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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꽃, 바람에 휘날리다
손정모(孫廷模)
은주는 작년 12월의 겨울에, 쌍계사의 불일 폭포에서 빙벽 타기를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빙벽 등반은 고려대 산악회에서 주관했고, 그녀는 고려대
1학년생으로서 산악회의 정회원이었다. 등반에 있어서, 수준급인 그녀는 나와 사귄
지 근 1년째가 되는 나의 연인이었다. 바람에 휩쓸린 자일이 뒤엉키는 통에, 균형을
잃고 헛 발을 내딛으며 떨어진 거였다. 싸늘한 암반으로 떨어져 내린 순간, 그녀의
두개골은 엉망으로 파열되어 즉사했노라고 산악회장은 말했다. 사고는 12월의 마지막
토요일의 오후 4시를 막 넘어서던 시점이었다.
비보를 듣자마자, 나는 고속 버스에 몸을 실었고, 실내에는 녹화 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다. 미스 코리아 선발 대회의 녹화물이었고, 얼굴이 어슷비슷한 미녀들이
연달아 엉덩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연신 마음은 은주에게 머물렀지만, 나의 눈은
어느새 미녀들의 몸매로 이끌리고 있었다. 혼란한 마음을 추스리려고, 눈까지 감고
뒷머리를 받침대에 밀착시켰다. 하지만, 머리 속으로는 여전히 어느 여인이 결선까지
남게 될 것인가하고 궁금하게 여겨졌다.
"이야, 정말 잘 빠졌네 ! "
옆 좌석에 앉은 중년의 사내가 연방 감탄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중년
사내에게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은주를 찾아 내려가는 나에게는 선발 결과가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 이제 나는 짝 잃은 기러기가 되었는데 말이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건대, 은주와 나는 누가 보더라도 다정한 연인
사이였다. 은주를 두고 내 친구들은 만날 때마다 나를 부러워하곤 했다.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의 애인은 아무런 조형미가 없다는 거였다. 은주의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부러움과 시샘이 뒤따랐지만, 그녀는 일체 초연한 표정이었다.
나의 눈에 잔상으로 남은 은주는 봄 바람에 꺠어나는 매화꽃처럼 청순한
이미지의 여인이었다. 그녀와 나는 수시로 대화를 나누며 교정을 거닐었고, 주말이면
산야로 나가 하늘을 우러렀다. 그녀와 나의 이러한 평범한 생활조차도 주변의 친구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은주와 나의 륙색(rucksack)에는 언제나 싱싱한 과일들과
음료가 풍성했었다. 거니는 벌판은 광활했고, 곳곳마다 솔숲이 푸르렀다. 나는 은주보다
두 살이 많은 대학 동문이었기에, 은주와는 환상적인 커플(couple)의 조건이 되었다.
바다를 향해 마주설 때면, 하늘은 언제나 비췻빛으로 열려 그녀와 나를 맞아 주었다.
그녀의 실력을 믿었기에, 빙벽 타기가 그녀와 나를 갈라 놓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내게 남겨 놓은 것은 처절한 공허함이었다. 나의
눈길이 닿는 시계(視界)에서 은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것은 차마 생각하기조차도 끔찍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서둘러 그녀가 남겨 놓은 공허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
벗어나고 싶지 않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녀를 산야에 묻고, 상경 열차에 올라서니
벌판은 어느새 하얗게 얼어붙고 있었다. 정말로 어깨가 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사지에 그처럼 힘이 빠질 수가 없었다. 경적을 울리며 열차가 고개를 넘을
때마다 감은 눈 가로 눈물이 맺혀 흘렀다.
거침없이 휩쓸려 가는 세월이었다. 은주가 죽은 지 넉 달째가 되던 지난
4월말이었다. 은주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녀의 묘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야간
통일호 열차편으로 상경하면서 나는 끝없이 은주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밀양을
지나면서부터 빈 자리가 생기더니, 통로 건너편의 여인이 눈에 띄었다. 그래, 눈에
띄었다는 말 이외에는 다른 적당한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40대 초반의, 미모가 수려하면서도
위엄마저 내풍기는 검정 원피스 차림의 여인이었다. 여인은 첫눈에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미모였었고, 가끔씩 섬광처럼 눈빛을 쏟아 내곤 했다. 회상컨대, 청량리역
광장에서 맞닥뜨릴 때까지 열차에서는 딱 두 번만 정면으로 시선을 나누었었다.
청량리역 출구를 빠져나와 광장의 중앙 지점에 들어섰을 때였다. 놀랍게도
여인과 나는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부지불식간에 나의 입에서 독백처럼 불쑥 말이
튀어 나왔다.
"어, 여기서 또 만나게 되었군요."
"어머, 정말 그렇네요. 아마 밀양을 지나면서부터 본 것 같네요.
첫눈에 수심이 가득한 안색(顔色)으로 느껴졌기에, 대번에 기억이 되더군요. 바쁘지
않으시다면, 잠시 카페에 들렀다 가지 않을레요 ?"
