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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안개에 잠긴 달빛

손정모(孫廷模)

  그는 낚싯대를 놓고 기지개를 켠다. 정오의 햇살은 수면 위로 은비늘처럼 파득거리고 있다. 목선(木船)을 타고 수줍은 듯 사래질하는 바람결은 청정하다 못해 현란하기까지 하다. 그 바람 줄기에 매달려, 목선의 노(櫓) 그림자가 강심(江心)으로 자꾸만 곤두박질한다. 강심을 향해 예리하게 내뻗은 낚싯대는 매달린 시울마다 강팔진 음색으로 적막을 가르고 있다. 옅은 색조의 물 안개는 음부를 슬쩍 가린 여인의 속옷마냥 고혹적이다. 강 건너편으로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섰고, 미루나무 숲 뒷켠으로는 밀밭이 끝없이 널브러져 있다. 햇살은 아주 천천히 갑판 아래로 몸을 사려 숨어들고 있다. 그는 강가에 서서 귀에 들리지 않는 바람의 몸짓과 목선에 매달린 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
  강 건너 미루나무 숲을 향해, 그는 쌍안경을 든다. 아까부터 미루나무 숲 오솔길에는 백색의 승용차가 멈춰 서 있다. 주차된 지 반 시간쯤 되었을까 ? 이윽고 밀밭으로부터 승용차를 향해, 청춘 남녀가 내닫는다. 짐작대로 여자는 카프란 카페의 민양이다. 여자는 그와 같은 층의 오피스텔을 사용하는 이웃이다. 관측한 바로는 벌써 일 주일째였다. 여자가 상기된 얼굴로 밀밭에서 남자들을 만나온 지가. 감았던 허리를 풀며, 그들은 차에 오른다. 미끄러져 가는 차창 밖으로 유월(六月)의 정밀이 밀려나고 있다.
  그는 쌍안경을 내리고 하늘을 우러러본다. 청명한 하늘엔 새털 구름 몇 조각이 흐른다. 웅웅거리는 엔진음을 내며, 비행기가 남동으로 날고 있다. 은색의 비행기를 보자마자, '아, 날고 싶다.'며 짧게 내뱉는다. 허허로운 새털 구름에서, 반짝 빛나는 솜털의 자유랄까 ?

"이봐, 윤과장 ! 개포동의 공사업체 선정건으로 아마 감사원에서 냄새를 맡 았나 봐. 뭔가 심상치 않아."
잔뜩 긴장한 채 내뱉는 임부장의 말에, 그의 사지는 일시에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비참한 말로가 섬광처럼 펼쳐져 보이는 듯했다. 그는 머리를 감싸쥐며 퍼렇게 눈을 치떴다.

걸어서 반 시간 거리의 양수리 강변에 그의 오피스텔이 있다. 오피스텔을 떠나 강가에 머문 지 벌써 한 달째다. 그는 걸음을 옮겨 텐트 속으로 들어선다. 나흘째 갈아입지 않은 내의로부터 시큼한 땀내가 코를 찌른다. 그는 끈적거리는 몸둥이로부터 너저분한 옷을 벗어 던진다. 순식간에 알몸이다. 문득 뇌리에 새털 구름 같은 허허로움이 스물거린다. 그는 물 수건으로 몸을 닦고는 나른해진 신색으로 드러눕는다. 드러누운 그의 시야로 파란 수평선이 활짝열린다. 수평선 위로는 태깔 좋은 백로 한 마리가 마침 날아 내린다. 백로의 자유로운 활강이 이채롭다. 백로의 자유로운 나래짓에 취해, 그의 의식은 점차 무색계로 빨려든다.

갑자기 물 안개가 짙게 깔리며, 하늘에는 온통 거미줄로 뒤덮였다. 거미줄은 뜯어낼수록 기승을 부리듯 더욱 늘어만 갔다. 그는 거미줄에서 헤어나기 위해 발버둥질을 쳤다. 이 때였다. 하늘 곳곳에서 소나기처럼 독거미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더니만, 금세 형사들로 변하더니, 곧바로 그를 체포하려고 달려들었다. 놀란 나머지, 마구 비명을 질러대다가 그는 눈을 떴다. 잠을 깨었어도 불안감으로 인해, 이마에선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눈을 부비며, 채광창을 연다. 잔디밭 언저리에 등나무 덩굴이 우거졌고, 그 아래로 중년 사내가 누워 있다. 잠든 사내는 잔디밭 위에 다듬어 세운 석조물인 양 미동도 없다. 풀밭 언저리로 백색 점퍼로부터 반사된 빛살이 눈부시다. 노출된 사내의 정물상처럼 그도 채광창 앞에 물끄러미 앉아 있다.
  사내의 복색은 언제 봐도 흰 색 점퍼와 낙낙한 평상복 차림새다. 아마 차림새에는 무관심한 모양이다. 사내의 행동 반경은 언제나 등나무 덩굴 밑이다. 늘상 아침이면 등나무 덩굴에 인접한 물가에서, 사내는 낚싯대를 들고 서성인다. 마치 금세라도 대어를 낚아 올릴 태공이기라도 한 듯. 계속 그러다가 점심 시간이면 식사를 하러 슬그머니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잠시 후엔, 어김없이 되돌아와 낚싯대를 드리운다. 그렇게 시작된 낚시는 저녁 어스름까지 지속된다. 사내의 거동으로 보아 자신의 존재마저도 초연해 버린 듯하다.
  좌대에 걸터앉은 사내를 배경으로 강물이 낙조를 받아 은빛으로 부서진다. 강 건너 물가로는 준설선 한 척이 떠 있다. 작업 인부 너댓이 달라붙어 준설 작업이 한창이다. 준설선의 선수로부터 엔진음이 빛살처럼 날아오르며, 연이은 파문이 동심원을 그린다. 수면 위로 퍼져 흐르는 동심원은 거대한 물고기의 군무(群舞)처럼 보인다. 사내는 쉬임 없는 물고기의 군무를 다스리는 조련사 같다.

