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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과 빛

손 정 모

12월 초순의 남한강변이었다. 초겨울의 바람결이 솔숲을 가로지르며 연방 빛살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예전보다는 조금 일찍 내린 첫눈이 나뭇가지마다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나뭇가지마다 엉겨 붙어 있는 눈은 바람이 불 때마다 살 비듬처럼 일어서 허공으로 치솟았다. 살얼음으로 잔뜩 뒤덮인 강에서도 바람이 일 때마다 하얀 눈가루가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상수는 느닷없이 가슴을 휘젓는 핸드폰의 진동음에 움찔 놀라,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상수 씨 !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정확한 결과를 갖다줄 수 있소 ? 만약 그 때까지 아무런 결과가 없다면, 우리 사이의 계약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소. 뿐만 아니라, 내가 결코 당신을 그대로 두지는 ……."
  시린 발끝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상수는 가만히 핸드폰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연후에, 그는 쌍안경을 꺼내 극동 모텔의 주차장을 살펴보았다. 서서히 주차된 차량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흘낏 시계를 바라보니, 아침 7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수질이 좋은 약수와 빼어난 경치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텔 뒷산을 등반하고는 했다. 상당히 많은 수의 불륜 커플들이 새벽 산행을 마치고는 하산을 한 듯했다. 차가운 바람결을 견뎌 내며 상수는 서해 부동산의 주인인 신남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자, 자연스레 보름 전 국민대 뒤쪽의 북악산 계곡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 날 아침이었다. 이른 시각부터 소장은 상수를 불러 사건 하나를 던져 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 사진의 여자를 찾아달라는 거야. 그냥 찾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의 진한 장면을 담은 사진을 넘겨 달라는 조건이야. 순수하게 자네 앞으로 할당된 금액은 천만 원이야. 야, 뭘 이리저리 생각하고 야단이야 ? 무조건 착수하는 거야. 장소는 남한강변에 인접한 여주의 모텔이야. 관련 자료는 여기에 다 있으니까 잘 해 봐, 이만."
  숱한 전과 경력으로 악명이 높은 50대 초반의 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또다시 다른 흥신원들을 불러 작업 지시를 내리러 나간 거였다. 넘겨받은 자료를 펼쳐 들고 보니,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해 볼 의사가 있다면, 지정된 일시에 맞춰 북악산 계곡으로 나오시오.
- 신남호 -

  국민대 바로 뒤쪽의 바위가 돌출한 계곡에서였다. 50대 중반의, 몸집이 다부져 보이는 사내가 담배를 뻐끔거리며 상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광 용역에서 나온 사람이오 ? 그래, 잘 왔소."
  상수는 직업 근성으로 사내의 얼굴을 면밀히 뜯어보았다. 대략 신장 175 cm에, 80kg쯤의 체중을 지닌 다부진 골격의 사내였다. 사내는 사진을 상수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나, 남호라는 사람인데, 이 여자를 좀 찾아 줘야겠소. 이 여자 ? 물론 나의 집사람이지. 3주 전부터 확실히 눈치가 좀 이상했거든. 그런데도 내겐 물증이 없다 이거야. 내가 바라는 건 이 여자의 불륜 현장 사진이야. 야외에서건 모텔에서건 현장 사진을 찍어 오란 말이야, 알겠소 ? 대신 사례비는 천만 원이고, 덧붙여 격려비까지 주겠소. 마음에 안 들면 그만 두어도 좋소. 만약에 일을 하려거든 제대로 해 주길 바라오. 혹시 일을 하다가 실패했을 경우에는 절대로 가만 두지 않겠소."
  등산복 차림의 사내는 뭐가 바쁜지 훌쩍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모텔 주위의 숲 속에서 상수는 잠시 쌍안경을 내린 채, 주차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8895의 번호를 단 백색 소나타 III가 막 주차장에 와 닿고 있었다. 금세 모텔로부터 남자 종업원이 나오더니, 순식간에 아크릴 덮개로 번호판을 가리고 있었다.
  상수는 즉시 쌍안경을 들어, 차에서 내리는 남녀를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사진상의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남자는 키가 크고 늘씬한 30대 후반이었지만, 여자는 남자보다 3∼4세는 연상으로 보였다. 상수는 불륜의 남녀를 본 순간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지금껏 찾고 있던 게 바로 너희들이야. 너희들이 내게 걸린 건 운수 소관일 뿐이니까 절대로 나를 탓해서는 안 돼. 암, 그렇고 말고.'
  자신도 몰래 입술을 깨물며, 상수는 모텔 5층 건물의 30개 객실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숨을 죽이고는 2∼3분 후에 어느 방에서 불이 켜지는지를 살펴보았다. 불빛은 정확히 5층 우측의 세 번째 객실로부터 후루룩 새어 나왔다. 곧장 상수는 모텔의 건물 조감도를 펼쳤다. 불이 켜진 곳은 503호임에 틀림없었다. 투숙자의 위치가 정확히 포착되자마자 상수의 마음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주머니로부터 소형의 일제 도청기를 꺼내 들고는 핸드폰을 눌러 모텔 전화기에 접속시켰다. 간단한 장치로 모텔을 거치는 일체의 통화 내용을 도청할 수 있었다.
  금세 핸드폰에 전기 신호가 반짝거리더니, 도청기를 타고 음성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 거기 금화반점이죠 ? 여기 극동 407호인데요. 만두 한 접시와 탕수육 하나 부탁 드릴게요."
  상수는 휴대용 가방을 잠시 노송나무 아래에 숨겨 둔 채, 곧장 모텔로 갔다. 모텔에서 좀 떨어진 곳에 상가 건물이 한 채 있었다. 그 건물을 지나다보니, 슈퍼마켓 앞에 중국 음식 배달용 양철함이 놓여 있었다. 용수는 슈퍼마켓 주인이 등을 돌리자마자 태연히 양철함을 주워 들고는 곧장 모텔로 향했다. 음식 배달을 나왔다고 얘기를 한 다음 곧장 모텔 5층으로 올라섰다.

