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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자맥질
손정모
노란 보자기를 푼다. 보자기에서 소녀의 향기가 나는 듯하다. 오동나무 상자가 드러난다. 덮개를 여니 종이쪽지가 눈에 띈다. 누렇게 뜬 A4 용지다. 명수야, 달인이 되고 싶지? 그러려면 2가지의 비책이 필요해. 내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다. 나와 동갑인 소녀는 스물한 살이었다. 소녀의 뼛가루를 뿌리고 막 하산하는 길이다.
산 아래 교량 부근. 흘러드는 시냇물로 소용돌이친다. 연신 하얀 포말이 허공으로 틘다. 포말들마다 허다한 사연들로 들끓는 기분이다. 물거품 중에는 소녀의 눈물도 배어 있으리라. 모험에 의해서만 신경지가 개척된다고. 눈감기 직전까지 절규하던 소녀였다. 아침 햇살을 가르며 차가 유연하게 달린다.
문득 눈시울이 젖는다. 석 달 전 산사에서였다. 건물만 있고 승려가 없는 절이었다. 소녀는 보육원 출신의 자수성가한 화가였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소녀와 나는 함께 그림을 그렸다. 작업과 식사는 함께. 잠은 따로였다. 지속된 과음으로 간경화에 시달리던 소녀. 회생하기엔 경화가 너무 심했다.
소녀의 독보적인 운필법과 농담법. 이를 두고 세상에선 평이 대단했다. 세기에 걸쳐 나올까 말까 한 귀재라고. 중요한 건 세간의 평이 아니었다. 소녀의 실력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는 점이었다. 소녀와 나는 미대생인 화가다. 내가 숭상하는 건 최상의 경지다. 경지에 이른 달인. 나의 목표는 달인이 되는 거였다.
저마다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분명 최상의 경지란 있을 터였다. 거기에 가장 가까운 게 소녀의 경지라고 여겨졌다. 둘은 미술의 기예를 연구하는 친구. 즉, 취우(趣友)로 지냈다. 서울 교외의 적막한 산사에서였다. 나날이 기예를 깨치다가 소녀와 사별한 거였다.
어느새 점심나절이었다. 산길을 떠난 지 2시간만이었다. 국제교류전이 열리는 인사동의 K화랑. 넓은 홀에는 상당수의 예술인들로 북적댄다. 교류전이어서 그런지 외국인들도 적잖게 보인다. 연일 홍보를 한 매스컴의 탓도 클 것이다.
유서에 담긴 두 가지의 비책(秘策). 나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게 바로 달인에 이르는 열쇠라고 했다. 숨지기 1주일 전이었다. 소녀는 나를 불러 말했다. 이젠 모든 기교는 다 전해주었어. 남은 건 어떻게 불꽃을 피우느냐에 달렸어. 생명력을 부여하려면 기(氣)를 불어넣어야 돼.
나는 H화백의 작품을 찾는다. 세계적인 유명세를 누리는 화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몰린 곳에 H의 작품들이 나붙었다. 인기 절정인 작품이 뭔가를 본다. 제목이 ‘치솟는 화산가스’다. 먹구름 같은 가스가 분화구로부터 솟구친다. 가스에 힘이 느껴진다. 금세 눈앞으로 밀려들 듯하다.
H의 나머지 작품은 4점이다. 역작들만 엄선된 모양이다. 작품 제목은 ‘해일’, ‘폭풍우’, ‘밀물’, ‘저녁안개’다. 하나같이 생동하는 기운을 지닌 소재다. 작가별로 작품이 진열되어 있다. 세 번을 화산가스 앞을 오간 뒤다. 시선을 끄는 여인이 눈에 띈다. 나이는 스물 서넛쯤. 흑색 원피스 차림의 늘씬한 여인이다.
여인도 아까부터 화산가스를 주시하고 있다. 뭔가 느껴지는 게 많은 모양이다. 나는 우선 여인의 용모를 살핀다. 예쁘장한 얼굴이다. 다음으로 가슴을 훑어본다. 뾰족하게 치솟아 탄력이 느껴진다. 상반신이 움직일 때마다 쉴새없이 덜렁인다. 캡으로 과장된 건 아닌 듯하다.
문득 전신으로 묘한 기운이 치솟는다. 차갑고도 맑은 기운이다. 도전욕을 자극하는 근원이다. 소녀의 유서와도 관련된 부문이다.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낸다. 화산가스 앞으로 다가간다. 화산가스의 작품을 크로키한다. 스케치북의 절반가량의 크기로. 아래쪽엔 느낌을 간단히 기록한다. 그래 봐야 3∼4분가량이 소요될 뿐이다.
다음으로는 해일에게로 접근한다. 해일의 표현 기법은 너무나 탁월하다. 등대를 지나 수협 어판장을 뒤덮는 해일의 위용이 섬뜩하다. 곤두서서 밀려드는 물기둥에서 전율이 느껴진다. 크로키 옆에다 느낌을 단다.
해일의 크로키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검정 원피스의 여인이 점차 접근했다. 여인의 시선이 스케치북에 휘감긴다. 나는 마음을 다잡는다. 알고도 모른 척해야만 한다. 절대로 시선을 여인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 의도가 노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종이를 넘기면서 폭우 앞으로 접근한다. 단숨에 세상을 쓸어버릴 듯한 기세가 서린 작품이다. 폭우의 크로키 옆에 소감을 쓴다.
‘하강과 상승의 경계선에서 현상이 비칠댄다. 숱한 빗줄기가 가져온 물방울이 지상으로의 자맥질이라면. 비 갠 날의 증발은 물방울의 실종으로 비치리라. 폭우가 실종으로 느껴지는 날 설움은 무한히 커지리라.’
