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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손 정 모

갯벌 아스라이 썰물이 진다. 이빨을 하얗게 드러내며 해풍이 달려든다. 오후의 태양열에 시달렸음일까? 백사장에는 고장 난 풍향계가 오도카니 서 있다. 하단의 풍속계만이 살아남아 어지러이 내달린다. 풍향계 주변에는 시설물이라곤 없다. 나는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풍향계 주위를 서성인다. 바람결에 수시로 치맛자락이 넓적다리로 오르내린다. 강풍과 약풍이 어우러진다. 풍향계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고개가 푹 꺾인 채다. 언제부터 고장 난 걸까? 끼이익 끼이익! 해풍에 휩쓸릴 때마다 풍향계가 울어댄다. 내 젖은 속눈썹이 바람에 떤다. 풍향계의 신음소리가 체내로 스며드는 기분이다.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신형의 산타페가 내닫는다. 몸보다 남자의 목소리가 먼저 내닫는다. 오래 기다렸어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다가서며 남자가 손을 내민다. 밀려드는 남자의 체온이 따스하다. 감청색 양복에 보랏빛 넥타이. 깔끔한 맵시의 남자가 산책하자고 한다. 단순한 느낌만일까? 남자의 눈빛이 수시로 파도처럼 휩쓸린다. 짧게 깎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간들댄다. 정말 고마웠어요. 공허한 마음을 달래 주셔서요. 남자의 눈빛에 절실함이 묻어 있다. 절실한 눈빛에 생각이 미치자 콧잔등이 시큰거린다. 면회가 까다로운 중환자실에서였다. 널 끝까지 돌봐야 하는데?. 절절한 연민으로 파고들던 삼촌의 눈빛이었다. 저기까지만 갖다 오기로 해요. 남자의 손이 파도치는 해변을 가리킨다. 남자의 구두가 지날 때마다 모래가 사각댄다. 사각대는 모래 위의 발자취. 마냥 부질없다고 생각된다. 사각대는 음향에서 단절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컴퓨터에 카메라 다셨죠? 이제부터 화상으로 채팅해요. 제안한 남자는 ‘은하수’란 닉네임의 채팅 파트너였다. 채팅으로 알게 된 지 석 달째였다. 화상으로 상대를 바라본다는 건 묘한 경험이었다. ‘실잠자리’라는 닉네임으로 떠돌던 때의 내가 자유로웠던 모양이다. 얼굴이 드러나자 속내까지 노출되리라곤 몰랐다. 첫눈에 남자는 실의로 찌든 얼굴이었다. 내풀린 초점에서는 과거의 나를 만난 느낌이었다. 동병상련이란 이리도 다채로울까 싶었다. 남자와는 화상 채팅 1주일만의 첫 만남이다.

멀어 보였는데도 금세 왔군요. 남자가 미소 짓는다. 가슴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쪼그려 앉아 남자가 물에 손을 담근다. 덩달아 나도 남자의 곁에 앉는다. 역동적으로 물결치는 바다. 보기만 해도 가슴의 앙금이 씻기는 기분이다. 두어 차례씩 간들대다가는 파도가 바위를 올려치곤 한다. 하얗게 갈라지는 포말에서 풍경(風磬)의 여린 진동음이 느껴진다. 삼촌의 천도제가 치러지던 날은 하늘마저 시린 가을이었다. 생시대로 영혼의 목욕도 시키는 거죠.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읊조리던 승려의 말이었다. 영혼의 목욕이라? 갑자기 목이 콱 메는 기분이었다. 삼촌보다 맑은 영혼의 소유자가 있었던가? 정녕 영혼 세척이 필요한 사람들은 친척들이라고 여겨졌다.

“저는 못해요. 엄연히 형님이 계신데 제가 왜 소연을 맡아요?”

“글쎄, 너희 내외는 부부 직장인이잖니? 농사짓는 날더러 소연을 맡으라는 경우가 어디 있어?”

빗길 과속으로 부모를 잃던 날에 작은집에서 들썩대던 언쟁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여름철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4형제 중의 맏이였고 자식이라곤 내가 유일한 혈육이었다. 해변에는 서서히 밀물이 밀려든다. 치솟는 파도가 암벽을 때릴 때마다 물보라가 나비처럼 흩날린다. 언쟁을 침묵으로 일관하여 지켜본 것은 막내삼촌이었다. 막노동 일을 하는, 총각이었던 삼촌이 끝내 나를 맡기로 한 거였다. 그 누가 그리운들, 울먹이던 날 안고 작은집 마루를 내려서던 삼촌만할까? 마음에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였다. 까닭 없는 불안감. 어디서든 초조감이 등골을 적시곤 했다.

남자는 파래를 건져 올린다. 시선이 유난히 맑은 느낌이다. 남자의 시선을 바라보다가 문득 사내를 떠올린다. 50대 초반의 이혼한 사내다. 이혼한 지 1년이 지났다. 사흘 전에도 전화가 왔다. 모레쯤 한 번 만날까요? 굽이치는 풍경소리만큼이나 청아한 목소리였다. 좋아요, 전화 기다릴게요. 사내는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모기소리만큼이나 작게 웅얼대던 목소리를.

남자의 파래조각들을 바라보며 나도 물속으로 손을 넣는다. 조약돌이 만져진다. 평행사변형을 닮은 흰 조약돌이다. 어딘가에 유사한 돌이 있을 것만 같다. 경쟁이라도 하듯. 남자와 나는 분주하게 물속을 더듬는다. 남자의 주변은 초록빛의 파래로 휘감긴다. 우와, 나의 탄성이 내뻗친다. 평행사변형의 자줏빛 조약돌에 시선이 머문다. 크기도 흰 것과 비슷하다. 까닭 모를 기대감에 몸이 떨린다. 굽힌 자세로 두 조약돌을 맞춰 본다. 문득 연인과 내가 조화를 이룬 느낌이다. 창졸간이지만 황홀감에 휩싸인다. 헌데 이 때다. 불시에 너울 큰 파도가 얼굴을 친다. 엉겁결에 돌을 놓치고 만다. 자욱한 모래먼지 속에 돌의 자취가 묘연하다. 아무리 뒤져도 흔적조차 없다. 까닭 모를 절망감에 가슴이 저리다. 길 잃은 바람이 처절히 나뒹구는 듯하다.

