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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길의 여로(旅路)

손정모(孫廷模)

  대형 판유리창으로 저녁의 어스름이 살며시 내려앉기 시작한다. 썰물처럼 햇살은 서둘러 골목길을 빠져 나가고 있다. 도로에는 퇴근길을 재촉하는 인파로 술렁대기 시작한다. 화방이며 골동품 상가의 곳곳에서, 불빛이 고개를 내밀며 깨어나고 있다. 마지막 1년을 채우기 위해, 나는 양선배의 화방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거기에서 나는 매일 저녁 6시부터 밤 9시까지 일을 한다. 나의 업무는 주로 커다란 진열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계산대에서 치러진다. 지금 나는 도로에 면한 판유리면을 통해 인사동길의 정경을 내다본다. 퇴근 시간을 넘기고도 거리는 여전히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화방의 왼쪽으로는 골동품 상가들이 밀집해 있고, 오른쪽으로는 제3 미술관을 비롯한 미술 전시관들이 곳곳에 깔려 있다. 길 건너편 중앙에는 관훈 미술관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백상 빌딩과 성화 빌딩이 우뚝 솟아 있다. 오른쪽으로는 중앙교회의 첨탑이 아슴푸레하게 잡힌다. 그 이외에도 사이사이로 할인 매장, 경양식점, 카페, 서점 등이 즐비하게 깔려 있다.
  거리에는 네온 사인의 불빛이 실뱀처럼 흘러 내리고 있다. 현란한 불빛에 실려, 문득 목포의 밤 하늘이 떠올랐다. 어릴 적에 효정이와 함께 올려다보던, 별빛이 사무치게 빛나던 밤 하늘 말이었다. 어쩜 그리도 별빛이 영롱했었던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저려 온다. 한 때 같이 살았던 효정이는, 한 살 아래의 이종 사촌 여동생이다. 그녀가 나의 자취방에 놀러 오겠다고 한 날이 바로 오늘이다. 나는 효정이만 떠올리면, 친 동기간이나 다름없는 애틋한 정을 느낀다.
  '고궁 화방 및 사진관'이라는 상호에 걸맞게, 화방에는 표구점 및 사진관의 시설이 부속으로 깔려 있다. 어느덧 여기서 근무해 온 지 2년만이다. 이 골목에서 나는 감각이 제법 섬세한 대학생 사진사로 알려져 있다. 좌측의 사진실에는 자동 현상 인화기를 비롯한 대형 사진기, 의자, 부대 촬영 보조 장치 등속이 쫙 깔려 있다. 그 안쪽 구석 자리에는 암실이 자리잡고 있다. 근래에 들어, 암실은 종종 누드 모델들의 탈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거기에서 화가들은 취향에 맞는 모델을 골라잡곤 한다. 계산대 우측의 진열대에는 각종 그림 기자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안쪽 벽면에는 유명 화가들의 작품들로 그들먹하다. 화방을 찾는 사람들은 수퍼마켓을 찾는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하다. 단순히 필름을 맡기러 오는 화가들도 있고, 그림 도구를 구입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림 표구를 맡기러 오는 화가들도 있고, 맡긴 작품을 팔아 달라는 신진 작가들도 있다. 이들의 작품에 눈독은 들이되 구경만 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고, 들를 때마다 한 작품씩 사 가는 단골 손님들도 있다. 또한 손님들 중에는 누드 모델들의 수도 적지 않다. 그녀들은 누드 사진첩을 건네면서, 좋은 화가를 소개시켜 달라며 하나같이 아양을 떤다. 방울 소리가 울리며, 간식 배달 소녀가 들어선다.
  "어머, 언니 ! 오늘 새 옷이네요. 맛 있게 드세요."
  소녀는 켄터키 치킨과 우유 한 팩을 건네고는 돌아서서 나간다. 유리문이 열렸다 닫히며, 8월의 무덥지근한 공기가 실내로 왈칵 달려든다. 배달 소녀가 다녀가는 시간은 언제나 저녁 6시 반이다. 뭐가 즐거운지 깡총거리며 소녀는 벌써 횡단 보도를 건너가고 있다.
  화방의 주인인 양미선은 나와는 대학 동문으로 미술학과의 5년 선배다. 2년 전에 교통 사고로 남편과 자식을 잃고는 여지껏 그녀는 홀몸이다. 양선배는 누가 보더라도 뛰어난 중견 여류 화가다. 그녀는 낮에는 화방을 지키다가, 밤이면 자택에서 작품 활동을 하곤 한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지도 교수의 덕이다. 나의 어려운 생활고로 인해, 지도 교수는 양선배의 화방을 나의 아르바이트 자리로 소개했다. 나는 양선배와 접촉하면서부터 점차 그녀를 닮으려고 애쓰는 자신을 느낀다. 내겐 그녀의 우아한 품격과 당당한 실력이 언제나 부럽다. 그녀 앞에 서면 감전이라도 된 듯 예술의 혼에 동화되곤 하는 자신을 느낀다.
  50대 초반의 머리 벗겨진 채명국 화백이 들어선다.
  "어이구, 수고 많네요. 오늘 손님들 좀 다녀갔어요 ? "
  그의 곁에는 30대의 늘씬한 여인이 붙어서 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진열대 후면 벽에 걸린 자신의 표구된 그림들을 쓱 훑어 본다. 변동 없는 자신의 액자수를 확인하고는, 담배를 입에 물며 말을 건넨다.
