눈빛으로부터 상처입은 영혼임을 직감했다.
평온한 휴식처를 제공한다는 배려를 눈빛으로 전하며, 나는 청년을 동백실로 안내했다.
그 청년이 바로 창수였다.
그 때부터 동백실의 장기 투숙자가 되어 버린 창수는 곧잘 바다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때때로 나를 불러, 나와 함께 바다를 바라보며 얘기를 나누곤
했다. 창수는 서울에서의 미술대학 재학 시절부터 특선으로 활동해 온 화가였다.
제대를 하고 졸업을 한 뒤엔 곧장 회사의 산업 디자인실에서 근무해 왔다. 그러다가
평양 축전에 그림을 보낸 것이 문제가 되어 곧바로 안기부로 끌려 갔었다. 그러면서,
회사로부터도 일방적으로 해직을 당했다고 했다. 창수가 취조받던 한 달간을 얘기할
때면, 그의 눈빛부터가 다르게 떨려 오곤 했다. 수시로 발가벗겨진 채 전기 고문을
당해, 거의 폐인이 되어서야 귀가(歸家) 조치된 거였다. 거기에서 생긴 후유증으로
때때로 정신 착란성 발작을 일으켜 왔다고 했다. 정상 생활로 복귀하려면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부터는 때때로 여행을 나서곤 했다는 거였다. 지난 겨울에는 강원도의
산사(山寺)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했지만, 뭘 하며 지냈는지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아마도 그림으로 맺힌 한을 달랬을 거였다. 그래서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언젠가는 여행중에 그린 그림으로 경치가 수려한 곳에서 작품전을 열 계획이라고
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겠다는 의지만은 확고해 보였다. 때때로
그는 푸념처럼 말하곤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어딘가에는 그의 한을 풀어 줄 곳이
있으리라고 말이다.
"망상에 가까울지라도 그냥 편하게 믿어 보는 거죠. 설사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래두요. 가슴이 탈수록, 부러 미소를 지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보는
거죠. 그림하고만 대화를 나눈다는 게 얼마나 고독한지 아세요 ? 머릿속으로 구도를
잡지 말고 그냥 붓 나가는 대로 그리는 거죠, 지금처럼 말이예요."
그와의 대화를 나누면서부터 점차로 나는 그의 답답한 현실에 연민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선 곧잘 황량한 해풍(海風)의 징후가 비치곤 했다.
나는 그의 얼굴에 내비친 바닷바람의 기운을 조심스럽게 다독거려 주곤 했다. 아무리
봐도 처절한 황량함이었다. 온기라곤 전혀 없는 바닷바람의 차가운 미소 ……. 바닷바람의
미소라니, 내가 상처 입은 창수를 빗대어 수사 구문이나 떠올릴 계제인가 말이다.
아마도 2주일 전의 점심 나절이었을 것이다. 오전 11시에 도착한 통영호
편으로 섬에 올랐다는 젊은 여인이 산장에 들어섰다. 여인은 나보다 세 살쯤 많아
보이는 스물 여섯쯤 되어 보였다. 여인은 오똑한 콧날과 반달처럼 휘어진 눈썹,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지닌 빼어난 미모였다. 자주색 블라우스에 하얀 미니스커트를
받쳐 입은 맵시로부터 나는 직감적으로 창수의 여자임을 알아차렸다. 깔끔한 인상에
눈빛마저도 만만치 않은, 보통 키의 체격이 좋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올라오기 전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얘기를 들었어요. 벌써 다섯
번째의 섬을 방문한 끝에야 겨우 여긴 줄 감이 잡히더라구요. 아가씨, 그림을 그리는
동창수(董昌洙)씨라는 분 여기에 계시죠 ? 창수씨를 만나려고 왔는데, 지금 어디에
계시죠 ? "
여인은 산장을 찾은 그 날부터 일 주일간을 머물다가는 창수를 데리고
떠나갔다. 그 날, 창수가 여인을 따라 나서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창수의 마음을 돌렸을
터였다. 여인이 동숙하던 첫 날의 창수는 완전히 두문불출이었다. 여인이 머문 지
이틀째가 되던 아침이었다. 여인은 수시로 우아한 맵시로 드나들었지만, 창수는 새벽부터
보이질 않았다. 선착장 입구의 창수의 낚시 동료로부터는 아직도 창수가 나타나지
않았다면서, 연거푸 독촉 전화질이었다. 여인은 며칠간을 더 묵겠다며 미리 숙박료를
계산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새벽부터 안 보이던 창수는 갯바위의 낙시터에도 안 갔다면 대관절 어디로
간 것일까 ? 저녁 무렵에 갑작스럽게 나무 대문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풍을 동반한 폭우가 느닷없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근래에 없던
기상 현상이었다. 이렇게 쏟아져 내리다간 산장이 송두리째 절벽 아래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음습하고 황량한 이 곳을 되도록이면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탈출하지
못한다면,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산장과 함께 묻혀 버릴 것만 같았다. 내 나이 어느
새 스물 셋이었다. 내 또래들은 대학도 다 마친 나이였건만, 나는 언제까지 부나비
인생을 살아야 할까 ?