그는 고개를 돌려 옷을 갈아입는다. 그의 발치에 핸드폰이 눈에 띈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전원을 켠다. 디지털로 표시된 메시지 접수창을 열어 본다. 음성 메시지가 일곱, 문서 메시지가 아홉이다. 첫 번째 음성은 격앙된 소리로 마구 짖어댄다. 나 임부장인데,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 삼 주일 동안이나 그렇게 말렸고, 또 원하면 뭐든지 붙여 준다고까지 했는데, 정말 이럴 수가 있어 ? 나 도대체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 ? 정말 머리통이 돌인지 아니면 돌인 척하는 건지, 내 원참 ! 그건 그렇고, 감사원에서 너댓 놈이 청사로 들어왔는데 어떡할 거야 ? 자네만 손을 뺀다고 해서, 수습될 일이 아니잖아 ? 하여간 오늘 자정까지 연락해 줘, 알았어 ? 그는 종료 버턴을 누르며 텐트 밖으로 나온다. 그는 수면을 바라보며, 낚싯대를 쥔다. 등 뒤의 자갈 밭의 돌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멈춰 선 소나타 III의 창 밖으로 나폴리 여인은 손을 흔들며 소리 없이 웃고 있다.

  나흘 전 해거름 때였다. 그의 좌대 옆 바로 지척에 연두색의 승용차가 멈춰 섰다. 그는 순간적으로 놀랐다. 여지껏 그가 자리잡은 곳에 차량이라곤 들어온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스물 서넛쯤의 중키에 늘씬한 골격의 여인이 차에서 내렸다. 여인은 썬글래스를 벗어들고는 그에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에게는 차도 여인도 낯설었다. 무척 요염하게 생겨, 온 몸으로 관능미를 자아내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쌩긋 미소를 지으며, 구면인 것처럼 그의 곁에 바짝 다가 앉았다.
  " 고기 많이 잡았어요 ? 저도 고기 꽤나 잡아 봤거든요. 낚싯대 하나 써도 되죠 ? 그럴 줄 알았어요. 선생님의 맑은 눈빛이 이거예요. "
라며, 여인은 엄지 손가락을 하늘로 치켜 세운다. 이렇게 하여 그는 나폴리 여인을 만났다. 나폴리 여인이란, 그녀의 이국적인 미모를 반영하여, 모델 동료들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했다.
  여인은 방긋 미소띈 얼굴로 그의 곁에 앉는다. 어망(魚網)을 들어보곤 '어머 많이도 잡았네요.'라며, 놀란다. 반 년 동안의 모델 생활을 거쳐, 지금은 사우나탕의 전속 안마사로 있다는 여인은 언제 보아도 생기 발랄하다. 여인은 지저귀는 제비처럼 입을 연다.

  그는 여인을 대하자마자 의문에 휩싸였다. 혹시 이 여인이 수사 요원들이 보낸 미끼는 아닐까 ? 그가 무슨 강력범이나 살인 용의자가 아닌 다음에야 이렇게까지 뜸들일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도피 생활이 길어지자, 그는 심한 정신적인 불안감과 짙은 고독감에 휩싸였다. 그는 더 이상의 고독을 반추하고 싶진 않았다. 설사 여인을 믿다가 뒤통수를 맞는다고 할지라도, 믿어 보는 자체가 새로운 돌파구일 듯도 싶었다. 그는 일단 정직하기로 마음먹고, 경건한 마음으로 여인을 대했다.

  선생님은 세무과장님이라 그러셨죠 ? 서울 강남에 근무하셨다구요 ? 그 지대는 퍽 물 좋은 지역이었을 텐데, 혹시 너무 챙기신 것은 아니겠죠 ? 아니 뭐라구요 ? 바로 그것 때문에 강가에서 세월을 보내게 되셨다구요 ? 세상에 어쩌면 그럴 수가 ?
  남들 다 하는 것, 표시나지 않게는 할 수 없었나요 ? 그럼 어떡허죠 ? 정년까지 보장되는 공직 생활에서 쫓겨나게 되었다구요 ? 그 뿐이 아니라구요 ? 검찰에 소환되어 조만간 구속될 게 확실하다구요 ? 그래도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 사실상의 생명이 사라지는 순간이라구요 ? 너무 엄살 부리지 마세요. 시야만 좀 돌리면 얼마든지 다른 활로가 있잖아요 ? 남의 이야기라고 마구 해서는 안 된다구요 ? 그건 절대로 아니예요. 저의 처지에 비한다면 아무 일도 아니예요. 저의 처지가 어떤지 알고 싶지 않으시다구요 ? 그럼 전 갈게요. 왜 붙잡으세요 ? 제 얘기를 들어 주시겠다구요 ? 진작 그러실 일이지, 저도 왠지 선생님께만 고백하고 싶었어요.