  "요즘은 말야. 물 난리까지 겹쳐서, 경기 회복이 언제쯤이나 될지 알 수가   없어, 정말. 우와, 홍양 ! 옷을 그렇게 입으니까, 달에서 방금 내려온 항아     같애. 아부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보인다니까, 그러네. 혹시 받아 놓은 사진첩 있으면 좀 줘 봐요. "
  저녁 무렵부터 다녀간 모델만 해도 십여 명이 넘는다. 받아 둔 사진첩만 해도 5권이다. 한 때, 대한민국 미술대전 상임 심사 위원이기도 했던 채화백이었다. 또한 그는 특선 작가를 역임한 원로급 화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탁월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난잡한 바람기로 인하여, 그는 세인들의 비난을 면하지 못했다. 버젓한 가정을 지녔으면서도 그는 유난히 여자를 밝혔다. 내가 볼 때만 해도 그랬다. 그는 2 ∼ 3주 단위로 다른 여자를 데리고는 화방을 찾는다. 언제나 그의 입에서는 알코올 냄새가 절어 있다. 나의 기억으로는, 그가 맑은 정신으로 화방을 찾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심드렁하게 사진첩을 넘기더니만, 세 번째 사진첩을 펼쳐 들면서부터는 표정이 달라진다.
  "이 봐, 홍양. 주옥란이란 이 모델 말야. 내일 밤 7시까지 일단 화방으로 나 오라고 해 줘. 암실 테스트를 해 본 다음에, 쓸지 안 쓸지를 결정해야겠어."
  말을 하다 말고는 흘낏 나의 눈치를 한 번 본다. 그리고는 멋적은 듯 헤벌쭉 웃는다. 그런 뒤엔 어김 없이, 오른 손을 뻗어 옆의 여자의 손을 잡고는 가게를 나선다.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과 번번히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거리를 나서는 채화백이었다. 이런 채화백에게 양선배는 어떻게 후한 점수를 주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양선배를 떠올리며, 돌아서 나가는 그들을 언제나 상냥하게 배웅한다.
  "재질 좋은 걸로 파스텔 한 통 하고, 픽사티브 있으면 1통만 줘요. "
  미술 학도인 듯한 청년이 계산대 앞에 서 있다. 나는 즉시 광분해성 비닐 봉지에 물품을 넣어 청년에게 건넨다. 청년이 떠나자마자 대여섯 명의 여고생들이 재잘거리며 들어선다. 여학생들은 일제히 흩어지더니, 각자의 물품을 고르느라고 여념이 없다.
  어느새 벽시계는 8시 40분을 가리키고 있다. 마지막 고객이 다녀갈 시간이다. 창 밖을 내다보니, 예견한 대로 길을 건너오는 홍섭이가 눈에 띈다. 대학 2년생인 그는 전년도에 세인들의 부러움을 사며, 화려하게 등단한 신예 화가이다. 그는 주로 여인의 나신을 그려 내는 데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화가라고 알려져 있다. 홍섭은 자기 집 드나들 듯 당당하게 들어서며 입을 연다.
  "안녕하세요 ? 언제나 절 반겨 주는 유림씨가 좋아요. "
  잔잔한 웃음과 함께 그는 두 통의 필름을 건네준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후면벽으로 간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채화백의 그림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금세라도 시퍼런 불꽃이 피어오를 듯한 느낌이다.
  "왜 그토록 채화백의 그림에만 눈독을 들이죠 ? "
  진작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는 움찔 놀란 듯하더니, 금세 온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분명한 건 말이죠 ? 구상 계열에서는 채화백의 작품만한 것이 없다는 점이 죠. 모방할 수 없는 독창성에다가 볼 때마다 치솟는 새로운 감흥, 이게 바로 그의 독보적인 작품 특성이죠. 제가 매일이다시피 이 곳에 들르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 어떡하면 그의 기법을 알아낼 수 있을까 하는 점 때문이죠. 그렇다면, 작품을 사 가면 될 게 아니냐고 묻고 싶은 거죠 ? 작품 한 두 점   으로는 특성을 살피기가 쉽지 않잖아요 ? 그렇다고 이 많은 그의 작품을 사   기에는 경제적으로 역부족이죠. "
  그래서 그런지 채화백의 그림을 들여다보는 그의 자세는 경이에 찬 모습 그 자체다. 홍섭이가 맡기고 가는 필름은 하나같이 여인들의 나신이 담겨져 있다. 필름당 누드 모델의 통상적인 수는 대여섯 명에 달한다. 대상은 다르지만, 하나같이 쪽쪽 곧은 몸매와 볼륨감 넘치는 가슴을 지니고 있다. 누드 사진을 뽑아들 때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여인의 누드에 황홀해하는지를 알 것만 같다. 정녕 발가벗은 여체만큼 아름다운 예술품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채화백의 작품 감상을 끝내고 나면, 홍섭이는 계산대 앞으로 와서 즐겨 말을 건넨다. 대화할 때면, 그의 맑은 눈빛이 강렬하게 느껴질 때도 더러 있다. 간혹 시선이 마주칠 때면, 그의 눈길은 안개 속처럼 그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시선에는 뭔가 내밀한 뜻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을까하고 더러 곤혹스러워질 때도 있다. 홍섭이가 떠날 때쯤이면, 시계는 아홉 시를 가리킨다. 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를 채우고 나니, 온 몸이 나른해져 온다. 나는 이제 걸어서 십여 분 거리의 자취방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위력적인 저기압 세력권에 놓여 있는 8월 초순의 밤이다. 언제 또 폭우가 쏟아질려는지 하늘은 잔뜩 험악한 기세를 보이고 있다.