내가 여고를 마칠 무렵이었다. 부모님은 생계가 버겁다며, 나의 반대로
나만을 남겨 둔 채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이민에 합류하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고국을 떠나고 싶지 않은 이유에서였다. 어떠한 삶을 살더라도 고국에서 인생을 영위하고
싶었던 터였다. 그 후 1년만에 날아온 소식을 받는 순간이었다. 나는 둥지 잃은 한
마리의 처량한 새가 되었음을 알았다. 소식을 받기 1주일 전에 아버지는 공사 현장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어머니 역시도 앞 날이 암담한 나머지 호주 남자와
재혼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때부터의 나의 삶은 목욕탕, 안마 시술소, 여관
등지를 떠도는 부나비 인생이었다. 나의 황량한 삶에 부나비의 궤적은 얼마나 더
지속될 것인가 ?
대문은 삐거덕거리다가 못해 아예 날려가 버릴 지경이었다. 나는 숨을
죽이며 안내실 창 밖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목제 대문 부근에는 세숫대와
냄비 등속이 휭휭 소리를 내며 날아 다니고 있었다. 여느 때와는 너무나 다른 폭우였었다.
여객선이 도착한 직후였던지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호들갑을 떨며 초인종을 눌러댔다.
웅성거리는 소리로 미루어 대여섯 명이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나는 폭우를 만나,
생쥐처럼 오들오들 떠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이렇게 흉흉한 폭우 속이라면,
몇몇은 빗줄기를 맞아 심장이 얼어 붙거나 나뒹굴었을 터였다. 조금만 더 폭우가
지속된다면, 바닷물은 섬 꼭대기까지 차오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동백산장마저도 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익사 장면을 떠올리며
주눅이 들어 넋을 잃고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귀에 대니, 창수의 헐떡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선씨, 여긴 섬의 서쪽 동백숲이예요. 저녁 무렵에 웬 폭우가
이렇게 심하죠 ? 전 오늘 새벽부터 발작을 할 것만 같아서, 아예 여기로 나와 버린
거예요. 이제 열기는 많이 가라앉은 편이거든요. 내가 있는 동백숲에서 정선씨를
만나고 싶은데, 좀 나와 주시겠어요 ?"
"네, 알았어요. 곧 갈게요."
그가 시간을 보내던 동백숲은 한낮에도 햇빛이 안 들 정도의 무성한
숲이었다. 여전히 폭우는 계속되었고, 창수와 나는 옷이 죄다 젖은 채 바위에 나란히
누웠다. 창수는 나의 젖은 옷을 헤쳐 젖가슴을 애무하며 말했다. 나는 그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그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정선씨 ! 전에 내가 두어 번 얘기한 적이 있죠 ? 서윤주라고, 어제 온
여자 말이예요. 그녀는 어떤 대기업체 전무의 첩인데, 서울 영동의 캬바레에서 만났던
여인이예요. 춤을 추다가 눈이 맞아, 몇 번 교접을 하다 보니 자주 만나게 되더라구요.
그러다가, 나는 그녀가 인사동의 커다란 미술관 주인이란 걸 알게 되었죠. 또한 그녀도
내가 유명세를 띤 화가라는 걸 알고는 미술관을 가지고 나를 유혹했어요. 대체로
미술관 대관료가 엄청나게 비싸잖아요 ? 나는 그녀 덕으로 원할 때엔 무료로 언제든지
작품전을 열 수 있었죠. 게다가 운도 따라 주었기에, 작품전이 열릴 때마다 수익도
상당했었죠. 수익에 비하면 대관료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셈이었죠. 그랬기에, 그녀에게
나는 성적 상대로나 경제적으로나 상당히 이용 가치가 있는 놈으로 비쳤겠죠. 그런데,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은 말이예요. 그녀가 경제적으로 부(富)티 나는 첩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붙잡아 둘려는 점이예요. 내가 보기로, 그녀는 남자 못지
않게 소유욕과 정력이 왕성한 여자임에 틀림없었어요. 그녀는 사내를 만났다고 하면,
하룻밤에도 너댓 차례는 교접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자거든요. 솔직히 처음에는
너무나 황홀했지만, 지금은 너무나 끔찍해서 하루 빨리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요.
그런데도, 그녀는 일단 점 찍은 남자는 절대로 포기 못한다며 그저 막무가내예요.