  503호의 출입문 앞에서 무선 도청 장치를 꺼내 전기 신호가 가는지를 점검했다. 전지의 충전 상태가 양호하다는 녹색 불빛이 반짝거렸다. 크기는 비록 단추 정도였지만, 성능만큼은 대단한 거였다. 접착식으로 된 거여서 살짝 벽에 붙이기만 해도 설치가 끝나는 거였다. 일단 이 장치 하나면, 모든 대화 내용이 그대로 핸드폰으로 청취가 되는 거였다. 잠시 문 앞에서 뜸을 들인 후에, 노크를 하고는 귀를 기울였다. 키 큰 사내가 웬 일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문을 약간 열었다. 그러다가, 음식 배달함을 보더니 더욱 크게 문을 열었다. 바로 이 때였다. 왼 손으로는 배달함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도청기를 손바닥으로 감춘 채, 문을 밀치며 들어섰다.
  "여기가 403호죠 ? 음식 배달시키셨죠 ?"
  "아뇨. 여기는 503호예요. 잘못 왔네요."
  "어이구 미안해요. 그럼, 이만."
  숙련된 동작으로 뒷걸음질치면서, 등뒤로 손을 놀려 손잡이의 바로 밑에 도청기를 달았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간단히 밀착되는 순간 설치용이었다. 상수는 고개를 숙인 채, 급히 배달함을 들고는 아래층으로 달렸다. 그러다가 재차 503호로 가서, 문의 자물쇠 부분에 가는 철사를 넣었다가 살며시 빼냈다. 가는 철사는 자물쇠의 틈새를 들어갔다가 빠져 나오는 동안에 고유한 형태로 구부러져 있었다. 일체 소리를 내지 않고 진행된 신속한 동작들이었다. 모텔을 빠져 나오면서 슈퍼마켓 옆에서 대기 중이던 동료 흥신원에게 철사를 넘겨주었다.

잠시 후 원래의 노송나무 아래로 달려온 상수는 가만히 핸드폰을 꺼내 음량을 조절했다. 이내 핸드폰이 울리면서, 열쇠를 다 깎아 놓았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하여, 금방 열쇠를 찾아 손에 쥐었다. 이제 만반의 준비는 끝난 셈이었다. 마치 강물에 낚시를 던져 놓은 기분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문을 따고 들어가서 화끈한 장면을 찍기만 하면 되는 터였다. 사내가 반항을 하는 정도야 전혀 대수로울 것이 없었다. 싸움이라면 이력이 날 대로 이력이 나 있는 상수였다. 핸드폰에서 소곤거리는 음성이 마치 귓속을 간지럽히는 것 같아서, 느낌이 영 이상했다. 철부지 불륜 패는 아닌 모양인지 뭔가 말이 길었다. 사내가 길게 말을 하고 나면, 여자가 또한 길게 읊조렸다. 자기들 딴에는 대단히 익살스러운지는 몰라도, 듣고 있는 상수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자꾸만 단조롭다는 느낌에 휩싸이다가 마침내, 상수는 과거의 상념에 젖어 들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경남의 통영이었다. 그가 아버지를 잃은 때는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제주도 근해에까지 출항하여 그물을 걷어올리던 중에 당한 해난 사고 때문이었다. 그 후로는 펑 뚫린 가슴으로, 어머니와 함께 보낸 나날들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기억되는 유년의 세월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의 잔영이 있을 뿐이었다. 아마 네댓 살이 되었을까.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꼭 오줌을 가리게 하는 어머니였다.
  "상수야 ! 오줌 누자. 쉬이이 쉬이이 ! 어딜 보노 ? 자, 어서 오줌 누어야지. 쉬이이 쉬이이 ! 말 안 들으면 때린다 ?"
  흡사 안개 자락 속에 휩쓸리는 바람결처럼 기억의 편린을 일깨우는 것은 아릿한 아픔이었다. 이따금 엉덩이가 아팠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상수에게 유년의 세월은 너무나 잔혹했다. 상수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잠수 사고 때문이었다. 이래저래 일찍 부모를 잃은 상수는 고교 시절까지를 이모 댁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독립하여 상경한 거였다. 가정 형편이 곤란한 학생들에게는 거의 공통적인 수학(修學)의 방법이 있었다. 다름 아닌, 입주식 가정 교사가 되어 학비를 조달하는 방법이었다.