솔직히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진작부터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렇게 상황이 구체화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었다. 쌍화차를 들면서부터 나는 외로움이
절절한 심정으로 은주의 묘지를 다녀온 얘기를 했다. 벌써 제법 잡초가 어우러져
묘지를 감쌌더군요. 그녀가 평소에 좋하하던 장미꽃을 한 아름 무덤에 올려 놓고는
과거를 반추하다가 돌아왔었죠. 생각처럼 과거의 추억이 잘 떠오르더냐구요 ? 결코
그렇진 못했어요. 회상을 하다가는 자꾸만 가슴이 막혀 울먹이는 바람에, 제대로
과거를 추스리지도 못했어요. 문득 궁금해서 묻겠는데요, 실례지만 아주머니의 연세는
몇이세요 ? 갓 마흔이라구요 ? 그런데도 믿기지 않을 만큼 젊게 보이군요. 여인은
잠자코 고개를 끄떡거리며, 손지갑을 펼치더니만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담배를
권하는 여인의 몸짓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눈부시게 수려한 여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담배 연기를 몇 모금 토해 낸 뒤에, 여인은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튀김
새우를 집어 드는 여인의 손결이 조각처럼 섬세하고 고왔다. 문득 여인의 섬세한
손길에서 선율이 느껴지면서, 손등에 입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술잔이 오가면서부터는
아카시아꽃의 향기를 닮은 여인의 향수 내음이 자꾸만 날아 들었다. 그러면서 나의
눈길은 얇다란 원피스 자락에 감춰진 여인의 젖가슴과 둔부에 자꾸만 머물렀다. 나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 반면에, 여인의 얼굴은 처음과 같이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나의 얘기가 끝나기를 기다려 여인은 서경숙이라고 이름을 밝히며, 자신의 얘기를
들려 주었다. 여인은 상계동에서 음악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이라고 했다. 고등학생들의
대학 입시를 맡아 지도한다는 거였다. 끓어 넘치던 자존심으로 말미암아 혼기를 놓쳐
버린 뒤에는 자유롭게 산다고 했다.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으므로, 무엇 하나 걸릴
게 없이 편하게 지낸다는 거였다. 이 번의 지방 여행은 진양호에서 음악적인 영감과
감수성을 얻기 위한 거라고 했다. 일 주일간을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다가
올라오던 중이라고 했다. 문득 나에겐 여인의 개성 있는 삶과 넉넉함이 부러움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미혼 여인이라는 점에 있어서, 자꾸만 원초적인 질문이
떠올라 그만둘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나는 몇 번이나 질문하려다가 그만둔 물음을
던졌다. 서선생님, 혹시 지금껏 남자와의 교접 욕구는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것도 잠시였다.
여인은 잠시 들고 있던 소설책 한 권을 건네주면서 화제를 바꾸었다. 현종씨가 내게
관심이 있다면, 책의 뒷면에 전화 번호가 있으니까, 다음에 연락 주세요. 나의 아파트로
한 번 초대할게요. 내친 김에 노래방에까지 같이 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말이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숨긴 채, 악수만 하고 헤어져서 돌아섰다.
계절이 바뀌어 어느덧 5월에 접어들었다. 서울 근교의 산야는 어디를
가나 곳곳에 신록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었다. 여인과 헤어진 지 이제 닷새만이었다.
아침에 여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셋째 주의 토요일 아침에 그녀의 집으로 초대하겠노라고
했다. 며칠 동안에 나는 그녀가 건네준 소설책을 면밀히 읽어 나가기로 했다. 여인이
준 책을 펼쳐 들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컬러(color)로 새겨진 명함이 떨어져 내렸다.
나중에 갈무리해 둘 요량으로, 명함을 우선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소설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안젤리나의 연인'이었다. 여인이 내게 책을 주었을 때는 분명히
뭔가 뜻이 있었을 거라고 여겨졌다. 그랬기에, 눈에 불을 켜고 숙독에 숙독을 거듭했다.
반나치 운동을 벌인 안젤리나라는 여인이 조국과 부모 및 연인마저도 결국은 버린다는
거였다. 그런 다음에, 수녀로 변신하는, 파란만장한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 낸 작품이었다.
서경숙과 안젤리나는 자유로운 여성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다른 점이
너무나 많았다. 책을 거듭 읽었지만, 여인이 내게 준 의미를 알아낼 수 없어, 가슴이
답답했다. 이따금씩 떠오르는 은주에 대한 추억으로 인해, 근래에도 나는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묘하게도 은주의 얼굴이 사라질 때면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름
아닌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검정 원피스 차림의 여인을 말함이었다. 청량리역에서의
만남 이후로, 나는 부쩍 여인의 환상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사무치게 외로운 밤이면,
나는 거울 앞에 선 채 여인을 떠올리며 용두질을 해댔다. 그러다가 문득 여인의 미소
짓는 얼굴이 새겨진 명함에 생각이 이르렀다. 나는 허겁지겁 책상 위를 비롯하여
서랍 등을 뒤적이며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심지어 쓰레기통과 입지도 않은 옷의
호주머니까지 뒤졌건만, 끝내 명함을 찾지 못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며,
나는 점차 매사에 의욕을 상실해 갔다. 이 상태로는 내가 설사 여인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막막하기만 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정신을 멍들게 하는
것일까 ? 나의 이러한 심리 변화의 근저(根底)에는 분명 뭔가가 강력히 작용하고
있었을 터였다. 혹시 그 원인들 중의 일부가 여인으로부터 받은 소설책에 내재된
것은 아니었을까 ? 여인의 아파트를 방문하기로 한 하루 전 날이었다.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목욕을 하고, 면도를 하고 세탁한 양복을 꺼내 입었다가 벗었다가를 반복했다.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빗질도 정성을 들여 꼼꼼히 했다. 방 문을 여닫으며 방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방으로 자꾸만 안절부절못하여 들락거렸다. 그러면서도 나는 거듭
회의에 빠졌다. 내가 굳이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뭘까 ? 내가 원하는 것은
여인과의 정상적인 만남인가 아니면 육체적인 교접일까 ? 내가 여인과의 교접을 원한다고
해서 그녀가 선뜻 나의 청을 들어줄지도 미지수였다.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확실한 것은 대관절 하나도 없었다. 밤 8시 무렵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니까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어 보니, 윗층에 사는 40대 중반의 통장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홀로 지내는 사내들만 찾아 다니며 추파를 보내는 묘한 여자였다. 언제나
입보다는 눈이 먼저 생글거리며 웃었다. 여자는 종이 뭉치를 건네주며 말했다.