다른 곳을 보는 듯. 시선을 사방으로 분산시키는 듯했어도. 여인의 시선은 금세 스케치북에 뒤엉킨다. 크로키를 보는 건지 논평을 보는 건지? 십여 분이 지날 때다. 식사 시간이 된 탓일까? 사람들이 점차 줄어든다. 주최측 운영위원이 내게 약도를 건네준다. 식당 위치를 알리는 약도이다.
식당에는 대략 4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대화의 내용으로 대개가 화가임에 틀림없다. 원로급에서부터 나 같은 애송이까지 다양하다. 전람회 주최 본부장인 F화백이 잠시 인사말을 한다. 사회 진행자가 참석자 전원을 소개한다. 아까부터 내 눈길을 끌던 여인. 그녀도 맞은 편 식탁에 앉아 있다.
가슴이 뛴다. 여인을 본 순간부터다. 묘한 흥분이 전신을 휘감는다. 소녀의 유서가 생각난다. 달인이 되려면 두 가지의 일을 해야 한다고. 처음에는 비현실적인 것으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이 달라졌다. 여인을 대한 순간. 두 가지의 비책을 성취할 듯한 예감이 들었다. 은밀히 나는 여인의 미태를 눈여겨본다.
사회자가 여인을 소개한다. 서양화 구상계열의 화가. 개인전 경력이 14회째인 윤서희 작갑니다. 짝짝짝. 사방에서 들리는 박수소리. 의례적인 회식 진행이다. 어느새 내 차례다. 미대에 재학 중이며 한국화를 전공하는 장명수 작갑니다. 박수갈채가 들린다. 여인도 내 이름을 기억했으리라.
나는 자리를 순회하며 술잔을 권한다. 순회하다가 여인에게도 잔을 내민다. 소주잔 가득 술을 따른다. 금세 술잔이 되돌아온다. 이 때 명함을 슬쩍 건넨다. 학생이어도 작가여서 내게도 명함이 있다. 명함엔 e-메일 주소까지 실려 있다. 대화의 흔적만 남기고 살며시 일어선다.
식탁을 돌다 보니 아는 사람들과도 만나게 된다. 추상계열의 작가회의 회원들도 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마음이 끌리는 여자가 있다. 두 살 연상의 처녀다.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가졌다는 평을 듣는 여자다. 이전부터 마음으로만 관심이 있었을 뿐.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여자가 맞은 편 자리를 권하면서 입술을 달싹인다.
“많이 전수받으셨나요?”
가슴이 뜨끔하다. 내가 소녀로부터 전수받은 사실을 여자까지도 알고 있었다니. 아, 이럴 수가? 소녀의 유서가 슬그머니 떠오른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남몰래 주먹을 말아 쥔다. 유서의 두 가지의 항목. 첫째부터가 만만찮다고 느껴졌다. 첫째를 거쳐 둘째까지를 이루어야만 기(氣)를 발산할 역량을 터득할 거라고 했다. 기를 발출해야만 달인이 되리라고 했다. 흐흐흐. 달인이라. 기왕이면 달인이 되고 싶다.
회식 자리에서 빠져나와 부근의 골목에 들어선다. 여자에게 핸드폰을 건다. 이내 여자의 목소리가 흐른다. 네, 금방 나갈게요. 둘만의 대화의 공간을 찾기로 한다. 행사장이 인사동이었던 관계로 전통 음식점을 찾는다. ‘흘러간 유년’이라는 집이 눈에 띈다. 창호지가 발린 격자문이 있는 방안.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산사춘과 더덕구이를 먼저 주문한다. 문득 검은 원피스의 여인이 떠오른다. 그녀는 잘 돌아갔는지 궁금해진다. 여자는 술잔을 들며 묻는다. 고향이 농촌이죠? 여인의 입술이 달싹인다. 나의 억양으로 고향이 남쪽이란 걸 알겠지만. 고향이 농촌이냐고 질문당한 예는 처음이다. 어떻게 알았죠? 나의 목소리가 조금 떨린다.
“제가 예술인이 아니겠어요?”
귀가 ‘윙’하고 울린다. 누군 예술인이 아닌가? 여자의 말이 이어진다. 예술인은 감성으로 먹고 살잖아요? 댁의 눈빛 때문에 알았어요. 시냇물이 굽이치듯 일정한 빛살로 분출되는 눈빛 때문이었어요. 경험상으로 시골 사람들의 눈빛이 그랬어요. 가슴으로 찬바람이 휩쓸리는 기분이다. 느낌의 강도가 저다지도 섬세할 수가 있다니?
세 병째의 산사춘을 딴다. 잔을 받는 여자의 손등이 뽀얗다. 감싸 쥐고픈 충동이 인다. 여자의 강점은 그림의 구도에 있다. 여자의 독특한 구도에 대해 진심으로 찬사를 늘어놓는다. 진실한 마음이 충분히 느껴지도록. 여자의 얼굴에 살며시 홍조가 인다. 취기라기보다는 감동으로 인한 듯하다.
여자와 함께 있으니 소녀가 그리워진다. 단아한 선비 같은 소녀였다. 거동과 말씨마다 고아한 품격이 내비쳤다. 그런 소녀가 남긴 유서로서는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세상 떠나기 2주 전. 소녀는 나를 불러 속삭이듯 말했다.
“명수야, 혈육이라곤 없는 나야. 아무래도 오래 못 버틸 것 같애. 나 죽거든 화장하여 재는 산봉우리에 뿌려 줘. 그런 다음에 이 보자기를 풀어 봐. 네게 전할 메시지가 들어 있어. 부디 내 말대로 해야 돼.”