남자가 잠자코 손을 헹군다. 이제 돌아갈까요? 남자의 말이 귀에 들릴 듯 말 듯하다. 엉겁결에 고개를 끄떡인다. 남자의 얼굴에 시종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늘의 답답한 느낌에 진저리가 처진다. 바람의 통로마저 차단되어 버린 듯. 꺾인 풍향계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방향을 잃은 바람결에서 왈칵 설움이 느껴진다.

답답한 상황에서는 그가 생각난다. 만나기만 해도 아늑한 느낌을 주던 그. 연인이었던 그가 한없이 그리워진다. 남자의 차가 비치 모텔에 멈춘다. 남자가 샤워를 먼저 권한다. 물기를 닦으며 남자가 실내로 들어선다. 신체가 잘 다듬어진 편이다. 남자가 나의 아랫도리에 감긴 타월을 걷어낸다.

삼촌의 일터는 수시로 달랐다. 햇살에 그을린 얼굴과 지친 표정. 눈빛에는 결기가 서렸다. 집에만 들어서면 애써 표정을 밝히려던 삼촌. 찌든 표정에서도 따사로움이 분출되던 얼굴. 생각할수록 삼촌이 그리워진다. 중학교의 졸업식이 있던 날. 유일한 가족이자 하객은 삼촌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산 꽃다발이랬다. 차가운 바람결에 간들거리던 장미 꽃송이들. 잘 못해 줘서 미안해. 삼촌의 눈빛이 먹먹하게 젖었다. 덩달아 나의 콧날도 시큰거렸다. 너무 고마워요, 삼촌. 식이 끝난 뒤였다. 삼촌에게 이끌려 동해의 해변으로 달렸다. 날 위해 휴가까지 낸 터였다. 모래바람이 망사처럼 일어서던 해변에서였다. 넌 잘 해냈어. 대학까지도 돌봐 줄게. 열심히 해 봐. 삼촌의 목소리가 아늑하게 귓전으로 스며들었다. 따사롭기로는 삼촌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졌다. 바람 세찬 해변이 어쩜 그리도 가슴에 벅찼던지?

그늘진 모습에 비해선 남자는 침착한 편이다. 자, 선불입니다. 수표 2장이 내게로 전해진다. 얼결에 받아든다. 남자는 나보다 다섯 살 연상인 서른이다. 남자는 침대 곁의 원탁을 가리킨다. 남자와 원탁에 알몸으로 마주 앉는다. 원탁 위로 남자의 손이 드리워진다. 무심결에 나도 손을 내민다. 맞잡은 손으로 남자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진다. 남자의 눈빛이 그윽해지더니 한숨이 새어나온다.

남자의 한숨을 대하자 문득 그의 숨결이 그리워진다. 동강의 어라연 계곡에서였다. 불꽃처럼 흩날리던 여름날의 반딧불이들. 다른 지역에서는 멸종에 직면했다던 반딧불이들. 반딧불이의 비행의 궤적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나만 결혼해서 돌아가면 돼요. 부모님과 형제들은 프랑스에 정착한 지 꽤 됐어요. 머지않아 학위 취득하러 건너가야만 해요. 함께 안 갈래요?”

부모의 영혼이 깃든 고국을 떠나기가 싫었다. 언어가 장벽인 점도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생각해 보겠다고만 했다. 대학원에서 조경학을 전공하던 그는 매사에 성실했다. 나의 대답에 희망을 느꼈던지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텐트 속에서 새벽을 밝히면서까지 나는 그를 받아들였다. 혹시 아프지는 않느냐면서 나를 다독이던 그. 그의 손길이 미치는 곳마다 황홀하여 나는 마구 진저리를 쳤다. 그대로 화석이 되어 버리고픈 밤이었다. 사랑의 진정한 실체를 느낀 밤이기도 했다. 동강을 찾기 일 주일 전쯤이었으리라. 조개를 캐고 싶어요. 전공서적에만 묻힌 그에게 도발적으로 던진 나의 말이었다. 논문 발표에 여념이 없던 그이기도 했다. 그래, 한 번 해 보죠. 선뜻 동의하며 그가 인터넷을 더듬었다. 아, 태안의 몽산포 해변이 좋겠네요. 썰물이 진 광막한 갯벌에서였다. 파도자락에 휩쓸리는 개펄을 가리키며 그가 속삭였다. 이렇게 호미로 긁어 보세요. 논의 우렁이와는 달라요. 우렁이는 스며든 구멍을 남기거든요. 헌데, 조개 구멍은 없기에 꾸준히 파야만 돼요. 개펄을 긁어대며 그가 미소를 지었다. 바지락이 호미에 밀려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개가 플라스틱 바가지의 절반을 채울 때까지 그와 나는 개펄을 팠다. 일어서면서 그가 나의 손을 살폈다. 조가비에 상처가 나지는 않았는지 그가 살폈다. 그의 섬세한 배려가 따스함으로 느껴졌다.

이젠 아무 것도 없다구요. 남자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밀려든다. 혼례 비용과 주택 자금마저 모두 사라졌어요. 절친한 친구의 부탁이라서 보증을 섰죠. 그 친구만은 믿었는데…. 말하는 남자의 눈시울에 가벼운 경련이 인다. 돈도 돈이지만 친구를 잃은 내 마음 이해하겠어요? 그를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짜증이 난다.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돌연히 남자가 일어선다. 원탁에 가려졌던 성기가 덩그렇게 드러난다. 거기마저 오그라들어 볼품이 없다. 남자는 방을 서성대기 시작한다. 컵을 들어 물을 들이킨다. 도저히 못 견디겠어요. 날 좀 어떻게 해 줄래요? 가슴에서 찬바람이 인다. 그래, 결국 그 얘기로군. 드러누운 남자의 아랫배에 얼굴을 갖다댄다. 오그라진 성기가 탄력을 되찾는다.