일단 그녀에게 걸려든 남자는 그녀가 손을 놓기 전에는 헤어날 수가 없나 봐요. 나는
정말 손 들고 발 들고 하다 못해 성기까지도 다 들어올릴 지경이예요. 그런데, 모순스럽게도
그녀가 절대로 밉거나 싫지는 않단 말이예요. 그녀가 미운 구석이라도 있다면 또
모를 텐데, 이건 그것도 아니라서 미칠 지경이예요. 나는 윤주라는 여성 마약에 중독된
형편없는 사내예요. 정선씨, 혹시 저를 좀 구해 주지 않을레요 ? 이 때 솔직히 나는
어리둥절했다. 지나고 보니, 그게 나에 대한 구혼이었었는데 말이다. 만약 내가 그
때 구혼인 줄 알고 받아들였었더라면, 창수의 방황은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다만 어리둥절했을 뿐이었다. 창수가 그녀를 못 벗어난다는 것은 결단성이
없는 소치라고만 여겨졌기에, 이해의 여지가 없었다. 또한 창수가 진정으로 나를
원하는지 그냥 떠볼려고 던진 말인지도 분명치 않게 느껴졌다. 이래저래 나는 대답을
못한 채 폭우가 쏟아지는 하늘만을 올려다보았다. 둘 사이에 일순 어색한 침묵이
흘렀으나, 내가 그의 몸을 애무하면서부터 쉽게 풀렸다. 그 때 내가 창수를 받아들이겠노라고
확답을 못 했던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러웠다.
"동백산장(冬柏山莊)이라 ? 섬에 숙박 시설은 여기밖에 없다고
했지 ? 그런데, 새벽의 끝 무렵인데도, 왜 이렇게 산장이 깜깜해 ? "
나는 여행객들의 말을 듣자마자 상념에서 깨어나 즉시 전등을 켰다.
간판과 안내실의 조명등(照明燈)이 두어 번 깜빡거리더니 금세 환해졌다. 형광등에서
깨어난 빛살들이 일제히 어둠을 내몰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 때 나는 장사도를
생각하며, 새벽 바다를 항해하는 거대한 함선을 떠올렸다.
새벽에 자리잡은 밤의 항해. 이제 기나긴 밤의 항해가 끝나 가고 있었다.
내가 가꾼 조명등의 빛살은 도선사(導船師)의 불빛과 다름 없을 터였다. 나의 불빛을
보고, 먼 바다에서 버둥거리던 선박들이 방향을 잡을 터였다. 나는 새삼 감회 어린
눈으로 조명등의 먼지를 털며 닦았다. 여행객들은 불나방처럼 조명등의 불빛을 찾아들었지만,
도선사의 존재에는 전혀 무감각했다. 내가 가꾼 조명 등의 불빛이 없었더라면, 여객선들은
그냥 지나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안개 속을 달리는 발동선들의 지향점은 어디이며,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 것일까 ? 발동선은 마냥 지정된 항로를 찾기에만 급급해
헐떡거리는지 몰랐다. 속상하게도 말이다. 발동선은 언제나 고운 불빛을 가꾸는 도선사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나는 안내실 창구 앞에 놓인 풍란의 화분에 마른 걸레질을 했다. 북서쪽
벼랑에서 채취한 것이어서 잎새나 꽃의 향기가 일품이었다. 풍란의 뒤쪽으로 바라보이는
바다는 날마다 쉬임없이 파동치고 있었다. 바다의 잔잔한 파동을 지켜 볼라치면,
어느새 섬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파랗게 가라앉은 하늘과 청록색으로 굽이치는
바다를 바라보기를 즐겼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해풍에 남실거리는 가왕도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 세월엔가는 이 안내실마저 바다에 떠돌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면 걸레로 훔친
반짝이는 풍란의 화분을 들여다본다. 미인의 속살처럼 허여멀쑥한 공기 뿌리에, 연녹색의
잎새를 활짝 펼친 절묘한 자태의 풍란이었다. 수시로 꽃망울을 터뜨려 그윽한 향기를
자아내는 풍란만큼 기품 있는 식물이 또 있을까 ? 나는 마른 면 걸레로 수시로 풍란의
잎새를 닦아 주곤 했다.
북동쪽 낭떠러지에 인접한 해변에선 늘상 안개가 피어 올랐다. 특히
아침과 저녁 나절이면, 짙은 안개로 인해 마치 괴물이 요동치는 느낌이었다. 자주
가 보지 못한 그 곳은 수시로 나의 마음을 충동질하곤 했다. 마치 거기에 뭔가가
있어서 자꾸만 나를 부르는 느낌이었다. 참다가 몰래 다가서 볼라치면 안개가 시야를
막아 번번히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때마다 나를 기다리던 것은 아득한 바다와
끝없이 널브러진 자갈밭이었다.