그로부터 60여미터 떨어진 등나무 아래 강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중년 사내는 석상처럼 미동조차 없다. 팔을 수평으로 뻗어 낚싯대를 드리운 자태는 마치 검객이 검(劍)을 빼든 형세처럼 근엄하고 위풍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석양빛을 받아 강물은 울긋불긋 파득거리고 있다. 파랗게 짙어 가는 물색과 수면을 뿌옇게 뒤덮는 강안개에 젖어, 사내의 모습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돌연 낚싯대가 활처럼 휘어지더니, 사내는 민첩한 손놀림으로 물고기를 낚아 올린다. 팔을 내뻗고 거두어 들이는 품이 이만저만한 솜씨가 아니다. 잠시 흐트러졌던 자세를 추스린 뒤, 사내는 이내 석상처럼 저녁 안개에 휘감겨 들고 있다.

그는 휴대용 축전지로 핸드폰을 충전시킨다. 핸드폰을 켜 둔 채, 다시 낚싯대를 잡는다. 그는 저녁 안개가 휘몰아치는 강심을 그윽히 지켜 본다. 돌연 핸드폰의 불빛이 깜박거리며, 메시지가 수신되고 있다. 그는 음성 서비스를 통해, 두 번째의 음성 메시지를 청취한다. 윤과장님, 저 형균데요, 오늘 아침에 세무1과로 검찰의 소환장이 내려왔습니다. 일곱이나 되는 부서원들은 모두 자리를 피해 버리고 저만 남아서, 전화를 받고 있습니다. 개포동의 양재천 하천 공사 업체에서 임원들이 고소장을 낸 것 같습니다. 피하신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과장님, 저의 음성을 듣는 대로, 연락 바랍니다. 되도록 빨리요, 거듭 부탁 드립니다. 종료 버턴을 누른 뒤에 핸드폰을 좌대에 밀쳐 놓는다. 그리고는 다시 낚싯대를 쥔 채, 물 무늬 부서지는 강심을 지켜 본다.

느닷없이 찌가 쏙 들어가면서 낚싯줄이 팽팽해진다. 저녁 무렵부터는 끌어올리는족족 우람한 메기다. 메기는 목구멍까지 바늘을 삼키고서도 탐욕스럽게 버둥거린다. 메기를 낚아 올릴 때마다 그는 자꾸만 수사 기관에 붙잡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물색이 짙어지는 강심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에 잠긴다. 양수리 강변을 찾아온 첫 날이 떠올랐다. 분명히 그 때는 그랬었다. 마음 정리가 끝나는 대로, 곧바로 몸을 강물에 날려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정리하려 들수록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그러다가 어느 새 한 달째에 접어든 거였다.

나폴리 여인은 그의 오른쪽 다리를 안마하고 있다. 복사뼈와 무릎 사이의 구간을 실뱀처럼 나긋거리며 손가락이 오르내린다. 피로가 풀리는 듯한 시원한 느낌이 그의 전신을 누벼 흐른다. 힐끗 그의 표정을 살피더니, 그녀의 손길은 무릎을 지나 그의 허벅지를 더듬어 오른다. 허벅지부터는 엄연한 성역(聖域)이다. 반바지 가랑이 사이로 매끄러운 손을 넣어, 무릎부터 허벅지쪽으로 거슬러 더듬어 오른다. 고간(股間)까지 올라와서는 슬그머니 허벅지로 내려간다. 고간과 무릎 사이를 오르내리며, 그녀의 손길은 마음껏 기교를 부리고 있다. 그는 전신이 나른해지며, 낚싯대를 쥔 손에서 힘이 슬슬 풀려 나간다. 이 때부터 나폴리 여인은 자신의 처지를 읊조리기 시작한다. 흡사 여름 나절에 정신 없이 지저귀는 제비를 닮았다고 느껴진다.

그 때가 지난 정월말께였죠. 새벽 다섯 시에 사우나탕에 들어선 손님은 쑥탕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고 있었어요. 보통 쑥탕을 찾는 손님은 거의 다 안마사와 교접을 원하는 축들이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쑥탕으로부터 걸려 온 인터폰은 교접 대상의 안마사를 찾는 거였어요. 총 네 명의 안마사들 중에서, 두 명은 외박에서 아직 안 들어온 상태였고, 한 사람은 몸살로 앓아 누웠기에, 손님의 상대는 당연히 저의 몫이었어요.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쑥탕에 팬티만 걸친 채 들어서자, 머리가 벗겨진 비만형의 손님이 벌겋게 익은 얼굴로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50대 초반의 손님은 퇴직한 외항선 선장이라고, 자신을 밝혔죠. 20분쯤의 안마가 끝날 무렵, 선장은 수표를 두 장 쥐어 주고는 말했죠. 아가씨, 나는 장화를 신는 것은 싫어하거든, 체형에 맞춰 잘 좀 해 줘. 적절히 그의 욕구를 채워 주자, 그는 다시 석 장의 수표를 쥐어 주곤 떠났어요. 그 뒤로 두 달간 여섯 번을 찾아와 교접을 나눈 뒤엔 종적이 묘연했죠.