"총각, 이게 이 번 달 반회보라구. 늘상 애인과 붙어 지내더니,
요즘은 애인이 안 보이는 것 같애. 애인과 헤어졌어 ? 혹시 외롭다면 내가 ……"
말이 길어지기 전에, 나는 얼른 회보를 받아 들며 대문을 닫아 버렸다.
하지만, 나는 통장을 괄세할 입장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전문대 1년생인, 그녀의
맏딸을 지도해 주는 시간제 가정 교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근래에는 심신의
상태가 엉망이어서, 통장을 내쫓다시피 하여 문을 닫아 버린 거였다.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나는 상계동 주공 아파트의 7층에 올라 초인종을
눌렀다. 여인은 이내 문을 열면서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았다. 나는 원예점에서
산 백합과 장미 등으로 어우러진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여인은 연두색 민소매 셔츠에
남색 미니스커트 차림새로 달려나왔다. 여인은 꽃을 받아 들며 말했다.
"어머나, 눈부셔라 ! 그렇잖아도 미남이신 데다가 이렇게까지 치장을
하셨으니, 너무나 눈부셔서 눈을 못 뜰 지경이예요. 게다가 꽃도 주실 줄도 아시고,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여인은 경쾌한 몸놀림으로 꽃다발을 받아 향기를 맡더니, 곧장 피아노
위의 화병에 꽂았다. 여인은 준비해 둔 과일과 음료들을 진열해 놓은 상을 거실로
들고 나오며 말했다.
"쉽게 찾아 오셨군요.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았어요 ?"
"구획 정리가 잘 되어서, 찾기가 쉬웠어요. 그간 별고 없었어요
? 만나뵌 지 얼마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무척 보고 싶었어요."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으며, 여인은 양 손으로 나의 오른 손을 감싸
쥐었다. 여인과 나는 딸기와 파인애플을 먹으면서 서로를 따뜻한 눈망울로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이 어딘지 친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여인의 눈빛은
은주가 나를 바라볼 때면 취하던 바로 그 눈빛이었었다구. 눈빛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니,
또 있었다. 대학을 갓 입학한 신입생 시절이었다. 입주식 가정 교사로 머물던 방배동에서였다.
당시에 여고 2년생이던 인혜의 눈빛이 또한 그랬었다. 입주한 지 아마 한 달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과외 지도를 받고 난 뒤에, 인혜는 방을 나가려다 말고 나에게 다가
왔다. 인혜는 나의 등에 젖가슴을 밀착시키며, 나의 가슴에 손을 넣어 상체를 더듬기
시작했다. 사춘기를 맞는 소녀의 전형적인 몸짓이려니 여기고, 무안해 하지 않게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지내고 보니, 과연 사춘기 소녀의 한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불과했었다.
여인은 금세 향긋한 작설차를 내왔다. 차에서 피어 오르는 증기가 부드럽게
실내로 퍼져 나갔다. 거실의 벽면에는 각종 음악 콩쿠르에서 수여받은 상패와 상장들로
그들먹했다. 여인은 국내에서는 제법 이름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여인은 수시로 악곡의
영감을 살리러 주로 호수나 해변을 산책한다고 했다. 수면에서 반사되는 햇살이나
수면으로 번져 나가는 수파(水波)를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고 했다. 여인은 내게
그윽한 눈빛을 드리우며 말했다.
"나는 현종씨의 상처 입은 눈빛을 대하자마자 마구 가슴이 떨려
왔었어요. 그러니까, 열차 안에서는 딱 두 번이었죠. 한 번은 밀양을 통과하는 순간이었고,
나머지는 대전을 눈 앞에 둔 지점에서였죠. 그 때 제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쩜
사내의 눈빛이 저렇게도 처절할 수가 있을까하고 말이예요. 용케도 청량리역에서
현종씨가 일어서기에, 저도 뒤따라 일어나서 우연인 척 광장에서 만났던 거죠. 처절함이란
왕왕 예술 세계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기에, 댁과 대화를 나눠 보고 싶어지더군요.
행선지가 서울까지이면 대화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둘 작정이었죠. 나는 현종씨의
눈빛을 떠올리며 내내 차이코프스키의 6번 교향곡인 비창을 생각했었죠."