그러던 중의, 지난 6월 초순경이었다. 바로 그 해변에서 되돌아 나오려고
다복솔이 우거진 절벽 밑을 지날 때였다. 상하 흰 색으로 깔끔하게 차려 입은, 눈을
감고 있는 창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절벽 아래에 있는 바윗돌 위에 올라앉아
단정히 가부좌를 취하고 있었다. 산장으로 올라가려면 나는 외줄기의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득불 창수의 곁을 지나야만 했다. 헌데, 안개가
뿌옇게 낀 외진 곳에서 처녀가 사내를 맞닥뜨린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두려웠다. 나는
암벽 모퉁이에 있는 커다란 바위 뒤쪽에서 잠시 몸을 숨기기로 했다. 그리고는 눈만
살짝 내밀고는 창수가 먼저 자리를 뜰 때까지 지켜 보기로 했다. 창수가 앉은 반대편
해변으로 섬을 돌아나갈 수만 있다면 그러고도 싶었다. 하지만, 바다쪽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해변이었어도, 돌출된 암벽으로 말미암아, 반대편으로의 진행은 불가능했다.
또 다시 바다로부터는 안개가 뽀얗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나는 이 때부터 창수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볼 수가 있었다. 내 주제도 벅찬데, 남의 세계까지 기웃거린다는
것이 어불성설이었지만 그렇게 되고 말았다.
확실히 그 날의 창수는 내가 평소에 보던, 품격이 우아한 화가가 아니었다.
삼십 여분을 가부좌로 앉아 있더니만, 마침내 창수는 천천히 일어섰다. 바다를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더니만 급기야는 바다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알지
못할 불안감으로 치를 떨며 그러한 창수의 행동을 지켜 보았다. 창수의 발이 바닷물에
닿자마자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팬티에 두어 줄기의 오줌을 지렸다. 창수는 바닷물에
이르렀어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물 속으로 뛰어 헤엄을 쳐 나갔다. 팔을 쭉쭉 뻗으며,
머리를 옆으로 돌리는 품이 꽤나 수영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십여 미터도
못 가서 머리를 되돌리며 뭍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그러더니만, 그는 냅다 바다를
향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야 ! 너희들의 눈이 도대체 눈이냐 ? 그림에 대해 뭘 안다고 사람을
이렇게까지 병신으로 만들어 ? 내 말이 들리거든 대답해 보란 말이다, 이 자식들아
!! "
말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물 묻은 옷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 번에는 바다쪽이 아니었다. 바다와 연하여 광막하게 드러누운 자갈밭 쪽이었다.
그는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자갈밭 길을 헐떡거리며 달리고 또 달렸다. 나는 그의
절규와 뜀박질을 통해, 그의 정신적 고뇌의 무게를 공감할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가끔씩 해변의 자갈밭 길을 거닐며, 창수의 고뇌를 생각했다.
어젯밤의 여인의 전화를 받고서부터 내겐 창수가 또 해변을 헤매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어젯밤부터 해변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까닭
모를 불안감이 자꾸만 나를 억눌렀다. 지금도 여전히 창수는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젖은 몸으로 달리고 있을 것인가 ? 헐떡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길이 없어 피를 쏟으며
쓰러져 버렸는지도 몰랐다.
아마도 또 새벽 배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직도 캄캄한 새벽에 초인종
소리가 묵직한 느낌으로 울려 왔다. 나는 창을 열며 고개를 내밀었다.
"방 하나만 주세요."
바랑을 진 50대 초반의 비구승이었다. 단정한 승복 차림에다 염주를
낮게 드리운 맵시가 고매한 품격으로 비쳤다. 나는 공손한 자세를 취하며 승려를
2층 제일 구석방인 청매실(靑梅室)로 안내했다. 내가 문을 닫고 나올 무렵에 승려는
눈을 내리감으며 참선의 자세를 취했다.
문득 새벽에 재차 걸려 온 여인의 전화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정선씨, 왠지 당신 같으면 창수씨의 소재를 알고 있을 것만 같네요.
이건 어디까지나 직감인데, 창수씨를 내게서 빼앗아 가려고 하지는 말았으면 해요.
알다시피, 창수씨는 무척 불운한 사람이거든요. 한 마디로 나의 보살핌이 필요한
남자라구요. 혹시 그이가 정선씨를 찾아갔다면, 부디 적선해 주는 셈치고 연락 좀
주세요. 연락 전화는 오오팔에 삼삼팔구예요. 꼭 좀 연락해 줘요. 오오팔에 삼삼팔구로요.
만약 연락해 준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보답해 드릴게요."
각인된 얼굴의 표정만큼이나 당돌하고도 거만스럽기 짝이 없는 전화
짓거리였다. 나는 그녀의 말을 시종 듣고만 있었을 뿐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여자로서 여인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것 같았다. 여인은 여전히
쫑알거렸고, 나는 비위가 상해 듣기가 싫었다. 계속 듣고 있자니까 부아가 치밀어
올라, 나는 슬며시 수화기를 놓아 버렸다.
새벽 다섯 시쯤 되었을 때다. 나는 주인 여자에게 바람을 좀 쐬고 오겠다며
북동 해안을 찾아 나섰다. 지형성 안개 탓인지 그 곳은 늘상 짙은 안개가 끓어 올랐다.
