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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모도
손
정 모
굵직한 음향의 뱃고동이 연거푸 두 차례나 빛살처럼 날아올랐다.
이윽고, 카페리호는 강화도의 외포리항을 떠나, 통통거리며 바다를 가르기 시작했다.
뭉게 구름이 하얗게 치솟은 팔월 중순의 쾌청한 날씨였다. 정오 무렵의 햇살이어선지
날아드는 빛살마다 강력한 활력으로 꿈틀댄다. 그런데도 내겐 자꾸만 8월의 태양과
다가오는 석모도의 전경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금세
나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 어느새 '펑'하고 구멍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배의
난간에 기댄 채, 자꾸만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섬뜩한 느낌의 푸른 섬광만이 연신 나의 뇌수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 보세요. 혹시 몸이 불편하신가요 ? "
움찔 놀라, 나도 몰래 눈을 크게 떴다. 첫눈에 동갑내기쯤 되어 보였으리라.
청순한 미모의 여인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뇨, 간밤에 잠을 좀 설친 모양이에요. "
원래의 생각으로는 잠시 대꾸만 하고는 고개를 돌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여인을 바라보는 순간, 뜨끔하고 심장의 박동이 멎는 느낌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 자꾸만 가물거리던 눈빛이 어느새 천연덕스레 깨어나 있었다.
갑자기 거센 풍랑에 휩쓸린 듯, 심장의 박동이 급속도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아련한 통증이 일며, 순식간에 몸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부터였다.
여인의 얼굴에 겹쳐, 문득 희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희연의 영상이 떠오르자마자,
어느새 먹먹한 설움이 끓어올랐다. 올해 초 대관령 고개에서의 빙판 길 교통 사고만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아니면, 그 날 희연이 문제의 관광버스만 타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나의 인생이 이렇게까지 황량하고 애달프지는 않았으리라. 희연을 떠올릴
때면, 나의 기억은 어느새 작년 7월의 영월 동강으로 치닫곤 했다. 어라연 계곡의
비경에 취해, 밤새도록 모닥불을 피우며 물가에서 밀어를 나눌 때였다. 숨쉬는 일체의
세상이 희연과 나를 위한 구조물인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그리하여, 그녀와 나는
수시로 조물주의 전능에 대해 감탄했고, 밤새도록 경이로워하곤 했다. 당시의 나는
휴가중인 군인이었었고, 희연은 스무 살의 대학 2년생이었다. 일시의 시간도 허비할세라,
희연과 나는 서로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이야기꽃을 피우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어라연의
흐르는 물줄기처럼 희연의 열정은 맑고도 아름다웠다. 그 때 희연은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준호형, 난 정말 고려 도예의 비색 청자를 격조 높게 재현하고 싶어.
비단 비색뿐이겠어 ? 시골 뜨락에 핀 삼잎국화의 고운 황색도 나타내고 싶고, 또
뭐가 있지 ? 빗방울에 젖은 작약꽃의 화사한 선홍색도 살려내고 싶고 말이야. 색채의
재현이란 마치 미궁 속에 빠진 방황하는 혼백의 구조에 비견되지 않을까 ? 내가 너무
과장된 표현을 한 것은 아닌가 모르겠네 ? 하여간, 나의 가슴에 준호형의 이미지가
와 닿은 것은 말이지 ? 준호형의 문학도적인 관점에서의 추구하는 바가 나의 색채
구현과 일맥 상통한다는 점 때문이야. 구도자의 눈빛은 구도자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닐까 ?
바로 이 때였다. 희연의 구도자란 말을 듣자마자, 기억 속으로부터 아슴푸레하게
세상 떠난 아버지의 영상이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시점이었다. 변산이란
곳으로부터 날아든 전보를 받고, 어머니가 울면서 떠난 지 삼일만이었다. 아버지는
변산의 적벽강 해안에서 객사체(客死體)로 가족의 품으로 말없이 돌아왔다. 몇 날
며칠간이나 거듭되던 어머니의 통곡이 점차 가라앉을 무렵이었다. 이 때가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의 아버지야말로 진정으로 멋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방랑벽이 유달리 심해, 판소리와 시조에 취해 남도를 구름처럼 떠돌던 아버지였다.
일자무학(一字無學)이면서도 그저 소리가 좋아, 들판에서 일하던 차림새 그대로 길을
떠나곤 하던 아버지였다. 늪지에서 분출되던 인광(燐光)처럼, 나의 유년의 어느 굽이에선가는
아버지의 자애로운 인상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으리라.
4월말이라, 남도의 들녘에선 흐드러지게 핀 배꽃이 바람에 지천으로 나부낄 때였다.
보름달이 뜬 날 밤, 아버지는 나의 손을 이끌고 배밭길을 거닐면서, 뭔가를 노래했다.
그렇게 절절하고 사람의 심혼(心魂)을 뒤흔드는 노랫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 때의 노랫가락이 바로 심청가였음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었다.
사람의 숨결이 별안간에 멎는 듯도 했고, 창자의 피가 괴어 끓는 듯도 했다. 마치
캄캄한 밤중에 길을 잃었다가 마중 나온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듯도 했다. 배꽃이
하얗게 달빛에 젖던 새벽 무렵까지도 나는 아버지의 노랫가락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아버지의 잦은 외출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배꽃이 눈부시게 피어날 무렵이면, 나는 어느덧 아버지를 그리워하곤 했었다. 꿈결처럼
아버지의 손결이 피부에 느껴질 때면, 이 세상이 그렇게 눈부실 수가 없었다. 봄바람이
피부에 나부낄 때마다 자지러질 듯한 황홀감으로 전율하곤 했다. 그리하여, 나는
배꽃이 벙그는 봄만 되면 달 그림자를 좇는 소년이 되곤 했었다.