잠시 여인이 몸을 일으켜 전축을 틀자마자, 이내 비창의 장중한 음률이
흐르기 시작했다. 53세의 나이에, 콜레라로 숨지기 직전까지 차이코프스키가 혼신의
정열로 만든 최상의 걸작인 비창이었다. 러시아의 전형적인 침울한 서정에, 인생의
부정적인 정서가 어우러진 이 악곡을 누가 모르겠는가 ? 특히, 인생의 불안이나 공포,
절망, 패배 등이 설운 정서로 표현된 악곡이잖은가 말이다.
비창의 악곡이 흐르면서부터, 나의 의식은 채색 영롱한 과거의 터널
속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무래도 꿈만 같았던 7개월 전인 작년 10월 하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날은 단짝인 성호의 전세집에서, 성호와 나는 초저녁부터
술에 듬뿍 취해 있었다. 둘 다 주량은 얼마 안 되었지만, 이미 주량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 상태였었다. 온 세상이 그렇게 포근하고 아늑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하늘의
구름 속을 둥실둥실 떠 가는 듯한 몽환의 상태에 젖어 있었다. 이 때 성호가 눈빛을
빛내며 기발한 제안을 했다.
"형준아, 너는 나의 능력을 알지 ? 어떠한 딸애(그는 여대생을
이렇게 불렀다)들도 30분만 내 얘기를 들으면,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들 자신이 있다구.
내 말이 허풍으로 들린다면, 당장 아무나 불러 와 봐. 시범을 보여 줄 테니까 말이야."
"성호야, 만약에 너의 말대로 안 되면, 어떻게 할 거야 ?"
"헛소리하고 자빠졌네. 당장 아무 년이나 불러 봐. 너의 눈 앞에서
보여 줄게. 내 말이 허풍이라면, 나의 연인 영옥이를 네 앞에서 발가벗도록 해 줄게,
됐어 ?"
나는 취기도 올랐지만, 성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솔직히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즉시 핸드폰으로 은주와 영옥을 포함한 써클 여학생 다섯을 불렀다.
용케도 반 시간이 지나자, 여학생 다섯이 모두 도착했다. 나는 거실에서 텔레비전만
들여다보고 있었고, 성호는 여학생 다섯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 앉혔다. 성호는 서서히
무게를 잡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뭔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눈빛을
빛내며, 성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수시로 맥주잔을 건네고 있었다. 대략 20분쯤
경과되었을 때였다. 성호는 오디오를 켜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나는 취기로 인해, 자꾸만 눈이 감기려고 했었지만, 억지로 버텨 내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을 보다가 잠시 눈이 감겼을 때였다. 갑자기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스럽게 느껴져
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성호와 함께 여학생 다섯이 눈물을 흘리며 잔뜩 감동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성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독백처럼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생 자체가 환상일진대, 우리를 속박하는 헝겊 조각들을 아직까지도
소중하게 걸칠 필요가 있을까 ? 적어도 진정한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오늘 밤만은 바람에 흩날리는 도화(桃花)의 꽃잎처럼 가식을 훌훌 떨쳐 버리자구."
말을 마치면서 성호가 웃도리를 벗기 시작하자, 일순 실내는 정적에
휩싸였다. 바로 이 때부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여학생 다섯이 거의
동시에 일어서더니, 눈물을 쏟아 내며 웃도리를 벗기 시작한 거였다. 은주까지도
일어나 브래지어를 푸는 모습을 보게 되자,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잠시 후에
여인들은 속치마만 걸친 반라의 몸으로 성호와 어울려 원무(圓舞)를 추기 시작했다.
나도 숨이 막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일어나 상체를 드러내곤 일행과 합류하여
혼몽한 정신으로 원무를 추기 시작했다. 여인들의 덩그렇게 드러난 젖가슴이 상체에
와 닿을 때마다 아뜩한 현기증을 느끼곤 했다. 그 날 밤을 지새도록 오디오에서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 구름 속의 학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여인은 그윽한 눈빛을 빛내며 내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악곡마다
작곡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했는데, 비창을 현종씨가 듣게 되어 무엇보다도 기쁘네요.
왜냐구요 ? 댁의 처절한 영혼을 말끔히 치료하는 약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그리고,
바로 그 눈빛 말이예요. 그 눈빛이야말로 지금까지 꽁꽁 얼어 붙었던 제 가슴을 녹여
준 원천이었죠. 그랬기에 현종씨를 꼭 초대하고 싶었어요. 여인은 칵테일잔과 양주병을
꺼내 오더니, 술잔을 채워 내게 건넸다. 향긋한 술 내음이 실내에 돌며 여인과 나는
술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지난 밤까지의 정신적인 쇠잔함이 가셔지면서 일시에 맑은
기운이 전신으로 뻗쳐 올랐다.
여인의 청초한 눈빛과 미니스커트 아래의 늘씬한 각선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나는 생각했다. 상경 열차에서 여인과 나의 눈길이 마주친
것은 혹시 전생의 인연은 아니었을까하고 말이다. 여인은 나의 처절한 눈빛을 보고는
나의 영혼을 달래 주고 싶었노라고 했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집으로 나를 초대까지
한 거였다. 그런데, 내가 여인에게 해 준 것은 뭔가 ? 여인의 의도가 헌신적인 사랑이라면,
지금의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걸까 ? 마음에 느낌이 일자,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서선생님,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지만, 제가 선생님께
드릴 것은 없다구요. 저는 단지 연인을 잃은 슬픔만 고백한 거였고, 선생님처럼 베풀
것은 없는 몸이라구요."