거의 알코올 중독자였던 소녀. 술을 너무나 아끼며 사랑했다. 술을 마시면서 소녀는 내게 말했다. 정상적으로 기를 다스리려면 요원한 세월이 필요해. 어쩜 임종 순간까지도 어려울지도 몰라. 단시일 내에 이루려면 비상한 방식이 필요해. 잠시 말을 멈추더니 술잔을 입에 대었다. 취기로부터 작열하는 기의 발출법을 터득하려는 거야. 이건 모험이 없으면 어려운 거라구. 강한 모험 정신이 있어야만 해. 약간은 회환에 찬 모습으로 말한다. 음주가 폭음이 되면서 몸이 망가진 모양이야. 그래도 원하던 건 구했어. 짧게 살아도 보람 있는 삶이라고 여겨져. 암, 그렇고 말고. 머리를 끄떡이는 소녀의 모습에 설움이 일렁거렸다. 소녀는 작업을 할 때에만 술을 마셨다. 이런 절제된 느낌으로 인해 나는 소녀를 우러러보았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소녀의 뼛가루를 뿌린 뒤였다. 경건한 자세로 보자기를 풀었다. 유서를 읽자 낯이 화끈대는 느낌이었다. 혹시 잘못 읽은 건 아닐까도 싶었다. 달인이 되려면 2가지의 일을 하라고 했다. 그래야 기를 발출할 방식을 체득한다는 거였다. 첫째는 한 달이란 한정된 기간에서였다. 2명의 여자를 사귀어 연인으로 만들라는 거였다. 둘째는 석 달이라는 한정된 기간에서였다. 여자들과 2:1의 그룹 섹스를 하라고 했다. 여자들에게 승낙을 받아 행하라고 했다. 승낙의 형식은 자발적이며 흔쾌한 동의여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만 하면 기를 자유로이 발출시키게 되리라고 했다.
평소에 소녀의 심성은 워낙 우아했다. 그랬기에 소녀의 말엔 충분한 의미가 있으리라고 여겨졌다. 과제의 의미를 나름대로 분석해 봤다. 깊은 의미는 체득해 봐야겠지만. 수행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생소한 영역과 생경스런 경험. 이로부터 비결을 터득하라는 뜻이리라. 해 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었다.
점점 여자는 희열에 달뜨는 느낌이다. 볼우물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눈웃음마저 뒤엉켜 완연 뇌쇄적이다. 감탄하듯 나는 여자의 손을 잠깐씩 어루만진다. 손을 빼거나 뿌리치는 기미가 전혀 안 보인다. 느낌상으로 여자에게 자신감이 붙는다.
확신이 서자 용기가 치솟는다. 모네(Claude Monet)의 회화 기법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연못을 관통하는 구름다리 주변의 그림. ‘백수련(白睡蓮)의 연못(Le bassin aux Nymphéas, 1899년작)’에 관해 의견을 나눈다. 말년엔 일본식 정원을 조성하여 수년간 수련만 그려댄 모네였다. 서양인 치곤 독특한 취향의 화가였다. 연못을 가득 채운 수련의 아취. 그의 그림에선 아늑한 정취가 느껴진다. 연못 주위의 수양버들이 살아서 나부대는 듯하다.
“그의 그림엔 정적인 소용돌이가 있지요. 졸리는 듯하면서도 깨어 있는 느낌이랄까요?”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입술이 방긋거린다. 고개를 끄떡이며 여자의 손등을 어루만진다. 따스한 느낌이 전신으로 밀려든다.
밤 8시 무렵. 노래 좀 하다가 가자고 부추긴다. 여자는 짐짓 뺀다. 그러면서 시간상 좀 빠듯하다고 한다. 갑자기 가슴이 술렁댄다. 입에 침이 마르는 느낌이다. 이대로 여자를 놓아 보내서는 안 되겠는데.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진다. 연결 고리를 만들려면 확실히 해야 한다.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절대로 초조하게 비쳐서는 안 돼. 술잔을 부딪치며 살짝 눙친다.
“오늘 다른 약속은 없으시죠? 딱 한 시간만 머물다 가요, 네?”
살얼음을 밟는 느낌이다. 여자가 정색을 하며 안 된다고 하면? 다음 기회에 보자고 한다면? 내가 뭐라고 말하겠는가? 이럴 때에 적절한 계책이라도 있었으면 싶다. 떨리는 마음으로 여자의 반응을 기다린다. 오, 제발 내 마음을 따라 주기를! 찰나의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진다. 여자의 눈빛이 흔들린다. 일시에 가슴이 섬뜩해진다. 버럭 짜증을 낸다거나 귀찮게 여긴다면?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쿵쿵 울린다. 긴장으로 사타구니마저 뻐근해지는 듯하다. 여자는 잠시 갈등하는 기색이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끄떡이며 입술을 쫑긋댄다. 좋아요. 여자는 쾌활한 목소리로 응답한다. 미칠 듯한 행복감. 바로 그런 느낌이다.
행복감이 스러지면서 묘하게도 상반된 허망감이 밀려든다. 소녀를 만난 게 행운이었다면. 소녀와의 사별은 처절한 슬픔이었다. 눈에 띄게 주량이 감소하던 어느 날. 한낮이었다. 소녀는 붓을 놓으면서 쉬고 싶다고 했다. 쉬고 싶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애잔함이 내 가슴으로 휘몰렸다. 작업 중에는 휴식을 모르던 소녀였기 때문이다. 컨디션 조절이 어려운 상태임을 직감했다. 파인애플 주스를 힘겹게 마시고 나선 손짓을 했다. 방 밖으로 나가 달라는 뜻이었다. 조용히 문을 닫곤 마루로 나섰다. 마루를 거쳐 나의 거처인 객방에 들어섰다. 소녀의 상태로 봐서 예감이 안 좋았다. 마음을 졸이며 등을 벽에 기대었다. 그러다가 쌓인 피로로 풋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놀라 소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나가달라는 손짓이 그녀의 마지막 의사 표시일 줄이야.