그가 출국하기 한 달 전이었다. 성판악에서 9.6km를 걸어 백록담에 올라섰을 때였다. 발 아래로 펼쳐지는 장관. 백록담은 표주박 모양으로 드러누워 있었다. 흡사 8자 모양 같죠? 8자의 고리에 우리의 인연을 새긴다면 어떨까요? 그의 목소리에 파란 물빛이 일렁이는 듯했다. 마냥 감미로웠다. 나는 미소로 응답했다. 진입 방지용 나무 울타리 앞에 섰을 때였다. 살짝 내려가면 안 돼? 목책을 움켜잡은 채 그에게 투정을 부렸다. 말갛게 웃으며 그가 말했다. 나랑 프랑스로 가 준다면 기꺼이. 부모의 영혼이 떠올라 목이 메었다. 그건 안 돼. 단호한 응답에 그가 움찔 놀랐다. 그가 사진을 찍는 사이. 나는 목책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사랑만큼 절실한 게 있을까? 그를 놓친다면? 아마도 다시는 사랑을 못할지도 모를 일이리라. 그걸 예견하면서도 다스려지지 않는 내 마음이었다. 내 마음 깊숙한 어디쯤. 일렁이는 불덩이가 있는 듯했다. 아무리 다스려도 다스려지지 않는.

남자의 손길이 나의 엉덩이를 더듬어 내려간다. 그래, 이 순간이나마 마음이 안정되기를. 남자의 체열이 성감대를 자극해댄다. 결국은 뒤엉키고 말 것일진대. 남자를 향해 한껏 몸을 연다. 허리를 잔뜩 꺾으며 남자를 깊숙이 받아들인다. 해풍이 방향을 잃고 울음 우는 듯. 서로 어우러져 푸른 숨결이 된다. 귓전으로 아랫배로 숱한 바람결이 치솟는다. 남자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어라? 남자에게 아직도 따사로운 정서가 남았다니? 놀란 가슴에 현기증이 일 정도다. 느닷없이 핸드폰이 운다. 열어보니 서해 횟집이다. 손님들이 밀려드는 모양이다. 곧 횟집으로 가야 한다. 힐끔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의 시선이 천장에서 맴돈다. 거기에 숨겨진 답을 찾으려는 듯. 그를 향해 속삭인다. 잊고 살아도 때로는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내 목소리가 작았음에도 남자가 고개를 끄떡인다. 그 길밖엔 없겠죠? 조언해 줘서 고마워요. 길 잃은 바람이 남자의 얼굴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선선히 남자가 일어선다. 매너 하나는 멋들어지다는 생각이 든다. 떠나는 남자에게서 고독한 바람결이 느껴진다. 해변에서 사각대던 모래의 음향이 들리는 듯하다. 한없는 단절의 극한으로 휩쓸리는 느낌이다.

초저녁인데도 식사 손님들로 북적댄다. 주말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주인이 뜰채로 물고기를 건져 올린다. 넙치와 도다리와 우럭들로 주종을 이룬다. 간혹 놀래미나 감성돔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회를 뜨는 일은 나의 어엿한 직업이다. 시멘트 바닥에서 나뒹구는 물고기를 빨리 제압해야 한다. 물고기의 뒷골에 살짝 칼금을 낸다. 이래야만 물고기가 실신해 버린다. 우선 신속히 비늘을 훑는다. 이내 칼 깊이를 조절하여 아가미와 창자를 발라낸다. 다음에는 척추를 따라 살을 얇게 저민다. 칼날이 뼈에 안 부딪히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횟감도 살고 칼날도 산다. 마지막으로 얇게 썬 무채를 접시에 깔고, 회를 올리기만 하면 된다. 회의 빛깔이 유지된 채로 식탁으로 넘겨지면 만족스럽다. 쉬지 않고 회를 뜬다. 식칼에서 분출되는 빛줄기에서 삼촌의 얼굴이 어른댄다.

부모를 잃고 삼촌에게 얹혀살면서부터였다. 수시로 내 마음이 소용돌이쳤다. 삼촌의 눈빛은 호수의 물빛이었다. 아늑하고도 따사로운 느낌이었다. 질녀에게 부담 주지 마. 어떤 경우에서도. 삼촌은 자신의 영혼에 다짐을 한 듯했다. 존경스런 삼촌은 시린 칼날로 느껴졌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정은 긴장 해소의 장소랬는데. 그렇지 못하니 딱할밖에. 세탁기를 돌리려고 해도 삼촌은 말렸다. 심지어 음식 장만이나 설거지까지도. 나를 위한다는 게 뭔지? 모든 게 무형(無形)의 족쇄로 여겨졌다. 딱 한 가지. 공부만 제대로 해. 내 말 알겠어? 언젠가부터 공부가 달갑지 않게 여겨졌다. 배려도 고마운 일이지만. 경직된 삶의 양식이 거북했다.

넙치의 속살이 도마를 뒤덮는다. 속살의 색채를 대하자 사타구니에 힘이 풀린다. 속살의 비릿한 이미지 탓이리라. 생리가 터질 때의 느낌과도 같다. 억압 상태에서 풀려나는 나른한 느낌. 이 미묘한 느낌을 어디에 비유할까? 취몽(醉夢) 같은 상태라고나 할까. 당장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삼촌의 눈빛은 따스하지만 시린 칼날로 여겨져요. 절 편하게 안 해 줄래요, 응? 속으로만 삼키던 간절한 말이었다. 세상 떠난 삼촌이 문득 그립다. 이제 어디서 만나랴? 삼촌의 눈매가 청정한 바람결이었다면 그의 눈빛은 따사로운 바람결이었다. 만나면 편안한 느낌을 주던 그. 어떤 근심거리도 그를 만나면 해소되었다. 교양과목에서 두 번이나 과락을 당했을 때였다. 담당교수가 죽도록 미웠다. 울분을 삭이지 못해 혼자서 술병을 깠다. 그에게 말하기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연인이기에 더욱 자존심 상하는 문제였다. 그래, 혼자서 술잔을 기울였다. 때마침 생리 기간이기도 했다.