구도자란 말을 읊조리던 희연의 눈빛에서 문득 아버지의 애잔한 눈빛을
느꼈다. 그러자, 나의 가슴은 심하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 때의 내겐 사무치게
아버지의 손결이 그리웠던 터였다. 나도 몰래 처음으로 희연의 두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희연은 잠시 나의 눈동자를 조용히 올려다보더니만, 이내 눈을 감은 채
상반신을 기대어 왔다. 놀랍게도 나의 가슴에 밀착된 희연의 상반신이 전과 다르게
심하게 떨고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희연이 처음으로 나의 목을 양팔로 껴안으며,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내밀었다. 사귀어 온 지 2년만이었지만, 내게 처음으로 드러내
보인 여성다운 자세였다. 확실히 부드럽고도 감미로운 강변의 바람결이었다. 하늘에는
온통 은가루를 뿌린 듯, 별들이 초롱초롱하게 깨어나고 있었다. 나는 작은 한 마리의
새처럼 가슴을 떨며, 다소곳이 희연의 입술에 입맞추었다. 감미롭고도 청량한 입술이었다.
모닥불을 배경으로, 희연과 나는 별빛이 눈부신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나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이윽고, 희연과 나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밀어를 속삭이면서
밤을 지새웠다. 창백한 달빛 아래로, 시간이 흐르면서부터 강 안개가 하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강 안개의 언저리쯤에서였으리라. 반백의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고 선 아버지의 자애로운 얼굴이 슬쩍 어른거리는 듯도 했다. 꿈에서조차
자애로운 눈빛의 아버지를 본 날이면, 그 날은 언제나 즐거운 날이 되었다. 애달픈
것이 있다면, 아버지가 객사를 하면서까지 얻은 실체를 자식인 내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설사 당신은 뜻을 이루었을지라도 아들인 내가 본 실체는 어디에도 없었기에 막막했었다.
평생을 탐미적인 눈빛과 구도의 정신으로 일관된 삶을 산 아버지야말로 진정한 구도자가
아니었을까 ? 희연을 만난 어라연 계곡에서조차도 말이다. 나는 희연의 눈빛과 아버지의
눈빛이 무척 닮아 있다는 것을 느끼곤 숨을 죽였었다. 나는 가슴 밑바닥을 휩쓸며
차 오르는 회한에 눈시울을 적시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의 착잡한 심사를 헤아리기라도
한 듯, 개똥벌레의 무리가 어라연을 종횡으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졸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 무척 피곤한 기색이군요. 저기 뒤편
의자로 가서 좀 앉으시겠어요 ? "
여인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맑은 눈망울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여인의 호의를 무시할 수가 없어, 의자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휴가의 끝 무렵이어선지
사람들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일단 여인의 존재를 잊지 않고 있다는 예의를 보여
주기 위해 말을 건넸다.
"일행과 함께 오신 모양이죠 ? 종종 석모도를 찾는 편이세요 ?
"
여인은 내가 말을 걸어 준 것에 대해 무척 고마워하는 표정이었다.
"아뇨, 전 아직 미혼이구요, 여태껏 애인도 없어요. 혹시 댁이라면,
일행이 많을 듯도 한데요 ? "
여인과 나는 함께 푸른 바닷물을 바라다보며, 서서히 대화를 나누었다.
낯선 남녀가 만나게 되면, 혐오감을 갖거나 아니면 친숙해지거나의 하나에 대개는
귀속되리라. 여인과 나는 후자에 가까운 경로를 밟고 있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전생의 어디에선가 친숙하게 만났던 느낌마저 들었다. 석모도의 석포리 선착장에
내려서면서부터, 나는 여인의 제안대로 여인의 승용차에 동승했다.
"준호씨, 아직 1시도 안 됐네요. 우리 드라이브나 좀 하다가 시간이
되면 식사나 하자구요. 우선 해수욕장과 보문사가 있는 왼쪽 해안도로부터 타는 게
좋겠죠 ? 그럼, 곧장 진행할게요."
"뜻밖에 미혜씨를 만나, 편안하게 여행을 하게 됐네요. 언제라도
제가 부담스럽게 느껴지시면, 아무데나 떨어뜨려 주세요, 아시겠죠 ?"
9월의 복학을 앞둔 나보다도 미혜는 1살이 많은 24살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체대를 졸업한 무용수로서, 때때로 매스컴에도 얼굴을 내밀곤 하는 미모가
수려한 여인이었다. 그 흔한 연분도 못 찾아 여태껏 애인도 없는 처지라며 여인은
살짝 미소지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로는 여인의 남자 보는 눈이 너무 높았던 탓으로
보였다. 그저 사내란 말이다. 신체가 건강하고, 마음이 너그러우며 제 할 일을 한다면
그만 아닌가 말이다. 뭘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야단이란 말인가 ? 나의 전공이 국문학이라고
밝혔을 때, 여인은 의외로 눈빛을 빛내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아직 속단할 계제는
아니었다. 관심이 없으면서도 관심 있는 체할 수도 있잖은가 말이다. 하여간 여인의
관심 어린 표정이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자면, 어느 정도는 구미가
당기는 면도 있었다.
해수욕장이 바라보이는 해안도로 부근에서였다. 토종 미꾸라지 전문의
음식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산내들'이란 간판을 내건 음식점은 전원풍의 격식을
갖춘, 운치 있어 보이는 건물이었다. 자리를 잡고 마주앉아 나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빼어난 미모에 눈빛마저 영롱했었기에, 나는 반쯤 넋이 나간 기분이었다.
충남 서천의 갯마을이 고향이라며 미혜라는 여인은 말문을 열었다.
여인이 다섯 살이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해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세 살 위의 오빠와 함께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의 잠수질만이 유일한
생계의 수단이었기에, 어려서부터 삶의 고달픔에 젖어 지냈다. 아버지를 잃은 그
해 겨울이었다. 유난히 폭설이 심해, 들판이건 건물이건간에 정강이 높이까지 차
오른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여러 날 앓던 감기 끝 무렵에, 복병처럼 여인에게 홍역이
찾아 들었다. 굶다시피 한 몸에, 고열이 마구 끓어오르며 기승을 부렸다. 점차 끓어오르던
열에 시달리다 못해 의식을 잃고 막 쓰러진 순간이었다. 바다에서 막 돌아오던, 여인의
어머니가, 황급히 여인을 부둥켜 안고는 동구 밖으로 내달렸다. 그러면서,
고함을 질러 또래들과 섞여 있던 여인의 오빠를 불렀다. 여인의 어머니는 5년간이나
무릎 관절염을 앓고 있었던 터라, 언제나 다리를 절며 걸었다. 밤이면 누렇게 흘러내리는
고름을 닦아내느라, 다리도 제대로 못 편 채 울먹였다. 그러한 여인의 어머니가 여인을
업고는 집을 나선 거였다.