인사동 초입의 노래방. 제일 구석진 방에 여자와 함께 들어선다. 노래가 흐르면서 의식이 흐트러지는 느낌이다. 과거에 의식을 물결처럼 빗질해 주던 소녀. 문득 붓을 든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요염한 얼굴이었다. 휙휙 화선지 위를 스치는 소녀의 붓놀림. 스쳤다 싶은 자리마다 생동하는 기운이 머물렀다. 소녀의 운필엔 조화가 서렸다. 소녀의 붓질에는 기류가 들끓었다. 소녀가 화선지를 내려다볼 때엔 강물을 굽어보는 느낌이 들었다. 흐르는 강줄기에 기력을 발산하는 듯했다. 소녀의 붓은 검객의 칼날이었다. 붓의 방향에 따라 기가 파드득거렸다. 들끓는 기류의 소용돌이가 화선지를 넘나들었다.
마이크를 쥔 여자의 블라우스에서도 기류가 들끓는 느낌이다. 여자는 팝을 선호한다. 약간 빠른 느낌의 템포. 여자는 이런 음감에서 달뜬 표정이다. 나는 여자와 어우러져 경쾌한 스텝을 옮긴다. 교양으로 익힌 스포츠 댄스 덕분이다. 여자의 발놀림은 확연히 민활하다. 간주곡이 진행될 동안. 둘은 잠시 캔 맥주로 목을 축인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 여자가 나를 안고 스텝을 밟는다. 동작은 물 흐르듯 유연하다.
유연한 동작을 대할 때였다. 화선지를 달리던 소녀의 붓놀림이 떠올랐다. 잔뜩 만족한 듯. 한숨까지 내쉬며 소녀는 붓을 내려놓곤 했다. 화선지에서 일렁대는 숨결이 내게도 느껴졌다. 마치 삭신이 녹아내릴 듯했다. 서로 시선이 맞닿을 때였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너도 수영 잘 하지? 영문을 몰라 물끄러미 소녀를 바라보았다. 무자맥질 알지? 그냥 자맥질이라고도 하는 것. 잠시 나의 표정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사람의 전신이 물에 잠긴다는 건 무서운 일이야. 비단 사람뿐이겠어? 뭍에서 숨쉬는 생명체가 물에 잠긴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어? 소녀의 말이 이어진다.
“호흡마저 중단한 채 물속에서 치러지는 유영. 다시 몸이 떠올라야만 호흡이 가능해. 이게 바로 자맥질이야. 자맥질의 구간은 호흡과 호흡 사이야.”
왠지 의미가 깊게 들렸다. 자맥질의 구간이 호흡과 호흡 사이란 말이. 안개를 꿰뚫고 들리는 일깨움의 소리로 여겨졌다. 제대로 된 작가가 되려면. 자맥질하듯 전신을 내던질 듯한 모험. 그런 모험이 있어야 함을 일깨우는 듯했다.
노래하면서 여자를 끌어안으니 한없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몸에 기류가 돌지 않으세요?”
불시에 내가 뱉은 물음이다. 잠시 생각하는 듯. 여자가 눈썹을 살짝 찌푸린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끄떡이며 응답한다.
“그래요, 아주 많이 나돌아요. 어쩌면 좋죠?”
이 때다. 여자의 왼쪽 젖가슴을 슬쩍 더듬는다. 깜짝 놀란 듯. 여자의 눈빛이 크게 흔들린다. 당신이 너무 좋아 만지고 싶었어요. 여자의 귀에 속삭이듯 말한다. 여자가 고개를 갸웃대며 미소 짓는다. 하얀 치아가 눈송이처럼 눈부시다. 젖가슴의 접촉은 한 번으로 끝낸다. 절제력의 척도를 드러내려는 듯. 밤 9시가 되자 노래방을 떠난다. 손을 들어 택시를 세운다. 여자를 태워 보낸다.
머릿속이 어수선하다. 좀더 걸어야만 할 것 같다. 걸으면서 머리의 열기를 가라앉혀야겠다. 인사동에서 파고다공원으로 걷기로 한다. 취기로 인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길가의 나트륨등이 깨어난다. 가슴에서 안개가 피는 느낌이다. 나트륨등의 은은한 황색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리움이 생각날수록 서러움이 밀려든다. 소녀를 떠나보낸 슬픔이 서러움이 된다. 외로움에 몸을 떨던 소녀. 모든 외로움을 그림에 쏟다가 떠난 소녀. 소녀의 고아한 성품이 마냥 그립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어댄다. 귀에 갖다대니 여자의 목소리다. 저예요. 덕분에 집에 닿았어요. 내일 전화할게요. 간단한 통화로서도 충분한 메시지를 전하는 여자다. 폴더를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걸으면서도 의문이 치솟는다. 과연 나의 소질은 소녀만 할까? 죽도록 노력해도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뒤흔든다. 자꾸만 고개를 내흔든다.
재차 핸드폰이 울어댄다. 이 시각에 누굴까? 폴더를 연다. 낯선 전화번호다. 목소리를 들으니 검정 원피스의 여인이다. 어디에요? 명함을 보고 전화 드렸어요. 전화번호가 맞기는 맞나 하구요. 제가 엉터리 같죠? 말소리에 이어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여인의 얼굴을 떠올린다. 고요한 호수처럼 단아한 여인. 말 한 마디에도 마음을 뒤흔들던 아취. 그처럼 고아한 여인의 웃음소리라니. 가슴이 점차 뒤설렌다. 여인과 얼결에 몇 마디를 주고받는다. 상냥한 목소리의 여운을 남기며 전화가 끊긴다. 전신이 황홀한 느낌이다.