서서히 태양의 고도가 높아지면서, 모텔 주위의 숲 속이 환히 밝아졌다. 바람이 불어올 적마다 솔숲이 뒤엉키면서 솔 향기가 사방으로 내리 깔리고 있었다. 상수는 핸드폰에서 새어 나오는 통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어느새 지쳐 버리고 말았다. 남의 사생활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정말이지 할 짓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아무리 남의 생활이 불건전하다고 할지라도 이를 엿보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으리라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잔뜩 심기가 불편한 판에, 나날이 정신적인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핸드폰의 전기 신호를 지켜보면서, 상수는 도저히 답답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근래에는 거의 손대지 않았던 담배를 꺼내서는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금세 구수한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면서 머리에 평온한 느낌이 들며 개운해졌다. 언덕 아래로 바라보이는 주차장에서는 연방 들어오는 차와 빠져나가는 차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어머, 철민 씨! 철민 씨가 이렇게 박력 있게 나올 줄은 정말 몰랐네 ? 조금 전까지 누나라고 깍듯이 받들더니, 그래 누나를 이렇게 발가벗겨도 돼, 응 ?"
  순간적으로 전신에 오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 상수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래, 네 년의 이름이 향숙이랬나 ? 어휴, 이름이 아깝다 아까워.'
  금새 핸드폰을 통해 여자의 야릇한 비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서서히 흥분에 휩싸이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아랫도리가 서서히 발기되고 있었다. 하지만, 상수는 이내 머리를 흔들며 앉았던 바위로부터 일어났다. 카메라를 챙겨 들고는 신발 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있었다.

복제한 열쇠를 자물쇠의 구멍에 꽂고는 우측으로 돌리니,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상수는 특수 부대 출신이었던 관계로 어떤 것이든 몸으로 때우는 데엔 자신이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곧바로 뒤엉킨 남녀를 향해 카메라의 플래시를 번쩍거리며 터뜨렸다. 폭우 속에 단검을 빼들고 장애물 지역을 통과할 때의 느낌그대로였다. 창졸간에 알몸으로 벌떡 일어난 남녀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세 번을 플래시를 터뜨린 다음에 상수는 전화기를 들려는 사내를 향해 발을 날렸다. 이외로 사내는 맥없이 거꾸러졌다. 비명을 질러대는 여인을 향해서는 사납게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여인의 목소리도 금세 잦아들었다.
상수는 먼저 둘의 옷을 뒤져 핸드폰을 압수했다. 그리고는, 인터폰의 선을 자른 다음, 급히 비상 계단을 타고 모텔을 빠져 나왔다. 모텔 주변의 숲 가장자리에 주차시켜 둔 차를 이용하여 급히 여주를 떠났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추적 차량이 있는지를 살펴보았지만 별 이상은 없었다.

  여주를 떠난 지 사흘이 지난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상수는 아침부터 사진을 꺼내 들고는 깊은 생각에 골똘히 젖어 있었다. 3장의 사진은 모두 여주의 모텔에서 촬영된 것들이었다. 하나같이 발가벗은 몸으로 사내와 여인이 뒤엉켜 있는 사진들이었다. 보면 볼수록 선정적인 사진이라서, 상수는 얼굴이 자꾸만 달아올랐다. 상수는 오른손으로는 사진을 들고, 왼손으로는 자신도 몰래 사타구니를 더듬고 있었다.
  '아하, 참말로 미치겠네. 내가 이 사진을 남호에게 넘기기만 하면, 천만 원이 바로 들어오는 거잖아 ? 그런데도 간단히 넘겨주고 싶지 않으니 이게 웬 일일까 ?'
  그는 도봉산이 지척으로 바라보이는 아파트의 거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문득 스물 일곱의 자신의 나이를 반추해 보았다. 텔레비전 위에는 성희와 나란히 찍은 얼굴 사진이 소형 액자 속에 들어 있었다. 액자 속의 성희를 바라보자마자, 그는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산다는 게 뭔지 ? 네가 그토록 나를 따르는데, 내 마음은 왜 자꾸만 엉뚱하게 흘러갈까 ? 왜 나는 너 때문에 괴로워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정말 !'