이제 어망에는 잡힌 물고기들로 제법 그들먹하다. 잠시 후의 운명도 모른 채, 물고기들은 어망 속의 자유에 심취해 있다. 유영하고 노니는 품이 전혀 속박당한 것 같지가 않다. 문득 그는 자신을 되돌아봤다. 혹시 그가 지금 누리는 자유는 나폴리 여인이 제공한 '여인 속의 자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인 속의 자유란 폭양 아래의 포플러 그늘이 주는 풍성함에 비견될 수 있잖을까 ? 마침내 그는 여인의 그늘에 길들여지는 자신을 발견해 낸다. 그리고는 아무도 몰래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던 지난 5월 밤이었어요. 선장은 전화로 자신은 여러 날 몸져 누워 있는데, 아무래도 에이즈일 것 같다면서, 저도 에이즈에 감염되었을지 모르니까 병원에 가 보라고 했어요. 그리고, 덧붙이기를 만약 감염되지 않았으면,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주어진 생을 소중하게 가꾸어 가길 바란다며 전화를 끊었어요. 갑자기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받은 후에 농담이기를 바라며, 병원을 찾기로 마음 먹었죠. 날이 샐 때까지 오들오들 떨다가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짜 내어, 서울대 병원에 들렀죠. 검진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를 못 기다려서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를 거예요. 처참한 심정으로 의사를 만났으나, 결과는 아주 정상이라는 거였죠. 선장의 얘기를 들려 주었지만, 의사는 빙그레 웃으며, 부언해서 설명했죠. 분명히 에이즈 바이러스는 검출되지 않았으며, 추측컨대 선장이 저를 이용하여 자신의 감염 여부를 확인하려는 시도였을 거라고 말이죠. 혹시나 하는 두려움에서, 두어 군데의 다른 병원을 더 찾았으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찌르르하고 전신을 누벼 흐르는 안도감과 환희의 충만감으로 인하여, 완전한 새 삶을 부여받은 느낌이었죠. 저는 그 때서야 외항 선장의 의도를 알아차렸어요. 제게 현실의 소중한 의미를 재발견하게 하려는 뜻이라고 말이죠. 하여간 저는 선장으로 인하여, 최대의 선물을 받은 셈이었죠.
터질 것 같은 환희를 발산할 길 없어, 저는 강변을 찾아 나섰고, 강가에서 제가 처음 만난 분이 선생님이었어요. 첫 인상 말이시죠 ? 30대 후반의 깔끔한 용모였지만, 전신으로부터 뻗쳐 나오는 고뇌의 빛이 너무나 강렬하게 느껴졌어요. 그 순간부터 제 가슴 속엔 까닭 모를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죠. 왠지 가슴 속을 짓눌러 오는 암울하고도 답답한 느낌 같은 거 있죠 ? 착잡하다 해야 할지 비통하다 해야 할지 형언할 수 없는 심정에 휘말려 버렸죠. 굳이 말하자면, 극도의 절망감으로부터 갓 벗어난 저의 처지인지라, 선생님에 대한 일종의 동병상련의 정이 아닐까 해요.

바로 이 때였다. 부웅 붕 엔진 소리를 내며 사이카 2대가 등나무 밑의 사내를 향해 달려가더니 멎는다. 건장한 체격의 두 청년은 깎듯이 인사를 하더니, 공손한 자세를 취한다. 사내는 낚싯대를 좌대에 걸어 놓은 뒤, 두 청년들을 데리고 인접한 텐트 속으로 사라진다. 텐트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몰라도 잠잠해 보인다. 사람들이 사라진 적막감에 젖어 있노라니까, 텐트 속으로부터 남자 셋이 다시 나온다. 마치 두 청년은 죄인이라도 된 듯 연방 굽신거리더니, 다시 사이카를 타고는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중년 사내는 치를 떠는 듯 허공을 향해, 두 차례의 주먹질을 하고는 담배를 피워 문 채, 강가를 서성거린다.

두 청년의 출몰과 중년 사내를 떠올리자 그는 슬며시 불안해졌다. 혹시 그들이 형사들은 아닌지 가슴이 떨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관찰 결과로는 절대로 중년 사내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두 청년들이 굽실거리며 떠받드는 그는 대관절 누구란 말인가 ? 그리고, 며칠 전에 불쑥 나타난 나폴리 여인만 해도 여전히 수상했다. 혹시 그녀가 수사 기관의 끄나불은 아닌지 ?

핸드폰에서 불빛이 반짝거리더니, 새로운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 동진씨 ! 저를 너무 타산적인 여자로만 보지 마세요. 현실상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고, 나래의 학업에도 지장이 없어야 되잖아요 ? 마음이야 제가 더 아프지 동진씨가 더 아프겠어요 ? 기왕 합의로 갈라선 마당에 혹시 나래가 전화를 하더라도 받지 마세요.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그게 나래에게나 동진씨 모두를 위하는 길 아니겠어요 ? 지난 10년간의 부부 생활에서 저의 좋은 모습만을 기억해 주세요. 동진씨, 너무 절망 마시구요, 당당한 삶을 사시기를 바래요, 안녕. 복잡한 상념에서 헤어나기 위해, 그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눈에 띄는 대로 조약돌을 힘껏 걷어차 버린다. 걷어차인 돌이 휭하니 허공을 날아 강물에 박히며 물거품을 튕겨 올린다.