부모를 잃고 난 뒤부터였다. 생리기간은 중학 시절부터의 고역이었다. 취몽 상태로 마음이 술렁거렸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가슴이 소용돌이쳤다. 수시로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듯한 환영에 시달렸다. 그러면서 오줌이 마려워지곤 했다. 하지만, 변기에만 앉으면 오줌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공부만 하라는 삼촌의 배려마저도 형벌로 여겨졌다. 심장이 죄어드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나의 목을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급기야 중3의 어느 봄날에서부터였다. 생리만 흐르면 나도 몰래 뭔가를 훔쳐내곤 했다. 그건 생리대이거나 팬티일 때가 많았고 더러는 책일 때도 있었다. 며칠이 지나면 병적으로 우울해지곤 했다. 저버린 양심에 몸이 저린 탓이었다. 회복될 무렵부턴 날마다 허공에다 맹세를 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안 그러겠다고. 그것도 부족한 듯. 거울을 볼 때마다 맹세했다. 그랬음에도 언젠가부터 나에게는 ‘절대’란 단어는 먹혀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이 상했다. 정신이 깊이 망가지는 건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나날이 황폐해지는 정서에 자꾸만 속상했다. 그럴 때마다. 관절 깊은 곳에서는 바람이 새는 듯했다. 더러는 뼈마디마저 삭아 내리는 느낌이었다. 바람 새는 느낌이 잦을수록. 가슴은 점차 냉기로 파래졌다.

절망감에 마신 술이라 빨리 취했다. 덩달아 마음마저 달아올랐다. 뒤설레는 마음의 파장이 커지려는 듯했다. 얄궂게도 팬티가 젖는 느낌이었다. 샅에 핏기가 배는 기간이기도 했다. 문득 끝없이 술이 고프다는 생각이 일었다. 백화점 양주 매장. 인파들에 묻혀 기회를 엿보았다. 다른 손님들과의 흥정이 일 무렵. 돌아서는 비닐 가방에 느껴지는 둔중한 중량감. 목을 펴고 당차게 걸어야 했다. 그래야 의심을 받지 않겠거니 여겼다.

훔친 양주의 맛이라니. 기막히게 감미로웠다. 차차 훔치는 장소도 다양해졌다. 발각될 확률을 줄이려면 그래야만 했다. 백화점 출구만 빠져나오면 바깥은 별천지다. 누군가 뒤따라 나올까 봐 두려웠다. 꼭지가 켕기지만 돌아봐서는 안 된다. 끝까지 당당해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생리기간은 열병이었다. 훔치느라 신경 써야만 했고 양심의 가책으로 번민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엔 훔친 양주로 그를 불러내기에 이르렀다. 훌쩍이며 과락을 호소했을 때였다. 별 일 아니잖아? 한 번 더 들으면 되지. 시원스런 그의 목소리에 근심이 사라졌다. 그를 근심에 빠뜨릴 게 없어 보였다. 넉넉한 풍도의 그가 미더웠다. 얼추 두어 시간 동안. 넙치와 도다리가 유독 많이 나갔다. 수십 접시의 회가 내 손을 거쳤다.

헝가리 무곡이 울어댄다. 폴더를 여니 사내의 목소리가 밀려든다. 밤 8시까지 유람선 선착장으로 나오세요. 여주인과 눈길이 마주친다. 여주인이 윙크를 한다. 어서 가 보라는 뜻이다. 앞치마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횟집을 나서는데 여주인이 짐을 넘겨준다. 흘깃 살펴보아도 만족스럽다. 싱싱한 갯지렁이 두 곽과 소주 5병과 마른 안주류다. 이 정도면 하룻밤을 지내는 데 충분하다.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짐을 든다. 선착장에 이르니 소형 동력선이 다가선다. 사내가 조타실 밖으로 손을 흔든다. 도착하는 걸 지켜봤어요. 많이 보고 싶었소. 사내의 말에 나도 몰래 미소를 머금는다. 사내의 인간성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이내 배는 무인도인 돌섬을 향해 달린다. 돌섬 주변에 낚시의 포인트들이 즐비하다. 낚시꾼들에게 미끼를 나르다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돌섬 주변은 나의 제2의 생업장이다. 낚시꾼들이 자주 찾는 곳이며 미끼에 여자까지 찾는 곳이다. 미끼를 대주는 것만으로는 경쟁이 안 된다. 남자들이 찾는 섹스까지도 제공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거면 되겠죠? 소형 포플러나무 곽을 열어 사내에게 내보인다. 튼실한 갯지렁이들이 물 적신 톱밥을 헤치며 꿈틀댄다. 만족한 듯 사내는 크게 고개를 끄떡인다. 자, 한 시간만 함께 낚시해요. 낚싯줄 묶음을 사내가 내게 건넨다. 낚시를 받아들자 금방금방 입질이 느껴진다. 손을 상하로 꾸준히 놀려야 한다. 봉돌이 바닥에 닿은 높이로부터 한 뼘의 높이만큼은 끌어올려야 한다. 그래야 바닥에서 수류를 일으키고 물고기들이 달려들게 된다. 10 ∼ 15분마다 두세 마리씩 낚싯줄에 매달려 올라온다. 계속 낚기만 하면 된다. 사내가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는. 낚싯줄을 건져 올릴 때마다 동심원의 파문이 인다. 파문은 금세 밀려드는 물결로 지워져 버린다. 연이은 파문들. 파문들의 소용돌이에 H 백화점 양주 코너의 관리인이 연상된다.