파고다공원의 외곽을 다섯 번째로 거닐 때다. 비록 혼자 걷는 길이었지만. 여자의 젖무덤의 열기가 농묵의 느낌으로 전해진다. 그 날의 노래방에서였다. 손에 느껴지던 젖무덤의 감촉. 만지다가 숨이 져도 아쉬울 게 없을 정도였다. 탄력적으로 와 닿던 아늑한 느낌. 탐욕마저 정화해 주는 듯했다. 한없이 아늑하고 포근하기만 했다. 기를 펼치는 데 필요한 게 있다면. 바로 이런 신묘한 느낌이리라. 신묘한 느낌이 농묵의 정취로 스며든다. 힘차면서도 심오하게 내뻗는 농묵의 여운. 농묵의 정서로 신묘한 느낌을 나타내고도 싶다. 화선지 위로 번지는 농묵의 기세. 해변을 휩쓰는 강풍과도 같은 위세가 느껴진다. 여자와의 만남과 애무의 느낌. 이걸 어떻게 운필에 적용할까를 생각해 본다. 스파크가 일 듯. 전신으로 짜릿하게 밀려들던 여자의 체온. 이런 느낌을 어떻게 붓으로 나타낼지? 가슴에 과제로 남겨진다.
인사동을 다녀온 지 닷새만이다. 컴퓨터를 여니 홈에 여인의 메일이 들어있다. 엄청 반갑다. 메일을 여니 회식 때의 느낌이 표현되어 있다. 명함의 주소대로 보낸 메일이라고 한다.
“첫 만남이 기억에 생생해요. 크로키와 독특한 평도 인상적이었구요. 틈나는 대로 메일 보내도 되죠?”
간결하지만 매혹적인 메일이다. 가슴에 느낌이 일렁인다. 이 정도면 마음이 통하겠다는 확신이 선다. 당장 메일의 답장을 쓴다. 첫 메일의 답신이라 간략하게 쓴다. 상대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메일을 통해 연습을 한다. 상대의 마음을 어떻게 흡수해 나갈지를. 문득 소녀가 들려준 자맥질의 의미가 떠오른다. 치솟을 기약이 되어야만 뜻이 있는 거라고. 문득 가슴으로 파동이 인다. 자맥질이랍시고 여인들을 사귀어 내가 성취한다고 치자. 두 여인들의 신세는 뭐가 될 건가? 어차피 배우자는 하나여야만 되지 않는가? 결국 한 여인은 농락당하는 꼴이지 않는가? 출발부터 슬픔이 내재된 과제다. 이런 일을 계속 추진해야 하는가? 한 마디로 마음이 석연치 않다. 소녀의 유서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생각조차 않았으리라. 점차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렇지만 소녀의 경지를 떠올리면 생각이 달라진다. 소녀의 경지는 너무나 부러운 세계다. 자나 깨나 도달하고픈 절대적인 세계다. 그래서 유서의 내용을 실행하려고 한다. 막상 실행하려니까 신뢰를 저버리는 문제가 예견되어 마음이 무겁다. 흔들리는 의식 사이로 불안감이 어른댄다. 달인도 달인이지만. 연인을 둘씩이나 사귀어도 그룹 섹스를 못한다면? 생각할수록 지극히 어려운 과제다. 어떤 여자가 그룹 섹스를 수락하겠는가? 창녀라도 응해주기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어떻든 달인은 되고 싶다. 달인이 될 수만 있다면. 꼭 달인만 된다면.
검정 원피스의 여인을 사귀는 순간. 이미 자맥질은 시작된 거라고 여겨졌다. 메일로 교신한 지 1주일째다. 여인을 만나야 한다. 만나자는 메일을 띄운 오후다. 만나주겠다는 응답 메일이 왔다. 토요일 오후 2시. 명동역 3번 출구 앞으로 약속 장소를 정한다.
아직 하루가 남은 시점이다. 화선지를 펴고 붓으로 물감을 푼다. 고속터미널 도매상가에서 산 동양화용 물감이다. 호수(No.)에 따라 다섯 종류의 붓을 펼친다. 물감의 농도를 점검한다. 신문지 위에 약간씩 칠해 본다. 뻑뻑한 느낌이면 점적병으로 조절한다. 마음에 들 정도면 붓을 씻는다.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짠다. 머릿속으로 대략의 구도를 잡는다. 담묵(淡墨)을 찍은 붓으로 형상을 친다.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넓적하게 짓눌린 붓에 농묵(濃墨)을 묻힌다. 점적병의 물을 수반에 살짝 따른다. 질감은 농묵과 담묵의 조화로 생긴다. 사물의 생생한 묘사는 질감이 나타내는 실제성과 관련된다. 질감이 성공적으로 살아나면 사물이 생동감을 찾는다.
계곡의 풍경을 그리려다가 마음을 바꾼다. 일단은 질감의 표현부터 다지기로 한다. 넓은 유리판에 농묵과 담묵의 먹을 푼다. 붓을 비스듬히 눕힌다. 붓의 각도는 유리와 먹의 유착 정도를 결정한다. 이건 붓에 묻힌 먹의 농도를 결정한다. 농묵을 든 순간이다. 왠지 여자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간결한 표현에 비해선 강한 느낌을 주던 여자. 여자의 이미지는 강렬했다. 여자의 눈빛만으로도 유혹의 기운이 느껴졌다. 농묵의 붓을 화선지에 칠한다. 진한 흑색이 시선을 끈다. 진한 색채가 주는 정서. 강하고 매끄럽고 힘이 넘친다. 흑색만으로도 작품이 될 정도다. 하지만, 그래서는 질감이 생기지 않는다. 질감은 사물의 생명이다. 질감을 통해 생명력을 느끼게 된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농묵의 효과를 깨쳐야 한다. 농묵만의 의미를 살려야 한다. 그래야만 농묵이 쓰일 시점을 알게 된다. 농묵의 먹물이 여자의 눈썹처럼 윤이 난다. 여자의 눈썹에 생각이 미치자 여자가 그리워진다.