  이제 해는 지평선으로 몸을 숨기려 한다. 나폴리 여인은 그의 텐트 속에서 냄비와 양념류 및 버너를 가져 온 뒤에, 잡힌 물고기들을 깨끗이 씻어 매운탕을 끓이기 시작한다. 구수한 냄새가 곧 사방으로 내리깔린다. 그는 텐트 속으로 들어가 소주병을 들고 나오더니 등나무 덩굴 아래를 향해 고함을 지른다.
  " 여보슈, 형씨 ! 이리 와서 술 한 잔 합시다. "
  석상처럼 굳어 있던 중년 사내가 이내 몸을 돌리더니,
  " 지금 나를 부른 거요 ? "
라고 대꾸해 왔다.
  " 그럼요. 지금 형씨 말고 여기 누가 더 있겠소 ? 이리 와서 술잔을 나누며 세상 사는 이야기나 나눕시다. "
  매운탕을 술안주 삼아, 셋은 둘러앉아서 소줏잔을 기울인다. 나폴리 여인은 차를 몰아야 한다면서, 술잔에 살짝 입술만 댄 뒤, 잠시 후 차를 몰고 떠난다.

이제 남자 둘만 남아, 술잔을 기울인다. 통성명을 하고 지내자구요 ? 좋아, 그럽시다. 나는 남기철이라는 놈이요. 직업 말이요 ? 계집애들 사타구니 감상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란 말이요. 에헤,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 그 왜 있잖소 ? 처음에는 말이오. 무작정 상경하는 처녀애들만을 꾀어서 포르노를 찍었는데, 지금은 서로 포르노 모델이 되겠노라고 하루에도 20 ∼ 30명씩 촬영소를 다녀간다구요. 놀라운 것은 여대생들이 쉽게 용돈을 벌려고 재학 증명서까지 떼 와서는 자신들을 엘리트 모델로 써 달라고 팬티를 마구 까 내리는 세상이라 이 말이요. 그 년들의 말이 뭐라는지 아시우 ? 대학생이고 나발이고간에, 여성의 성기를 만들어 놓은 것은 이 세상의 수컷을 찾으라는 신(神)의 고의적인 농간이 아니겠느냐는 거요. 포르노 비디오는 왜 찍느냐구요 ? 솔직히 말해, 당신은 포르노 비디오를 본 적이 없소 ? 대답 못 할 줄 알았소. 찾는 사람이 있으니까 찍는 거 아니오 ? 우리 나라 처녀애들의 몸매가 동남아에서는 탐욕의 선풍적인 대상이 된다는 것은 들었지요 ? 국내에서 제작된 80 %가 태국, 싱가폴, 인도네시아 등지로 암거래되고 있는 실정이 아니오 ? 이 세상의 수많은 예술품들을 나열한 대도 역시 인체의 오묘한 형상미와는 비교가 안 된단 말이오. 삼삼하게 생긴 년은 먼저 맛을 본 뒤에, 비디오 촬영장으로 데려 가는데, 촬영장에서 보면 다시 한 번 더 손대고 싶을 정도의 매력을 풍긴다니까요, 글쎄. 전직이 뭐냐구요 ? 아, 그건 척 들어보면 알 일이지. 나는 도무지 글자 나부랑이에는 흥미가 없는 놈이었거든. 그래서, 중학교까지만 근근히 졸업하고 나서는, 곧바로 가출을 해 버렸소. 그 후에 사창가 골목을 넘나들면서 배우고 익힌 것이라곤 계집년들의 엉덩이나 까 내리는 거였소. 하지만, 지금껏 나는 처녀애들을 화나게 하거나 울려 본 적이 없소. 나에게 다리를 벌려 준 년들치고 진정으로 나와 사귀고 싶어하지 않은 년은 단 한 명도 없었소. 또한 경찰서나 교도소 같은 곳의 출입 경력도 전혀 없는 놈이란 말이요. 남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건 말건 내 나름으로는 나의 일이 정당한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믿고 있소. 예를 들어서, 적어도 나는 국민들이 경모하는 자리에 앉았다가, 교도소 신세를 진 숱한 누구들처럼 비양심적인 놈은 아니라 이 말이요. 내가 만드는 테이프는 오로지 성인용으로서,나는 나의 판매 조직을 통해, 오로지 성인에게만 판매하도록 지시하고 있소.이것은 나의 직업관이자 판매 철학이기 때문에 적어도 나를 아는 사람은 나를 이해하고 있소. 오늘도 촬영소 종업원 애들 둘이 녹화 필름을 갖고 왔었는데, 텐트 안에서 돌려 본 결과, 모델의 연기가 신통찮은 느낌이 들었소. 홧김에 애들만 호통을 쳐서 보내 버렸소. 인도네시아애들이 원하는 바로 그러한 장면들이 빠져 있었거든요. 한 시간 이내에 재촬영하도록 애들을 닥달하여 돌려 보냈소. 한 대씩 차 안길까도 생각했지만, 5년을 넘게 따라다니는 정리를 생각해서, 호통만 쳐 주었을 뿐이오. 계속해서 등나무 덩굴 밑만 고수하는 이유가 뭐냐구요 ? 그건 일종의 작품 소재를 만들기 위한 영감을 얻으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그 다음으로는 취미 생활을 살리려는 거죠, 뭐. 왜 안갯발이 짙게 깔리지 ? 술이 확 취하는 것 같은데, 다음에는 내가 부르겠소. 중년 사내는 손을 두어 번 흔들고는 비칠비칠 걸음을 옮기며 등나무 덩굴 아래로 사라져 간다.