여인은 깔끔한 맵시로 미소를 짓더니, 나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세요. 저의 초대에 응해 주셨고, 풍성한 꽃다발까지
선물로 주시지 않으셨어요 ? 그리고, 무엇보다도 청순하면서도 탐미적인 눈빛이 너무너무
제 마음에 들어요. 거듭 말씀 드리지만, 댁의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어요. 삶 자체가 매사에 반드시 특정한 동기가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 설사 별다른 동기가 없었다더라도 이렇게 만난 것 자체가 새로운 동기가
아니냐 말이예요."
나는 얼굴을 붉히며, 술잔에 든 담황색의 양주를 대꾸 대신으로 들이켰다.
나는 이렇게 편안하고 아늑한 세계가 존재하는 줄을 이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마음
같아서는 몇 달간이라도 여인의 품 속에서 잠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봄 날의 강 언덕에
휘감기는 아지랑이처럼 술 기운이 아른하게 퍼져 올랐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몇
십 년의 세월 동안을 사귀어 온 지기 같은 생각이 들었다. 두 병째의 양주에 이르자,
여인의 얼굴에도 약간의 홍조가 일기 시작했다. 여인은 다소곳이 일어나, 오디오의
음반을 갈아 끼웠다. 이내 블루우스 계통의 춤곡이 흘렀다. 여인은 팔을 뻗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자연스레 여인과 나는 서로를 부둥켜 안은 채 곡조에 따라 스텝을
밟았다. 가끔씩 서로의 뺨이 닿을 때마다 주기로 달아오른 열기를 느끼곤 했다. 여인의
몸에서는 아카시아꽃의 향기를 닮은 향수 내음이 은은히 풍겨 나왔다. 여인의 얼굴도
술 기운으로 홍조를 띠었지만, 자세만큼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통제하는 정신력 같은 것이 내비쳤다. 취중이었지만, 나는 여인의 분명한
마음을 알고 싶었다. 오디오에선 여전히 블루우스풍의 느린 춤곡이 흐느적거리며
흘러 나오고 있었다. 간헐적인, 여인의 하체와의 접촉과 아카시아꽃의 향수 내음으로
나의 성기는 벌써부터 발기되어 있었다. 나는 여인의 귓전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선생님은 정말 분위기와 기품을 갖춘 훌륭한 여인이세요."
이렇게 말하며, 나는 뺨을 맞을 각오를 하면서 여인의 엉덩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여인은 빙긋이 웃더니만, 천천히 얼굴을 나의 품에 묻어 왔다. 돌연히
나의 가슴이 쿵쿵거려 오며 은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내 앞의 여인은 서경숙이
아닌 은주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제 술 기운이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올랐기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예전의 은주에게 했듯이, 나는 여인의 무릎으로부터 허벅다리를
더듬어 올라갔다. 이제 여인은 두 손으로 나의 목을 껴안은 채 스텝을 밟고 있었다.
엄밀하게는 스텝이랄 수도 없었다. 그저 왔다 갔다하며 거실을 돌며 춤을 출 따름이었다.
마침내 여인의 속옷에까지 손길이 닿았으나, 여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팬티 라인 안으로 손을 넣어 여인의 치모에 손이 닿는
순간이었다. 여인의 가슴이 격렬하게 쿵쿵거리면서 여인은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이것만으로도 여인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손을 빼고 물러섰다. 그러다가, 다시
포옹을 한 뒤엔 여인과 진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림의 완성을 앞둔 화가처럼 다시금
가슴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불안이 사그라질 때까지 그렇게 오래오래 나는 여인과
입맞춤을 나누었다. 오로지 들리는 것이라곤 그녀와 나의 쌔근거리는 숨 소리였을
뿐. 사방은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정적 속에 휩싸였다. 이윽고 몸을 풀고는, 시계를
본 뒤에 여인에게 말했다.
"서선생님, 정말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그립고 보고 싶을 때마다
전화 드릴게요. 건강히 지내세요."
"현종씨 ! 참으로 멋진 남자세요. 멋과 감정의 절제가 너무나 돋보여요.
내게 부담감을 갖지 말고 때때로 찾아 줘요. 그럼, 잘 가요."
여인으로부터 신림동의 나의 아파트로 돌아와 보니, 우유 투입구를 통해
쪽지가 들어와 있었다. 그 날은 토요일 저녁이었다.
현종 오빠 !
계속 전화를 했는데도, 연락이 안 닿아 이렇게 쪽지를 쓴다구. 이 번 주에는 과내
행사로 좀 바쁘거든. 그래서, 다음 주부터 지도를 받고 싶은데,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거지 ? 그리고, 이 번 주 토요일에는 오빠랑 함께 옥류계곡을 오르고 싶은데,
괜찮지 ? 그럼, 안녕 !