얘, 민철아 ! 산 너머 죽동의 보살 할머니 댁으로 어여 가자꾸나. 작은
산 고개 하나를 넘어야만 죽동(竹洞) 마을이 있었다. 죽동은 길다란 저수지를 따라
이루어진 죽림 속에 터를 잡은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는 신통력으로 소문 난 박 보살이란
무녀가 있었다. 50대 중반의 박 보살은, 다급할 때엔 의원으로서도 이름이 알려진
여인이었다. 침술과 환약의 조제를 위시하여, 곧잘 병구완도 잘하여 근동에서는 명성이
자자했다. 미끄러지거나 굴러 내리기도 하면서, 여인의 어머니와 오빠는 번갈아 여인을
업고 산을 넘었다. 눈에 젖어 발은 감각이 없었지만, 허위단심으로 숨을 내몰며 죽동에
닿았다. 박 보살의 대문 앞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휘유우'하고 휘파람을 토해 내며,
곱상한 얼굴의 박 보살이 달려나왔다. 보살은 당장 여인을 안아 들더니, 수건에 물을
적셔 연방 여인의 몸을 닦았다. 한동안 동작을 반복하더니, 여인의 눈꺼풀을 뒤집어
본 뒤에 고개를 끄떡거리며 말했다.
"아이구, 참 다행이네요. 신장(神將)님이 따님을 잘 보살펴 줄
것 같네요."
그러면서, 여인을 방바닥에 다독거려 눕혀 놓고는 다시 뜨락에 섰다.
"보소, 미혜 엄마요 ! 동서남북의 사 방위에 넓적한 돌 조각을
하나씩만 깔아 놓고 오소. 이제 마음놓고 천천히 하세요."
그러면서, 무녀는 복숭아나무의 가지를 낫으로 잘라, 사 방위에 깔린
돌 위에 반듯이 놓았다. 그리고는 연방 '휘이휘이' 휘파람을 불더니만, 여인의 어머니더러
신장님께 절을 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나서, 십여 분쯤 지난 뒤였다. 여인의
몸에 가득했던 열꽃이 점차 사그라지며, 여인의 안색은 정상으로 되돌아갔다.
"준호씨, 저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서부터 이 세상의 무녀들을
존경하게 되었죠. 아울러 무녀들의 신통력마저도 저는 확실히 믿게 되었어요. 요즘도
고향에 내려가면, 죽동의 보살님의 생가에 들러, 유년기의 저를 떠올리곤 해요. 비록
보살님은 유명을 달리하셨지만, 그 분의 생가에는 언제나 복사꽃의 향기가 남실대는
느낌이었어요."
음식점을 나서서, 민머루 해수욕장의 입구까지 차를 몰아갔다. 차를
버려 둔 채, 여인과 나는 해변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하얀 모시처럼 곱게 부서진
모래알들이 해변 가득히 펼쳐져 있었다. 바다는 언제 보아도 젊은 색채로 출렁이고
있었다. 아득한 선조들의 시절에서부터 바다는 인간에게 숱한 미래와 희망을 안겨다
주었으리라. 숱한 세월과 사람들이 휩쓸고 간 그 해변의 언저리에서 나는 또 바다를
본다. 부서지는 모래알에 휘감긴 한숨과 눈물과 그리움의 색채는 어떤 것일까 ?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조차 내 가슴을 서늘하게 적셔 오는 슬픔과 연민의 숨소리를 듣는다.
어느새 여인은 나의 왼팔을 감싸안은 채, 나의 눈길을 좇아 수평선을 바라본다. 대관절
만남의 실체는 무엇이며, 왜 과거는 추억 속에서만 아름답게 빛나는 걸까 ?
"준호씨, 여기까지 온 김에 해수욕이나 하면서 몸을 좀 식히시죠
? 전 벌써부터 바닷물에 뛰어들고 싶었거든요."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후 두 시 무렵의 태양열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벌써부터 아닌게아니라, 등에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즉시, 여인을 향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 정말 너무 덥네요. 수영복을 가져오려면, 어차피 차로 되돌아가야겠죠
? "
푸른 바다와 흰 모래와 붉은 태양이 조화를 이루는 곳. 그 곳은 다름
아닌 석모도의 민머루 해수욕장이었다. 수영복 차림새를 하고부터는 오래 사귄 연인들처럼
손을 맞잡은 채, 해변을 향해 달렸다. 비록 인생살이가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깨어서는
안 될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둘 다 조금 큰 키인데다가, 미모의 소유자들이라고
자처하는 터였다. 발 밑에서 사각거리는 은빛 모래의 감촉과 허벅지를 적시는 물결의
느낌이 너무나 감미로웠다. 감청색 파라솔 아래에서는 가슴에 털이 무성한 청년이
'진주 조개'를 기타아로 연주하고 있었다. 바다에는 청춘 남녀들의 축제인 양, 앳되고
젊은 연인들로 북적대었다. 수영복 위로 돌출된 젖가슴과 매끄러운 엉덩이의 윤곽은
젊은 여성들의 아름다움의 원천이기도 했다. 젊은 여인들이 지나칠 적마다 살아 있는
최상의 예술품들이 걷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언제까지나 물빛만을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수영을 시작했다. 여인의 수영 동작에도 꽤나 수련한
듯한 부드러움과 평온함이 실려 있었다. 여인의 자유 수영의 자세를 보노라면, 마음까지도
평온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정되고 유연스러웠다.
바다의 물살을 가르며 수영을 하자니까, 슬그머니 희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희연과는 동강에서 만났지만, 낚시질하는 이외에는 수영은커녕 물놀이 한 번 못한
터였다. 문득 여인이 희연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여인의 뒤를 좇고 있었다.
