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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벽
손정모

  시린 얼음물처럼 드맑은 강물이다. 강풍이 휘몰아치는 모양이다. 포장마차의 비닐 휘장이 새된 소리로 울부짖는다. 사내는 소주병을 딴다. 벌써 세 병째다. 처연한 핏빛으로 타는 석양이다. 그는 상념에 잠겨 슬며시 입술을 깨문다.
  어제의 눈사태 발굴 현장에서였다. 고사목에 휘감겨 나뒹군 시신들. 시신들이 공개될 때마다 울음조각들이 눈가루처럼 흩날렸다. 지리산의 피아골로 내리쏟아진 엄청난 눈 더미들 아래에서였다. 사내의 어머니의 얼굴과 머리카락에는 여전히 눈가루들이 살아서 나부대었다. 어쩜 생시와 그리도 달라보였던지 사내는 가슴이 저렸다. 그토록 평온한 어머니의 모습에 사내는 충격이 컸다.
  투명 비닐 문이 열리면서 여인이 들어선다. 사내와 엇비슷한 위치에 앉아 여인은 주인을 부른다. 차가운 미소를 흘리며 여인은 장어구이와 참이슬을 주문한다.
  사흘 전 아침이었다. 전화기를 통해 사촌형의 긴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지금 텔레비전을 켜 봐. 눈사태가 일어나 난리야. 조난자들은 승려와 신도들이 대부분이래.”
  사내는 텔레비전을 켰다. 아나운서가 뉴스 속보라며 한창 열을 올렸다. 지리산 남쪽의 피아골로 내리쏟아진 눈사태였다. 폭설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시신 발굴 작업은 한창이었다. 사내는 미처 몰랐다. 사내의 어머니가 눈에 묻혔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평소에 사내의 어머니가 머물던 곳은 지리산 서쪽의 천은사였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손님이라곤 사내와 여인이 전부다. 사내는 여인의 안색을 흘깃 훑어본다. 서릿발이 줄줄이 일어선 표정이다. 왠지 사내에게는 팔자가 드세어 보인다고 느껴진다. 팔자가 드센 얼굴로는 사내의 아내 역시 만만치 않다. 팔자라는 말을 떠올리자 사내는 흠칫 몸을 떤다. 그러다가 몸을 추스르며 사내는 술잔에 입술을 갖다댄다. 바로 이 때다. 여인이 사내의 의중을 묻는다. 손님이라곤 둘뿐인데 동석해도 되겠느냐고. 사내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떡인다. 왠지 여인과 마주앉자 사내의 전신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든다. 사내는 머리를 흔들며 별스런 일도 다 있다며 짐짓 허리를 편다. 그런데도 사내에게는 왠지 섬뜩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는 느낌이다. 여인은 미모에 어울리지 않게 앙칼진 목소리로 사내를 향해 말한다.
  “왜 하필이면 섬진강에서 술잔을 기울이세요? 하동의 솔숲에서 우는 바람소리에는 귀기(鬼氣)가 얼마나 서린 줄 아세요?”
  여인은 장어구이에 젓가락을 들이대며 얼음장같이 서늘한 미소를 짓는다. 장어의 발그레한 살갗을 대하자마자 사내의 가슴이 벌떡거린다. 사내의 관자놀이 부분에도 미미한 경련이 인다. 선홍색의 색채가 사내의 시야에 밀려드는 순간이다. 사내는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에 휩싸인 느낌이다. 사내는 자신도 몰래 왼손을 말아 쥔다. 그러자 의식의 갈피로부터 핏발선 아버지의 눈빛이 밀려든다. 사내는 가볍게 몸을 떨어대며 밭은 숨을 내쉰다. 여인은 이를 놓치지 않고 묻는다. 장어구이가 마음에 안 드느냐고.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강물로 떨군다. 강물은 붉은 공작의 깃털처럼 현란하게 남실댄다. 사내에겐 장어의 발그레한 색채와 강물의 색깔이 흡사하다고 여겨진다. 선홍색이 가슴으로 밀려들면서부터 사내의 눈빛이 흔들린다. 사내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듯 여인을 향해 입을 연다.
  사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사내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마당에는 사람들로 북적대었다. 평소에는 영 내왕이 없던 아랫마을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의 악다구니가 거세어지자 사내의 아버지가 냅다 고함질렀다. 핏발선 눈빛이 섬뜩할 지경이었다. 순식간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내 참 더러워서. 없는 놈한테 돈 빌려 준 게 그렇게 불안해? 땅 마지기 하나 없이 사는 나를 이렇게 윽박질러? 가진 건 이밖에 없으니까 니들 맘대로 해.”

  밥솥까지 빼 가는 빚잔치의 현장이었다. 사내의 어머니는 대밭에서 코를 싸쥐며 흐느꼈다. 사내의 아버지는 울분을 터뜨리며 사립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사내에게 그 때처럼 처연한 석양은 처음이었다. 부모가 떠난 마루에 내리박히던 햇살은 농염한 핏빛이었다. 사내의 이야기를 듣다가 여인은 잠시 눈물을 글썽인다. 그 날처럼 긴 밤은 없었다. 배고프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밤이었다. 이 때부터였다. 사내는 선홍색을 볼 때마다 핏발선 아버지의 눈빛을 떠올리곤 했다. 사내는 젓가락으로 장어의 몸뚱이를 뒤집으며 말한다.
  “예닐곱 살 때에 부모를 여읜 아버지였어요. 어려서부터 떠돌이 생활이었으니 설움이 오죽 했겠어요?”
  사내의 아버지는 정서불안으로 늘 첫 마디부터가 짜증이었다. 언제나 핏발선 눈동자에선 찬바람이 일었다. 알거지로 떠돌다가 사내의 어머니를 만나서야 문중으로 돌아왔다. 당장 땅이 없다 보니 종중산에 빌붙어 살아야만 했다. 사내의 어머니만 해도 그랬다. 중매로 맺어진 이전의 남편과는 마음이 안 맞아 도망을 나온 새댁이었다. 사내의 어머니의 말로는 이전의 남편은 우둔하기 짝이 없는 남정네라고 했다. 그렇게 도망 나온 사내의 어머니는 공사판 언저리에서 국밥 장수를 했다. 그러다가 공사판을 전전하던 사내의 아버지를 만난 거였다. 사내의 어머니에게 사내의 아버지는 첫눈에서부터 비범해 보였다. 비록 가진 거라곤 없어도 머리가 영민하고 배포가 당당해 보였다. 그렇게 알거지 신세로 맺어지다 보니 살림은 이루 말이 아니었다. 강물은 더욱 더 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섬진강 전체가 불덩어리에 휩싸인 느낌이다. 여인은 신발을 벗어 발을 살며시 드러낸다. 사내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없는 살림에 제가 태어났으니 오죽 힘들었겠어요? 짜증 서린 목소리와 핏발선 눈빛. 이러한 점들이 어려서부터 저를 정서불안으로 내몰았나 봐요.”