―
윤희 ―
윤희는 서울의 전문대학 1년생으로 아파트의 같은 동에 사는 통장의
딸이었다. 호텔 경영학과에 다니는데, 영어 실력이 기초가 안 잡혀 나의 개인 지도를
받는 중이었다. 윤희가 나의 지도를 받기 시작한 것은 대입 수능 이후부터였으므로,
대략 6개월이 경과되는 셈이었다. 윤희는 은주가 죽고서부터는 은근한 눈빛을 보이면서,
주말이면 관악산을 함께 오르자고 보채곤 했다. 현재까지의 나의 눈에 비친 윤희는
관능미를 물씬 풍기는 빼어난 미모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줄곧 내 가슴에는 은주가
자리잡고 있었기에, 윤희가 이성으로 느껴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윤희를 여동생쯤으로
대했고, 윤희도 내게 천연덕스럽게 응석을 부리며 오빠로 불렀다. 어쨌든 윤희와
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관악산 등정을 해 왔다. 통상적으로 등산을 해 온 날은
매달의 마지막 주 토요일이었다. 제4 광장과 연주암 사이의 중간 계곡이 윤희와 내가
즐겨 찾는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주말쯤에는 윤희가 아닌 '여인'과 함께 관악산을
오르리라고 별렀다.
어느새 5월의 마지막 주였다. 나는 며칠 전에 전화를 걸어, 여인과 함께
관악산을 오르자고 약속해 두었다. 도심 한복판까지 아카시아꽃의 향기가 남실거리며
흘러 드는 5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여인과 함께 제4 광장과 연주암 사이의 계곡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넉넉한 수량(水量)을 지닌 관악의 계곡은 지형적으로
흔치 않았다. 계곡수가 유난히 풍부한 그 곳은 가히 선경(仙境)이라고 할 정도로
경치가 빼어났다. 거기를 생전에 은주는 옥류계곡(玉流溪谷)이라 부르자고 했다.
거기는 커다란 바위와 해묵은 노송과 풍부한 계곡수가 어우러진 곳이었다. 또한 거기에서
은주와 내가 발가숭이로 멱감은 회수도 적지 않았다.
옥류계곡에 도착하자마자 여인은 대번에 환호성을 질렀다.
"어머나, 관악산에도 이런 곳이 있었어요 ? 관악산은 주로 사질층(沙質層)의
계곡이라 물이 괴지 않는데, 여기는 지형이 좀 다른가 봐요."
나는 즉시 응답하며 쾌재를 불렀다.
"그렇잖으면 제가 모시고 왔겠어요 ? 제가 보기로 관악의 비경
중의 하나예요. 여기 있으면 온갖 세상사를 다 떨쳐 버릴 수가 있거든요."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벌써 등산화와 양말을 벗어 든 채, 물가로 내려서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솔숲을 스쳐 지나는 바람결조차도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온 산야를 하얗게 뒤덮은 아카시아꽃의 향기가 연방 코 끝에 남실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계곡은 외진 곳이어서, 하루 종일을 기다려도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여인이 물가에 앉아 손을 씻고 있었다. 나는 잠시 너럭바위에 드러누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보이는 하늘은 끝없이 널브러진 푸른 바다로 느껴졌다. 1년
전만 해도 은주랑 같이 너럭바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었다.
문득 은주와 처음으로 옥류계곡에서 멱을 감던 날의 일이 떠올랐다.
바로 작년 이맘 때의 일이었다. 그 때도 지금처럼 푸른 하늘에 아카시아꽃이 솜털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마치 눈이라도 내린 듯이, 아카시아꽃이 온 산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흐르는 물도 너무나 맑아, 물 속을 들여다보며 은주가 말했다.
"어쩜 이렇게 맑을 수가 있을까 ? 현종씨, 수영 잘 해 ? 여기서
한 번 시범 보여 주면 안 돼 ? 뭐라구 ? 나까지 옷을 벗어야 돼 ? 싫어 ! 아니, 날더러
현종씨 앞에서 발가벗으란 말이야, 지금 ?"
은주의 말이 씨가 된 셈이었다. 그 날 은주와 나는 발가숭이가 되어
처음으로 함께 멱을 감게 되었다. 펄쩍 뛰던 형세와는 달리, 은주는 희희낙락하여
좀처럼 물에서 빠져 나올 줄을 몰랐다. 오로지 들려 오는 것은 산 속을 스쳐 가는
맑은 솔바람 소리일 뿐. 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은주의 하얀 엉덩이가 나긋거리며
물 속을 떠다니는 모습이 너무나도 귀엽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일부러 쫓아가며
소리 나게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려 주면서 깔깔거리곤 했다. 뭐가 그리 즐거웠을까
? 은주는 옷을 입을 생각도 않고서,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내게 익살스럽게 따졌다.
"우와 ! 현종씨는 왜 그리 짖궂어 ? 남의 엉덩이 갈라지면 책임질
거야 ?"
은주의 하얀 엉덩이와 매혹적인 미소는 어쩐지 아카시아꽃의 이미지와
너무도 많이 닮았다고 여겨졌다. 아마도 청순하면서도 향긋한 이미지와 걸맞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누워서 올려다보는 숲 속은 온통 하얀 아카시아꽃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꽃송이들이 휘날릴 때마다 은주의 하얀 엉덩이가 물 속을 유영하는 느낌으로
전해져 왔다. 언제나 얼굴에서 장난기가 떠날 줄 모르던 쾌활한 소녀의 얼굴이 아카시아꽃으로부터
환영으로 떠올랐다. 서서히 코 끝이 맵싸해지면서,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창졸간의
느낌이었다. 이대로 추억을 간직한 채 영영 화석이 되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갑자기 세상사가 부질없어 보이고 하찮게 여겨졌다. 정녕 이대로 은주의 추억만을
간직한 채, 눈을 감고 싶었다. 서늘한 솔바람에 실려, 아카시아의 꽃송이가 연방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어느새 눈가로 제법 눈물이 흘러 내렸나 보다. 서늘한 여인의 손이 부드럽게
나의 눈물을 지워 주고 있었다. 여인은 나의 두 뺨에 손을 갖다 댄 채, 내게 속삭였다.