얕은 물밑으로는 멸치를 닮은 물고기 떼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물고기에 대한 생각에 이르자, 바다 낚시의 단짝인 영태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태는 대학을 중퇴하고 민물 양어장을 운영하는 나의 절친한 친구다. 서로 마음이
통했기에, 누구보다도 자주 만나는 사이였다. 두 달 전, 인천 연안 부두의 횟집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일 때였다.
"준호야 ! 나 말이지 ? 사흘 전에 하마터면 구속되고 난리가 날
뻔했었어. "
나의 기억으로는 영태가 내게 거짓말을 늘어놓은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느끼고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영태는
양어장에 주력했지만, 그의 아내는 틈틈이 청과 채소류도 가꾸고 싶어했다. 소꿉놀이처럼
조금씩 가꾸던 상추와 시금치, 고추, 가지 등속은 나날이 풍성해져 갔다. 한 달 전부터는
그의 아내가 시장에 조금씩 내어다 팔아 용돈을 마련하고 있었다. 처음에 영태는
그의 아내를 말렸었다.
"여보, 뭐 하는 거야 ? 양어장 일도 바쁜데, 어느 짬에 농사일까지
하려고 그래 ? 내가 먹고 살 만큼 해 볼 테니까, 제발 좀 그만 둬."
그의 아내는 자꾸만 채소를 가꾸고 싶어했고, 마침내 허락하고 말았다.
넉 잔째의 술잔을 들면서 영태는 말했다. 일 주일 전의 해거름 때였어. 향어 백여
수를 횟집에 갖다 주고 오는 길에, 바람을 좀 쐬고 싶었어. 그래서, 봉고차를 버려
둔 채, 청과물 시장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었지. 헌데, 순댓집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에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어. 정말 뜻밖의 일이었기에, 처음에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어. 금방 다녀올게요라며 집을 나섰던 아내가 청과물 시장 골목에서
…… 글쎄 이걸 이야기 거리라고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 행인들이 나다니는 길목에
주인이 어디 있느냐 이 말이야 ? 그런데도, 먼저 자리잡은 우악살스런 여편네들 몇이
달려들어 아내의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있었것다, 글쎄 ? 그리고, 아내가 정성스레
가꾸었던 채소류들이 엉망진창으로 길바닥에 짓밟혀 있었것다 ? 순간적으로 눈에
뵈는 게 없었어. 닥치는 대로 여편네들을 발로 차고 주먹으로 두들겨 패 댔었어.
잠시 후에는 행상인들로부터 자릿세를 갈취해 오던 폭력배까지 서넛이 인상을 쓰며
나타났었네. 아, 글쎄 이것들이 나타나더니, 다짜고짜로 나의 멱살부터 움켜쥐려고
덤벼들었단 말이야 ? 준호 네가 알기로도 내가 덩치가 있어 ? 싸움을 잘 해 ? 하지만,
그 땐 뺑 돌아버린 상태라, 손발이 절로 나가더구만. 멱살을 잡으려던 놈을 향해
그대로 면상을 들이받고는 쇠 파이프를 주워 들었어. 그 때부터는 닥치는 대로 무조건
박살을 냈었어. 그러자니까, 누가 신고를 했나 봐. 나와 깡패들 셋이 나란히 경찰차에
실려 갔었지. 그리고는 조사를 받는다 대질 심문을 받는다하여, 세상에 그런 난리가
없었어. 그뿐이랴 ? 반창고를 붙인 채 몰려온, 시장 골목의 여편네들과의 말다툼도
가관이었지. 이에 뒤질세라 교도소에 처넣겠다고 발발 떨며 혈압을 올리는 여편네들의
남편이란 놈들도 만만찮았었다구. 어쩌다가 내가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후회스러웠었어. 하지만, 후회해 본들 어쩔 수가 없는 일이잖아 ? 이틀을
유치장에서 머문 후에야, 나는 자존심을 버리기로 했었어. 할 수 없이 나는 부장
검사로 있는 문중의 형님께 전화를 걸고야 말았어. 지금 생각해도 께름칙해 죽을
맛이야. 평소에는 전혀 왕래도 없다가 낯뜨거운 일을 당해서야 전화를 했으니 말이다.
유치장을 나온 뒤에, 나는 아내와 함께 포장마차에 들렀어. 아내는 울먹이며 그녀의
잘못으로 이 번 일이 발생했다며 계속 내게 용서를 빌었었네. 그런데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아내한테 무슨 잘못이 있냐구 ? 내가 허락을 했기에 채소를 가꾸었고, 그걸
시장에 팔려고 나간 건데 죄가 되냐구 ? 나는 아무 소리도 않고서, 포장마차의 주인이
보든 말든 아내를 힘껏 포옹해 주었지. 너 알잖아 ? 나는 남의 시선에 구애받는 사람이
아니거든. 잠시 후에 소줏잔에 술을 채워 아내에게 건네면서, 아내의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어.
절대로 당신이 잘못 한 것은 없다구, 알아 ? 모두가 다 남편을 잘못
만난 소치라고 생각해 줘. 한동안 아내는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더니만, 고개를 푹
수그리며 눈물을 닦기 시작했어. 소리 없는 눈물의 절규가 나의 전신을 마구 찔렀었네.
아내의 푸른 한숨과 눈물을 대하자마자 다시 한 번 발작할 것만 같았네. 나는 소줏잔을
으스러뜨릴 듯이 움켜쥐고는 내심으로 신음을 삼켰어. 아울러 그 날 이후로 굳게
결심했어. 어떤 경우에도, 아내의 눈에서 서러운 눈물이 흐르는 일이 없도록 하겠노라고
말일세.
한동안 바다를 종횡으로 헤엄치던 여인이 상기된 얼굴로 해변으로
올라서며 말했다. 우와, 정말 오랜만에 원 없이 수영했네. 준호씨, 저쪽 편에서 모래찜질을
하고 싶거든요. 저를 살짝 좀 묻어 주시겠어요 ? 모래찜질을 하는 여인의 곁에서,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무엇 때문에 이 섬을 찾았던가 ? 누가
날 보고 오라고 했던가 ? 복학을 앞둔 시점에서, 희연과의 사별의 정한을 조용히
정리해 보고 싶었었다. 그래서, 서해의 조용한 섬인 석모도를 찾은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여인이 자연스레 끼여든 터였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여인도 여인이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내 마음의 요소가 더 컸으리라.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여인과는 구도의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라는 느낌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당장 여인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거나 여인의 인생에 귀를 기울이기만 해도 뭔가는 깨달을
듯도 했다. 모래를 털고 바닷물에 몸을 헹구면서 여인은 말했다.