온 섬 자체가 동백나무라 할 정도로, 주종을 이루는 나무는 동백이었다. 나는 걸어서
이십 여분 거리의 북동쪽 벼랑길을 찾아 나섰다. 팔월의 해풍을 맞아, 동백나무 잎새들이
수시로 파드득거리며 하늘로 치솟곤 했다. 그 틈새로 잠을 깬 산새들의 울음 소리가
섬의 산야에 빛살처럼 내리꽂히곤 했다.
산장에서의 창수는 확실히 서글서글하며 예절 바른 청년이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사람을 끌어 들이는 친화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산장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바다에서 수직으로 치솟은 층암 절벽 위를 좋아했다. 특히 층암 절벽 위의,
바다로 향해 돌출된 너럭바위를 세인들은 용바위라고 불렀다. 그는 늘상 용바위에서
상주하다시피 하며 유화 도구를 펼쳐 놓고는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림의 소재는
언제나 섬과 바다였다. 언제나 그의 그림에서는 강렬한 생동감이 느껴지곤 했다.
나는 창수의 손에 의해, 새로운 생명력으로 태어나는 섬과 바다를 보기를 좋아했다.
창수에게는 적어도 고정된 관람객 1명은 확실히 확보된 셈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창수의 성품과 그림에 매혹되면서 점차 그를 이성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북동 해안으로 통하는 능선길을 타고 걸어갈 때였다. 팔월의 해풍에
실려, 동백나무의 잎새들이 자꾸만 하늘을 향해 발길질을 해대곤 했다. 안개 자락이
섬의 능선과 골짜기를 적실 때마다 미풍이 살짝살짝 얼굴을 내밀곤 했다. 그 틈새로
생각난 듯이, 때때로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섬의 산야를 어루더듬곤 했다.
투숙한 사흘째부터 여인은 주류를 인터폰으로 신청했다. 수화기를 든
순간에 나는 의아심이 일었다. 내가 알기로는 창수가 산장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밤중에 여인의 주문에 맞춰 몇 병의 맥주와 안주를 차려
들고는 동백실을 찾았다. 노크를 하니, 속살이 다 비치는 속옷 차림으로 여인이 술과
안주를 받아든다. 여인을 본 내가 수치심으로 불에 덴 사슴처럼 온 몸이 달아올랐다.
돌아서는 찰나에 나의 눈에 비친 창수의 표정은 당혹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기색이었다.
창수의 물기 어린 눈빛에서 하얗게 침전되는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었다.
창수의 눈빛에 생각이 미치자, 여인이 투숙한 나흘째 밤의 정경이 떠올랐다.
그 날 밤 8시 무렵이었다. 창수는 준호와 상희를 데리고 용바위 쪽으로 낚시질하러
가고 없었다. 준호와 상희는 섬에 피서를 온 연인이었는데도, 창수와는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창수가 용바위에서 돌아오려면, 통상적으로 적어도 새벽 너댓 시 무렵은
되어야 했다. 여인은 그 날 밤에도 동백실에서 나에게 술 심부름을 시켰다.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인상을 지닌 여인이었다. 앞으로 사흘간을 더 묵겠다며, 늘 맥주와
좋은 안주를 준비해 놓으라고 부탁했다. 웃으며 이야기를 하다가도 수시로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여인이었다. 여지껏 산장에서 창수가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주문대로 술을 보냈다. 그리고, 그 날 밤은 나도 왠지 술을 마시고 싶었다.
마침 주인 부부가 동창회에 가서 다음 날에 오기로 하고, 섬을 떠난 날이었다. 나의
말이라면 뭐든지 잘 들어주던, 네 살 아래의 남자 종업원인 경준이었다. 나는 그에게
맥주와 싱싱한 횟감을 준비시켜 놓고는 마주앉았다.
조촐한 술상을 사이에 두고, 경준과 나는 권커니 받거니 하며 술잔을
비웠다. 불투명한 미래와 살아온 지난 날들의 궤적이 술잔 하나하나에 엉겼다가는
풀려 나가곤 했다. 서로의 가슴을 열고,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불우하고도 비감스러운
과거의 편린을 떨쳐 버리려고 애썼다. 잊혀져 간 과거의 학창의 꿈을 더듬는지 경준의
눈에는 조금씩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경준을 보고 나는 말했다. 경준아,
우리의 현실은 남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거잖니 ? 만약에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드는 방향으로 노력하면 되잖아 ? 그러면서, 나는 술잔에 술을 채워
막 경준에게 건네려던 참이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인터폰이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 동백실의 여인이었다. 나에게 할 얘기가 있다면서 잠시 들러 달라고 했다.