  주인이 큰 그릇 가득 재첩 국을 가져다준다. 이 때 여인이 사내를 향해 묻는다.
  “나보다는 연하인 듯한데 몇이죠? 서른하나? 나보다 여섯 살이나 밑이군요. 생각보다 더 젊어 보이네요.”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여인의 술잔에 술을 따른다. 여인도 답례로 사내의 술잔 가득 술을 채운다. 조금 전까지 사내는 강물에 어머니의 유분을 흩뿌리고 돌아온 터였다. 여인은 말했다. 섬진강에는 유분을 흩뿌리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고. 그래서 강물에는 언제나 귀기가 서려 있다고 했다. 사내가 중학교를 마칠 무렵에 아버지는 간경화로 이승을 하직했다. 그 후로 줄곧 사내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왔다. 사내의 어머니가 승려들의 동안거에 맞추어 지리산으로 간 건 이 주일 전이었다. 해마다 되풀이되던 일이었기에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입산하기 하루 전의 언쟁이 가슴에 응어리로 남을 줄은 몰랐다. 동안거에 어머니와 잘 어울려 다니던 사촌형수 때문에 사촌형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사촌형은 지방 출장중이라 집에 없었다. 사촌형수가 시장 보러 가느라고 두 살배기 조카를 잠시 맡긴 때였다. 조카가 잠투정을 하며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였다. 오줌을 뉘어야 한다며 어머니는 조카에게 깡통을 들이밀었다. 조카는 고추를 드러내 놓고서도 좀처럼 오줌을 누려들지 않았다. 이 때였다. 어머니는 가볍게 조카의 엉덩이를 찰싹 두들겼다. 그러자 조카는 울음소리를 내며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바로 이 장면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사내는 조카의 불자동차를 들어올렸다가 내동댕이치며 냅다 고함을 질렀다.
  “아니, 왜 엉덩이를 때리세요? 저를 키울 때도 이렇게 키웠어요, 네? 오줌 가리기가 뭐가 중요하다고 엉덩이까지 치세요?”
  “왜 이 난리냐? 손자 엉덩이 좀 때렸기로 이렇게 야단이야?”
  사내는 책으로부터 알고 있었다. 오줌 가리기가 성격 형성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지를. 사내는 어머니의 행동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사내는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떨렸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사내는 여인과의 대화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내는 은어 회와 술을 추가로 주문한다. 사내는 회를 집으며 여인에게 섬진강을 찾은 연유를 묻는다. 여인의 표정도 아까부터 착잡해 보였다. 사내가 상추에 회를 싸서 얼마간 씹고 난 뒤다. 여인은 자신의 과거를 사내에게 털어놓는다.
  여인이 이 번에 선을 본 것은 순전히 이종언니 때문이었다. 마지막이니 딱 한 번만 더 보라는 얘기였다. 운이란 알 수 없지 않느냐는 거였다. 약간의 기대심리도 없지 않아 마지막으로 응한 자리였다. 매번 선을 볼 때면 여인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었다. 이 번에도 응어리진 정서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여인이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여인은 두 살 아래의 여동생의 죽음에 응어리져 있었다. 여섯 살 무렵이었을까? 여인의 아버지는 지방의 건설 현장에 내려가 머물고 있었다. 어머니는 무당이라 인근 마을에 굿을 하러 잠시 집을 비운 상태였다. 홍역을 앓아 기진맥진한 동생이 밥을 먹고 편히 휴식을 취하는가 싶었다. 오후 2시 무렵이 지날 때였다. 동생의 눈빛이 흐려지더니 몸을 뒤로 뻗치며 떨어대기 시작했다. 절박한 위기감이 여인의 전신을 엄습했다. 본능적으로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여인은 오리 길이나 떨어진 아랫마을의 사람들을 찾아 집을 나섰다. 아무나 어른이 보이면 매달려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정작 아랫마을에 도착했어도 집들마다 텅텅 빈 상태였다. 십여 농가의 어른들이 전부 일터로 나가고 없었다. 어머니를 찾아보고 싶어도 어느 마을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은 탔지만 더 이상 어째 볼 도리가 없었다. 곧바로 집으로 들어가려니까 자꾸만 무서움증이 일었다. 집으로 가려는 마음과는 달리 발걸음은 자꾸만 다른 데로 향해졌다. 저녁 무렵까지 강에서 얼쩡거리다가 마당에 들어서니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가슴을 찔러 왔다. 일시에 현기증이 일며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치맛자락에 오줌을 지렸다.
  “그 때부터 내 인생은 멍에에 휩싸였어요. 어쩌다 동생을 잡아먹은 나쁜 년이 되고 말았는지?”
  그 날 이후로 여인의 정신은 황폐의 늪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다. 지금껏 선을 본 지도 수십 번이 넘었다. 그랬음에도 오늘까지 외톨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여인은 입술을 깨물며 저녁노을을 바라본다. 잠시 그들 사이엔 스산한 기류가 드리워진다.
  포장마차를 나와 둘은 송림을 거닌다. 강변을 따라 아스라이 펼쳐진 송림이다. 길길이 자란 해송들이 자아내는 풍치가 눈부실 지경이다. 발걸음을 옮기다가 여인이 사내를 바라보며 묻는다. 이제는 홀몸이냐고. 사내는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그렇다며 고개를 끄떡인다. 여인이 사내에게 그럼 미혼이냐고 묻는다. 사내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결혼했지만 이혼하여 지금은 독신이라고 밝힌다. 바람결이 차가운지 여인의 어깨가 떨린다. 사내는 곧장 여인과 함께 송림을 빠져 나온다.
  여인의 제안에 따라 사내는 목포까지는 함께 가기로 한다. 사내는 여인의 승용차에 동승한다. 차는 국도를 따라 목포를 향해 달린다. 마음의 응어리만 없다면 가슴이 뒤설렐 듯도 한 남도의 여정이다. 차바퀴 구르는 소리가 구름송이처럼 밀려들면서 사내의 시선이 어두워진다.
  지난달 넷째 토요일 오후였다. 아내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사내를 향해 말했다.
  “내가 어디서 돌아오는 줄 알아요? 방금 아기를 지우고 오는 길이에요.”
  갑자기 사내의 등줄기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사내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 치를 떨었다. 사내는 떨리는 목소리를 최소한으로 억누르며 물었다.