준호씨는 문학을 통해 인간의 삶을 탐색해 보겠다고 하셨죠 ? 저는 춤과
선율(旋律)을 통해, 인간의 섬세한 영혼의 메시지를 표현하고 싶어요. 저는 고전적인
춤사위에서부터 현대 무용에 이르기까지 춤이란 춤은 빠짐 없이 연구하는 중이에요.
제가 이 섬을 찾은 동기는 춤동작에 섬세한 이미지를 심기 위함이었어요. 바닷물과
해풍과 저녁 안개 자락으로부터도 뭔가 섬세한 생명력을 추출할 수 있잖을까 싶어요.
그런데, 여자 혼자서는 뭔가 좀 두렵잖아요 ? 준호씨가 석모도에 머물 동안만이라도
제 곁에 있어 주지 않을래요 ? 절대로 준호씨의 일에는 방해를 주지 않을게요. 혹시
오늘 당장에 섬을 떠나는 건 아니시죠 ? 잘 모르겠다구요 ? 하여간 계실 동안만이라도
제 곁에 머물러 주시는 거죠 ?
나는 파랗게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러자, 여인은 눈빛을 반짝 빛내더니, 나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처음 본 순간부터 준호씨와는 잘 통할 줄
알았다니까요. 이제부턴 아무런 부담 없이 같이 다니자구요."
어느덧 오후 4시 무렵이었다. 여인과 나는 상쾌한 마음으로 보문사의
경내에 들어섰다. 석불들이 안치되어 있는 통바위의 석실을 지나면서, 100여 평의
실내 규모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서서히 430여 개의 화강석 계단을 따라,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발 아래로는 청정한 물빛의 서해 바다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바다가 시원스레 바라보이는 사찰이었다. 산의 울창한
숲과 쪽빛의 바다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펼쳐져 있었다. 20여 분이 지나서야, 미혜와
나는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에 도착했다. 눈썹바위는 사람의 눈썹처럼 생겨, 남쪽의
절벽면으로 비쭉 돌출되어 있었다. 눈썹바위 아래로는 커다란 마애 관음보살상이
새겨져 있었다. 평소에 보아오던 부드럽고도 잔잔한 미소의 관음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무표정한 모습의 얼굴이었다. 어찌 보면 조각된 시대의 아픔이 깃들어 있는 듯도
했다. 암울한 일제 시대인 1928년에, 보문사의 주지와 금강산의 승려가 합동으로
만든 작품인 탓이리라. 높이는 9.2 m요, 폭은 3.3 m에 달했으며, 연화대 위에 앉아
있는, 세속을 초월한 모습이었다. 또한 이것은 인천시 유형 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된
유적이기도 했다. 새겨진 조각상의 표정보다는 외로운 산중에서도 대작(大作)을 완성시켰던
승려들의 구도의 열정이 돋보였다. 한동안은 침묵의 연속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여인과 나는 관음보살상을 바라보며, 점차 깊숙이 상념에 잠겨 들었다.
지난 5월 초순경이었다. 평소에 어머니가 자주 다니던 함안의 관음정사로부터
조전(弔電)이 날아들었다. 숨을 몰아쉬며 산사에 도착하니, 석양빛이 곱게 깔린 어스름
무렵이었다. 주지승은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한 채,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늘 점심 무렵이었어요. 절 뒷산의 중턱에 자리잡은 천연 미륵상 앞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산을 올랐었죠. 하늘에 구름이 잔뜩 낀 게 다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예정대로 산을 올랐죠. 일행은 저를 포함해 모두 열 둘이었고, 자당이신
보살님께서도 힘들어하지 않고 산을 올랐어요. 계획대로 불공도 순조롭게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산하던 중이었죠. 하산을 시작하면서부터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죠.
바위와 풀잎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자, 산길은 금세 미끌미끌해졌어요. 일흔의
연세에도 정정하시던 보살님께서 다리가 휘청거린다 싶자, 어느새 골짜기로 곤두박질쳤죠.
너무나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붙잡을 틈도 없었죠. 구급차를 불러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보살님은 끝내 운명하고 말았죠.
주지승과 함께 들른 영안실에서 나는 희연에 이어, 두 번째의 주검과
마주했다. 사위는 적막 속에 휩싸였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갑자기 나의 몸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심장의 박동마저도 멎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점차 영안실에서 오그라드는 하나의 새카만 점이 되었다. 점은 점점 작아지기
시작하여, 우주의 잿빛 속으로 휩쓸리고 있었다. 늦은 나이에, 외자식인 나를 출산하고는
용왕제를 지내며 천지신명께 거듭거듭 감사를 드렸다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나에게
혈육이기 이전에, 온 우주였으며 나의 생명의 보금자리였었다. 희연을 잃을 때만
하더라도 나의 마음속에는 어머니라는 정신적인 위안처가 있었다. 이제 온 우주를
지탱해 주던 어머니마저 노쇠로 인한 실족 사고로 세상을 떠난 터였다. 나를 붙잡는
스님과 간호사에게 혼자 있고 싶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들도 이내 눈빛이 젖어들며
살며시 나를 내버려 둔 채 영안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명주천을 열어, 호수처럼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는 어머니의 평온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나간 날들의 추억이
일시에 파노라마로 휩쓸려 오며 나의 의식계에 휘감겼다. 나는 어머니를 말없이 껴안고는
하염없이 어머니의 뺨에 나의 뺨을 맞대었다. 갑자기 파랗게 떠 오른 봄 하늘 아래로
청량한 솔바람 소리가 들려 오는 듯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으리라. 집 뒤의
산밭에서 고구마를 처음으로 캘 때였다. 고구마를 캐어 추스르던 나의 모습을 지켜
보다 말고, 어머니는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 준호야, 네가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구나.