50대 중반의 둥글넓적한 얼굴의 사내. 개기름이 번쩍대는 얼굴엔 탐욕스러운 눈빛이 출렁거렸다. 삐익 신호음이 울렸다. 손님, 카드가 걸리네요. 주민등록증 잠깐만요. 중년남자가 불렀다. 그 때 주소가 찍힌 모양이다. 며칠 후. 아파트의 수위가 등기우편물을 내밀었다. 봉투를 여니 사진들이 펼쳐졌다. CCTV로 촬영된 복사본 사진들이었다. 절도 장면이 담긴 나의 사진들이었다. 발신지를 보니 명동이었다.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가슴이 뛰며 발작할 것만 같았다. 사진더미 아래로 쪽지가 보였다. 토요일 오후 3시. 양평 콘도 207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매장 관리인. 전화번호를 제외한 다른 말은 없었다. 그토록 차가운 메시지는 처음이었다.

낚싯줄을 타고 물고기는 연이어 올라온다. 입에서 낚시 바늘을 뽑아 우럭을 물통에 던진다. 기역자를 그리듯 낚시 바늘을 살짝 돌리면 된다. 우럭에서 놀래미로. 놀래미에서 감성돔으로. 어쩌다 도다리도 잡힌다. 사내는 아직도 낚시에 여념이 없다. 사내가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계속 물고기를 낚아야 한다. 사내와의 불문율이다. 사내의 몰두하는 모습이 숭고하게 여겨진다. 사내의 눈빛이 그윽하다. 사내의 손길에 바닷물마저 몸을 사리는 느낌이 든다. 남자끼리도 이미지 차이가 그리도 큰지? 사내에겐 흡인력이 느껴진다. 평온하게 휘감겨 드는 아늑함이랄까?

반면에 그 날의 중년남자는? 콘도 문을 들어서는 순간 자지러질 듯했다. 중년은 팬티차림으로 양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피둥피둥한 살이며 중배 부른 몸매. 힐끗 쳐다보며 욕실을 가리켰다. 어서 씻고 와. 네가 좋아하는 양주야. 이대로 도망 가 버린다면? 생각할수록 질식할 듯했다. 내 마음을 간파했음일까? 고개를 저으며 중년이 코웃음을 흘렸다. 넌 이미 늦었어. 중년이 느물거리며 욕실을 가리켰다. 물기를 닦으며 중년의 앞에 섰다. 중년이 수건을 빼앗아들며 이죽거렸다. 너는 양주를 마시고 나는 널 마시는 거야, 알았어? 나의 젖가슴의 물기를 닦으며 중년이 덧붙였다.

“그래도 넌 운이 좋은 거야. 수감까지는 안 된다 치자. 수억 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한다면 어쩔 건데?”

기가 질릴 수밖에는. 중년을 통해 도벽을 끝내려고 했다. 하지만 샅에 핏빛이 서리면 열기가 차올랐다. 이를 악다물며 숨진 삼촌. 음영처럼 겹쳐지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들. 핏기가 배면 그만 열기에 휩쓸리곤 했다. 몽유병 환자인 듯. 취몽 상태로 흐느적거리곤 했다. 점차 의식의 저변으로 불나방이 어른거렸다. 죽을 둥 살 둥 불길로 치달리는 날갯짓. 죽어야만 열기에서 벗어나게 되는 비상이 애처로웠다. 나란 존재가 혹시? 섬뜩하여 머리를 내둘렀다. 절대로 아니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삼촌이 떠나던 날 밤. 중환자실의 철망에 매달려 버둥대던 독나방이 떠올랐다. 날갯짓을 따라 흩날리던 독 가루들. 나방의 몸부림은 필사적이었다. 임종을 느꼈음일까? 삼촌이 보호자를 불러들였다. 내가 들은 말이 마지막 말일 줄이야?

“널 끝까지 못 돌봐서 미안해. 미안…….”

입 안으로 말이 삼켜지면서 다시는 의식을 찾지 못했다. 삼촌이 떠나던 날. 세상을 두 번 잃은 느낌이었다. 가슴이 펑 뚫려 버린 듯했다. 고3인 내게 여름은 커다란 슬픔덩이였다.

그만 합시다. 사내가 낚싯줄을 거둬들인다. 아울러 나의 것도 당겨 올린다. 이어 우럭을 손에 쥔다. 제법 칼질이 익숙하다. 덩달아 나도 합세한다. 금세 쟁반이 수북해진다. 고추장과 젓가락을 찾아 사내에게로 내민다. 사내도 소주와 술잔을 꺼낸다. 먼저 사내의 잔에 술을 친다. 만족한 표정으로 사내가 내게 술을 따른다. 가볍게 술잔을 부딪친다. 회가 입에 살살 녹는 느낌이다. 맛이 이를 데 없이 좋다. 두어 순배의 술잔이 돌았을 때다. 난 정말 아내한테 할 만큼은 했소. 그랬는데도 결과는 이 꼴이오. 대그룹 신소재 회사의 임원인 사내. 성취욕으로 인생을 불태웠다는 사내다. 플라스틱 고추장 팩을 두 개째 벗긴다. 회는 아삭아삭한 맛이 피부로 감겨든다. 아내가 갱년기를 맞을 때였소. 도저히 마음에 갈피가 안 선댔소. 선량해 뵈는 사내의 눈동자가 드맑다. 친구들이며 선배들에게 자문을 구했소. 권유에 따라 화가인 아내를 여행 보내자고 마음먹었죠. 사내의 눈시울이 젖어든다. 근데 정말 몰랐소. 그게 잘못이 될 줄은. 일시적으로는 여행이 아내의 마음을 달래는 듯했소. 사내의 이어질 뒷말이 두렵다. 사내가 이처럼 속내를 털어놓기도 처음이다. 물고기가 내장을 드러내면 죽기 마련이다. 사내가 속내를 드러낼 때엔 뭔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슬그머니 두려워진다. 바닷바람이 밀려들며 물안개가 끼기 시작한다. 안개자락이 용의 꼬리처럼 음침하게 느껴진다. 시종 내 마음이 두려움에 떠는 걸까?