"현종씨 ! 마음이 괴롭죠 ? 또 다시 옛 연인이 떠올라, 현종씨를
울리나 봐요. 우리, 언제까지나 나이를 초월하여 연인으로 남았으면 해요. 은주씨가
그립거들랑 언제라도 나를 가지세요. 현종씨가 새로운 배우자를 만날 때까지만 말이예요.
그 이후론 영원한 연인으로 남고 싶어요. 그리고, 이제부턴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나는 눈을 감은 채 조금 망설이다가, 눈을 뜨면서 말했다.
"경숙씨 ! 경숙씨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홀로 지내실 거예요 ? 다소
늦기는 했지만, 상대가 전혀 없지는 않을 텐데요."
"40대의 여자를 누가 데리고 가겠어요 ? 아기까지 달린 남자들도
재혼할 때엔 앳된 처녀들만 찾는다잖아요 ? 굳이 짝을 찾으려고만 들면 없지도 않겠지만,
절박하게 찾아 헤매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이러나 저러나 흙에서 태어난 목숨인
걸요. 생명체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게 살아야죠."
여인의 말을 듣고 보니, 내게는 여인이 삶을 풍족하게 사는 선각자로
여겨졌다. 나는 몸을 돌려, 내가 누운 너럭바위 옆에 여인을 나란히 눕혔다. 그리고는
여인의 귓전에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경숙씨, 당신과 함께 있으면, 봄 날의 따스한 햇살 속에 있는
느낌이 들어요. 현저한 나이 차이라, 아내로 맞아 들일 수는 없지만 왠지 당신을
갖고 싶군요."
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인은 맑은 눈빛을 빛내며 내게로 입술을 내밀었다.
나는 평온한 마음으로 입을 열어 여인의 혀를 받아들였다. 내가 여인의 혁대를 풀
때에, 여인도 나의 바지를 벗겨 내리고 있었다. 우윳빛이 감도는 여인의 매끄러운
알몸. 마침내 아카시아꽃의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 나는 여인의 속살이 드러났다.
탄력적으로 치솟은 여인의 젖가슴 위로 바람에 휘날린 아카시아의 꽃잎이 이따금씩
떨어져 내렸다. 여인의 나신을 바라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한 마디로
여인의 나신은 너무나도 빼어난 형상미의 극치였다. 질식할 정도의 눈부신 아름다움이었기에,
감히 손을 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여인의 배 위에 두 손을 얹은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꽃의 향기가 연신 후각을 적셔 왔다. 때마침 뻐꾸기의
울음 소리가 관악의 숲 속 여기저기로부터 애절하게 끓어 올랐다. 어쩜 저렇게도
울음 소리에 애절함이 깃들어 있을까 ? '뻐꾹 뻐꾸욱 !' 들으면 들을수록 사무치게
설운 감정이 밀려 들었다. 어느새 나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에 이슬이 맺혀 흘렀다.
뻐꾸기의 울음 소리로부터 잠재되어 있던 은주의 상실로 인한 설움이 솟구쳐 올랐다.
나도 몰래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어대었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여인은
나의 뺨을 '철썩' 소리가 나도록 매섭게 후려갈겼다. 상체를 벌떡 일으킨 여인이
눈을 앙칼지게 치켜 뜬 채 말했다.
"현종씨 ! 사람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예요 ? 아무리 사별한
연인이 사무치게 그리울지라도 이렇게까지 사람을 굴욕스럽게 하지는 않는 법이예요.
우리의 인연은 없었던 걸로 해요. 정말 해도 너무 하군요. 나 먼저 갈게요."
뭐라고 변명도 하기 전에 여인은 부리나케 옷을 챙겨 입고는 순식간에
떠나 버렸다. 나는 여인을 탓하고 싶지가 않았다. 오히려 떠나는 여인에 대해, 연민의
정마저 느꼈다. 착잡한 심정으로 옷을 추슬러 입고는, 여인의 체온이 실린바위 위에
다시 드러누웠다. 가만히 눈을 감으니, 작년 5월의 정경이 꿈결처럼 밀려 들었다.
이끼가 하얗게 말라 붙은 바위 위로 훈훈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쏴아쏴아'하며
솔바람 소리가 숲을 가로지를 때마다 눈송이처럼 아카시아꽃이 마구 휘날렸다. 은주는
옥류계곡에서 좀처럼 나올 기미가 없더니, 돌연히 비명을 지르며 달려나왔다.
"어머나 ! 현종씨, 이리 좀 와 봐. 물 속에 뭔가가 있어."
은주의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가슴이 섬뜩하여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경악에 찬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 거기에는 분명 뭔가가 있었다. 달려가 자세히
들여다본즉, 커다란 두꺼비 한 마리가 배를 불룩거리며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즉시 두꺼비를 붙잡아 손에 들고는 은주를 향해 들이밀었다.
"엄마 ! 엄마야 !"