  상수가 넋을 놓고 있자니까, 석 달 전 수락산에서의 정경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성희의 성화에 할 수 없이, 장비를 갖추어 산을 올랐다. 일요일 아침이면 언제나 늦잠을 자는 버릇이 있던 그였다. 그랬기에 산을 올랐어도 영 눈이 제대로 열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능선길을 더듬어 가다가 북서 사면으로 휘어져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곳에 이르렀다. 서너 명이 누워서 뒹굴 수 있는 크기의 잔디밭이 나타났기에, 둘은 자연스레 주저앉았다. 9월 초순이라, 날씨는 더 없이 맑았고 햇살은 여전히 따가울 지경이었다.
  둘이 자리를 잡고 잔디밭에 앉아 다리를 쭉 편 채 대화를 나누었다. 그보다는 세 살 아래인 성희가 그를 향해 말했다.
  "상수 씨 ! 나는 상수 씨를 사귀면 사귈수록 어렵게 느껴져. 우리가 사귄 지도 벌써 2년째 아냐 ? 근데, 상수 씨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조차 모르겠단 말이야. 뭔 말인지도 몰라 ? 나를 단순히 말 상대로만 여기는지 아니면 이성으로 사귀는지조차 잘 모르겠단 말이야. 어쩌다가 내가 정체 불명의 교제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그는 가까운 거리에서 여인을 대할 때면 언제나 마음이 불안해졌다. 한 마디로 마음이 술렁거려, 안절부절못할 지경이었다. 상수의 마음은 점차 술 취한 듯 자꾸만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얗게 핀 억새꽃이 파도처럼 바람의 선율을 타고 휘감기기 시작했다. 그는 성희를 향해 뭔가 대꾸해 주고 싶었지만, 가슴만 저릴 뿐이었다.
  성희는 대기업체의 홍보실에 근무하는 전산 담당 여직원이었다. 대학에서 상수를 만나면서부터, 부쩍 상수를 따르다가 애정을 느끼게 된 터였다. 사귄 지는 2년 정도 되었지만, 연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성희는 두 달 전부터 부쩍 상수를 연인으로 삼고 싶어했다. 그냥 단순히 대화하고 여행하는 정도가 아닌, 사랑을 나누는 관계이고 싶었다. 그리하여, 두 달 전부터 수시로 등산을 하며 은근히 치근대며 몸을 밀착시키곤 했다. 그녀의 기억으로 그는 처음에는 상당히 잘 대해 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막상 둘의 얼굴이 가까워지려고만 하면, 그는 눈썹을 떨며 그녀를 밀어내곤 했다. 그녀는 처음 몇 번째는 그의 영혼이 너무나 순수하여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며 점차 거리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성희는 그녀 자신에게 혹시 무슨 문제가 있지는 않나 하고 생각해 보았다. 며칠간을 두고 그녀 자신의 행동을 면밀히 되새김질해 가며 점검해 보았다. '혹시 그녀의 우발적인 언행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는 않았나'하고 돌이켜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언행에 있어서, 그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요소는 없는지도 곰곰이 따져 보았다. 생각할수록 원인을 알 수 없었기에, 지친 마음으로 며칠간은 그를 만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간간이 그로부터 전화는 걸려 오곤 했다. 그렇게도 머리를 감싸고 생각에 잠겨 봤지만, 끝내 그녀는 원인을 알아낼 수 없었다. 원인이라도 알게 된다면, 대책이라도 세울 텐데 이도 저도 아니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잠시 과거의 상념에 잠겼던 성희는 이내 현실로 돌아와서,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 잔뜩 서린 정체 모를 긴장감을 본 순간에,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이게 무슨 영문일까 ? 왜 그가 그토록 얼굴 가득히 긴장한 빛을 감추지 못하는 걸까 ?
  그녀는 슬그머니 가슴 한편이 공허해지면서, 작은 설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아, 내가 사내를 앞에 두고 서러움을 느껴야 하다니 ? 내 가슴의 작은 감동 하나조차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는 나는 뭐란 말인가 ? 내가 뭐가 부족하여 설움을 다 느끼고 야단일까 ?'
  그녀는 깔고 앉은 잔디의 풀잎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잠시 깔고 앉은 잔디였건만, 풀잎은 바람결을 타고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파르르 떠는 풀잎의 진동으로부터도 섬세한 생명의 움직임이 느껴져 왔다.
  '대관절 이 사내가 뭐길래, 내가 이렇게 가슴을 졸이면서 그의 마음을 사려고 할까 ?'
  골똘히 생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성희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우발적인 척 가장을 하여, 왈칵 그의 가슴에 상체를 실으며 풀밭 위로 나뒹굴었다. 찰나간의 동작이었지만, 동작의 파장은 의외로 컸다. 답답한 신음을 두어 번 토해 내더니, 그는 안색이 핼쑥해지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성희야, 아무래도 속이 거북하고 너울거려서 안 되겠어. 우리 다음에 만나자. 머리가 온통 술렁거려서 도저히 견뎌 낼 수가 없어.'
  말을 마치자마자, 성희는 내버려 둔 채 그는 곧바로 하산해 버리고 말았다. 그 때 성희가 그에게 느꼈던 실망감과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산할 당시의 상수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그 날 이후로, 상수와 성희의 관계는 다소 서먹서먹해진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나빠진 것도 아니었다. 학과의 특성 때문인지, 상수는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여 애를 먹었다. 계속되는 무직 상태를 벗어나려고 뛰어든 곳이, 흥신소라는 곳이었다. 지금껏 반 년 세월을 뛰었지만, 절대로 오래 머물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흥신 업무란 것이 주로 남의 뒤를 캐는 것이어서, 언제나 마음이 편치 못했다. 흥신 업무를 하면서도 기회만 주어지면 주변을 더듬어 일자리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직업다운 직업을 말함이었다.
상수의 마음은 나날이 불안감에 휩싸여 흔들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유혹과 공갈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상수가 맡은 일은 주로 불륜 현장을 찾아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 상수의 자료가 제공되기만 하면, 위험하게 유지되던 가정이 곧바로 붕괴되어 버리곤 했다. 그러한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당장 그 일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그나마 밥을 굶지 않아도 되는 여건에 대해 고마워해야 할 입장이었던 터였다. 허나, 남의 가정을 붕괴시키는 대가로 삶을 영위한다고 생각하니, 영 마음이 떨떠름했다.