   집으로 내려서는 길은 언제나 인왕산 골바람으로 서늘하다. 가슴까지 서늘하게 적셔 주는 바람을 맞으며, 나는 양껏 팔 벌려 심호흡을 한다. 빌라로 통하는 길목쯤에서, 나는 효정이를 위해 수퍼에 들른다. 자취방에 오르는 층계쯤에서 기다리던 효정이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반색하며 달려든다.
  "언니, 나야. 퇴근이 만날 이 맘 때야 ? 나도 방금 도착했어. "
  "효정아, 우리 정말 오랜만이지 ? 너 많이 이쁘졌구나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인들처럼 얼싸안는다. 저녁 밥상을 마주하면서부터 우리는 소중하게 갈무리된 이야기꽃을 펼친다. 저녁 안개에 잠긴 강물처럼 고적한 분위기에 젖어, 우리의 기억은 과거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나는 엄마를 잃고서부터 목포의 이모댁에서 자랐다. 엄마를 여읠 때의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의 어린애에 불과했다.
  "새벽에 돌섬 물뱀이 벼랑 아래로 물질을 나섰다가 변을 당했댔지 ? 피붙이 라곤 유림이밖에는 없는 청상이잖아 ? 애고 불쌍해서 어쩌나 ? "
  수업을 하다 말고 연락을 받고는 곧장 교실을 떠나 달려왔다. 소식을 듣는 순간엔 오로지 아뜩한 현기증뿐이었다. 나는 달리면서부터 서슬 퍼런 슬픔이 북받쳐 올라 치마에 오줌을 지리고 있었다.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에는 마을 아낙들이 떼지어 몰려 섰다. 원형으로 둘러싼 아낙들의 울 안에는 엄마의 싸늘한 주검이 땅 바닥에 누워 있었다. 바닥에 누운 엄마를 보자마자 설움이 북받쳐 올라 나는 엄마를 향해 왈칵 몸을 던졌다. 바로 그 순간에, 흙냄새가 빛살처럼 날아오르며 나는 실신해 버리고 말았다.
  습기가 차오르며 멀리서 천둥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후두둑거리는 빗소리가 사방에서 밀려들더니, 급기야는 창 밖으로 굵은 빗방울이 마구 쏟아진다. 요즘 들어서는 밤만 되면 서울의 하늘은 구멍이 뚫린다. 한강 홍수 주의보가 해제된 지 며칠된다고 이 지경일까 ? 나는 밥상을 밀쳐 놓고는 열린 창문을 닫으며, 효정이와 마주앉았다. 비는 연방 억수로 쏟아져 내리며, 창문을 씻어 내린다. 쏟아져 내리는 빗물은, 어쩌면 아이엠에프(IMF)로 목 잘린 실직자들의 눈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나의 자취방에는 종환이의 체취가 배어 있다. 입대하기 2년 전서부터 그는 나의 자취방에서 살갗을 맞대며 살았다. 살다가 때가 되면, 결혼을 하자는 묵계가 담긴 동거 생활이었다. 그의 집은 제주였고, 함께 지내는 동안 이따금씩 그는 고향 나들이를 하곤 했다. 철학과에 재학중이던 그는 동양 철학에 심취하지 못해 늘 안달이었다. 그러더니, 관상이나 사주를 보는 일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군입대를 며칠 앞두고서였다. 그는 나에게 선언을 하듯이 말했다. 제대하고 돌아오면, 정통 무속인으로서의 한평생을 살아가겠노라고 말이다. 왠지 섬뜩한 말로 받아들여졌지만, 나는 그를 이해해 주고 싶었다. 설사 그래도 그렇지, 하고 많은 직업들 중에서 하필이면 무속인이라니 ? 전신의 맥이 탁 풀리며,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시대의 조류와는 안 맞는 직업관으로 인해, 우리의 미래도 밝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벌써 반 시간을 넘게 세찬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에서는 중랑천의 범람을 예고하며, 대피하라는 계도 방송이 한창이다. 창 밖은 세찬 빗줄기로 인해, 온통 포말이 튀어 사방으로 흩날린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에 겹쳐, 매화도의 응봉 골짜기에서 맞닥뜨렸던, 지형성 강우의 끔찍한 소나기가 떠올랐다.