  “근데 왜 나랑 상의도 안 했어?”
  바로 이 순간이었다. 기관단총을 난사하듯 아내의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신이 이러니까 아기를 지웠죠. 언제 나한테 관심이나 가졌어요? 오로지 안다는 게 상대를 노려볼 줄이나 알지. 무슨 원수가 졌다고 날마다 짜증을 부려요? 더 이상 당신한테 시달리느니 갈라서는 게 낫겠어요.”
  사내는 아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서서히 피가 끓어올랐다. 사내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구겨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잠깐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언제 당신한테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그래? 내가 다른 사람한테는 몰라도 당신한테는 한다고 했어. 내가 언제 당신에게 짜증을 냈느냐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에 쥐어진 벽시계가 마루바닥을 향해 날아갔다. 금세 와지끈거리며 시계가 박살나 버렸다. 아내는 느닷없이 괴성을 질러대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벽시계는 아내의 직장에서 집들이 기념으로 선물한 거였다. 아무래도 사내의 기색이 이상스러웠던지 여인이 슬며시 물었다.
  “어디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으세요?”
  사내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뿐. 뭐라고 대꾸하고 싶지도 않은 표정이다. 한동안 차 내엔 답답한 정적이 서린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여인이 입을 연다.
  “잠시 후면 보성을 지날 거예요. 보성에서 장흥까지는 18번과 2번 국도로 갈라지거든요. 바다가 보이는 18번 국도가 어때요?”
  사내는 자신도 몰래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면서 사내는 생각에 잠긴다. 걸핏하면 고개를 끄떡여 동의하는 습성의 원인을 떠올린다. 잠시의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내몰리던 과거의 잔영이 떠올랐다. 언제나 매서운 아버지의 눈빛을 떠올리자 그만 가슴이 시렸다. 실수라곤 조금치도 용납지 않던 아버지였다. 심부름의 내용을 잘못 알아들었어도 물어보기가 두려웠다. 언젠가 되묻다가 아버지의 고함소리에 주눅이 든 이후부터 생긴 습성이었다. 심부름시킬 때의 아버지의 목소리는 언제나 나지막하여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사내의 목소리가 작을 때에는 버럭 역정을 내었다. 아버지가 발산하던 불만의 요소들이 어린 사내의 영혼을 억압시켜 온 거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사내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다. 그 순간이다. 여인은 신산스러운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본다. 이 때부터다. 해변으로 휩쓸리는 파도소리가 들려온 것은. 차는 보성만을 따라 물결치듯 달려간다. 남해의 파도소리가 이처럼 장중하게 느껴진 적은 없다. 순간적으로 사내와 여인은 파도소리에 함께 귀를 기울인다. 아련하면서도 근원적인 그리움이 실린 파도소리다. 득량도가 바라보이는 수분을 막 통과할 무렵이다. 한 여자가 부지런히 손을 흔들고 있다. 길가에 세워진 백색의 승용차 밖에서다. 뭔가 긴급한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차를 세우고 물으니 차바퀴가 펑크 났다고 한다. 사내가 간단히 여자의 바퀴를 갈아 끼운다. 여자가 고맙다며 잠시 시간을 내어 달라고 한다. 괜찮다고 사양해 보지만 그게 아니라며 여자가 부득부득 졸라댄다. 여자가 말한다. 무려 한 시간이 넘게 도움을 청했단다. 그랬어도 다른 차들은 지나쳐 버렸다고 한다. 그러기에 너무 고마워 시간을 내어 달라고 한다. 길가의 공터에 주차시키고는 셋이서 해변으로 내려선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 무렵이다. 셋은 해변에 자리 잡은 호프집으로 간다. 병맥주를 시켜 병째 마셔 대며 이야기를 나눈다.
  여자의 나이는 서른셋이다. 여자는 광주에서 화순을 거쳐 강진으로 가는 길이었다. 직장 때문에 광주로 옮겨간 남편의 거처에 들렀다가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여자는 주말마다 남편을 찾아 남편의 수발을 해 주었다. 여자는 강진 군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어서 남편과 함께 이동할 수는 없었다. 그 날은 남편이 무슨 동호회 모임 때문에 집에 없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광주에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여자에게는 밀린 빨래가 걱정이었다. 그리하여, 빨래나 해 주자고 생각하며 전셋집인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섰다. 막 마루에 들어서니 마루엔 남녀의 옷이 널브러져 있고 안방에선 달뜬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적으로 절망에 휩싸인 채 여자는 열린 안방을 들여다보았다. 예측한 대로 남녀가 발가벗은 채 뒤얽혀 교접을 하며 신음을 내뱉는 중이었다. 뒤얽힌 남녀는 자신의 남편과 앳된 처녀였다. 여자는 단걸음에 달려들어 처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방바닥에 패대기를 쳐댔다. 처녀는 비명을 지르며 마구 버둥댔다. 남편이 여자를 밀어내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악에 받친 여자는 남편의 귀싸대기를 후려갈기며 악다구니를 늘어놓았다.
  “당신이 인간이야? 이렇게 사람을 배신해도 돼?”
  여자는 이성을 잃어 집기를 내던지며 한동안 포악을 떨었다. 그러다가 생각할수록 인생이 허망해져서 아파트를 곧장 빠져나와 버렸다. 그 차가 보성을 지나 수분에 이르렀을 때에 앞바퀴에 펑크가 나 버렸다. 길에 버려진 공사용 쇠못에 바퀴가 찢긴 모양이었다. 차를 몬 지는 여러 해가 되었어도 바퀴를 갈아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보조 타이어를 꺼내 놓았어도 아무런 해결책이 없었다. 손을 들어 도움을 청했지만 차량들은 그냥 지나쳐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고맙게도 여인의 차가 멈춰 선 거였다. 여자는 병맥주를 추가로 주문하고는 병을 따서 돌린다. 겨울 대기에 얼마나 떨었던지 여자의 얼굴은 여전히 벌겋게 달아 있다. 차츰 술이 들어가면서부터 안색이 정상으로 되돌아간다. 여자는 남편의 불륜을 묵과하지 않겠다고 한다. 시종 얼굴이 경직된 채 눈초리가 매섭게 흔들린다.
  자리에서 일어서니 자정 무렵이었다. 다들 주기가 잔뜩 오른 상태라 운전대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사내에게 다들 말은 없어도 해변을 거닐고픈 눈치들이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해변으로 내려선다. 밤바다로 밀려드는 해풍의 강도가 만만치 않다. 그랬어도 사내는 묵묵히 앞장서 발걸음을 옮긴다. 이 때 사내와 동행하게 된 배경을 여자가 여인에게 묻는다.