지금 네 아버지는 어디에서 낮술에 얼굴을 붉히며 노랫가락을 풀어 놓으실지 모르겠구나.
나는 네가 있으므로 전혀 외롭지 않단다. 그 망할 놈의 노랫가락이 무엇인지 여편네의
마음 하나 다독거려 줄 줄도 모르니 …… 준호야, 너는 커서 절대로 …… 아니, 내가
어린애 앞에서 무슨 푸념이지 ? 하여간 나는 너의 반짝이는 눈빛만으로도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행복하단다. 그렇게 하여 나는 먹먹한 가슴만을 안은 채, 어머니를 떠나
보냈다. 나는 그 때 지고지순한 아름다움을 보았다. 세상사를 초월한 맑고도
기품 어린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말이었다. 흔들어 깨우면, '아이구 내 강아지 왔나'하며
금세 눈을 뜰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덥다고 보채면, 어느새 미소짓는 얼굴로 부채질을
하며, 내려다볼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향을 사르는 신도들의 무리가 끝이 없었다. 마애 관음상 앞에서 지난날의
어머니를 떠올리다가 문득 배를 타고 싶었다. 생시에 어머니가 좋아하던 것은 마을
앞을 지나 새 동네에 이르는 나룻배를 타는 거였다. 나룻배는 마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거였고, 나는 즐겨 어머니를 태워 강을 건너곤 했다. 내가 배를 몰 때면, 천천히
몰아라며, 수면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미소짓곤 했었다. 혹시나 어머니의 모습이
마애 관음상에 어리지는 않았나 싶어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금세
실망하며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표정이라곤 전혀 없는
관음상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밤 8시 무렵이었다. 석모도의 해변에서 나룻배로 10여
분쯤의 거리에 '섬돌나루'라고 부르는 무인도가 있었다. 해변을 거닐다가 문득 밧줄로
묶여진 나룻배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 본 바로는 근래에는 거의 이용된
흔적이 없었다. 나룻배를 타고 싶다는 나의 말을 듣자, 여인은 쾌재를 부르며 같이
가자고 했다. 먼저 민박 집을 예약해 두고는, 주인의 동의를 얻어 바다에 나룻배를
띄었다. 나룻배를 소나무 등걸에 묶어 놓고는 섬돌나루에 올랐다. 섬돌나루엔 소나무와
잡목이 어우러졌고, 사이사이로는 황토와 백사가 뒤엉킨 모양의 토양이 자리잡고
있었다. 작은 언덕이 교차하는 굽이에 반석이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주위로는 윤기가
흘러 넘치는 솔숲이 해풍에 한껏 교태를 부리며 춤추고 있었다. 게다가, 머리 위로는
은가루를 쏟아 부은 듯 별들이 지천으로 빛을 뿜고 있었다.
여인은 모닥불이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나의 눈치를 살폈다. 공터에 마른
잡목의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우며 여인과 나는 마주 앉았다. 주변에는 밀려드는
파도 소리요, 하늘에는 쏟아져 내리는 별빛이요, 공터에는 타오르는 불길이 있것다.
가만히 있어도 뭔가 아늑하고도 황홀한 일들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모닥불의
열기가 서서히 몸에 배어들면서부터였다. 여인이 덥다면서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 젖히자, 하얀 브래지어가 반쯤 드러나 보였다. 뽀얀 속살과 두드러지게 돌출한
젖가슴이 무척 선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여인은 말했다. 준호씨, 오늘밤은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이야기를 좀 오래 했으면 하는데, 괜찮으시죠 ?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떡거려 동의했다. 이윽고, 여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처음에 준호씨를 본 것은 배가 강화도의 외포리 선착장을 떠난
직후였어요. 지금 심정으로는 젊은 사람들끼리니까, 말 놓고 이야기하자고 싶지만
왠지 좀 두렵네요. 저야 좀 왈가닥 기질이 있는 여자로 보이지 않으세요 ? 하지만,
준호씨의 경우에는 뭔가 강한 절제력 같은 것이 때때로 엿보이곤 해요. 그랬기에,
괜히 말을 잘못 꺼내 준호씨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구요. 지금이라도
말을 놓아도 괜찮다구요 ? 에이, 설마 정말이실라구요 ? 하지만, 이제는 제가 계속
경어를 쓰고 싶은걸요. 왜 있잖아요 ? 여자의 변덕은 죽 끓듯 하다는 말도 모르세요
? 호호, 저도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이라구요. 준호씨의 수심에 잠긴 얼굴,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윽한 눈빛. 냉소주의자에 가까울 만큼의 절제된 행동과 깍듯한 예절이
서서히 저의 마음을 뒤흔들기 시작했었어요. 원래 사람이란 사소한 느낌이나 분위기에
의해서도 쉽게 감정이 싹 트는 것 아니겠어요 ?
애끓듯한 수심을 지우려고, 저도 오랜 세월을 발 버둥질쳐 왔었죠. 제겐
세 살 연상의 오빠가 있었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죠 ? 그 오빠 말인데요, 오빠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든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여름철이었죠. 마을 앞 강에서
친구들과 멱을 감다가, 그만 급류에 휘말려 버렸어요. 장마 뒤끝이라, 강물이 불어나
있었지만 수영에 자신이 있었기에 뛰어든 거였죠. 하지만, 한 번 휩쓸리자 도저히
헤어나올 재주가 없었죠. 영락없이 죽는 거구나하고 생각했죠.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오빠는 거적때기에 덮여 제 대신 강가에 드러누워 있었어요. 저를 구하고는 대신
숨을 거둔 거였죠. 오빠의 수영 솜씨는 근동에서도 겨눌 상대가 없을 정도라고 알려졌었죠.
그 때 이후로 제 가슴속에는 엄청난 깊이의 설움이 들어차 있었죠. 잠을 자나 눈을
뜨나간에 말이에요. 가슴 속 깊숙한 곳에는 언제나 오빠를 잃은 슬픔과 죄책감이
뒤엉켜 있었던 거죠. 어릴 땐 다 그랬겠지만, 저는 오빠를 한없이 좋아했었거든요.