  목포에서 뱃길로 세 시간 거리의 해상에는 나의 고향인 매화도가 떠 있다. 매화도 주위로는 다도해의 전형이랄 수 있을 정도로, 섬들이 별을 뿌린 듯 깔려 있다. 고2 시절의 여름 방학 때였다. 엄마가 누워 있는 매화도가 불현듯이 그리워졌다. 섬에 내리자마자 엄마의 무덤이 있는 매화도 북서쪽의 응봉 계곡을 찾아 길을 나섰다. 거긴 나의 고향이었다. 응봉의 골짜기와 능선을 위시하여, 작은 실개천에 이르기까지 안 가 본 곳이 있었던가 ? 엄마의 무덤은 찔레꽃과 인동꽃의 향기가 그윽히 서린 응봉 골짜기의 양지쪽에 있었다. 무덤 주위로는 해묵은 소나무숲으로 뒤덮였고, 무덤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다. 엄마의 무덤에 드러누운 채,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산새들의 울음 소리가 청신경을 간지럽히며 빛살처럼 날아 올랐다. 그 틈새로는 맑은 음향의 솔바람 소리가 '쏴아쏴아'하며 파도처럼 밀려 들었다. 청솔가지를 스쳐 흐르는 바람 소리는 마치 천 년의 정밀을 깨뜨리는 자연의 속삭임 같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봄날이었다. 집 뒤뜰의 언덕배기에는 흐드러지게 만발한 배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소담스럽게 핀 배꽃 송이마다 수많은 꿀벌들이 들락거리며 날아 오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꿀벌의 윙윙거리는 나래짓 소리는 언제나 내게 꿈결같이 아늑한 정취를 불러 일으켰다. 바람이 일 때마다 은박지처럼 반짝거리던 꽃잎들이었다. 잔뜩 아름다움에 취해, 홀린 듯 꽃송이들을 올려다볼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나의 두 눈을 손으로 가렸다. 눈 꺼풀의 감촉으로 나는 엄마임을 알았다.
  "아이, 엄마는 ? 놀랬잖아 ? "
  나는 포근한 느낌에 젖어, 두 팔을 뒤로 돌려 엄마를 안았다.
  "유림이가 이렇게 배꽃을 좋아할 줄은 몰랐구나 ! 어쩜 배꽃이 이렇게 소담 스럽게 피었을까 ? 옛다, 손에 들고 보렴. "
  엄마는 가렸던 손을 풀며, 열 대여섯 송이가 총총히 매달린 작은 꽃가지를 꺾어 건네주며 활짝 미소지었다. 배꽃의 향기와 어우러진 엄마의 미소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조업 중의 풍랑으로 아버지를 잃었을 때부터 우리 가족은 모녀 둘뿐이었다. 어려울 때마다 내게 힘을 준 것은 엄마의 환한 미소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꽃가지를 건네주는 엄마의 미소는 구름에 가려졌다가 드러나는 달빛만큼이나 눈부셨다. 그 날 이후로는 줄곧 그랬었다. 배꽃을 바라볼 때면, 나는 언제나 꽃송이마다 넘쳐 흐르는 엄마의 미소를 느낀다.
  이틀간의 연가를 이용하여 놀러 온 효정이었다. 나의 잠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깔끔한 용모에 미색이 돋보이는 여인이다.
  "언니, 내가 일하는 염색 가공반의 유반장 있잖아 ?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사귀어 온 지가 여섯 달이 되었거든. 공고 출신의 서른 넷의 공돌이지만, 사람이 듬직하고 성실해 보여 사귀었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애. 혼자   사는 그의 전세방에 출입한 지 두 달쯤 된 지난 토요일이었어. 그는 고등학   교 동창들과의 회식 때문에 늦을 거니까 오지 말라고 했어. 처음엔 나도 집   에서 좀 쉴까 했지. 그러다가 빨래라도 좀 해 주려고 그의 집에 들렀어. 그 날 왜 내가 거길 들렀는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려. "
  그녀의 파들거리는 떨림이 맞잡은 손길로부터 전해져 왔다.
  나는 긴 시간 동안을 무덤에 누워 하염없이 울먹이며 회포를 풀었다. 어느덧 태양은 중천으로 치솟아 핏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일어나서 거북 바위를 지나, 방아골로 내려설 무렵이었다. 물방앗간의 터가 지척에 바라보이는, 억새풀이 지천으로 돋아 있는 곳에서였다. 외지에서 온 듯한, 중학 마크가 새겨진운동복 차림의 소년 셋이 길을 막아 섰다. 덩치로 보아 중3쯤 되어 보였다. 말이 중학생이지 덩치는 고등학생과 다를 바가 없는 거구들이었다. 셋이서 나를 에워싼 채, 키가 가장 크고 얼굴이 갸름한 소년이 말했다.
  "저……, 누나 ! 우리 몹시 궁금한 게 있거든요. 비디오로는 가끔 숨어서 보 았지만, 여자의 알몸을 실물로 보지는 못했어요. 한 마디로, 누나의 발가벗은 몸을 좀 보고 싶어요. 맹세하지만, 몸만 좀 보여 준다면 우린 절대 딴 짓은 않을 게요. "

  소년들은 내가 응봉 골짜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줄곧 미행해 왔다고 밝혔다. 내가 무덤 위에 드러눕는 것을 보고는 자살하려는 걸로 알고는 두려웠다고 한다. 나는 주변의 상황을 순식간에 헤아려 보았다. 방아골은 한낮의 깊은 산골짜기라 하루 종일을 기다려도 인적이 뜸한 곳이었다. 본능적으로 온 몸이 쩌릿거리며 저려 왔다. 같이 오겠다는 이모를 데려 오지 않은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설마 고향 뒷산인데 무슨 일이 있겠느냐며, 큰소리를 쳤던 자신이 미웠다. 이제는 후회해도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전신을 엄습했다. 자신도 모르게 이빨이 덜덜 떨렸지만, 최대한 침착하기로 했다. 머릿속이 졸지에 윙윙거리며 구토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효정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그의 복제 열쇠로 문을 따고 막 들어갔을 때였지. 낯선 여인의 구두 가 먼저 눈에 띄었고, 직감으로 뭔가 일이 꼬임을 느꼈어. 마루에는 남녀의 옷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졌고, 방 문은 반쯤 열려 있었지. 나는 숨을 죽여 방   안을 들여다 봤어. 벌거벗은 남녀가 뒤엉켜 한창 격정에 떨고 있지 않겠니    ? 머리의 피가 확 식는 느낌이었어. 뒤엉킨 남자는 유반장이었고, 여자는 석   달 전에 입사한 경옥이었어. 내가 믿었던 사내로부터의 배신감으로 인해, 난   그만 미쳐 버릴 것만 같았어. 난 거기를 빠져 나와서는 곧장 거리를 정신없   이 내달렸어. 극도의 분노로 달리는 중에서도 머리는 펄펄 끓어 올라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어. "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달싹이는 효정의 눈에는 뽀얀 안개가 서린다. 여전히 창 밖에는 비바람이 사납게 들이치며, 쏟아지는 빗줄기로 후두둑거린다. 하얀 포말들이 뿜어 내는 냉기가 등줄기를 서늘하게 한다.