  세상 떠난 여인의 어머니는 무녀였다. 여인의 부모가 세상을 떠난 시기는 여인이 대학을 졸업한 직후였다. 종양으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난 거였다. 일시에 천애고아가 되어 버린 터였다. 그랬어도 동생을 잡아먹은 언니로서의 강박관념은 여전히 뿌리깊이 남아 있었다. 수십 차례의 중매가 결렬된 원인도 물론 거기에 있었다. 오늘도 맞선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허사였다며 여인은 침울해 한다. 진주에서 선을 보고 하동을 경유하다가 사내를 만난 터다. 여인의 집은 진도이고, 사내의 마지막 정착지는 신안군의 팔금도이다. 또한 여자의 집은 강진이니 강진까지는 동행인이 될 수도 있다. 하나같이 마음이 심란한 처지라 어느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려 들지 않는다. 대화는 중단되기가 일쑤였고 대화가 길어질수록 허탈해지기만 한다.
  어느새 새벽 두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차가운 해변의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셋은 솔숲을 뒤져 삭정이와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모닥불을 피운다. 불똥이 멀리 튀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이면서 모닥불을 피운다. 모닥불이 일정한 화력으로 탈 무렵에 셋은 모닥불 주위로 둘러앉는다.
  사내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던 해부터였다. 사내의 어머니는 겨울이면 절에서 살다시피 했다. 세상의 한을 절간에서 풀어 버리려고 한 터였다. 그러다가 이 번에 눈사태를 만나 세상을 떠난 거였다. 천은사의 승려들과 함께 피아골로 들어간 지 엿새만의 변고였다. 마지막에 언쟁을 하여 어머니를 서운케 한 게 사내의 마음에 영 걸렸다. 사내에게 어머니의 얼굴에 겹쳐 문득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내와 신접살림을 살 때였다. 집들이를 할 때마다 방문객들이 쑥떡대곤 했다. 아내의 얼굴이 팔자가 드세어 보인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언제나 가정에 신경을 써라는 얘기였다. 당시에는 터무니없다며 웃어 넘겼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더니 점차 아내는 핑계를 달며 이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아내를 위해 사내가 부단히 노력할수록 아내는 점차 사내를 경멸하기 시작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몰라도 시작부터가 이게 아니다 싶었다. 사내의 노력이 극진해질수록 아내의 목은 점차 교만해지기만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내는 사내의 정서불안 현상을 사방으로 까발리며 돌아다녔다. 자신과의 이혼에 따른 모든 잘못이 전적으로 사내에게만 있다는 듯이 떠벌렸다. 사내의 가슴은 이래저래 펑 뚫려 버린 상태가 되었다. 이제 그 누구도 자신의 황량한 가슴을 치유시킬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한편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다니는 절에 봉사한 대가로 거액의 통장을 지니게 되었다. 이는 주지의 배려로 인한 것이었다. 어머니의 봉사 범위는 다양했다. 초파일이나 칠석날 등에 신도들을 불러 모으는 데는 어머니의 공로가 매우 컸다. 그리고 행사 때마다 기부금을 받아 사찰의 건축을 확장시키곤 했다. 이런 공로가 인정되어 절에서는 어머니의 명의로 따로 통장을 만들어 준 거였다. 화장장으로 어머니를 들여보내기 직전이었다. 절의 주지가 사내를 불러서는 전해줄 말이 있다고 했다. 사내를 만나자마자 어머니의 공로에 대한 치하가 늘어지더니 문제의 통장을 내 놓았다.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하다가 자신이 잠시 맡아둔 거라고 했다. 통장을 들여다보다가 그 많은 입금액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통장의 입금액이라면 중형의 최신형 선박을 구입하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주지는 통장을 건네면서 말했다.
  “이 금액으로 열심히 사신다면 돌아가신 보살님껜 최대의 은혜를 갚는 일이 될 겁니다. 또한 통장에는 종단에서 지급된 장례비도 들어있으니 참고하십시오.”
  어머니의 유분을 강물에 뿌리던 날 떠오른 생각이었다. 물려받은 돈으로 동력선을 구입하여 여생을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사내가 태어나 꿈을 키워 오던 목포 서해상의 신안군 팔금도가 떠올랐다. 팔금도 서쪽의 고산 선착장 앞에는 무인도로 거사도와 용도가 버티고 있었다. 팔금도 부근의 해역이라면 동력선을 띄워 여생을 보내는 데는 지장이 없을 듯했다. 그가 살아오면서 한 조각의 꿈을 가꾼 곳이 있다면 고산 선착장 부근의 성황당이었다. 성황당에서는 바다의 경치가 한눈에 드러나 보였다. 성황당의 당산나무는 해묵은 왕버들(chaenomeloides)이었고 나무에는 언제나 오색천이 휘감겨 있었다. 왕버들의 밑동은 어른 다섯이 안아야 안기는 둥치였다. 사내의 어머니는 마음이 울화로 끓어오를 때면 소년인 사내를 데리고는 성황당을 찾았다. 거기에서 행하는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경건한 자세로 당산나무 아래에 머물곤 했다. 사내는 그러한 모습의 어머니를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사내도 일이 안 풀릴 때면 이따금씩 성황당을 찾곤 했다. 왠지 당산나무 아래를 다녀오면 암울하던 일이 잘 풀리곤 했다. 사내는 선박을 사면 성황당에서 풍어제를 올리리라 작정했다.
  사내가 당산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여인은 이내 매혹되는 눈치다. 그러더니 자신의 어머니가 무당이었다며 꼭 사내의 당산나무를 봐야겠다고 사내에게 매달린다. 사내는 흔쾌히 여인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사내는 은연중에 목포항에서 한 척의 최신 동력선을 사리라 마음먹는다. 이전에 근무하던 회사에서 3년가량 배를 몬 경력이 있는 사내다. 사내는 자신의 배를 가진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부푼다. 그리하여 섬진강을 지나면서부터 최신 선박의 목록을 더듬어 보곤 한다. 사내에겐 남의 예속 하에서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미칠 듯이 좋다. 남의 지시나 통제를 받는다는 건 분명 커다란 압박감임에 틀림없다.
  모닥불을 쬐며 여자는 시종일관 결기 서린 표정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뜻이 흔들리지 않게 자꾸만 반복해서 강조한다.
  “남편한테 이혼하자고 해서 듣지 않으면 그대로 이혼소송을 해 버릴 거예요. 남편한테 결정적인 이혼 사유가 생겼으니 재판에는 당연히 내가 이길 거예요.”