  사라지는 사내를 바라보며, 그는 중얼거린다. 언중 유골이라도 이건 너무 심해. 사람을 정면에 두고 바보로 만들어 버리다니 ? 나는 도대체 뭔가 ? 나도 국민들이 경모하는 자리에 앉았다가, 교도소 신세를 질 숱한 비양심적인 누구들 중의 하나라고 비아냥거리는 거야, 뭐야 ?
  그는 정갈하게 설겆이를 해 놓고는 텐트 안으로 들어간다. 이동용 축전지에 전압계를 연결해 보니, 눈금이 바닥에서 까딱거린다. 축전지를 충전시키든지 갈아야 할 때다. 그는 텐트와 낚시 장비는 그대로 놓아 둔 채, 텐트 옆에 세워 둔 자전거를 타고 그의 오피스텔로 향해 떠난다.
  강남 지역의 45평짜리 아파트를 처분하여 처 자식의 위자료로 정리해 주고 나니, 남은 것이라곤 달랑하니 임대한 오피스텔 1칸뿐이다. 오피스텔에 들어서 커텐을 젖히니, 복도 맞은 편의 오피스텔 창문에 여인의 모습이 비친다.
  불 꺼진 방에 창문을 열어 놓고 여인은 밖을 내다보는 중이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오른손을 접었다 펴며, '잠깐 건너 갈게요.'라며 창을 닫는다.
  잠시 후 민양은 잠옷 차림새로 그의 오피스텔로 들어선다. 그는 움찔 놀라 표정이 복잡해진다. 아저씨, 뭘 그렇게 놀라세요. 아저씬 제 직업을 알고, 저는 아저씨가 혼자란 걸 알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놀라긴요 ? 잠옷이라 신경이 쓰이세요 ? 저는 막 자리에 누우려다 아저씨댁에 인기척이 들리기에 그냥 들어와 본 것뿐이예요. 혹시 죄지은 것 있으세요 ? 삼 일째 경찰이 다녀갔어요. 내가 보기엔 아저씬 법 없어도 살 사람으로 보이는데, 뭐가 잘 못 됐지 ?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앨범을 내려 놓고는 주절거린다.
  아저씨, 지난 번에 아저씨가 들려 준 말에 따라, 나도 건전하게 살아볼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난 체질인가 봐요. 하루라도 남자의 애무를 받지 못하면, 살아갈 의미가 없게 느껴져요. 처음엔 2년만 이 짓을 하다가 화장품 가게를 열어 볼까 생각했는데, 난 이 일을 도저히 그만 둘 수 없을 것 같아요. 자꾸만 피가 달아 오르고 아무 남자에게나 다리를 벌려 주고 싶다구요. 아저씨 그렇게 섰지만 말고, 이리 좀 와 봐요라며 그녀는 그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그의 침대로 다가간다. 침대에 걸터앉자마자 그녀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손으로는 그의 가슴을 더듬는다.

그는 그녀를 내버려 둔 채, 그녀의 앨범을 펼친다. 배경은 양수리 강변의 밀밭이다. 자동으로 촬영된 남녀의 교접 장면이 펼쳐진다. 여인은 모두 민양인데, 대상은 모두 다 다르다. 그는 아득한 현기증을 느끼며, 앨범을 밀쳐 놓고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여인은 기다렸던 것처럼 불을 붙여 준다. 담배 연기가 실내를 뒤덮는다. 천년의 세월 동안 안개 속에 묻혀 있던 동굴에 첫 발을 내딛는 듯한 숙연함이 일시에 주변으로 내리깔린다.
부장은 그의 사직서가 수리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사직이 아니라면 오로지 파면이다. 세무직에 있던 남들은 다 까딱없는데 하필이면 강남 지역이 수사 대상으로 떠오를 건 뭔가 ? 생각할수록 치가 떨린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물 좋을 때, 한 몫을 잡는다는 게 그만 덜컥 덜미를 잡힌 것이다. 사직서를 써 낸 뒤, 일 주일간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미아리 일대를 누비며, 숱한 창녀들의 사타구니에 정액을 쏟아냈다. 그래도 가슴에 쌓이는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절망감과 허탈감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미친 듯이 양수리 강변으로 달려나가게 된 터였다. 창 틈으로 들어오는 공기로 밤이 깊었음을 느꼈다. 잠자코 있던 그녀가 그의 혁대를 풀며 그의 바지섶을 열어 젖힌다. 그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아득한 현기증을 느끼며,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둔 채 눈을 감는다.