  나는 주변의 상황을 신속히 헤아려 보았다. 그들은 응봉 골짜기에서부터 줄곧 미행해 왔다지 않은가 ? 보아 하니, 내가 거절한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갈 소년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소리를 질러 주위로부터 도움을 받을 상황도 못 되었다. 도망을 치자고 해도 발 빠른 소년들을 따돌릴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놓아 달라고 빈다고 하여, 놓아 줄 그들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마음을 굳게 정하고 소년들의 얼굴을 침착하게 둘러보았다. 의외로 그들은 선량한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일단은 버틸 수 있는 데까지는 버텨 봐야겠다고 작정했다. 가능한 한 차분한 어조를 유지하며, 나는 그들에게 설명해 나갔다. 누구에게나 사춘기에는 이성의 알몸을 보고 싶은 욕망과 충동은 있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충동이 가라앉고 나면, 한갓 환상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어쩜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부터가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설명을 듣는 그들은 숙연하기까지 했다. 타오르는 감정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게 훨씬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라고 덧붙였다. 설명을 끝까지 듣던 키 큰 소년이 두 손을 맞잡은 채 간청했다.
  "누나! 누나의 설명을 들으니까, 우리들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져요. 하지 만, 우리들은 아직 어른들이 아니잖아요 ?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정녕 환상에 불과하다면 말이예요. 우리를 위해 누나가 한 번쯤 옷을 벗어 주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잖아요 ? 우리가 다짜고짜로 누나를 발가벗겨 버릴 수도 있지만 말이예요. 이렇게 부탁 드리는 것은 일생 동안 서로간에 좋은 추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예요. 누나의 벗은 몸매를 정말 한 번 보고 싶어요. 태어나서 이렇게 남에게 부탁해 본 일이 없다구요. 제발 누나 ! 절대 딴 짓은 않을 테니까 한 번만 보여 주지 않을래요 ? 정말 부탁이예요, 누나 ! "
  정말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향이라고 너무나 마음을 편하게 먹어 돌발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점이 정말 한스러웠다. 나는 마지막 안간힘을 써서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내가 거절한다고 해서 너희들이 나를 놓아 주겠니 ? 하지만, 너희들이 신의를 지켜 주기 바래. 또한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는 말아 주었으면 해. "
  이제는 정말 어쩔 도리가 없다고 여겨졌다. 기왕에 궁지에 몰린 바에야 말이다. 소년들에게 발가벗기는 것보다는 내 스스로 벗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그래야 자존심이 덜 상할 것 같았다. 또한 그래야만, 소년들의 성적 충동을 어느 정도는 억제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떨려 오는 손을 추스리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며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스커트의 지퍼를 내리면서부터는 잔디가 곱게 깔린 평지로 걸어갔다. 마침 평지의 중앙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잔디에 누울 것인지 소나무에 기댈 것인지를 놓고, 나는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아무래도 소나무에 기대는 것이 심리적으로 덜 불안할 것만 같아, 소나무에 기대기로 했다. 이윽고, 마지막 속옷을 떼 내고는 소나무에 몸을 기대어 앉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죽은 듯이 눈감고 나무에 기대어 있는 거였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소년들은 이내 내게 다가 와 나의 알몸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족히 반 시간은 지났으리라. 소년들은 계속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의 알몸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기색이었다. 오로지 들리는 것이라곤 소년들의 침 삼키는 소리와 가쁜 숨 소리뿐. 솔숲을 스쳐 가는 바람 소리까지도 멈춰 버린 듯했다. 바싹 근접하여 관찰하는 탓인지, 그들이 내뿜는 숨길이 성감대를 자극하고 있었다. 분명히 나는 도마 위의 고기 신세였다. 소년들의 마음이 변하여 겁간을 한 대도 이제는 속수무책이다. 내가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이란 평생 믿어 보지 못한 신(神)에게 기도하는 일이었다. 제발 소년들이 약속을 지켜 나의 육체적 순결이 지켜지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오늘의 위기를 넘기게 해 줍시사고 떨리는 마음으로 산신(山神)에게도 빌었다. 산신에 이어 엄마를 떠올리자 목이 콱 메어 오며, 서서히 눈물이 스며 나왔다. 소년들의 숨결은 여전히 뜨거웠다. 거기에는 오뉴월의 보리밭을 스쳐 가는 바람결 같은 부드러움이 실려 있었다.