여인이 3번 출구로 막 나온다. 악수를 하자 여인의 따스한 느낌이 밀려든다. 카페 겸 레스토랑을 찾는다. 돈까스와 칵테일을 주문한다. 화산가스를 화제로 삼으면서 진토닉 술잔을 부딪친다. 핵구름처럼 치솟는 화산가스의 위용이 너무 강렬했어요. 어쩜 그런 느낌을 표현했는지 신비로워요. 여인의 목소리가 교태롭게 날아든다. 여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담묵을 떠올린다. 담묵은 어느 자리에서도 겸허하다. 붓질을 더 할 여유를 준다. 여인에게서는 향기가 배어 있다. 그윽한 살의 향기 같다. 칵테일을 추가시킨다. 여인의 얼굴이 약간 불콰하다. 취기가 밴 듯하다. 여인의 입술이 교태로이 움직인다.
“말 놓고 지내, 응? 비슷한 나이잖아?”
“그래, 좋아.”
여인이 생각난 듯 묻는다.
“친구한테서 기법은 다 전수받았어? 요절한 그녀가 안타깝네. 이 좋은 세상을 떠나다니 말이야.”
소녀의 말이 나오자 우울해진다. 소녀는 내 추억의 갈피에서만 간직하려고 했는데. 여인이 이야기를 하니 울적하기만 하다. 나의 욕심이 많은 탓일까? 왜 소녀를 나만의 공간에 가두려 할까? 울적한 기색을 간파했음일까? 여인이 나의 손을 쥐며 다독인다. 내가 괜한 말을 했지? 기분 풀어. 나긋나긋한 여인의 성향. 아무래도 감미롭기만 하다.
오후 6시 무렵. 레스토랑을 나와 명동을 거닌다. 레스토랑을 나오면서 여인이 나의 팔짱을 꼈다. 온통 아늑한 느낌이다. 현재로선 여자와 여인 둘 다 좋아 보인다. 동시에 두 여인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게 진정한 사랑일까? 나도 몰래 고개를 젓는다. 한 시간가량 골목을 누볐을까?
나이트클럽에 들러 맥주를 주문한다. 둘은 술잔을 부딪친다. 비틀즈의 노래가 신디사이저의 선율과 함께 내닫는다. 헤비메탈의 강한 금속성이 고막을 휘젓는다. 젊은이들이 우루루 무대로 몰려간다. 나도 여인에게 춤추러 나가자고 제안한다. 흔쾌히 여인이 일어선다. 1시간가량을 열정적으로 춤추었다. 드럼과 베이스 기타의 여운에 매료된 시간이었다. 여인의 이마가 땀에 젖어 번들거린다.
그래도 미진한 듯. 여인이 노래방에 가자고 한다. 바라던 바가 절로 이루어진 듯한 느낌이다. 마이크를 들고 노래하기 직전이다. 소녀가 불렀던 노래 ‘바위섬’이 생각난다. 소녀는 나와 단 한 번 노래방에 들렀다. 마지막 추억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그 날 소녀는 시종 앉아서만 노래했다. 기력이 쇠진한데도 전력을 기울여 노래했다. 악곡을 통한 기의 발산 현장이었다. 순간순간 마이크에 스파크가 이는 듯했다. 그러다가 문득 눈시울을 적시며 소녀가 말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정말 살아날 길은 없을까? 내 손을 쥐며 꺽꺽 울음을 삼키던 소녀였다. 제 소견으론 얼마 안 남았어요. 대비하셔야 할 거예요. 내뱉던 의사의 말이 떠올라 오금이 저렸다. 소녀를 달래려고 애썼지만. 치솟는 설움을 억제키 어려웠다. 그 날의 소녀만 떠올리면 가슴부터 젖어든다. 곡목을 ‘바위섬’으로 고른다. 소녀의 가창법을 흉내 내어 본다. 여인의 눈이 놀란 기색이다. 어머, 노래 솜씨 대단하네요? 여인에게로 마이크를 넘긴다. 예상했던 대로 여인의 노래 실력도 만만찮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여인과 블루스를 춘다. 몸놀림이 유연하기 이를 데 없다. 바람결마저 느껴질 정도다. 여인의 애창곡마다 애절한 그리움이 사무친다. 징징 울어대는 헤비메탈의 음률처럼 격정적이다. 그리움의 정서가 전자기타의 스파크처럼 불붙는다. 때때로 비트가 이루는 음역에서 소용돌이가 인다. 정상적인 박자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정감. 그런 정감의 허리를 비트가 요동치며 달랜다. 음률로 심신이 고조된 어느 순간이다. 여인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갖다댄다. 놀랍다는 듯 여인이 잠시 허둥댄다. 그러다가 여인이 입술을 연다. 가느다란 신음소리와 함께. 달뜬 얼굴로 여인이 내게 속삭인다. 널 사랑해. 우쩍 성기가 일어서는 느낌이다. 어느새 1시간이 흘렀나 보다. 더 이상 욕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 여인을 택시로 태워 보낸 뒤다.
취기를 달래려 종로 거리를 배회한다. 분명 처음엔 흥분과 만족감으로 들떴다.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점차 느낌이 달라졌다. 생각마저 달라졌다. 어느 순간 멍청하게 길만 걷는다. 평소 때엔 짧은 길이 멀게도 느껴진다. 문득 서늘한 느낌이 가슴으로 번진다. 혹시라도 여자들만 농락하는 꼴이 된다면? 술이 확 깨는 심정이다.