예감이란 때때로 섬뜩함을 안겨줄 때도 있다. 그 날은 왠지 1교시부터 삼촌 생각이 났다. 같이 지내면서도 삼촌의 얼굴을 못 볼 때가 많았다. 밤늦게야 피곤한 신색으로 들어서던 삼촌. 음주로 비틀거리며 들어올 때도 가끔 있었다.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 싶어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런 삼촌이 그립던 날이었다. 3교시가 파할 무렵이었다. 학교로 전갈이 왔다. 급히 병원으로 오라는 기별이었다. 도착해 보니 중환자실이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나를 찾았단다. 작은아버지와 삼숙에게도 연락이 안 된 상태였다. 뒤미처 달려온 숙부들에게 현장 소장이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교량 건설의 현장에서였다. 조립 중이던 철제빔이 무너지면서 깔린 거였다. 철제빔에 등짝과 허리를 맞아 나뒹굴었다. 구급차로 병원으로 내달렸지만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중환자실에 옮겨져 의식이 돌아오자 연락을 취한 거였다. 보호자의 면회를 엄격히 통제하는 중환자실이었다. 그랬음에도 나를 먼저 부른 건 삼촌의 뜻이었다. 퉁퉁 부은 삼촌의 얼굴을 대하자 숨이 멎는 듯했다. 하마터면 못 볼 뻔한 삼촌.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까스로 실눈을 뜨며 간간이 풀어놓던 말. 널 끝까지 돌보지 못하다니. 그게 맘에……. 의식을 잃으면서부터였다. 삼촌의 입에선 연신 허연 침이 들끓었다. 면회에 할당된 시간은 의외로 짧았다. 폭우마저 쏟아져 질척거리던 날. 자정 무렵이었다. 삼촌은 끝내 세상을 떠났다. 삼촌의 운명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처절한 공허감에 휩싸였다. 단절감에 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혹시나 매달릴까 봐 시선을 피하는 숙모들의 얼굴이 가증스러웠다. 삼촌을 잃은 이후부터였으리라. 대학 진학 때까지의 몇 달간. 작은 아버지가 건네주던 생계비로 겨우 끼니를 때웠다. 그 몇 달 동안. 세상의 절망감이란 다 맛보았다고 여겨진다.

삼촌 명의의 13평 서민 아파트. 혼자 지내는 공간은 너무나 무서웠다. 특히 밤 시간이 더 그랬다. 정체불명의 초인종이 울릴 때면 숨죽여 몸을 떨었다. 생리기간이 임박해지면 불안감은 가중되었다. 공황감에 두려움마저 겹쳐 발작할 지경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형언 못할 불안감은 취몽의 현상으로 치달았다. 수시로 가슴이 답답했다. 숨길마저 가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삶을 잇는 과정이었다. 황량하고 스산한 마음이 일 때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내가 여행사 직원에게 마음이 빼앗길 줄은 전혀 몰랐소. 여행인의 신묘한 마음에서 종국적인 위안을 찾았댔어요. 말하다가 이따금씩 사내는 먹빛의 수면을 바라본다. 그 어디쯤에 위안의 대상이 있기나 한 듯. 처음에는 일시적인 현상이려니 여겼죠. 헌데, 그게 이혼으로까지 이어질 줄은 정말 몰랐소. 회 세 접시가 순식간에 바닥났다. 어지간히 먹은 편이다. 마음이 통했는지 사내도 접시를 밀어낸다.

마음이 잘 통하기는 사내를 처음 만날 때부터도 그랬다. 사내를 처음으로 만나던 때였다. 키가 큰 텁수룩한 개 한 마리를 몰고 횟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사내가 개 줄을 목련나무에 매고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아가씨, 광어회로 한 접시 줘요. 오전 10시 무렵이라 한산할 때였다.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나를 불러 동참시켰다. 자기가 살 테니 같이 먹자고 했다. 여주인이 날 향해 고개를 끄떡였다. 청정한 눈빛에 언변이 대단한 사내라고 느껴졌다. 사내가 문득 마당의 개를 가리켰다. 저 개 이름이 뭔지 알겠소? 은마(銀馬)라고 해요. 은빛의 말. 말라깽이 개한테 붙여진 이름으로는 걸작이라고 여겨졌다. 나도 몰래 웃음이 나왔다. 무슨 개한테 은마라뇨? 사내의 눈빛이 달라지려다가 이내 평온을 찾았다. 암튼 저 개의 이름은 은마요. 알겠소? 꽤 웃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복잡한 탓이려니 여겼다. 사내가 두 병째의 술병을 따며 말했다. 내가 탈 말이라곤 저 개밖엔 없소. 나 참 기가 막혀서.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그에게 끌려드는 느낌이었다. 얼마 전부터 외톨이가 되었소. 시골 친구를 찾았더니 저 개를 줍디다. 반가움의 정표랬어요. 말라깽이 개와 외톨이 나그네. 뭔가 의미가 있어 보였다. 50대 초반의 수수한 얼굴의 사내였다. 그래, 개를 몰고 어디를 다니셨어요? 웃음을 머금으며 사내가 말을 이었다.

“사방으로 떠돌아다녔소. 산이건 강이건 가리지 않았소. 점차 은마가 말처럼 느껴졌소. 은빛 모래 위를 달리는 백마.”

목을 간질이며 대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사막에도 가셨겠네요. 사내의 얼굴에 잠시 눈웃음이 비쳤다. 방향을 알 수 없는 바람이 휩쓸리는 느낌이었다. 그 날 이후. 사내와 이따금씩 만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묘한 건 사내의 이미지와 그의 이미지가 닮았다는 점이다. 한없는 청량함과 수수한 아름다움. 사내를 만날 때마다 그가 그리웠다.