  내리는 빗줄기가 다소 약해진 듯하다. 정신없이 창문을 두들겨대던 기세가 확실히 누그러졌다. 점차 비가 갤려는 조짐이 보인다. 비갠 뒷 날이면, 효정이와 나는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기를 좋아했다. 고교 시절에 효정이와 나는 집에서 십여 분 거리의 유달산 공원을 오르내리기를 즐겼다. 쾌청한 여름 날 밤이었다. 이난영의 노래비가 선 지점에서는 유난히도 하늘의 별이 눈부시게 보였다. 가슴 속에 숱한 꿈을 심어 주던 별들이었다. 때론 가슴 격한 설움을 달래 주기도 하던 하늘의 별이었다. 효정이와 나는 일어서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인왕산의 형상이 아슴푸레하게 잡힌다. 먼 데서부터 하늘이 열리며, 별빛이 초롱거리며 살아나고 있다.
  "됐다. 이제 우리 그만 돌아들 가자 ! 누나, 정말 너무 고마웠어요. "
  그들은 일어서기 전에, 옷을 건네주며 인사말을 해 댔다. 나의 옷을 입혀 주었다. 셋이 모두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며 고개까지 꾸벅거려 인사를 해댔다. 그리고는 조용히 손을 흔들어 주며 응봉 고개를 넘어갔다. 나는 그들이 떠난 뒤부터 물 먹은 솜처럼 온 몸이 나른해져 왔다. 그러면서,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지면서 삭신이 뒤틀리며 쑤셔 오기 시작했다. 비록 처녀성을 잃지는 않았지만, 소녀 시절의 소중한 순결이 바람처럼 날아가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하여, 정녕 나무에 기댄 자세 그대로 다시는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 가장자리로부터 뭉게 구름이 피어 오르며 치솟았다. 그러더니만, 여기저기서 어둑어둑해져 오더니,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책에서 배운 적이 있는 지형성 강우였다. 갑자기 바가지로 물을 들이붓듯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를 피한답시고, 해묵은 소나무 아래에 섰지만, 순식간에 속옷까지 죄다 젖어 버렸다. 폭우를 맞는 동안은 등줄기가 내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는 20여 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런 뒤엔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이 드러났고, 뜨거운 햇살이 작열했다. 파란 하늘에 작열하는 태양을 바라보는 순간, 응봉 계곡의 일들이 어쩌면 환상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자정 무렵이다. 효정이와 나는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창 밖에는 수많은 별들이 살아나 빛을 뿜고 있다. 빼꼼히 열린 창문으로 인왕산 자락을 흘러내려 온 청아한 산공기가 밀려든다.

  "유림아, 이 정도면, 인계 작업은 끝났지 ? 어머, 저녁 안개가 골목으로 흘 러들고 있네. 오늘 저녁은 제법 정취가 서린 밤이 될 것 같애. 그럼 수고      해. "
  유리문이 열렸다 닫히며, 양선배는 골목길로 사라져 간다. 몇 차례의 손님들이 다녀간 뒤였다. 유리창 밖으로 내어 뿜는 수은등의 불빛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물품 출납 장부를 뒤적거리며, 매상 실적을 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방울 소리가 울리며, 채화백이 유리문을 들어섰다. 곁에는 처음 보는 30대의 중년 여인이 생글거리며 나를 보고 있다. 남색의 미니 스커트에 흰 색의 블라우스 차림이다. 채화백은 코를 벌름거리며 여인을 향해 말했다.
  "이봐, 신여사 ! 잠시만 길 건너의 동백 카페에서 기다려 줘. 내 잠시 이    곳에서 미술품 심사할 것이 좀 있거든. 끝나는 대로 곧 갈 테니까. 조금 시    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려 줘. 그럼 잠시 후에 봐. "
  여인은 고혹적인 미소를 띠며, 고개를 까딱거리고는 유리문을 나선다. 채화백은 곧 머리를 돌려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홍양, 주옥란이라는 모델한테 연락해 봤어 ? 오, 그래 ? 저 암실 안에서   대기중이란 말이지 ? 역시 홍양이 최고야. "
  그는 손을 한 번 들어보이곤 암실로 들어간다. 암실문이 닫히고 나자 실내는 정밀에 휩싸였다. 거리를 누비는 연인들의 몸짓과 어우러져 두 달 전 그와의 면회 장면이 떠올랐다. 외박 신청을 한 지 20여 분만이었다. 반듯한 군복 차림의 종환이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얼굴과 눈빛에는 반가움이 넘쳐 흘렀다. 그러한 그의 표정을 보는 나의 마음도 날아갈 듯이 기뻤다. 부대를 벗어나 철원 평야에 들어서니, 저녁 6시 무렵이었다. 논마다 심겨진 모가 불어오는 바람결을 타고 끝없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개구리의 울음이 펼쳐진 평야면을 타고 정겹게 흘렀다. 광막한 평야면 위로는 구름이 낮게 깔려 적요로이 흐르고 있다. 유년 시절 내내 듬뿍 젖어오던 시골의 정취였다. 논둑에 나란히 앉아, 졸졸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유림아, 지난 번에 만나고 한 달만이지 ? 꽤 오래 된 느낌이야. 잡념이 파 고들 틈이 없는 곳이 병영 생활이거든. 그간 너는 어떻게 지냈었니 ? 확실히 더욱 이뻐져서 못 알아볼 지경이야. "
  그는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레 나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따스한 그의 체온이 좋아, 나도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매를 닮은 쏙독새 두 마리가 평야 지대를 저공으로 날며, '쏙쏙쏙 촉촉촉' 울어댔다.