두 여자를 사랑한다는 건 위선이다. 나는 위선을 감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파렴치한이 아닌가? 자의식이 밀려들면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냐, 나는 예술을 위해 도전할 뿐이야. 예술의 성취는 나만의 만족은 아니야. 숱한 사람들의 정서를 위한 구도의 과정이라구. 그럼, 나는 결코 파렴치한이 아니라구.
고개를 내흔드는 사이. 가슴의 밑바닥으로부턴 다른 생각이 밀려든다. 사내는 솔직해야 해. 어떻게 여자 둘을 동시에 사랑하냐구? 네가 제 정신이야? 그 둘과 그룹 섹스를 해? 완전히 돌았구먼! 그만 기가 질리면서 고개가 꺾어진다. 일단 사귄 여자들은 어쩐다? 급격히 머릿속이 윙윙거리며 현기증이 인다.
종로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려 한다. 정리를 통해 실종된 나를 찾고 싶다. 실종된 나? 생각할수록 허허롭다. 재능 있는 예술인이란 분명 선망의 대상이다. 달인이 되고 싶다. 생명마저 내놓고도 달인이 되고 싶다. 분명한 건. 달인이어도 품격을 지닌 달인이고 싶다. 여인들에 대해선? 숨이 막힐 뿐이다.
여자와 만난 지도 1주일만이다. 그간 소녀의 작품 분석을 면밀히 했다. 300점이 넘는 작품을 일일이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구성이나 소재가 달랐다. 작품을 대하면 대할수록 감탄스러웠다. 작품마다 깃든 생동감. 완전히 전율할 지경이었다. 소녀의 작품을 대하면서부터였다. 처음엔 잘 몰랐지만. 노도에 휩쓸리는 해변에 선 느낌이었다. 작품들마다 자맥질하는 소녀의 분신으로 여겨졌다. 작품에 내재된 기백을 파악하고부터다. 유서와 자맥질의 연관성이 느낌으로 와 닿는다. 유서에 담긴 진정한 뜻. 그 뜻을 헤아려 봐야겠다. 나는 마루를 서성이며 생각에 잠긴다. 제대로 된 작품을 위해. 간경화의 바다에서 자맥질한 소녀. 그러다가 생명을 놓쳐 버린 소녀. 그런 소녀가 남긴 유서라면? 필시 심오한 뜻이 담겼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가슴이 탄다. 두 여인과 그룹 섹스를 해야만 해? 내가 원한다고 여인들이 응해 주겠는가? 아무리 작품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순순히 응해 줄 리는 없다고 여겨진다.
여자와 여인. 두 여인들의 성향을 떠올린다. 여자는 화끈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농묵의 형상으로 비친다. 여인에게는 은은한 정서가 느껴진다. 부드러운 듯 포용력이 깃든 성품이다. 비컨대 담묵에 어울리는 유형이다. 농묵과 담묵의 진미를 깨치려면? 직접 부딪쳐 봐야 할 일이다. 소녀는 생명까지 내던지며 자맥질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비한다면? 일시에 머릿속이 윙윙 울리는 듯하다. 그래도 그룹 섹스까지는 차마 내키지 않는다. 맨 정신으로는 판단하기가 벅찬 느낌이다.
슈퍼에 나가 맥주와 쥐포를 사 든다. 전셋집 마루에서 술잔을 기울인다. 베란다 문을 열어젖힌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술잔을 기울이며 생각한다. 내가 달인이 되겠다고 타인을 울려서는 안 된다. 여인과 여자. 둘 중의 하나.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한 사람만 내 배우자가 되리라. 그러자면 다른 한 사람과는 헤어져야만 한다. 이건 눈물을 뿌리게 하는 일이리라. 한 사람을 울리고야 마는 일이리라. 나는 점차 심한 피로감에 젖는다. 정신적인 압박감마저 느낀다.
“사내가 왜 그 모양이야? 뭘 그리 우물쭈물해?”
언뜻 소녀의 냉엄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결단력 있는 소녀에게 또다시 움츠러드는 심정이다. 쫓기고 쫓기다가 마지막 난관에 떠밀린 느낌이다. 문득 급우인 미희가 떠올랐다. 남자 짝을 찾는다며 수시로 상대를 바꿔 섹스를 해댄다. 섹스를 해 봐야 상대를 제대로 파악한다구. 신세대는 계약 애인의 시대야. 자주 듣는 미희의 말이다. 미희 말고도 그런 여대생들이 적지 않다.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이다. 여자와 여인. 둘 중에 누가 피해자가 될지라도. 내 마음은 진정 괴로우리라. 몇 시간째 번민하다가 술을 머리통에 들이붓는다. 체온이 떨어질 무렵.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댄다. 눈물이 두렵거든 차라리 달인을 포기해? 세차게 대드는 자의식에 멈칫한다.
어차피 한 번 태어나는 목숨일진대. 삶에 독특한 의미가 있어야겠다고 여겨진다. 평범한 삶도 소중하겠지만. 남다른 절정의 경지. 설혹 꿈만 꾸다가 스러질지라도. 피눈물과 열정을 바쳐 이룩하고픈 바가 있다. 그게 그림에 기를 발출하는 경지다. 절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영역이다. 화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바이지만. 쉽사리 다가서지 못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아무리 험난해도 꼭 이루고픈 영역이다. 그러기에 달인의 길을 포기할 수가 없다. 그러면 죄 없는 여인들의 눈물은? 신뢰의 벽을 깨는 데서 생기는 자괴심은? 살다 보면 모진 구석도 때론 필요하리라. 그런데도 마음이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 이론으로 다스려질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버거운 상념에 휩쓸리다가 또 눈물을 글썽인다. 속에서 열기가 들끓는 느낌이다. 옷을 벗고는 팬티 차림으로 무릎을 꿇는다. 구토처럼 울화가 치솟는다. 벽면을 향해 술병을 내던진다. 순식간에 유리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파편에 찢긴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내린다. 울부짖듯 허공을 향해 고함을 친다.