인터폰으로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아무래도 직접 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는
거였다. 경준을 그의 숙소로 돌려보낸 뒤에, 나는 천천히 동백실을 향했다. 여인은
자주색 원피스 차림으로 나를 맞았다. 여인도 술을 좀 마셨는지 서로 불콰해진 얼굴로,
방 안에 마주앉았다. 여인의 손에는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고, 여인이 펼친 곳엔 나의
누드화가 그려져 있었다. 여인은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으로는 스케치북 속의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가씨, 이 그림 속의 여자가 아가씨 맞죠 ? 어째서 창수씨로부터
소식이 없었던가 했더니, 그 원인이 바로 아가씨한테 있었군요. 분명히 말하건대,
창수씨는 나의 남자라구요, 나의 남자 ! 내 앞에서 약속해 주길 바래요. 이후부터는
절대로 창수씨 앞에서는 알몸으로 서지않겠다고 말이예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
나는 벌써부터 그녀의 표정과 태도로부터 혐오감을 느껴 왔기에, 일부러
또렷하게 말했다.
"절대로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내가 누드로 서는데, 나 말고 누구의
허락을 받으란 말이예요 ? 창수씨는 화가이고, 나는 …… "
바로 이 때였다. 여인이 눈을 치켜 뜨면서 냅다 손을 들어 나의 뺨을
후려 갈기며 말했다.
"사람으로 대해 줄려고 했더니, 뭐라고 이 년아 ? 조금 전에 뭐라고
했어 ? 네 같은 것도 사람이라고 대들고 지랄이야, 지랄이 !!"
너무나 황당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여인이 방금 뭐라고
했는가 ? 네 같은 것도 사람이냐고 물었겠다 ? 사람의 자존심을 짓밟아도 유만부동이지,
폭언에다가 폭행까지 했겠다 ? 나의 직업은 내가 선택한 것인데, 건방지게 누가 나에게
욕을 해 ?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서서히 고개를 바로잡으며,
여인의 몸을 신속히 훑어 보았다. 미혼의 여인인데도 제법 덩치가 있어 보이는 게
힘께나 쓴다고 자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객지를 떠돌며 내가 익힌 거라곤 정신력과
적응력뿐인데, 이러한 나를 때려 ? 나는 그렇잖아도 여인의 인상이 마음에 안 들던
차에, 손을 좀 봐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새 둘 다 방 안에서 일어선 상태였다.
순간적으로 두 발로 몸을 솟구치며, 오른발 앞차기로 그녀의 턱을 정통으로 걷어차
버렸다. 나의 발에 힘이 실렸던지 금세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발길질을 해대고 싶었지만, 더 이상의 행동은 자제하기로 했다. 약자에게 무력을
휘두르는 것만큼 용렬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엄살을 피워대는 여인을
일으켜 앉힌 다음에, 처음과 같은 자세로 차근차근히 얘기해 나갔다.
"창수씨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서윤주씨 맞죠 ?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그랬는데, 이왕이면 서로 잘 지냈으면 해요. 서로간에 쓸데없는 감정일랑
갖지 말고, 우리 차분히 얘기나 하자구요."
이렇게 하여, 그 날 밤에 나와 여인은 창수에 대하여 흉금을 털어 놓았다.
하지만, 얘기를 하면 할수록 창수를 서로 빼앗기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서로의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때부터 이러한 답답함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나의 가슴을 옥죄어 왔다.
이제 능선길을 내려와 북동 해변으로 통하는 오솔길에 들어섰다.
이 오솔길에만 들어서면, 창수와의 사랑이 시작되었던, 보름 전인 7월 중순의 일이
떠올랐다. 북동쪽 해안으로부터 백여 미터의 거리쯤에 자리잡은 대략 백 평 가량의
넓적한 돌섬에서였다. 아니 돌섬이라기보다는 우뚝 솟은 너럭바위라는 편이 옳았다.
이 너럭바위는 갯벌면으로부터 1미터 가량은 위로 치솟아 있었다. 돌섬 위에는 대략
이십 여명의 여행객들이 노닥거리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저녁 7시 무렵부터
점차 밀물이 들어차고 있었다. 갯벌 구멍으로부터 게 때들이 머리를 쑥쑥 내밀어
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한 때 반짝 빛났던 추억담을 풀어내며 과거의 향기에
취해 버둥거렸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새 바닷물이 돌섬 발부리를 적시기 시작했다.
일 미터쯤 차오르려면 시간이 걸리겠거니 믿는건지 다들 여유롭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바다는 사람들의 하찮은 예견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마구 덮쳐 들었다.
순식간에 여인들로부터 비명이 터져 오르며 술렁대기 시작했다. 신발도 버어너도
내팽개친 채, 여행객들은 엉겁결에 돌섬을 뛰어내리며 연방 비명을 질러댔다.
여행객들은 모두 황급히 갯벌을 빠져 나가고, 이젠 나의 일행 넷만 남았다.