  그가 지난 달부터 맡은 일은 전방 진지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서 그의 부대원들은 중장비를 동원해 산야를 깎아야만 했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그는 비무장 지대의 접경지에서 많은 인골(人骨)을 발굴했다. 인골을 발굴할 때마다 생전의 그들의 직업과 역할이 무엇이었을까를 헤아려 보았다.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상상이 가지 않는 인골들이었다. 결국 종환의 손에 발굴된 그들은 주인 없는 싸늘한 인골들일 따름이었다.
  종환은 인골이 집중적으로 발굴될 때마다 위령제를 지내자고 건의했다. 부대장은 의외로 선선히 승낙해 주었다. 종환은 위령제를 지낼 때마다 인골들의 영혼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위령제를 지내야만 속이 후련해지며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했다. 인골들의 영혼을 말할 때의 그의 눈빛은 아무리 봐도 신들린 눈빛이었다. 신이니 영혼이니를 말하는 그에게서 이질감을 못 느끼도록 나는 어느새 동화되어 있었다. 내 스스로를 돌이켜 봐도 놀라운 변화였다.
  밤이 이슥할 무렵에야 철원 시내의 여관에 들어섰다. 침상에 올라 알몸으로서로를 탐닉하며, 그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즐거운 이야기들의 연속이었다가, 그는 표정을 굳히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유림아, 결혼은 천상 우리 둘만 조용히 산사(山寺)를 찾아가서 해야 할까   봐. 벌써부터 부모님께 네 얘기를 했었어. 부모님 모두 부모 없는 며느리는    맞아들이지 않겠다잖아 ? 내가 너를 포기할 수 없는 마당에, 별 수 있니 ?    우리라도 산사를 찾아가 식을 올릴 수밖에는. "
  나는 또 하나의 단절된 벽을 느껴야만 했다. 일생 일대의 결혼식인데, 주위의 축복을 받지 못하다니 ? 시간이 걸리더라도 떳떳이 결혼을 하고 싶다. 일단 내가 종환이의 부모를 만나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무참히 모멸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들을 설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내가 종환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를 위해서라면, 나의 자존심은 기꺼이 바람에 날려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설득을 못 시킨다면 말이다. 내게는 며느리가 될 만한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셈이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슬그머니 설움이 핏물처럼 끓어 올랐다. 가슴을 적셔 오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나는 절망감에 젖어, 전신이 노곤해진 상태로 그를 받아들였다. 스산한 심경 때문이었는지 그의 애무가 진해질수록 설움이 핏물처럼 배어 들었다.
  암실문이 열리며, 채화백과 주옥란이 희희덕거리며 계산대 앞으로 걸어온다.
  "홍양, 당분간 내가 주양을 모델로 쓰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다 음에 저녁 한 끼 살게. 그럼, 다음에 봐. "
  채화백은 주옥란을 데리고 유리문을 나섰다. 그 사이에도 미술학도들이 너댓 명이나 재료며 기자재를 사 갔다. 손님들이 있을 땐 붐비던 실내였지만, 빠져 나가고 나면 금세 정밀이 밀려든다. 얼핏 눈을 들어 밖을 내다보니, 홍섭이가 막 가게문을 들어서고 있다. 습관적으로 그는 두 통의 필름을 맡기고는 벽면으로 걸어간다.
  예상대로 그는 채화백의 '시공을 초월한 도회 풍경'이란 작품 앞에서 넋을 잃고 있다. 작품을 스쳐 가는 그의 눈빛에서는 파르스름한 광채까지 일고 있다. 그의 눈빛이 지나는 자취마다 식물의 싹이 트고, 바람이 불어 나오는 느낌이다. 그의 눈빛은 열정이었고, 열정에 타는 화가는 아름다운 자연인이었다. 저러다간 필시에 사람마저도 그림에 휩쓸려 들어가 버리지는 않을는지 ? 아뭏든 나는 그의 열정이 좋았다. 신예로서 중견의 기량을 준비해 가는 삶의 방식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갑자기 전화기가 울어댔다. 전화기를 통해 울려 나오는 목소리는 효정이었다.
  "언니, 나야. 나 어쩜 좋아 ? 계속 구토가 치밀어 오르길래, 병원에 들렀더 니 임신이래잖아 ? 정말 화가 나고 나 미쳐 죽을 지경이야. 유반장 그치는    나 몰래 사직서를 내고는 외국 회사로 날아 버린 거 있지 ? 언제적 일이냐    구 ? 사흘 전에 출국했다는 걸 나도 조금 전에야 알았어. 어쩜 내 인생이     이 모양인지 정말 미쳐 버리겠어. 언니, 제발 말 좀 해 줘. 이제 난 어쩜 좋   겠느냐구 ? "
  효정이와의 통화를 끝내고, 계산대에 앉아 있으려니까 가슴이 답답해져 오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왜 이렇게 현실이 고달프고 암담한지 그저 가슴에 구멍이 펑 뚫린 느낌이다. 이렇게 방향성 없는 표류의 끝은 어디로 통할까 ? 늘상 철학적으로 거론되곤 하던 인간 실존의 무게는 어디에 가야 느껴질 것인가 ?