“일단은 여자들과 자맥질하겠어. 자맥질하다가 죽어도 좋단 말이야!”
그러다가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져 눕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메모장을 펼친다. ‘둘을 벗기는 날.’ 오늘의 일정이다. 일단 세 시간의 시차를 둔다. 시차가 빗나가면 조정하면 될 일이다. 사람과 시간을 정한다. 여자는 오후 3시에, 여인은 6시에 만나기로 한다. 둘 다 흔쾌히 응한다. 둘에게 은근히 암시를 준다. 전화로 여인에게 묻는다. 오늘 널 가져도 돼? 기급하는 척하다가 대답이 들린다. 꼭 오늘이어야 해? 곧바로 응답한다. 물론이야. 여인은 수락한 거나 다름없다. 냉수를 따라 한 잔 들이킨다.
거실을 한 바퀴 돈 연후다. 여자에게 전화를 건다. 대번에 들리는 맑은 소리. 자기야? 왜 이제 전화해? 바빴어? 일단 비위를 맞춰야 한다. 안 바빴으면 벌써 전화했지. 보고 싶어서 참느라고 혼났어. 달변이 아니어도 관계없다. 스스로 잘 알아듣는다. 잠시 딴청을 피우다가 속삭이듯 말한다. 널 갖고 싶어. 가슴이 타 버릴 것 같애. 놀란 숨소리가 느껴진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여자가 속삭여댄다. 웬 일이야? 뭔 일이 있었어? 일부러 천천히 한숨 소리를 낸다. 충분히 들릴 수 있게. 아냐, 그런 건 아니고. 우린 연인이잖아? 다른 연인들처럼 가까워지고 싶어. 여자의 불안정한 숨소리가 잠시 들린다. 나의 맥박도 빨라지는 느낌이다. 이내 여자가 응답한다. 꼭 서둘러야 돼? 박동소리가 엄청 커지는 느낌이다. 잠시 전화기가 고요하다. 어떤 소리도 단절된 상태다.
이 때 요염한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너무나 고와 안아주고 싶던 소녀. 취우간의 품위에 유난히 신경을 쓰던 소녀. 그런 그녀가 그립다. 모든 기력을 그림의 전수에 쏟아준 벗이었다. 이따금 꿈속에선 소녀의 알몸을 보곤 했다. 그러다가 격렬한 섹스를 하기도 했다. 욕정은 꿈속에서만 발산되는 선물이었다. 소녀의 뼛가루를 바람에 흩날리던 날. 그 날은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었다. 고요한 산중에 울려 퍼지던 뻐꾸기의 울음소리. 울어서 토해내는 설움의 가루들. 내버려 두면 설움이 핏물처럼 엉겨들 것만 같았다. 그 날. 뻐꾸기의 설움이 나의 설움이 되었다. 삐삑 두어 번 전화기의 잡음이 흘렀다. 여자의 작은 한숨소리가 새어나온다. 좋아. 나중에 만나. 어느새 성기가 우쩍 일어섰다. 가슴이 터질 듯 뻐근하다.
달빛이 부서지는 백사장. 광막한 모래사장이다. 바람결이 깃털처럼 일어선다. 늘어선 해송들이 물결친다. 이틀 전만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다. 마구 쿵쿵거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그 날. 예정대로 여인들과 섹스를 했다. 분당의 모텔 밀집촌에서였다. 하얀 속살과 탄력 있는 몸매들. 일단 알몸이 되자 황홀하게 감겨들던 여체들이었다.
두 여체를 취하던 날. 전율할 듯한 황홀함에 몸을 떨었다. 마치 요염한 소녀와 정사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황홀감이 스러지면서부터였다. 형용할 수 없는 공황감에 휩싸였다. 섹스와 기의 발출과의 긴밀한 연관성. 이걸 못 찾은 탓이었다. 관절에서 바람이 빠지는 느낌이 든 순간. 품격을 지닌 달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룹 섹스는 피해야 마땅하리라 여겨진다. 시행착오로 비책을 약간만 수정해야겠다. 그런다고 유서의 내용을 어기는 건 아니리라. 소녀도 내 마음을 이해해 주리라 여겨진다.
그룹 섹스를 거치지 않는 마지막 방법. 두 여체를 접촉한 느낌만으로 기를 발출해 보려고 한다. 모래사장에 드러누운 널따란 반석을 발견한다. 겹겹으로 깐 신문지 위에 화선지를 조심스레 편다. 먹물이 든 유리병을 꺼낸다. 먹물과 점적병으로 붓의 먹물 농도를 조절한다. 농묵의 붓과 담묵의 붓을 설정한다. 붓은 단숨에 휘둘러야 한다. 벌벌 떨다가 덧칠해서는 예술성이 떨어진다.
오후 3시 무렵의 해변이다. 쾌청한 하늘을 향해 소원을 빈다. 기의 발출법을 부디 터득케 해 달라고. 경건히 고개를 숙여 입술을 깨문다. 마침내 담묵의 붓을 빼든다. 숨결을 고르며 잠시 눈을 감는다. 가만히 눈을 뜬다. 눈시울이 떨리며 눈에 눈물이 돈다. 얼마나 기다려 온 날들인가? 가슴이 싸해지며 감격으로 벅차다. 나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순간. 마침내 붓이 화선지로 치달린다.
(200자
원고지 92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