강가에 도달해 보니, 아침 해가 막 수평선 위로 떠오르고 있다. 중년 사내가 자전거 위의 그를 보자마자 오라고 한다. 등나무 덩굴 밑의 텐트 안으로 들어선다. 건설 공사장에서 끌어 온 전원으로 작동되는 비디오 화면에, 줄줄이 포르노 미인들이 벌거벗은 채 선정적인 행위를 해대고 있다. 포르노 여인들은 모두 우리 나라의 처녀들이다. 싱가폴 밀수출용이랜다. 화면을 보자마자 사타구니께가 우련해 오면서 차츰 성기가 발기해 오른다. 중년 사내는 의미 있는 웃음을 띠며, 진로를 따라 술잔을 건넨다. 지금껏 보던 외산 포르노와는 다른 눈에 틔는 장면들이 곳곳에 깔려 있다. 포르노 여인들의 표정부터가 완연히 다르다. 한결같이 지극히 평온하고 그윽한 기품마저 서린 미소를 짓고 있다. 중년 사내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들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신성한 직업 정신에 의해, 혼을 불어 넣은 작품들이라고 한다. 비디오 화면을 보던 그는 돌연히 감전이라도 된 듯 내면으로부터 치솟는 부끄러움으로 치를 떤다. 명치 끝을 후벼 파는 듯한 통렬한 느낌이 들며, 술기가 확 퍼져 오른다. 결코여인들의 몸짓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세무를 빙자한 금품 강요 행위가, 여인들의 선정적인 몸짓을 보는 도중에 순간적인 깨달음이 되어 부끄럽게 느껴져 왔기 때문이다. 남들이 치욕스럽게 여기는 것도 중년의 사내는 프로 정신과 예술의 혼으로 승화시키지 않는가 ? 무엇을 하든 경건함에 달린 모양이다.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지 못한 채, 아귀같이 탐욕에만 집착했던 자신이 너무나 혐오스럽다. 차라리 그에 비하면, 포르노 미인들의 교접 행위는 가식 없는 인간 본성의 포용력으로 느껴진다. 만류하는 중년 사내를 밀치고 그는 사내의 텐트를 떠나온다. 취기로 눈 앞에 서린 안갯발이 빙벽처럼 느껴진다.

그는 그의 텐트 속에 들어서자마자 술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깊은 잠에 빠져든다. 잠든 그의 곁에서, 핸드폰만이 단조로운 신호음을 반복하여 날려 보내고 있다. 긴 터널 같은 악몽에 시달리다가 눈을 뜨니, 석양의 햇살이 사방에 내리깔려 있다. 눈을 뜨고 텐트 밖을 나선 뒤에는 낚싯대를 드리우며, 담배를 피워 문다. 직장 생활을 할 때까지만 해도 피우지 않던 담배였다. 겹겹으로 쌓여 가는 울화로 인해, 그는 어느 새 담배를 찾게 되었다. 입을 잔뜩 벌린 채, 숨을 끊듯이 내뱉으며 고리 연기를 연방 피워 올렸다. 갑자기 낚싯대가 휘청 꺾이며, 낚싯줄이 사정 없이 끌려 들어간다. 낚싯줄을 통한 느낌으로, 아무래도 굵은 메기일 듯했다. 수면이 갈라지면서 낚싯줄에 매달려 올라온 것은 예상대로 굵은 메기였다. 낚시 바늘을 빼 내려고 몸둥이를 잡으니, 이만저만 미끄러운 것이 아니다. 파득거리는 메기를 움켜쥔 채, 그는 생각에 잠겼다. 이 귀중한 시간에 메기나 움켜쥐고 있는 자신이 못나고 설웠다. 그는 메기를 어망에 던져 넣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개를 수그렸다. 피우던 담배도 반쯤 태운 채 강물에 뱉어 버렸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고적감에 치를 떨며, 한없이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상념에 잠겼다. 물 무늬 부서지는 수면을 보자, 자꾸만 구토가 치밀어 오르려고 했다. 머리를 처박은 채, 끝없는 회한에 잠겨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히 등 뒤로부터 하얀 손길이 뻗쳐 오면서 그의 눈물 젖은 뺨을 어루더듬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다름 아닌 나폴리 여인이었다. 그가 너무나 상심해 있던 나머지, 그녀가 차에서 내려 접근하도록 모르고 있었다. 사슴의 눈빛처럼 맑은 그녀의 눈동자가 마침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없이 그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를 보자 그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적으로 전율할 듯한 감동이 그의 전신을 휩쓸었다. 어느 새 남녀는 서로를 깊숙하게 포옹하고 있었다. 가슴 벅찬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는 다음 주부턴 홍익대 미대의 누드 모델로 나가게 되었어요. 어차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세상의 다시 없는 축복이라면 말이죠. 이제부터라도 제가 가진 몸매를 건전한 방향으로 사용하고 싶어요. 어제 날짜로 안마사라는 직업은 그만 두었어요. 그리고, 그 동안 모아 두었던 자금으로, 지금부터는 학원에 다닐 작정이예요. 그리하여, 내년초엔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새로운 인생을 열어 나갈 작정이예요. 그 때쯤이면, 선생님도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나 있을 거니까, 제가 구혼 신청을 하더라도 웃으시지는 않겠죠 ? 갑자기 눈을 반짝이더니, 그녀가 정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1시간 전에 저 쪽 강가에서 형사 두 명이 선생님을 체포하러 왔었거든요. 제가 선생님의 약혼자라고 말하고는 책임 지고 출두시키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랬더니, 그들은 선선히 제 말을 믿고 돌아갔어요. 제 친척들 중에도 법조계에 몸 담은 사람들이 더러 있거든요. 선생님의 경우에 대해 한 번 알아 봤죠. 폭행이나 절도처럼 죄질은 나쁘지만, 일단 공직으로 봉사해 왔고 초범이라는 점을 고려한 댔어요. 벌금형일 확률이 가장 높고, 실형이 떨어질지라도 보통 집행 유예로 선고된 댔어요. 크게 두려워하지 말고 제 말대로 자진 출두해 주시는 거죠 ? 제 말을 들어 주셔서 고마워요. 일단 소용돌이를 빨리 돌파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하여간 속죄하는 자세로 결과를 받아들이셨으면 해요.