  상수는 다시 한 대의 담배를 갈아 물고는 창 밖의 도봉산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잠시만 혼자 앉아 있어도 불안하고 외로워지려는 성향이 있었다. 자란 곳이 바닷가였기에, 유년 시절에 한가로이 부모님의 얼굴을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개는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거나, 잠수질을 하러 바다에 나가 있곤 했다. 배를 타지 않는 날이면, 해변의 말목에 김발을 묶는 일로 한나절을 보내곤 했다.
  햇살이 있을 동안은 친구들과 정신 없이 어울려 놀곤 했다. 그러다가, 밥 짓는 저녁 연기가 이곳저곳에서 피어오를 무렵이면 상수는 외로움에 떨곤 했다. 이웃집에서는 부모들과 아이들이 어울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 까르르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먼 바다에 나간 아버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물질을 나선 어머니마저 늦게야 돌아오곤 했다. 커 가면서 안 일이지만, 어업 공판장에 들러 해산물을 팔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돌아오는 저녁 무렵의 바다는 언제나 물안개가 서려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유년기 때부터 피부를 휩쓸던 외로움으로 인해, 그는 유난히 외로움을 타곤 했다. 헌데, 향숙의 사진 속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본 순간이었다. 전신을 휩쓰는 강렬한 충격을 받아, 그는 한동안 몸을 떨었다.
  '아니, 이럴 수가 ? 사람의 영혼을 뒤흔들어 버릴 듯한 묘한 눈빛이 아닌가 ! 이렇게 심혼을 뒤흔드는 눈빛이 있었다니 ? 왜 그 날 나는 이러한 눈빛을 몰라 보았을까 ?'

  상수의 마음속으로는 번잡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기 시작했다. 일단은 향숙을 만나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향숙을 만나본 뒤에 마음을 정하고 싶었다. 향숙의 누드 사진 3장을 놓고 이처럼 혼란에 빠지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쌍안경을 들어 창 밖의 도봉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여인의 사진을 펼쳐 놓고는 넋을 잃곤 했다.
  '아, 이럴 게 아니라 전화를 해야 한다, 전화를 !'
  오후 두 시부터 끙끙거리다가, 겨우 다섯 시가 되어서야 여인과 통화를 했다. 그녀는 선뜻 만날 장소와 시간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는 미리 생각해 둔 대로, 도봉산 망월사(望月寺) 부근의 계곡을 약속 장소로 제시했다. 그리고, 일요일 오전 10시 정각을 향숙에게 약속 시간으로 제시를 하였다.

  마침내 일요일 오전의 도봉산 망월사 계곡이었다. 어디를 둘러보나, 수목으로 풍성한 도봉산이었다. 푸른 솔숲이 정상 주위의 사방으로 바다처럼 펼쳐져, 바람결에 나부끼는 곳. 하루 종일을 굶고 있을지라도 전혀 배고픔을 느끼지 못할 곳. 청정한 도봉산의 산세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되어, 계곡의 너럭바위에 누워 있을 때였다. 오전 10시를 5분쯤 남겨 둔 시점이었다. 사각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향숙이 나타났다.
  "시간 약속도 정확하군요. 원하는 대로 제가 나타났어요. 절 어쩔 건가요 ?"
  "흠, 당차게 나오실 줄 알았어요. 모든 것은 이 산을 내려갈 무렵에야 판단할 수 있지 않겠어요 ?"
  여인은 연분홍 등산용 잠바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40대 중반의 무르익은 아름다움이 내비치는 여인이었다. 아무리 봐도 여인의 미모는 확실히 빼어난 바가 있었다. 상수에게는 여태껏 그녀만큼 아름다운 여인을 본 기억이 없었다.

  향숙은 약속 장소에 도달할 때까지 온갖 불안에 시달렸다. 여주의 모텔에서 핸드폰을 빼앗기면서부터 정신적으로 도저히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느낌으로 볼 때는 분명 남편이 사주한 인물 같았다. 하지만, 진행되는 일의 흐름을 볼 때는 그게 아닌 듯도 했다. 그랬기에, 향숙은 내심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관절 사진을 촬영해 간 사내의 정체가 뭔가하고 무척 궁금해졌다.
  마침내 문제의 사내를 마주한 순간이었다. 사내는 그녀 자신을 뚫어져라 하고 바라만 볼 뿐. 여간해서는 쉽게 본론으로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향숙은 사내의 외관을 응시하며, 사내의 무게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의외의 일인걸 ? 마치 영화의 미청년(美靑年) 주인공처럼 생겨, 여자깨나 울리겠는걸 ? 생판 무식한 날강도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 나이도 20대 후반으로 보이고, 아무래도 이런 일을 할 사람은 아닌데…….'
  이미 향숙은 사내를 만나러 올 때, 모든 것을 각오하고 올라온 터였다. 사내가 어떤 것을 요구하더라도 들어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설사 사내가 그녀의 목숨을 원한다고 할지라도, 죽는 시늉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이미 칼 자루는 상대에게 쥐어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선 일단 위기를 빨리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괜히 시간을 끌어 수사 기관에서 알게 된다면, 금방 소문이 날 게 뻔했다. 향숙의 생각은 일단은 사내를 만난 다음에, 사내의 수준에 맞게 대처해 나갈 작정이었다.