그가 출국하기 일 주일 전. 변산의 격포항에서 카 페리호로 위도에 들어갔다. 해안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위도해수욕장에 이르렀다. 석양 무렵이었고 사람들이라곤 그와 나밖엔 없었다. 은회색의 입자 고운 모래가 쫙 펼쳐진 곳이었다. 모래사장의 길이가 2km 거리는 충분했다. 밟아도 발자국이 새겨지지 않는 다져진 모래였다. 콘크리트를 버무려 부어 놓은 형상이었다. 문득 그가 고개를 숙였다. 주머니의 열쇠를 꺼내 내 모습을 크로키로 담았다. 금세 나의 모습이 재현되었다. 허리를 펴려는 그에게 졸랐다. 그림엔 나 혼자뿐이잖아? 현준 씨 모습도 함께 그려. 당혹스러운 듯 그가 웃는다. 나 자신을 어떻게 그리란 말이야? 대형 거울도 없는데. 천진한 그의 표정에 나도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그려 봐, 응? 이내 그가 고개를 숙이며 모래에 환을 쳤다.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그림에도 재능이 있는 청년이었다. 청춘남녀의 다정한 포즈가 생생하게 잡혔다. 위도에 남기는 마지막 족적 같아 눈시울이 젖어들려고 했다. 바닷물은 한참이나 멀리 빠져 있었다. 조류의 주기를 잘 모르는 나였다. 막연히 그림이 오랫동안 남아 있으려니 여겼다. 어스름이 밀려들자 차를 몰아 숙소로 향했다. 떠나면서도 모래에 새겨진 그림을 떠올렸다. 다음 날 새벽. 그와의 마지막 여행이라는 점에 그림을 다시 보고 싶었다. 새벽 해변 어디에도 그림은 남겨지지 않았다. 그토록 선명하던 그림이었음에도. 사라진 그림 탓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와 함께 한 자취가 그리도 쉽게 지워지다니. 한없이 가슴이 저렸다. 애절한 속내는 감춘 채. 모래사장 언저리를 서성이며 그림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다. 나의 아픈 마음도 모르는 듯. 파도의 생리도 모르느냐며 그가 쿡쿡 웃었다. 그러면서 그림을 찾아 헤매는 나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사진기로 담았다고 했다. 승용차까지 되돌아가는 사이에 자꾸만 울음이 치솟으려 했다.

나만 마음을 다잡으면 되는데. 그게 죽도록 안 되니 미칠 지경이다. 내 마음이 다스려질 날이 있기나 할까? 훗날에 가슴을 치며 후회하기가 십상이리라. 그럴 줄을 알면서도 그를 놓아 보내야 하다니. 온통 가슴이 젖어 먹먹하기만 했다. 안간힘으로 마음을 다스리려고 해도 통제되지 않았다. 부모와의 별리와 삼촌과의 영결이 커다란 원인이었으리라. 게다가 생리 도벽까지 정신을 망가뜨렸으니. 나 역시 고장 난 풍향계가 아닐는지? 바람의 방향마저 놓치고 비명만 꺽꺽 내지르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땅에 무슨 미련이 남은 걸까? 불현듯 세상 떠난 부모의 얼굴이 밀려들었다. 마지막 기력으로 의사를 전하려던 삼촌의 애절한 얼굴도 떠올랐다. 비록 이승에는 없지만. 그들의 영혼이 잠든 곳에서 떠나기가 싫은 탓이었으리라. 자나 깨나 그리움으로 피어오르는 건 그들의 영혼들이었다. 고국을 떠나면 그 어디서 영혼들을 만나랴 싶었다. 이런 내 마음까지도 이해하겠다던 그였다. 위도를 떠나기 직전에 그는 나를 오래오래 가슴에 품었다. 그 날 이후로 바다는 설움이 되었다.

이틀 전 국제 통화를 통해서였다. 프랑스 남부의 지중해에서 변산의 바다를 떠올린다며 전화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두견새의 울음처럼 그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형용할 길 없는 서슬 퍼런 슬픔이었다. 사내가 술잔을 내게로 내민다. 왠지 그의 품성을 닮은 사내에게 이끌리는 심정이다. 생각할수록 그가 그리워진다. 그를 떠올리며 사내의 품에 안기고 싶다. 사내를 통해 그의 체온을 느끼고도 싶다. 말하지 않으면 폭발해 버릴 듯한 기분이다. 나 안 가질래요? 사내가 쓸쓸이 도리질을 한다. 왜요? 제가 맘에 안 들어서요? 말없이 사내가 또 술잔을 건넨다. 사내의 눈빛이 한결 그윽하다. 들릴 듯 말 듯. 사내의 목소리가 뱃전에 일렁인다.

“보소, 당신이 원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지 않소? 애인이 그리우면 내일이라도 프랑스로 건너가소. 아직도 애인한테 여자가 안 생겼다면.”

사내의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가슴에 유리파편이 박히는 느낌이었다. 이틀 전에 들려주던 그의 말 때문이었다. 학문과 가족 때문에 프랑스에 정착할 거예요. 이제라도 건너올 순 없나요? 오래 기다리지는 못할 거예요. 부모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작별을 예견하면서도 왜 마음을 못 다스렸던지? 왜 그리도 마음을 못 추슬렀던지? 자꾸만 설움이 북받쳤다. 급기야 눈가에 이슬이 맺혀 흘렀다. 사내는 한동안 물빛을 응시하더니 말을 잇는다. 나랑 섹스를 해도 오늘은 너무 서글플 거요. 나는 어디까지나 허상일 뿐이지 않겠소? 이건 결코 당신이 원하는 게 아닐 거요. 점차 해풍이 일며 안개가 스러진다. 허탈한 내 마음을 달래 주려는 듯. 사내가 슬며시 화제를 바꾼다. 사내의 따스한 배려에 눈물이 핑 돈다. 어쩜 그와 풍도가 흡사할까 싶다.