내내 죄책감으로 시달려 오다가, 제가 무용의 길에 들어서면서부터 차차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아니, 춤 자체가 오빠와 통하는 영적인 세계로 느껴지면서부터 한없이 무용에 매료되었어요.
이제는 삼라만상의 숨소리나 몸짓 모두에서 고유한 깊이의 선율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런 중에서도 유년기의 오빠의 이미지와 정서가 준호씨를 본 순간부터 놀랍도록
생생하게 되살아났어요. 물론 두 사람의 외모가 닮았다거나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가슴이 떨릴 만큼 선명하게 오빠의 이미지와 정서가 준호씨의
전신으로부터 풍겨져 나왔어요. 줄곧 그 원인이 뭔가를 생각해 봤지만, 여전히 알
수 없을 뿐이에요.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의 마음이 자꾸만 준호씨께로
이끌리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어요. 너무나 일방적인 저의 감정 탓이라고 봐야 하나요
? 저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꽤나 분별력 있는 여자라고 자부해 왔거든요. 놀랍게도
말이에요, 준호씨의 이야기만을 듣고도 준호씨의 부모님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낼
것만 같아요. 그뿐이겠어요 ? 몹시 질투는 나지만, 준호씨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든
희연씨의 얼굴마저도 선하게 떠오르는 느낌이에요. 제가 왜 여태껏 남성을 사귀지
못했는지 아세요 ? 저 때문에 오빠가 죽었다는 강박 관념에 줄곧 시달려 왔기 때문이에요.
여태껏 제가 느낀 바로는, 남성들은 그냥 단순한 사내들이었을 따름이에요. 하지만,
카페리호에서 제가 처음 바라본 준호씨의 모습은 너무나 강렬한 인상으로 느껴져
왔었어요. 틈만 나면 엉큼한 눈빛으로 여자들을 흘낏거리는 부류들과는 풍겨 오는
분위기부터 확연히 달랐어요. 뭐라구요 ? 준호씨도 엉큼한 속성을 지닌 평범한 사내일
뿐이라구요 ? 에이, 설마 ?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준호씨 같은 분이라면 기꺼이
마음의 문을 열어 드리고 싶어요.
준호씨 ! 별빛이 눈부신 이 곳 섬돌나루에서, 저는 저의 과거를 모두
다 털어놓았어요. 오랜 세월 동안을 시달림에서 살아온 제가 불쌍해 보이지 않으세요
? 만약 준호씨만 괜찮으시다면, 별빛이 눈부신 이 섬돌나루에서 저의 ……
나는 더 이상 여인의 얘기를 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뚝 일어선
뒤에, 천천히 자갈밭 위를 거닐었다. 단순한 욕정 같으면야 당장이라도 여인을 하나의
암컷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처해진 나의 심경은 결코 그런 게 아니었었다.
희연을 잃은 슬픔을 어떻게 승화시킬 것인가 ? 그리하여, 어떠한 모습으로 새로운
삶을 살 것인가에 온통 마음이 쏠렸던 탓이었다. 마음이 정리되지 못한다면, 당분간은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잖는가
? 나는 탁 트인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한껏 들이킨 뒤에, 조심스럽게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하여, 가능한 한, 여인의 섬세한 정서와 분위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여인의 자존심이 상처받지 않도록, 진정을 다해 여인에게 내 마음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모닥불을 지피면서 바닷물을 바라보다가, 그래도 시들해지면 섬돌나루의
해변을 함께 거닐었다. 자연에 심취해 밤을 지새려는 여인을 달래어, 자정 무렵에야
나룻배를 띄워 석모도로 향했다.
섬돌나루를 떠난 지 십여 분쯤 지나자, 나룻배는 석모도의 해안에 도착했다.
은빛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해변의 잎새들 위로 달빛이 눈부시게 흩날리고 있었다.
여름철이라지만, 해풍만은 칼날처럼 매섭게 울부짖고 있었다. 나룻배를 말뚝에
묶어 놓은 뒤에, 여인과 나는 숙소를 향해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무수한 잔별들이 허공에 박혀 빛을 뿜고 있었다. 사방이 정적 속에 묻혀,
자정 무렵의 해안 도로엔 불빛 하나 없었다. 민박촌에 들어서면서, 여인과 나는 눈빛을
빛내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는 느꼈다. 이제 작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말이다.
나의 눈을 응시하는 여인의 눈빛이 파들거리며 떨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눈물이라도 금세 떨어져 내릴 듯한 분위기였다. 왠지 '찡'하고
가슴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이 때, 여인은 한껏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호씨, 제가 지금껏 목마르게 찾던 세계가 뭔지 아세요 ? 그건
바로 오묘한 선율의 세계였어요. 죽동 마을에서조차도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삶의
환희를 오늘에야 비로소 맛보게 된 거예요. 어쩜 우린 전생에서부터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 준호씨의 눈빛과 목소리는 시간에 따라 굽이치는 다채로운 선율이었어요.
이젠 단 한 순간이라도 곁에 있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도
언제나 포근히 다독거려 주던, 유년기의 오빠의 눈빛을 오늘에야 되찾은 느낌이에요.