  특수 부대 출신인 상수는 일부러 눈에 살기를 실어, 여인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기선을 제압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해 왔기 때문이었다. 상수는 다른 잡다한 말을 생략한 채, 서서히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여인도 만만찮은 눈빛으로 상수를 노려보며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흥, 이 놈의 계집애가 상당히 당돌한데 ? 네가 얼마나 도도한지 어디 한 번 볼거나 ?'
  향숙은 향숙대로 제 자리에 우뚝 선 채 다가오는 사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를 호락호락히 보다가는 재미없을 걸.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고작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그래 ?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 ?'
  둘 사이의 거리가 두 걸음쯤 떨어져 있을 때였다. 잠시 상수는 발걸음을 멈추며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더니, 내처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겨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게, 여인과 상수의 몸이 하나로 밀착된 순간이었다. 상수는 팔을 돌려 여인을 포옹하여, 서서히 힘을 주기 시작했다. 마치 여인의 갈비뼈를 온통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듯. 점점 죄어드는 사내의 힘을 여인으로서는 견뎌 내기가 버거웠다. 이윽고 여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여인이 힘들어하는 눈치를 보이자 상수는 잠시 팔을 풀고는 여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상수는 다시 가슴이 찔끔거렸다.
  '아니, 이 여자의 눈빛이 어쩜 내 어머니의 눈빛과 닮았을까 ? 아무래도 이건 말도 안 돼.'
  상수는 다시 팔을 돌려 여인을 포옹하기 시작했다. 여인의 갈비뼈가 우두둑 소리를 낼 정도로 강하게 상수는 여인의 상체를 죄었다. 여인은 고함도 지르지 못한 채, 또다시 힘든 표정을 지으며 헐떡거렸다. 여인의 콧잔등이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상수는 서서히 팔을 풀고는 여인의 눈동자를 재차 들여다보았다.
  향숙은 가슴에 찬바람이 일면서, 사내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이런 남자가 다 있어 ?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할 일이지 이게 무슨 짓이냐구 ?'
  잠시 팔을 풀었던 사내가 다시 여인을 포옹하려고 했다. 여인은 마침내 견디지 못하여,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기, 잠깐만요. 시키는 대로 뭐든 다 할 테니 제발 이러지 마세요 !"
  이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상수는 갑자기 험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이 여자가 사람을 어떻게 보고 지랄이야 ? 뭐라구 ?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구 ? 좋아, 그럼 윗도리만 당장 벗어 봐 !"
  향숙은 불안에 떨면서도 금세 옷을 벗어서, 상반신을 벌겋게 드러내었다. 상수에겐 아직도 처녀들의 몸매와 견주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몸매로 비쳤다. 상수는 자신도 몰래 경이로움에 젖어, 꿀꺽 한 모금의 침을 삼켰다. 문제는 이 때부터였다. 느닷없이 상수의 눈시울이 젖어들기 시작한 거였다. 여인의 벌거벗은 살색을 대하자마자, 상수에겐 유년기의 고향 해변의 낙조가 떠올랐던 터였다. 왠지 모르게 상수의 콧잔등이 시큰거리며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석양이 질 때면, 자줏빛과 선홍색으로 어우러진 저녁놀이 서쪽 하늘을 온통 불사르곤 했었다. 상수의 눈에 비친 향숙의 살결은 황혼에 나부끼는 빛살처럼 느껴졌다. 솔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향숙의 상체엔 빛살 무늬가 사방으로 흩날리곤 했다. 맑은 샘물이 흘러내리듯, 연방 솔숲을 뚫고 청아한 솔바람이 파도처럼 밀려들곤 했다.

  향숙은 돌연한 사내의 행동 변화에 한기를 느끼며 서서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혹시 나의 알몸을 보자마자 돌아 버린 것은 아닐까 ? 미친놈한테 걸리면 약도 없다는데, 이를 어쩌나 ? 제발 내가 무사히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향숙은 시종일관 상수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기색이 달라진다면, 잠시 후의 일을 예측하기 어려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타는 가슴으로 숨을 죽인 채, 상수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상수의 눈에는 이제 향숙의 상반신은 타오르는 석양의 낙조였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포근하고 따사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 같이 아늑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솔잎이 바람결에 나부낄 적마다, 피부 위에 새겨지는 숲 그늘이 현란하기만 했다. 솔잎이 자꾸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여인의 상반신의 숲 그늘은 현란하게 파동져 흘렀다. 쾌청한 오전의 날씨라, 햇살은 눈부실 정도로 맑기만 했다. 여인의 살갗에서 숲 그늘이 파동칠 적마다 상수는 유년기의 통영 바다를 떠올리곤 했다.

  향숙의 몸은 자신도 몰래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연하의 사내가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그녀의 몸매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의 눈길이 지나는 곳마다 금세 불길이 타오르면서 살갗이 익어 버릴 것만 같았다. 슬슬 피부가 가려워지려고도 했다. 여인의 마음속에는 점차 가렵다는 생각으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가렵다고 해서 마음대로 긁어 버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에 긁기 위해 손을 가져간다면, 사내의 손길이 곧바로 닿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향숙은 자신도 몰래 자꾸만 입술이 바짝바짝 타올랐다.
  '왜 확 까놓고 요구 조건을 말하지 않고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는 걸까 ? 이게 아주 완연한 변태이면 어떻게 하지 ? 아, 생각할수록 보통 일이 아니라서 미쳐 죽을 지경이군.'