소금물에 익숙한 넷은 천천히 바닷물을 걸어나오며 술병을 입에 물었다. 그러면서,
사타구니에 손을 넣어 밀착된 속옷에 자유를 주곤 했다. 이제 몇 발자국만 헤쳐 가면
금세 뭍에 오를 터였다. 그렇게 널브러졌던 자갈밭은 어느 쪽으로 묻혔단 말인가
? 동쪽 아니면 북쪽 ? 암벽에 그어진 흘수선(吃水線) 어딘가에도 바다를 향한 출구는
열려 있었을 터였다. 이제 막 뭍으로 올라서기 직전이었다. 아마도 따가운 소금기와
음주로 인한 열기를 떨쳐 내고자 한 몸짓에서 비롯되었을 터였다. 저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물에 젖은 손을 벌려 원무(圓舞)를 추기 시작했다. 불콰해진 얼굴로 이성의
체취마저도 부담 없이 들이마시며 모두들 하나같이 들떠 있을 때였다. 찰나간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나는 이러한 혼란을 틈타, 평소에 창수가 뇌까리던 '병신'이 어느 부위인지를 알아내고
싶었다. 나는 생각이 떠오르면 곧바로 실천에 옮기는 여자였다. 나는 취기를 빌미
삼아 창수를 껴안으며 그의 바지섶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창수의 눈빛이
파랗게 섬광을 뿌리며 뻗쳐 올랐다. 그러면서, 그는 격분하여 나를 향해 마구 소리쳤다.
"야, 너마저도 그렇게 암컷의 티를 내고 싶냐 ? 그래 좋아 ! 내
앞에서 발가벗어 보란 말이다."
이 때까지도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던 윤호와 상희는 주춤 물러섰다.
그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창수와 나를 번갈아 살피기에 바빴다. 이 때 하나의
영감이 머릿속을 섬광처럼 적셔 왔다. 나는 영감에 따라 즉시 실천에 옮겼다. 셋이
지켜 보는 앞에서, 나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며 옷을 벗으려고 했다. 상희는 기겁을
하며 내게 달려들어 나를 말리려고 했으나, 나는 간단히 그녀를 뿌리쳤다. 그러자,
윤호는 상희에게 눈짓을 보내더니, 상희를 데리고는 서둘러 갯벌을 빠져 나갔다.
나는 창수의 정면에서 아주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블라우스를 벗어던진 데
이어 브래지어를 풀어 젖히자마자 젖무덤이 덩그렇게 드러났다. 연이어 치마 허리에
손을 갖다댈 무렵이었다.
창수는 힘없이 무너져 내리며 나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만, 나를 꽉 끌어
안았다. 나는 순식간에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창수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창수의 눈에는 눈물이 마구 범벅이 되어 흘러내렸으며, 그의 관자놀이가 파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나의 마음을 고백컨대, 나는 창수의 망가진 부위가 어느 곳인가를 확인하고
싶었던 터였다. 춤추며 수없이 서로의 피부에 닿았더라면, 누구든 성기가 발기되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나의 손 끝에 느껴진 그의 성기는 발기 부전이었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순간, 나는 정말 못할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절규에 가까운
고함 소리도, 격렬한 분노도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그가 뱉어낸 옷을 벗으라는 소리에,
그에게 보상하고 싶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었다. 이렇게 느끼자마자 나는 실행을
했었고, 내가 아랫도리를 벗지 못하게 그는 나를 막았었다. 그 때, 나는 그가 고문을
받은 결과로 척수 신경에 장애를 입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진정으로 나는 그의 처지에
동정심과 연민을 느꼈다. 그리하여, 나는 상체를 벌겋게 드러낸 채 창수를 일으켜
포옹하려 했다. 내가 살며시 그를 끌자,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나를
힘껏 포옹했다. 나는 창수의 등을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창수를 오래오래 나의 가슴에
묻어 주었다. 이 날 이후로 나는 은밀하게 동백실을 드나들며, 창수의 누드 모델이
되곤 했다. 그의 그림이 끝날 때면 그와 나는 알몸으로 드러누운 채, 서로를 애무하곤
했다. 그러면서, 그와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누며 서서히 마음 속으로 서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육정(肉情)이 달아오를 때면, 육체적 교접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창수의 몸은 결코 발기 부전도 척수 신경의 장애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회상컨대, 돌섬에서의 창수의 발기 부전은 그의 복잡한 심리 상태의 반영이었을 따름이었다.
점차 새벽이 밝아오며, 태양의 끝자락이 설핏 동쪽 수평선을 적시려
할 때였다. 바다의 한켠을 휩쓸 듯이 한 무리의 갈매기 떼가 벼랑으로 날아 내리고
있었다. 여인으로부터 재차 전화를 받고서부터는 내 마음이 그렇게 떨릴 수가 없었다.
나의 떨림이 혹시라도 여인에게 간파될세라, 신중하게 통화를 끝냈다. 창수가 섬을
떠난 후로는 참으로 세상 살 맛이 없던 나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용바위에
올라, 창수를 생각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진작에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창수를
떠나 보내지 않았을 터였다. 정녕 한 번이라도 창수의 모습을 더 보고 싶었다. 왜
연락처 하나 적어 두지 못했던가하고 그럴 수 없이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안내실에서
펼쳐진 바다를 볼 때마다, 수평선 언저리로부터는 창수의 영상이 바람처럼 피어 올랐다.