제가 왜 이다지도 가슴 졸이며 준호씨께 저의 진정을 털어놓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미혜씨 ! 조금만 더 냉정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해요. 저는 결코
미혜씨께 높은 평가를 받을 정도의 사람이 못 된다구요. 아시다시피 저도 황량한
가슴을 서해에 풀어놓으려고 온, 평범한 사내일 따름이라구요. 저도 미혜씨만 없었다면
아마도 눈꺼풀이 부풀어 터지도록 피눈물을 쏟아내었을 거예요. 가슴이 텅 빈 제가
어찌 미혜씨의 섬세한 선율을 감당할 수가 있겠어요 ?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저는
결코 미혜씨께 어떠한 정신적 위안도 되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제발 ……"
이 때였다. 어느 결에 여인이 달려들어 나의 목을 얼싸안으며, 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펄떡거리는 여인의 심장 박동 소리가 선명하게 청신경을 울려
왔다. 온통 펄떡거리는 느낌. 마치 폭발 직전의 화염병을 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팔을 늘어뜨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놀랍게도 이 때
나의 눈을 찔러 온 것은 하늘의 달빛이었다. 파르스름하게 젖어, 도무지 기운이라곤
없어 보이는 달빛 말이었다. 꼭뒤를 지르듯 하얀 영상이 달빛을 가르는 느낌이 전율처럼
가슴으로 전해져 왔다. 올해 초에 희연의 비보를 접하자마자, 특별 휴가를 얻어 희연을
보러 갔다. 냉동실에서 명주천에 가려졌던 희연의 얼굴을 대할 때의, 아뜩하고도
섬뜩한 느낌이 되살아났다. 부디 이 모든 것이 날이 밝으면 깨어날 수 있는 악몽이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확인된 실체는 그게 아니었다. 결코 악몽이 아닌 처절한 현실이었던
터였다. 점차 섧고도 안타까운 그리움 같은 것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눈가엔 뽀얀 이슬이 맺혀 대롱거렸다. 서서히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나는 고뇌에서 벗어나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해풍에 실린 소금기로, 나의 울먹울먹해진
눈시울이 점차 젖어들기 시작했다. 현재의 심경으로는 말이다. 당분간 더 이상은
누구와도 연분을 맺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처해진 상황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 느낌이었다.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왔다가, 여인으로 인해 어머니와 희연에
대한 그리움만 깊어지게 된 터였다.
하도 밝게 쏟아져 내린 달빛이라, 한기마저 느껴지는 밤이었다. 무절제하게
어우러진 잡목들 위로 소금기를 머금은 해풍이 연신 목을 간질이며 내닫고 있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여인을 살며시 떼어 내며 말했다.
"미혜씨, 오늘밤은 왜 이렇게 서글퍼지는지 모르겠어요. 감정을
추스르려고 왔다가, 저는 더욱 신산(辛酸)스러운 가슴을 안고 돌아가게 될 것만 같아요.
근심을 떨쳐 버리려고 하나, 더욱 근심만 깊어지는 꼴이에요. 이제 작별할 때가 된
것 같군요. 삶과 만남이란 어설픈 철학이나 명제로는 분석해 낼 수 없는 오묘한 조화가
아닐까요 ? 풀려고 하면 할수록 해답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빨려 드는 느낌이에요.
먼저, 석모도에 와서 음악적 영감을 성취한 것에 대해 축하 드려요. 똑 같이 시간을
보냈지만, 저만 왜 과제를 해결 못 했죠 ? 이 사실 하나만 살펴보더라도, 저는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는 무능한 사내라구요. 그리하여, 현재는 물론이요 미래에서조차도
결코 미혜씨께 도움이 되지는 못하리라 믿어요. 언제든 미혜씨가 해변을 거닐게 되면
금세 불빛 찬란한 항구를 만날 거라고 믿어요. "
어느덧 미리 잡아 놓은 여인의 민박 집 앞에 이르렀다. 여인은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리며, 어쩜 이럴 수가 있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몸을 떨면서,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과거의 상념의 너울에 비해, 그렇게도 제가 왜소하게 비쳤나요 ? 전
언제라도 준호씨의 마음을 꽉 채울 자신이 있다구요. 잠시만 더 저의 말에 ……"
내가 떠날 눈치를 보이자, 여인은 이내 말을 멈추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밤 안개가 여인과 내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안개에 휩싸이면서부터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까닭 모를 설움과 고뇌가
마구 끓어오르자, 나는 어느새 여인으로부터 몸을 살짝 돌이켰다. 이제 사방은 정적에
휩싸여 내쉬는 숨길마저도 잿빛 바람결로 흩어지고 있었다. 안개더미에 몸을 던져
그대로 소멸되어 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나는 여인을 향해 작별의 뜻으로
묵묵히 손을 내밀었다. 여인은 나를 바라보며 눈을 한껏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순간적으로 서슬 퍼런 슬픔이 여인의 동공으로부터
빛살처럼 날아올랐다. 여인은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도리질을 하더니,
이내 나를 응시했다. 바다의 수면을 스쳐 가는 바람결처럼 맑은 눈빛이었다. 여인의
선하디선한 눈동자와 맞닥뜨리자,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슬며시 까닭 모를 슬픔이
치솟았다. 안개가 더욱 짙어지면서, 지척을 분간키가 어려워졌다. 바로 이 때였다.
별빛처럼 눈부신 여인의 눈동자가 그렁그렁하게 젖은 채, 바짝 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바싹 긴장하며, 입술이 말라붙는 느낌이었다. 여인은 끝내 말을 삼킨 채, 나의
눈동자를 거울처럼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사방에서 소리 없는 불길이 나의 전신을
휘감아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느새 나의 동공에도 '찡'하고 울려오는 맥놀이가
있었다. 그러면서, 나의 눈시울에도 어느새 눈물이 핑 돌았다.
"미혜씨, 삶이란 원래가 정처 없는 것 아니겠어요 ? 어쩜 이승에선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르겠지만, 건강히 오래오래 사시길 빌게요, 안녕 !"
"잠깐만요 ! 저를 한 번만 안아 주시겠어요 ? …… "
나는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추스르며, 여인과의 마지막 포옹을 했다.
유난히 따스하고도 섬세하게 휘감기는 여인의 체온이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적셔
왔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말이 되어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이윽고
여인은 서서히 몸을 풀더니, 속삭임처럼 말했다.
"영원히 오늘의 이 순간을 잊지 않을게요. 잘 가세요. 행복하시구요.
"
이윽고, 내가 발길을 옮겨 놓자, 여인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눈시울을
적셨다. 문득 때아닌 배꽃의 향기가 왈칵 밀려드는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그러면서부터
나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흘러내리는 눈물 방울이 점차 굵어지고 있었다.
몇 걸음쯤 발길을 옮기자 내리막 굽이 길이었다. 굽이 길로 내려서기 직전에 여인을
마지막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시야에는 밤 안개에 휘감겨 손을 흔드는 여인의 모습이
흐릿하게 드러나 보였다. 덩달아 나도 크게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고는 굽이 길로
내려섰다. 굽이 길로 내려서면서부터 장중한 서해 바다의 파도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의 충혈된 눈으로는 연신 유년기의 아버지의 미소가 달처럼
떠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