  상수는 향숙의 주변을 세 차례를 더 돌고 난 다음에 우뚝 섰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에 지친 기색이 어렴풋이 서려 있었다. 그는 여인의 벌겋게 드러난 상체를 바라보며 한동안 석상이 된 듯 말이 없었다. 가슴의 한 귀퉁이로부터 시린 유년의 상념이 구름장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문득 어머니의 뼛가루를 뿌리던 통영 앞 바다의 석양이 떠올랐다. 혈육이라고는 상수밖에 없던 부모님이었다. 이모부의 동력선의 뱃머리에 유골함을 세워 둔 채, 상수는 청정한 남해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로는 시원하게 펼쳐진 하늘, 발 아래로는 파랗게 굽이치는 바다. 석양 무렵이라, 서쪽 하늘은 선홍빛과 자줏빛의 노을로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연방 쉴새없이 나부끼는 바닷바람에 휘말려 수면에는 서서히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상수는 동력선이 놓여 있는 바다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통영 앞 바다의 미륵도 남쪽의 오곡도 주변의 해역이었다. 서쪽 수평선 위로는 두마도가 자줏빛의 형상으로 쉴새없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곤 했다. 남쪽 수평선 끝자락에는 아스라이 떨어진 국도가 휩쓸리는 바람결을 타고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비진도가 아름다운 초록빛으로 드러누워 해상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상수는 언제든 바다에만 서면 마음이 그럴 수 없이 아늑해지곤 했다. 이윽고, 상수는 유골함을 열고는 어머니의 유분(釉紛)을 바닷바람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상수는 잠시 고개를 돌려 이모부를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의 친숙한 교분 때문이었을까, 슬픔에 잠긴 모습으로 잠자코 술잔만을 기울이고 있었다.
  '휙휙'거리며 바닷바람이 기세를 올리다가도, 슬그머니 물러서서는 뼛가루가 휘날리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통통거리는 발동선의 엔진음이 수시로 은빛 파도처럼 가슴을 적시며 밀려들곤 했다. 상수는 가능한 한 천천히 뼛가루를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그러면서, 자신도 몰래 바다를 향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이제 엄마를 어디서 찾죠 ? 이렇게 내 손으로 엄마의 재를 뿌리게 되리라고는 ……. 혹시 저보다 아버지가 더 보고싶었던 건 아니죠 ? 설사 그랬을지라도 엄마를 이해해요. 이제 엄마는 더 이상은 외롭지 않겠군요. 하지만, 세상에 홀로 남은 저는 어떡하면 좋죠 ?"
  상수는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유분을 멀리멀리 허공으로 날려보냈다. 상수가 시계를 보니, 오후 6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이제 바다는 저녁 노을에 휘감겨, 사면의 바다가 선홍빛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따금씩 갈매기가 활갯짓을 할 때마다 바다의 수면은 잠깐씩 하얗게 배를 드러내곤 했다.
  마침내 마지막으로 유분을 바닷바람에 털어놓을 때였다. 선홍빛으로 작렬하는 태양이 수평선에 떠서 마지막의 열기를 실어 보내고 있었다. 바다는 수천 수만 마리의 물고기 떼처럼 금빛 은빛으로 파드득거리기 시작했다. 하늘과 수면을 뒤덮은 장엄한 저녁 노을로 인해, 온 바다가 불붙는 듯했다. 상수는 말할 수 없는 장엄한 분위기에 젖어,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잠시 졸음에 잠겼을 때였다. 창졸간에 생시인 듯이 어머니의 목소리가 맑은 바람결처럼 살며시 그의 귓전을 적셔 왔다.
  "얘야, 아무리 힘들 때라도, 통영 바다를 잊어선 안 돼. 외롭거나 힘들 때면 언제든지 바다로 와, 응 ? 언제나 널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요, 엄마 ! 이제는 엄마를 놓아 드릴게요. 그토록 좋아하던 통영 바다의 바람 속으로. 이제 엄마와의 추억이 통영 바다의 바람이 될 때까지만 엄마를 기억할게요. 안녕 !"
  여태껏 고요에 잠겨 있던 바다는 서서히 황금빛 물고기 비늘처럼 파드득거리며 치솟기 시작했다. 기관실을 들여다봤을 땐, 이모부는 술기운에 젖어 나른한 신색(身色)으로 수평선만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문득 석양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찰나간에 어머니의 미소짓는 얼굴이 잠시 환영처럼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소년은 자신도 몰래 불타는 서녘 하늘을 향해 마냥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가 바닷바람이 얼굴에 차츰 부드럽게 휘감기면서부터였다. 가슴에 구멍이 펑 뚫리는 기분이 들며, 서서히 눈시울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향숙의 벌겋게 드러난 상반신에서 나부끼는 빛살에 취해 잠시 상념에 잠겼던 상수였다. 상수는 상념에서 깨어나자마자 천천히 시선을 옮겨 여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여인은 일체의 세상사로부터 초연한 듯, 시선은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는 자신을 어떻게 다루더라도 초월하겠다는 결기마저 보이는 듯했다.
  상수는 잠시 현실로 되돌아와 여인의 앞에 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떠올렸다.
  '왜 나는 여인의 상반신에서 나부끼는 빛살로부터 유년기의 석양을 떠올렸을까 ? 그만큼 이 여인이 순수해 보였다는 말인가 ? 바람 피우는 여인이 순수해 보였다구 ? 이 무슨 모순 같은 생각일까 ?'
  여인의 상반신에서 남실거리던 빛살로부터 유년기의 석양을 떠올린 뒤부터였다. 오늘날까지 가슴속의 한이 되었던 어머니를 잃었던 설움이 새롭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왠지 불륜의 여인보다 자신의 행동이 비교할 나위 없이 비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유년기의 처절할 정도의 순수함은 다 어디에다 내팽개치고 이 모양이 되었을까 ? 어쩜 이 여인은 내게 순수성을 일깨우기 위해 형체를 드러낸 대자연의 스승일지도 모르잖는가 ? 아, 이제라도 좀 제대로 살기로 하자. 사지가 멀쩡한 놈이 이게 무슨 짓거리냐구 ?'
  어느새 상수의 눈시울을 타고 서서히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향숙 씨 ! 제가 잘못했어요. 옷을 입으세요."
  상수는 향숙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이내 등을 돌려 섰다. 여인은 더욱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된 채,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에, 여인은 정색을 한 얼굴로 상수에게 물었다.
  "아저씨 ! 이제 피가 말라붙는 느낌이에요. 제발 요구 조건이 있으면, 좀 털어놓고 말해 주세요. 왜 자꾸 뜸을 들이고 그러세요, 네 ?"
  상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향숙을 향해 말했다.
  "향숙 씨 ! 제가 잘못했다고 말했잖아요 ? 이제 더 이상 뒤도 돌아보지 마시고, 곧장 댁으로 돌아가세요. 원래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댁의 불륜 현장을 촬영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거든요. 사진만 넘겨주면 사례금을 받을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굳이 댁과 만나기로 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어요. 그 이유는 부끄러워서 차마 밝힐 수 없어요. 하여간 내가 댁의 벌거벗은 상반신을 본 순간에 심경의 변화가 생겼어요. 오늘 이후부터는 남의 허점을 찾아다니는 비열한 짓은 안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러니,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어서 가세요."
  헌데, 바로 이 때였다. 향숙이 느닷없이 상수의 두 손을 맞잡은 거였다. 그러면서, 향숙은 상수를 향해 말했다.
  "아,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요 ? 이렇게 가슴이 마구 뒤설렐 수가 없군요. 제 얘기를 한 번만 들어주세요, 네 ?"