“여태껏 은마에게 음식을 사 준 적이 없소. 그런 내게 주인 자격이나 있겠소?”

왠지 코끝이 찡해 온다. 사내의 동공을 들여다본다. 허상을 대한 느낌이라 가슴이 시리다. 사내의 입술만 움찔대는 듯하다. 그래, 풀어 주기로 했죠. 돌섬의 솔숲에다가 놓아 보냈소. 개의 처지가 가엾다고 생각된다. 안개 낀 날에는 이따금씩 개 짖는 소리가 나는 듯도 했소. 사내는 신산한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듯 중얼거린다. 하필이면 돌섬을 택했어요? 조심스런 나의 물음에 중얼대듯 사내가 읊조린다. 개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 때문이오. 사귐의 정표로 받은 개가 돌섬에 버려지다니? 애달픈 일이라 여겨진다. 나의 심중을 헤아렸음일까? 그의 말이 이어진다. 난들 어찌 정표를 함부로 버리고 싶었겠소? 상황이란 게 사람을 그리도 만듭디다. 이왕 온 김에 돌섬에 들를까요? 배가 돌섬에 닿자 사내가 소리쳐 개를 부른다. 하지만 몇 차례나 소리를 질렀어도 돌섬은 잠잠하기만 하다. 어딜 갔을까? 얼결에 대꾸를 해 준다. 아마 잠을 자는지도 모르죠.

실성한 듯 돌섬을 굽어보던 사내가 뇌까린다. 안개가 걷히거든 나도 떠나야겠소. 나도 이젠 세속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소.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흘깃 사내를 바라본다. 관자놀이의 실핏줄이 경미하게 펄떡인다. 눈썹마저 가늘게 떨리더니 침중한 목소리가 흐른다. 회사를 떠난 지도 오래 됐소. 언제까지 떠돌 수만은 없는 일이고. 동력선 한 척이 있으니 이나마 다행이오. 이제 남겨진 욕망은 없소. 외딴 섬에서 어부로 일생을 살겠소. 감긴 눈시울에 시린 안개가 휘감긴다. 마음이 이를 데 없이 착잡해진다. 붕괴된 가정 때문에 세속을 떠나는 나그네. 그의 이혼한 아내는 지금쯤 뭘 생각하고 있을까? 잠시 잠잠하던 파도가 다시 기승을 부린다. 치솟는 물결이 해안선을 휘감는다.

취중 상태에서 깨어나니 새벽 무렵이었다. 사내는 나에게 어디에 내려주면 좋겠냐고 묻는다. 풍향계가 있는 해변에요.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떠 나를 응시한다. 어떻게 풍향계가 있는 해변을 알고 있소? 쏘다니다 보니 알게 되었어요. 사내의 한숨이 가느다랗게 새어나온다.

“그 자리엔 원래 도선소(導船所)가 있었소. 인근 항구가 커지는 바람에 건물은 뜯기고 풍향계만 남게 되었소. 언젠가는 풍향계마저 사라질 거요.”

사내의 목소리에 물기가 비친다. 거기가 또 작별의 장소가 될 줄은 몰랐소. 사내의 말에 전율이 느껴진다. 이전의 누군가와도 거기서 헤어졌던가? 점차 가슴이 저려온다. 생각해 보니 은하수를 만난 곳도 거기였다. 지금쯤 은하수는 잘 흐르고 있을까? 밝은 눈빛을 믿던 실잠자리만 새벽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풍향계가 있는 해변에 나를 내려놓고는 동력선이 서쪽으로 내달린다. 조타실에서 손을 내흔드는 사내가 안개더미에 묻힐 때까지 바라본다. 엔진 소리만 허둥대더니 그나마 스러지고 만다. 이틀 전의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애달프다.

“석양으로 불타는 몽페리에 해변이야. 지중해에서 너를 잊어야 하다니! 여기서조차 변산 바다가 떠올라 너를 잊기 어려운데 어쩌지? 끝내 널 못 잊으면?”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이 밀려든다. 이젠 그 어디에도 구심점이라곤 없다. 다 흩어져 버린 기류일 따름이다. 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듯하다. 풍속계가 전속 질주를 한다. 거동이 불편한 풍향계만이 끼익 끼이익 울음을 운다. 바람이 드셀수록 고개를 숙여 땅바닥으로만 요동을 친다.

자욱한 물안개가 사방에서 밀려든다. 새벽이라 별빛마저 얼어붙은 듯하다. 세속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사내의 목소리가 은가루처럼 눈부시다. 사내가 떠난 수평선마저 자욱하다. 벌써 사내가 그리워진다. 떠나가던 모습, 어쩜 그렇게도 생경스럽던지. 사내가 떠난 해변에 세워진 풍향계. 바닷바람이 더더욱 기승을 부려댄다. 그럴 때마다 금속성으로 울부짖는 풍향계. 꺾인 고개로 바닥만 바라본 채 요동친다. 풍향계의 고개만큼이나 내 목이 무겁다. 영영 목을 못 든다면? 하얀 모래톱으로 파도가 일어선다. 파도더미에 실려 부모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삼촌의 눈물이 어른대는 듯도 하다. 프랑스 남부 해변의 그, 여전히 바닷바람을 들이키고 있을까? 가슴이 투명해지다가 퍼렇게 젖는다. 어깨선이 떨리더니 급기야 눈물이 핑 돈다. 바람의 행적이 이렇게 공허할 줄이야. 머리를 풀어헤쳐 바람에 내맡긴다. 이러다간 내 목마저 부러질 것 같다. 나의 관절마다 풍향계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신발마저 벗어 버린 채 모래톱을 걷는다. 내풀린 블라우스와 미니스커트로 바람이 휘몰린다. 파드득거리는 옷자락 소리가 깃발처럼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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