  사내는 여자의 기질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사내는 자신의 이혼한 아내를 떠올린다. 마음속에 품었던 말은 언제 어디서나 개의치 않고 내뱉던 그녀였다. 이혼할 무렵에도 당당히 그를 향해 말했다.
  “내가 당신 뒷수발이나 하는 가정부예요? 가정부라면 차라리 나아요. 그것도 아닌데도 눈에 핏발이나 세우면서 사람을 긴장시켜요? 숨통이 막혀서 당신과는 더 이상 못 살겠어요. 서로 좋은 게 좋다니까 위자료만 섭섭지 않게 줘요. 그래도 함께 살았는데 내게 마지막으로 들려줄 말은 없어요?”
  한 마디로 진절머리가 나고 이가 갈렸다. 사내에게 욕을 하지 않은 것만 해도 커다란 적선이라고 여겼다. 부부는 천생연분이라 했는데 무슨 악연으로 이렇게 비참한 결말을 봐야 하는지 비통스러웠다. 여인은 모닥불로부터 치솟는 연기를 바라보며 시린 회한에 몸을 떤다. 이 세상에 자신 하나를 받아줄 남정네가 없다는 사실에 치가 떨린다. 남자도 남자지만 남자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이 문제라고 여겨진다. 어째서 맞선 보는 상대만 보면 결점이 부각되는지 숨통이 막힐 노릇이다. 키가 크면 커서 역겹고 작으면 작은 대로 고깝다. 남자가 친절히 굴면 간사스러워서 싫고 무뚝뚝하면 건방져 보여서 싫다. 하여간 수십 차례의 선을 보는 동안 여인을 만족시킨 남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사실이 여인에겐 못내 아쉽고 서운한 노릇이다. 이제부터 세상을 향해 걸어갈 일이 막막하여 두려울 정도다. 아직까지는 남자들만 보면 일어나는 거리감을 불식할 묘책이 없다. 모닥불이 거의 사위어 갈 무렵에 셋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새벽 세 시 무렵이었다. 다들 술이 깨어 여행하는 데는 하등의 지장도 없는 상태다. 여자의 차가 먼저 출발한 뒤에 여인은 사내를 동승시켜 차를 몬다. 새벽의 도로는 텅텅 빈 상태다. 달리고 달려도 마주 오는 차량은 별로 없다.
  목포까지는 두 시간만 달리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쉬지 않고 달리면 새벽 다섯 시까지는 목포항에 닿으리라고 여겨진다. 장흥에서 2번 국도를 따라 강진을 거쳐 목포로 가기로 정한다. 차가 강진에 접어들었을 때다. 여인은 이대로 곧장 목포로 가기엔 허전하다며 진도에 들렀다가 가면 어떻겠느냐고 묻는다. 사내는 선선히 고개를 끄떡여 동의한다.
  새벽 4시 반이 조금 지났을 때다. 사내와 여인은 진도 서쪽 해안도로에 도착한다. 새벽이라 지나다니는 차량은 거의 없다. 그리하여 둘은 차를 길가에 버려둔 채 해변으로 내려선다. 마침 해변에는 세발낙지를 산 채로 파는 포장마차가 있다. 새벽 손님을 겨냥하고 주인은 꽤나 많은 양의 세발낙지를 마련해 놓았다. 커다란 바가지에 금세 십여 마리의 세발낙지가 떠서 헤엄을 친다. 주인이 사내를 향해 묻는다.
  “먹는 방법은 아세요? 모르신다면 여기 목 부분을 봐요. 숨을 쉴 때마다 구멍이 닫혔다 열리곤 하죠? 여기를 나무젓가락으로 푹 끼우면 이렇게 잡히죠.”
  주인은 숨구멍에 나무젓가락을 대자마자 또르르 젓가락을 감싸며 붙잡히는 세발낙지를 건져 올린다. 주인은 굼틀대는 세발낙지를 그대로 고추장에 찍어서는 사내에게 들이민다. 사내와 여인도 금세 흉내를 내며 낙지를 건져 먹는다. 처음에 먹을 때엔 발이 입술 전체에 달라붙어 곤혹스럽지만 이내 요령이 생긴다. 새벽 시간에 급히 마신 소주가 사람을 취하게 하는 모양이다. 사내와 여인이 포장마차를 떠나오면서부터 해안에는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른다. 금세 시야에는 포장마차의 존재도 승용차의 존재도 보이지 않을 정도다. 여인은 지나온 세월의 허망함에 젖는지 눈시울에 이슬이 비친다. 사내는 사내대로 떠나가 버린 아내를 떠올리는지 입술을 질겅이며 깨물고 있다. 사내에겐 여느 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 든다. 이전에는 술을 마셔도 지금처럼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속이 타는 듯했고 머리가 이글거리는 듯하다. 더구나 사방이 안개로 허옇게 뒤덮여 문득 우주에 미아가 된 느낌이다. 사내는 여인에게 묻는다. 혹시 속이 불편하지는 않느냐고? 여인도 가볍게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한다.
  “저 역시 속이 상당히 거북해요. 너무 술을 빨리 마신 탓인가 봐요. 사실은 이렇게까지 서둘 필요는 없는데 말이에요.”
  그들은 섬을 에두른 해변을 따라 좀더 거닐기로 한다. 여인이 먼저 사내에게 말한다. 차를 타면 금방이면 가니까 해변의 운무나 좀더 감상하기로 하자고. 둘은 운무 속을 떠밀리듯 허청거리며 해변을 걷는다. 아무래도 속이 거북한 모양이다. 사내는 잠시 여인으로부터 몇 발짝 떨어져 걷더니 이내 토사물을 쏟아낸다. 억억거리며 쏟아내는 품이 심하게 안 좋은 모양이다. 사내는 아예 자세를 낮춰 주저앉아 토사물을 쏟아낸다. 바로 이 때다. 여인이 다가와 사내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고 있다. 사내는 손수건을 꺼내 엉망인 얼굴을 추스르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사내는 이내 고개를 끄떡인다. 헌데 이 때다. 여인의 몸이 사내의 등으로 기우는 듯하더니 이내 쓰러지려고 한다. 사내는 언뜻 정신을 차리고는 여인을 등에 업는다. 차가 있는 곳까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차분히 걷는다. 여인은 혼수상태처럼 얼굴이 달아오른 채 사내의 뺨에 그녀의 얼굴을 갖다댄다.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여인의 향수 냄새가 사내의 후각을 자극한다. 사내의 후각에 향수 냄새가 밀려들면서 잠시 욕정이 이는 듯하다. 하지만 사내는 완강히 고개를 저으며 욕정을 거부하려고 한다. 자신의 정서불안으로 또 다른 여자를 울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여인은 사내의 목을 안은 채 그녀의 상체를 사내의 등에 밀착시킨다. 순간적으로 물컹거리는 느낌이 들면서 여인의 체취가 사내의 전신을 휩쓴다. 사내는 일부러 눈을 치뜨며 완강히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서 자신을 향해 중얼거린다.