  여인의 제안대로 상수는 너럭바위 위에서 마주 앉았다. 호젓한 산 속이라, 하루 종일을 지내더라도 등산객 하나 만날 수 없었다.
  "상수 씨 ! 댁이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정도(正道)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지 궁금하고도 놀라워요. 그 계기가 뭔지 좀 들려주실래요 ? 혹시 제게도 힘이 될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상수는 여인의 얼굴을 요모조모로 뜯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미색이 흘러 넘치는 요염한 얼굴이었다. 외관상으로 볼진대, 온몸으로 바람기가 넘쳐흐르는 얼굴형이었다. 그런데, 진지하게 묻는 의도가 심상치 않았다. 상수는 잠시 땅바닥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른 뒤였다. 그는 비교적 소상하게 유년기의 통영 바다와 석양에 관해 그녀에게 얘기해 주었다. 여인은 끝까지 듣고 있더니, 물기에 젖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가만히 입을 열었다.
  "역시 그런 일이 있었군요. 무척 가슴 아팠겠어요. 앞으로 올바른 삶을 사시겠다니, 무엇보다도 축하 드려요. 제 얘기도 좀 들어 주실래요 ?"
  "네, 원하신다면 기꺼이."

  여인은 남편의 바람기를 견디다 못해, 의도적으로 남자를 찾기 시작한 거였다. 처음 한두 번은 재미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횟수를 거듭할수록 헤어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남편이 눈치를 챈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
  "마치 스키를 타고 절벽 아래로 미끄러져 내리는 기분이에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는 상태가 되고 만 것 같아요. 저도 상수 씨처럼 헤어나고는 싶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향숙 씨 ! 제가 도와 드릴 방법은 없으세요 ?"
  "저를 도와주시겠다니 고마워요. 우선은 제 스스로 노력해 볼게요. 오늘부터 집에 돌아가면, 오로지 가사에만 전념하도록 노력하겠어요. 정 견디기 어려울 때에는 그림이나 서예 등으로 정서를 순화시키도록 하겠어요. 오늘 이처럼 제게 변화의 동기를 부여해 준 상수 씨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이제 당신은 저의 스승이에요."
  어느새 산그늘이 길다랗게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상수와 여인은 각오에 찬 눈빛으로 천천히 오솔길을 함께 내려왔다. 이윽고 산 아래에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된 거였다.
  여인은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상수도 입술을 깨물며 말없이 여인의 손을 잡았다. 작별을 하는 마당에, 상수는 여인을 향해 진심으로 말했다.
  "절대로 마음이 약해지시면 안 돼요. 부디 좋은 결실이 있기를 빌게요."
  "상수 씨, 정말 고마웠어요. 상수 씨께도 많은 행운을 빌게요, 안녕 !"
  마침 도착한 좌석버스에 여인이 오르자, 상수는 크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여인을 태운 버스가 시야에서 아스라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음 정류장까지 걸어가면서 자신의 각오를 재차 굳건히 다지고 싶었다. 당장 무엇을 해서 생계를 연명해야 할지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겠는데, 경제 한파 중이라 막막하기만 했다. 길거리를 걷다가 벽보를 보니, '영수 학원 강사 초빙'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래, 학원 강사라 ! 학원 강사라면 교원 자격증이 없어도 가능하지 않은가 ? 비록 육체적인 노력이 많이 드는 직장이라곤 하지만, 떳떳한 직업이 아닌가 ?'
  그는 당장 벽보의 전화번호 쪽지를 떼어 호주머니에 넣고는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깨어난 저녁 바람이 '윙윙'거리며 골목길을 사납게 휩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