숨넘어가는 소리로 고함을 꽥꽥 질러대며, 은주는 알몸으로 숲 속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혹시라도 숲 속에 독사가 있을까 염려되어, 나는 두꺼비를 버리고
은주를 불렀다. 은주는 금세 달려오더니, 물기를 말리고 있던 발가숭이 상태의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
"아이 ! 사람을 이렇게 마구 겁을 주어도 되는 거야, 응 ? 말 좀
해 봐. 한 번만 더 그랬단 봐라. 확 이것을 잡아 뽑아 버릴 거야, 응 ?"
은주는 사뭇 위협적인 자세로(그래 봐야 더욱 귀여워 보였을 따름이었지만)
나의 성기를 향해 두 손을 들이밀었다. 창졸간에 나는 어이가 없어, 껄껄거리며 배를
쥐고 허리를 꺾었다. 어느새 은주의 부드러운 손길이 나의 알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피부가 흥분을 하여 깨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이
지나는 곳마다 희열이 마구 소용돌이쳐 올랐다. 너무나 황홀하여 선 채로 화석이
되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은주의 애무를 받는 정경을 떠올릴 무렵에, 의식이
허물어져 내리면서 풋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비몽사몽간에 뭔가 실제로 부드러운 감촉이 피부로부터 느껴져 왔다.
가물거리는 의식 세계로부터 부드러운 감촉이 점점 또렷이 살아났다. 순간적으로
섬뜩한 느낌이 들며, 급히 눈을 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하도 놀라 자지러질
뻔했다.
"어, 윤희 아냐 ? 네가 여기는 웬 일이야 ?"
놀랍게도 너럭바위 위에는 윤희가 앉아, 나의 가슴에 손을 넣어 쓰다듬고
있었다.
"아이, 오빠 ! 날더러 여기는 웬 일이냐구 ? 내가 쓴 쪽지 못 읽었어
? 여기 이 자리는 오빠와 내가 등산만 오면 앉아 머무는 고정 자리잖아 ? 잠을 자더니,
모든 걸 잊어 버렸나 봐. 과내 행사를 마치고 오빠를 만나러 갔더니 없었고, 또 오늘이
마지막 주의 토요일이잖아 ? 우리가 지금껏 관악산을 오른 날이 바로 마지막 주의
토요일이잖아 ? 또한 관악산을 올랐다고 하면, 옥류계곡이라는 여기 이 자리에 머물렀던
것을 잊었어 ?"
내가 일어나 앉는 동안, 윤희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 잠이 든 오빠를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처음에 나는 오빠가 비관 자살을 한 거라고 믿었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오빠를
들여다보았더니, 뜻 밖에도 숨을 쉬고 있었다, 글쎄 ? 이 번에는 누군가 여자가 있어서
잠시 용변을 보러 갔나하고 지켜 봤었어. 그런데, 그것도 아니었어.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생각했어. 오빠가 은주 언니와의 5월의 추억을 못 잊어서, 이렇게 누워 있는
거구나 싶었어. 그런데, 난 오빠를 찾아 여기까지 왔을뿐더러 , 애무까지 했었다구,
기억이 나 ? 오빠는 날 어떻게 생각해 ? 뭐라구 ? 날 강심장이라구 ? 그런 대답 말고
말이야. 난 정말이지 지난 6개월 동안을 나 혼자서만 오빠를 짝사랑했었어. 나 정말
오빠를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단 말이야. 오빠는 날 아내로 삼고 싶지 않아 ?"
나는 대답 대신 하늘을 우러렀다. 파란 하늘이 눈부시도록 쾌청했다.
바람이 일 때마다 눈송이처럼 하얀 아카시아꽃들이 솜털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연신
코 속으로 스며드는 아카시아꽃의 향기. 온종일을 맡아도 질리지 않는 향긋한 내음.
생각을 하자니까, 또 은주의 환영이 떠오르려고 했다.
여인이 머물렀던 너럭바위 위로 연신 아카시아나무의 작은 꽃송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이걸 보는 순간에, 새로운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옥류계곡에서 만난
5월의 윤희라면 은주가 느꼈던 정서를 지닐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 말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마음에 자리잡자마자, 나는 윤희의 얼굴이며 몸매와 심성을 헤아려 보았다.
한 마디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게다가 나에게 솔직히 사랑을 고백해 온 여인이 아닌가
! 나를 사랑한다는 윤희의 진솔한 마음과 청순한 모습이 어우러져, 순간적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그리하여, 나는 윤희의 그윽한 눈빛을 바라보며 그녀를 연인으로 삼기로
마음을 정했다. 더 이상 얼쩡거리다간 윤희한테서까지도 따귀를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윤희야, 예전에 내가 발가숭이 은주의 얘기를 한 적이 있지 ?
내가 원한다면, 너도 이 자리에서 발가숭이로 옥류계곡에 뛰어들 수 있니 ?"
"오빠 ! 내가 매달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서 고마워. 오빠가
원한다면, 뭐든지 다 할게, 됐어 ?"
나는 옷을 벗으려는 윤희를 제지한 채, 한껏 그녀를 들어 안고 맴을
돌았다. 감격한 그녀의 눈에선 맑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나는 윤희의
손을 잡고, 눈송이처럼 하얀 아카시아 숲 속 길을 걸어 나갔다. 또 다시 멀리서 뻐꾸기의
울음 소리가 끓어 오르며, 아카시아꽃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나는 윤희 몰래
손등으로 눈물을 지우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