  ‘못난 녀석아. 평생 네 주관대로 한 번 살지 못하겠구나. 남에게 이끌림만 당하는 습성으로부터 언제쯤이나 벗어날래?’
  아마도 취기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인 듯 여인은 사내의 상체를 강하게 얼싸안는다. 바로 이 때다. 사내는 기진맥진한 듯 앞으로 고꾸라지며 여인을 놓쳐 버린다. 사내와 여인은 해변의 모래 위로 넘어지고 만다. 밀려드는 안개 더미와 술기운에 겹쳐 둘은 잠시 맥없이 해변 위로 나뒹군다. 모래바닥에 쓰러졌어도 금세 일어날 기력이 없어서 둘은 잠시 그대로 쓰러져 있다. 취기로 자꾸만 그들의 눈이 감기려고 할 때다. 언뜻 사내에게 바가지 속의 세발낙지가 떠오른다. 그러면서 사내는 문득 의아한 생각에 잠긴다. 세발낙지가 숨구멍을 열 때가 젓가락 공격을 당할 때라는 걸 아는지? 사내에겐 해변에 나뒹군 그들의 운명도 세발낙지를 닮았다고 여겨진다. 그들이 내쉬는 숨결마다 휘몰리는 해풍의 혓바닥이 젓가락질을 해대는 느낌이다. 점차 사내의 전신에 힘이 빠지면서 눈이 감겨든다. 겨울이지만 해변의 기온은 제법 푸근한 편이다. 어느새 반시간이나 지났을 때다. 이윽고 기력을 회복하여 사내가 먼저 일어선다. 쓰러져 있는 여인을 부축하여 승용차 안으로 들어선다. 햇살이 엷게 퍼질 무렵이다. 둘을 태운 승용차는 목포를 향해 달린다.
  목포항 선착장에 닿은 뒤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어선 매매장에 도착했다. 어선 매매에 따른 수속 절차를 먼저 알아본다. 등기 절차를 거쳐 어선을 인도받을 때까지 닷새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래서 먼저 계약을 한 뒤에 닷새 후에 찾아 가기로 약속한다. 계약을 마치고는 둘은 목포항 여객선 터미널로 가서 팔금도 행 배표를 끊는다.
  오후 3시 무렵에 사내와 여인은 팔금도의 고산 선착장에 도착했다. 고산은 사내가 유년을 보낸 고향이다. 그들은 먼저 선착장 부근의 음식점에서 때늦은 점심을 먹는다. 그런 뒤에 사내의 고향집에 들러 여장을 푼다. 이웃집에 의해 사내의 집은 잘 유지되어 있다. 여인이 관심을 둔 건 풍어제였는데 열흘 뒤에 올린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날 저녁 배로 여인은 섬을 나갔다가 아흐레 뒤에 들어오기로 약속한다.
  나흘 뒤에 사내는 신형 소형 동력선을 구입하여 고산의 선착장으로 가져왔다. 배의 추진력은 사내의 마음을 무척 뒤설레게 한다. 어망을 비롯하여 고기잡이에 필요한 장비들을 차근차근히 사 들인다. 어느새 아흐레가 성큼 지났다. 다음 날이면 풍어제가 열리는 시점이다. 저녁 무렵에 여인이 여객선으로 고산 선착장에 닿았다. 사내는 여인을 마중하여 자신의 집에 유숙하도록 배려한다.

  뒷날 저녁 7시 무렵이다. 성황당 옆의 제단 위엔 커다란 제상이 펼쳐지고 제례 음식이 진열되어 있다. 이장이 나와 풍어(豊漁)를 기원하는 축문을 올린다. 인근 섬에서 초청된 세 사람의 무녀들이 풍어제를 주도한다. 방울 달린 모자와 축귀용(逐鬼用) 칼 등이 동원된 다채로운 주술 행사가 이채롭다. 둘러싼 마을 사람들 모두 경건한 자세로 제례 현장을 지켜본다. 당산나무의 오색천이 바람에 나풀거릴 때마다 풍어제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축귀와 영신을 거쳐 풍어를 기원하는 대목에선 애절함이 절절하다.
  퉁 투둥 퉁 투둥 퉁 투두둥!
무녀들의 북소리가 고요한 해변을 휩쓴다. 성황당 언저리에는 기름 먹인 솜뭉치의 칸델라 불이 선회하고 있다. 아동들이 치켜든 몽둥이마다 칸델라의 불빛이 사방으로 피어오른다. 제단의 대형 촛불이 칸델라 불빛과 호응하여 쉴새없이 일렁인다. 칸델라 불빛에 떠밀려 사내의 의식에 소용돌이가 인다.
  사내에게 문득 남극 대륙의 빙벽이 떠오른다. 온갖 먼지들은 바람에 다 휩쓸려 버리고 곳곳마다 우뚝 솟은 빙벽. 길인가 싶어 열심히 더듬어가다 보면 눈앞을 가로막는 빙벽.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면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날개에 생각이 미치자 사내는 우울해진다. 정서를 억압한 환경만 아니었어도 사내는 날개를 지녔으리라 여긴다. 서른하나가 되도록 날개 없이 지낸 과거가 사내에겐 못내 아쉽기만 하다. 혹여 칸델라 불에 날개가 타 버린 건 아닌가 싶어 사내는 가슴이 섬뜩해진다. 날개를 찾고 싶어도 자꾸만 빙벽이 막아서는 느낌에 사내는 아연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숙연한 자세로 마음속의 소망을 빈다. 사내는 문득 여인의 행동을 살핀다. 여인도 둘러싼 마을 사람들처럼 애절히 소망을 비는 모양이다. 사내도 풍어를 이루게 해 주십사고 바다의 신에게 간절히 빈다. 그러면서 세상 떠난 어머니의 영혼이 왕생극락하도록 빈다.
  여기저기서 원호를 그려대는 칸델라 불빛에 실려 잠시 해변은 환상의 세계만 같다. 사내의 몽롱한 시야에 사내의 어머니의 환영(幻影)이 어른대는 듯했다. 애정이 실렸으되 서글픈 기색의 얼굴이 잠시 비치는 듯했다. 사내는 자신도 몰래 합장하며 어머니의 영혼이 좋은 세상으로 떠나기를 빈다. 너무나 간절하여 눈시울에 눈물이 비칠 정도다. 그러면서 속삭이는 듯한 중얼거림이 사내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어머니, 압제된 제 영혼을 자유로이 풀어줄 수는 없으세요? 삶이 너무 괴로워요.’