  "유림씨 !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요 ? 저는 한라미술대전에 출품할 작품 준비 관계로 당분간은 못 들를 것 같군요. 이건 제가 유림씨께 드리는 선물   입니다. 부담스러워하실 내용은 아니니까, 그건 염려 않으셔도 돼요. 그럼,    천천히 뜯어 보세요, 안녕. "
  언제나 쾌활한 표정의 홍섭은 나와 악수를 하고는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계산대 위에는 정방형으로 포장된 액자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홍섭이가 두고 간 선물이었다. 포장지를 풀자마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액자에는 수려한 한국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작품의 무대는 매화도 응봉의 산골짜기였다. 어쩜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 홍섭이가 어떻게 매화도를 알며, 매화도의 진경 산수도를 내게 선물할 생각을 했을까 ? 생각할수록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벽시계를 보니까, 어느덧 아홉 시에 가까웠다. 퇴근 준비를 해야 했다. 홍섭이가 준 액자를 보자기로 싸려는데, 액자 뒷면으로부터 쪽지 하나가 떨어진다.

유림씨 ! 빙산의 일각이긴 하지만, 저는 이제 채화백 화풍의 진수를 파악했어요. 저는 이제 더 여기를 방문할 이유가 없어진 셈이죠. 왠지 유림씨의 얼 굴을 보노라면, 어린 시절의 매화도의 소녀의 얼굴이 떠오르곤 해요. 매화도 의 소녀가 누구냐구요 ? 그건 제 가슴 속의 비밀이예요. 하지만, 유림씨껜 털어 놓고 싶군요. 소년 시절에 제 가슴을 송두리째 뒤설레게 했던 매화도 산 속의 누나였었다구요. 제가 괜히 엉뚱한 얘기를 늘어 놓았군요. 이제는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 없는 인생이군요. 왠지 소녀의 얼굴과 유림씨의 이 미지가 많이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곤 했어요. 부디 저의 엉뚱한 생각을 질 책하진 말아 주셨으면 해요. 왠지 가장 비슷한 이미지의 여인께 매화도의 진경 산수도를 드리고 싶었어요. 부디 사귀시는 분과 좋은 인연이 맺어지기를 빌게요, 안녕.
- 민홍섭 드림 -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도저히 숨이 막혀 못 견딜 지경이었다. 어쩜 홍섭은 진작부터 나의 정체를 알고 접근했던 걸까 ? 올 때마다 누드 필름을 맡긴 것도 또 다른 이유 때문이었을까 ?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속옷까지 죄다 벗겨진 것만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니면, 이런 모든 일이 정말 우연이었을까 ? 아무리 생각해도 뭐가 옳은 판단인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 때 전화벨이 다시 요란하게 울렸다.
  "유림아, 나야. 여기가 어디냐면 육군병원이라구. 나 원래 다음 주에 휴가   나가기로 되어 있었잖니 ? 그런데, 물자 수송을 하던 중에 그만 브레이크가   파열되어 버렸어. 그 바람에 트럭은 골짜기로 처박혔고, 나는 대퇴부 골절을   입었어. 많이 부러졌나 봐. 최소한 두 달은 입원해야 된 댔어. 휴가는 다 날   아갔지만, 폐인이 안 된 것만 해도 위령제를 부지런히 올렸던 덕인 것 같애. 틈 나는 대로 면회 와, 안녕."
  오늘은 이래저래 마음이 너무나 혼란스럽다. 뭐가 뭔지 머리가 핑글핑글 돌 지경이다. 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를 채운 뒤 골목길에 들어섰다. 서늘한 인왕산 바람이 골목길을 어루더듬어 주고 있었다. 화방을 지나 남쪽으로 난 첫 사거리의 초입께였다. 현대 아파트 12동 107호 앞에 구급차가 경적을 울리며 들어서고 있다. 107호에는 채화백이 살고 있는 곳이어서, 골목을 지나갈 적마다 눈여겨 보곤 했다. 왠지 섬뜩한 직감이 와 닿았다. 뛰다시피 그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구급차에는 담가에 실려 온 채화백이 막 옮겨지고 있었다. 채화백의 머리에는 온통 붕대가 칭칭 동여 매어져 있었다. 그리고, 붕대 곳곳에는 혈흔이 낭자했다. 주민들과 경비간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바로 십여 분쯤 전이었죠. 하도 비명 소리가 요란하기에 달려가 보니 이   지경이었어요. 화가라고 들었는데, 여자 관계가 얼마나 복잡했는지 몰라요.    아마 오늘 일도 화가와 관계를 가졌던 여자들의 남편들이 사주한 폭력배들    의 짓이래나 봐요. 험상궂은 패거리들이 아마 대여섯은 되었던 것 같네요.     신고를 하고 형사들이 달려왔을 땐, 이미 그들이 도주한 뒤였죠. 아무래도 생명을 건지기는 어려울 것 같죠 ? "
  머리가 너무나 어지러운 나머지 구토가 치밀어 오르려고 했다. 전봇대 뒤를 찾아 억억거려 보았지만, 정작 토사물은 나오지 않았다. 잔뜩 냉기를 품은 인왕산 바람이 옷자락을 풀어 헤치며 마구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