진정, 가슴 속으로부터 타오르는 연정(戀情)으로 자꾸만 목이 메었다. 바닷바람으로
창수의 영상이 사라질 때면, 나의 눈엔 어느 새 눈물이 어리곤 했다. 황량하고 삭막하기만
한 나의 가슴에 어느 새 창수에 대한 그리움이 쌓였을까 ? 어느 때고라도 창수를
만나게 된다면, 두 번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작정이었다. 눈물로 얼룩진 회한을 통해,
이제야 나는 창수를 연인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언제나 수평선에서 미소짓던 연인이여,
그대의 푸른 미소는 나의 진한 설움임을 아는가 ? 산길이 끝날 무렵쯤, 나는 바닷물이
빠져 나간 해안으로 서서히 내려섰다. 바다는 썰물이 되어 끝없이 밀려 가 버리고,
대신에 갯벌만이 아득하게 펼쳐졌다. 갯벌의 대부분은 자갈밭으로 뒤덮였고, 광막한
자갈밭 길의 끝 부분에는 창수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창수를 보자마자 뜨거운
감동으로 가슴이 북받쳐 올랐다. 나는 먼 발치였지만, 입에 두 손을 갖다댄 채 그를
소리쳐 불렀다.
"창수씨 ! 창수씨 맞죠 ?"
창수는 이내 고개를 돌리더니만,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나를 향해 갯벌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갯벌에 닿자마자 나는 그를 향해 달려나갔다.
갯벌의 중간 부근에서 창수와 나는 감격에 찬 재회를 했다. 창수와 나는 서로를 힘껏
포옹했고, 창수는 나를 들어올려 한 바퀴를 돌았다. 그가 나를 내려 놓을 무렵에,
나는 그의 목을 꽉 끌어 안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목이 꽉 잠겨 오며, 콧등이
마구 시큰거렸다. 내가 그의 눈을 바라보자, 그의 눈에도 맑은 이슬 방울이 서리기
시작했다. 창수는 듬뿍 정이 담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선씨 ! 며칠 동안이었지만, 정말 보고 싶었어요. 폭우가 쏟아지던
동백숲에서 내가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었죠 ? 그 날 정선씨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나는 그게 거절인 줄만 알았었죠. 비록 잠시 후에 정선씨가 나를 애무해 주긴 했었지만
말이예요. 나에게는 그 애무조차도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처지에서의 단순한
위로로만 느껴졌어요. 그리하여, 그 날은 그렇게 마음이 허전할 수가 없었던 거죠.
결국, 지금까지의 나의 삶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아울러, 정신이 망가져 때때로 착란 증세를 일으키곤 하는 나 자신이 너무나 비참스러웠었죠.
윤주씨를 따라 섬을 떠나던 날도, 이왕에 망가진 삶인데 아무려면 어떠랴 싶었던
거였어요. 그러다가, 세상이 싫어졌을 때는 미련 없이 생(生)을 마감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죽더라도 정선씨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느낀 이 해변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었어요.
곧장 여기로 왔었지만, 죽음을 작정하자 온갖 상념이 끓어 올라, 지금껏 눈물만 쏟았어요.
그러다가 정선씨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또 만나게 되었군요. 정녕 이제야말로
나의 사랑의 귀착점을 찾은 느낌이예요. 이제 당신을 위해서라도 절대로 방황하지
않을게요."
"창수씨, 어쩜 그럴 수 있어요 ? 하마터면 창수씨를 못 볼 뻔했잖아요
? 창수씨는 끝내 저마저 버리려고 했었죠 ? 적어도 제겐 당신을 사랑할 기회는 주셔야지요.
이제 더 이상은 헤어지지 말자구요. 그리구요, 왜 아까운 그림의 재능마저도 바닷속에
묻어 버리려 했었죠 ? 이젠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절대로 말이예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창수는 나의 눈을 들여다보며 나를 서서히 끌어
안았다. 끌어 안는 그와 나의 눈에는 순백의 뽀얀 이슬이 맺혀 반짝였다. 점차 마음이
그럴 수 없이 평온해져 오며, 지난 세월의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감동에 젖은 창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순수한 연정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아침이 밝아오면서,
밀려 나갔던 바닷물이 다시 해안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창수와 손을 맞잡고,
서서히 갯벌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몰려드는 파도에서 치솟는 포말들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면서 서서히 안개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통영에서 가왕도를 지나 죽도를
향하는 여객선에선, 구성진 노랫가락이 포말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점차 동쪽 해상으로
햇살이 피어 오르면서 장엄한 일출의 장관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다는 이제 수많은
물고기가 치솟는 듯, 끝없이 파득거리며 눈부신 황금빛으로 깨어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