마침내 제단의 촛불이 스러지고 무녀의 방울소리마저 가라앉고 나서야 사람들은 성황당에서 조용히 물러간다. 그렇게 숙연할 수 없는 밤이다.
  풍어제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간 날 밤이다. 사내의 집은 성황당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 여인은 사내의 집에서 유숙하기로 약정되어 있다. 마루를 사이에 두고 방이 세 개다. 둘은 마음이 통해 술잔을 나누자며 마주앉는다. 사내는 여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묻는다. 풍어제가 어땠느냐고. 여인은 가만히 미소를 깨물며 대답한다. 의미 깊은 밤이며 풍어제로 감동받은 밤이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사내에게 무슨 소망을 빌었느냐고 묻는다. 사내는 의외로 선선히 대답한다. 풍어와 어머니의 영혼의 천도를 빌었다고 말한다.
  사내의 눈빛이 서서히 젖어들면서 속내를 털어놓는다. 사내는 강박 관념에 시달린 정신적인 압제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사내의 말을 듣던 중에 여인이 불쑥 묻는다. 그래서 압박감에서 벗어날 전망이 있느냐고 말한다. 순간적으로 사내의 눈에서 격분한 빛이 사방으로 발출된다. 하지만, 금세 숨길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끄떡인 뒤에 여인에게 묻는다.
  “지윤 씨는 풍어제 때 뭘 비셨어요?”
  여인은 잠시 교태롭게 웃더니 금세 대꾸한다.
  “남자 때문에 더 이상 번민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
  대답이 끝나자마자 사내는 여인에게 재차 묻는다.
  “남자들이 괜히 당신을 거부하던가요?”
  이 번에는 여인의 눈길에 격분의 빛이 스쳐 흐른다. 여인은 잠시 마음을 추스르느라 입을 다문다. 여인의 표정을 지켜보던 사내가 의도적으로 말의 방향을 돌린다.
  “우린 둘 다 이루어질 수 없는 염원을 빈 건 아닐까요? 이루어지기 어려운 염원일수록 매달리고픈 게 인지상정이겠죠?”
  어느새 새벽 1시를 넘어서는 시점이다. 하현달이 동쪽 창문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달빛이 스며들면서부터 실내는 한없이 고즈넉한 분위기다. 문득 사내가 여인에게 묻는다.
  “우리가 과거로 되돌아가 맑은 영혼으로 환생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인이 씁쓸한 미소를 베어 물며 말한다.
  “동생을 잡아먹은 언니의 그늘에서 평생을 시달릴 줄은 몰랐어요. 그 날의 정황을 살펴보면 분명 나만의 잘못도 아닌데 이렇게 가슴이 미어져요. 반복되는 악의 순환이 언제까지 영향을 미칠지 알 수가 없군요.”
  그러다가 서러움을 못 이겨 여인의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변한다. 하현달이 내뿜는 달빛이 거실 바닥에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여인의 흐느낌과 서슬 퍼런 달빛이 빚어내는 처연함에 사내는 질식할 듯하다. 벌써 마루 바닥에는 빈 술병이 즐비하다. 취기가 머리끝까지 뻗쳐올라 남녀는 소파에 몸을 기댄다. 자꾸만 머리가 어찔거리며 남녀의 눈이 감겨든다.

  짙은 암흑 속이다. 회오리바람이 휙휙거리며 해면으로부터 마구 사내의 면상으로 내닫는다. 바람줄기마다 뺨이 찢길 지경이다. 누군가 사내의 머리를 바닷물 속으로 자꾸만 밀어 넣으려고 한다. 수영을 익히지 못한 사내는 공포에 떨며 비명을 내지른다. 그러다 꿀컥거리며 사내의 몸이 송두리째 물속으로 휩쓸려든다. 서너 차례나 의식이 아른대다가 마침내 사내의 머리가 맑아진다. 물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아니 이럴 수가? 하지만 마음먹은 그 어디로든 유영해 가는 자신의 모습에 놀란다. 물속 심층부에서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인다.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지리산의 고찰이 엎드려 있고 용마루에는 사내의 아버지가 눈을 부라리고 있다. 저주가 듬뿍 실린 아버지의 눈빛을 대하자 물속이 핏빛으로 굽이친다. 소스라치며 고개를 돌리자 혀를 깨문 채 사내를 노려보는 아내의 얼굴이 다가온다. 얼른 고개를 숙이며 바닥으로 내려서자 거기엔 퀭한 눈빛의 어머니가 발목을 잡으려 한다. 사내는 진퇴양난에 빠져 허둥댄다. 그러다가 소용돌이에 휩쓸려 얼음 동굴 속으로 떠밀려간다. 바닷물로 가득 채워진 얼음 동굴이다. 동굴 벽은 하나같이 투명하지만 빠져 나갈 구멍이 안 보인다. 사내의 눈이 일시에 왕방울 만해진다. 동굴 바깥벽에는 여인이 헤엄치며 자꾸만 동굴로 들어오려고 한다. 벽을 사이에 두고 아는 척 신호를 보내도 여인은 못 알아보는 모양이다. 주먹으로 내지르고 발로 차도 얼음벽은 끄떡도 않는다. 어느새 사내의 살은 터져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동굴 속은 핏빛으로 차오르는데도 동굴 바깥벽에는 여인이 매달려 헤엄을 치고 있다. 여전히 사내를 못 알아보는 눈치다. 사내는 연신 고함을 질러대다가 둔중한 물체에 부딪혀 소스라쳐 깨어난다.
  사내가 화들짝 놀라 눈을 뜨니 여인의 상체가 사내의 가슴께로 쏠려 있다. 술잔을 기울이다가 둘 다 소파에 기댄 채 잠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균형을 잃은 여인의 상체가 사내의 상반신을 내리누른 거였다.
  사내에겐 순간적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다. 사내가 꿈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여인이 자신의 가슴에 안겨 있지 않는가? 사내는 민활하게 머리를 굴려본다. 혹시 여인이야말로 사내가 찾던 파랑새는 아닌지? 여인을 부축한 채 사내는 좀더 신중하게 생각해 본다. 연상의 여인이라는 데엔 사내는 개의치 않는다. 외관상으로는 스물을 갓 넘긴 아가씨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모도 빼어나서 눈부실 정도다. 여인의 죽은 동생에 대한 망념도 세월이 흐를수록 무뎌지리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문제는 여인에게 있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고 여겨진다. 사내 자신만 억압된 정서불안으로부터 벗어나면 그만일 터였다. 하지만 이게 사내에겐 가장 극복하기 힘든 영역이다. 사내는 잠시 맑은 공기를 들이쉬며 자신을 되돌아본다. 사내에겐 외형상의 난관보다는 내면적인 정서의 극복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된다. 헌데 아내의 얼굴만 떠올리면 자신이 없어져 버린다. 왜냐하면 신혼 초기에는 아내와도 조화가 너무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내는 생각에 잠긴다. 아무래도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라고 여긴다.