  그는 고개를 빼 멀리 떨어진 강가의 느티나무 그늘을 본다. 형사들이 섰던 강변은 하늘과 물빛이 어우러져 아늑한 정취를 자아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폴리 여인을 본다. 안개 깔린 물 위의 수련꽃만큼이나 청아한 그녀의 눈매가 절망에 처한 그를 감동시킨다. 그는 용기 있는 그녀의 사랑에 감동하여, 그녀를 소중하게 들어안고는 텐트 속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감은 눈에 미소를 띤 채, 그에게 몸을 맡기며 말한다.
  "선생님, 저는 이미 선생님께 저의 마음을 열었어요.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는 오늘이 되게 해 주시는 거죠, 네 ? "
  그는 서서히 그녀의 옷을 벗기며 대답한다. 물론이죠. 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나를 말입니다. 그래도 사람이라고 예로서 대해 주는 당신을 만나다니요 ! 어쩜 이런 행운이 있을 수 있을까요 ? 당신의 맑은 눈물을 본 순간, 마치 전설 속의 공룡의 눈물을 본 느낌이었어요. 하필이면 왜 공룡의 눈물이냐구요 ? 중생대를 제왕처럼 군림했던 전설 속의 동물이 바로 공룡 아니었겠어요 ? 어째 공룡이란 단어에서, 과거의 찬란한 영화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지 않았어요 ? 당신의 말대로 더 이상 비겁한 자로 움츠러들지는 않을 게요. 내가 왜 한 달 가까이를 양수리 강가에서 보낸 줄 알아요 ? 정녕 치졸하고도 고달픈 생을 강물에 날려 보내고 싶은 마음, 그 하나뿐이었어요. 태양이 떠오를 때마다 석양에는 차디찬 시신으로 드러누울 나의 주검을 생각했어요. 비록 들판에는 나를 위해 울어 주는 새 한 마리 없을지라도 말이예요. 그냥 허허로이 흘러가는 강물에 생을 마감하고 싶었어요. 한 달여의 세월을 결단도 못 내린 채, 하염없이 방황에 방황을 거듭했죠. 문득 전설 속의 공룡의 비애가 당신의 눈매로부터 반짝 되살아나는 느낌이었어요. 그렇게도 끝이 안 보이던 돌파구를 이제야 찾은 느낌이 들어요. 나의 잦아들던 불꽃이 정녕 당신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불붙게 되었어요. 내 죽는 날까지 오늘의 감동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게요. 그런데 말이예요, 정말 내가 당신의 남편이 되더라도 후회는 없겠어요 ?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매에 방긋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그럼요, 저는 왠지 첫 만남에서부터 선생님의 강렬한 흡인력을 느꼈거든요."

일순 주위에는 얼음 같은 정밀이 감돈다. 천년 빙하에서 솟구치는 바람결인 양, 서로를 향한 눈매가 너무나 청순하다. 선홍으로 타는 저녁놀에 잠겨, 강물은 끝없이 금빛 은빛으로 반짝인다. 하늘에는 저녁놀이 타오르고, 강물에는 반짝이는 선율이 춤추는 석양이다. 그들은 생각한다. 이렇게 평온하고 아늑한 석양을 맞은 적은 없노라고. 자연의 정취에 젖어, 마침내 그들은 상기된 얼굴로 한 몸이 된다. 혈관마다 치솟는 기쁨으로 박동이 불길처럼 번진다. 그들은 하늘을 날아 오를 듯한 강렬한 절정감에 휩싸여 몸을 떤다. 이윽고, 그들은 나란히 엎드려 채광창을 열고는 강물을 본다. 무변대하(無邊大河)로 널브러진 수면은 낙조를 받아 한껏 휘황찬란하게 반짝인다. 점차 강 바람이 일며 저녁 안개가 피어 오른다. 농염한 여인의 얼굴인 양, 지평선으로부터 보름달이 살며시 얼굴을 내민다. 차츰 땅거미가 밀려들며, 저녁 안개에 잠긴 달빛이 미소 짓는 박꽃처럼 깨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