  한밤중이라 여인은 여전히 혼미한 상태다. 사내는 여인을 안아들고는 안방으로 옮긴다. 여인을 다독거려 이불로 덮어 주고는 사내는 건넌방으로 가서 드러눕는다. 사내는 잠시 꿈속의 장면을 회상하다가 치를 떨며 몸을 움츠린다. 그러다가 날이 새면 여인을 목포항까지 데려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스르르 눈을 감는다.

  목포항에 닿아 배를 계류시킨 뒤다. 사내와 여인은 서쪽으로 펼쳐진 백사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새벽 다섯 시 무렵이다. 해풍에 휩쓸리는 안개자락이 백사장 가득 굽이친다. 해안가 모래사장 언저리에는 길길이 자란 갈대가 윙윙거리며 나부댄다. 농밀한 안개 때문에 주위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다. 사내가 온몸으로 젖어드는 먹먹한 느낌에 취해 있을 때다. 여인이 사내를 바라보며 말한다.

  “제가 준혁 씨 같은 분을 만났더라면 벌써 결혼했을 거예요. 준혁 씨라면 반드시 정서불안을 이겨 내시리라고 믿어요.”
  여인은 함께 지내는 동안에 사내로부터 느낀 점을 사내에게 들려준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도 여인에 대한 사내의 배려가 너무나 감동적이었다고 말한다. 그 정도의 일관성이라면 사내의 정서불안의 극복도 결코 어렵지 않으리라고 예견한다. 그러면서 여인에 대한 느낌을 말해 보라고 넌지시 사내에게 청한다. 사내는 또렷한 어조로 여인에게 말한다.
  “제가 정서불안에만 시달리지 않는다면 당장 구애를 하고 싶은 분이세요.”
여인이 순간적으로 기뻐하며 정말이냐고 묻는다. 사내는 진심이라고 답한다. 여인은 사내를 향해 말한다. 사내가 그녀를 원한다면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고 말하며 쓸쓸한 미소를 짓는다. 짙게 내리깔리는 안개를 바라보다가 여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잠시 후면 헤어질 시간이네요. 어쩌다가 이런 작별을 하게 됐는지...”
  말을 하다가 말고 여인의 어깨선이 물결치기 시작한다. 여인의 애잔한 모습을 본 순간이다. 느닷없이 사내의 목이 울컥 멘다. 그러면서 까닭 모를 서러움이 치민다. 무언가 강한 힘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사내는 왈칵 여인을 끌어안는다. 여인도 몸을 떨며 사내를 살며시 끌어안는다. 사방은 죽음처럼 고요한데 그들의 달뜬 숨소리만 새벽 공기를 가른다. 여인의 향수 냄새가 사내의 야성을 자극한다. 아련한 황홀감에 취해 사내의 손길이 여인의 가슴을 더듬으려는 순간이다. 문득 비웃는 듯한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조카의 엉덩이를 때리려던 어머니의 얼굴도 겹쳐진다. 일시에 사내의 전신에 기운이 빠지면서 나른해진다. 사내는 여인을 안은 채 잠시 망설인다. 이대로 여인을 취할 것인지 아니면 고뇌를 반복할 것인지를. 참으로 찰나간의 생각이다. 여자들의 체온이 두렵다고 여기면서 사내는 비틀거린다. 여전히 정서불안에서 벗어날 자신이 서지 않는다. 이대로는 도저히 여인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아 절망스럽다. 사내는 입술을 깨물며 서서히 여인을 풀어준다. 도저히 이 이상은 어쩔 도리가 없는 느낌이다. 뭔가 잔뜩 기대한 듯한 여인의 눈빛에 먹구름이 끼는 듯하다. 여인으로부터 답답한 느낌의 탄식 소리가 새어 나온다. 여인은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애쓰며 말한다.
  “미안해요, 준혁 씨. 당신의 눈에 이 정도밖엔 못 되는 여자라서...”
  여인은 광막한 해변을 잠시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뭐가 이리 복잡하죠? 미치겠어요, 정말.”
  여인은 급기야 낮은 목소리로 흐느끼면서 묻는다.
  “다시는 못 만나겠죠? 바람이 되어 눈감는 순간까지 말이에요.”
어느새 사내의 젖은 목소리도 해변으로 빨려들고 있다.
  “정말 미안해요.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해 쩔쩔거려서요. 여기서 떠나시면 어떻게 지내실 건가요?”
“알다시피 이제 제게 무슨 낙이 있겠어요? 위탁된 유아들이나 돌보며 그저 열심히 살아야죠. 지금까지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워요.”
  여인은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손을 내민다. 백옥같이 고운 여인의 손이다. 뽀얀 손등의 푸른 정맥혈에 사내의 시선이 이르자 얼음동굴에서 소용돌이치던 꿈속의 바닷물이 떠오른다. 문득 꿈에서조차 자신에게로 헤엄쳐 오려던 여인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러자 서슬 퍼런 슬픔이 사내의 가슴에 빛살처럼 날아든다. 어느새 사내의 눈시울에 눈물이 핑 돈다. 형언할 수 없는 설움이 일시에 끓어오른다. 슬픔을 추스르며 사내는 서서히 여인의 손을 쥔다. 악수를 나누며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이다. 여인의 눈에도 물기가 서려 반짝인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나 잠시 떨어질 줄을 모른다. 선 채로 화석이 되어 버리고도 싶은 순간이다. 이윽고 여인은 손을 거두고는 모래사장을 지나 해변 길을 걸어 나간다.
  안개에 휩쓸리는 모래능선 위로 여인의 자취가 사라지기 직전이다. 이심전심이었던지 여인이 되돌아보며 손을 높이 흔든다. 펑하니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느낌이 들며 사내도 손을 높이 흔든다. 느닷없이 해풍이 심하게 일며 해변의 갈대숲이 일제히 드러눕는다. 바스락대는 갈대 잎들이 사내의 귓전을 간질이며 속삭이는 듯하다.
  ‘이제 제게 무슨 낙이 있겠어요? 지금껏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워요.’
사내는 물기 젖은 눈으로 시계를 들여다본다. 아직도 해가 뜨려면 반시간이나 지나야 한다.

( 200자 원고 105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