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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벽

                                                                                                                    손 정 모

  연이어 섬광이 하늘을 갈랐다. 마치 벼랑을 일시에 허물어뜨리기라도 할 듯했다. 또다시 콰르릉거리며 천둥소리가 섬의 전역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폭우로 쏟아지는 빗방울은 완연한 장대비의 전형이었다. '휙휙'거리는 광풍이 일 때마다 물안개가 이빨을 하얗게 드러내며, 허공에서 굽이치고 있었다.
  진수는 절벽 하단에 커다랗게 드러난 동굴의 입구를 아까부터 바라보며 눈빛을 빛내었다. 그는 쉴새없이 쏟아지는 빗방울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눈빛은 잔뜩 충혈이 된 채, 은은히 살기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그는 검정 티 차림으로 나무를 움켜쥔 채, 몸을 숙여 동굴을 내려다보았다.
  한낮이건만 물안개에 휘감겨 좀처럼 동굴의 입구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그는 한층 더 눈빛을 빛내며 자신도 몰래 뇌까렸다.
  '이건 완전히 뜻밖인 걸. 밤새 그렇게도 야단스러웠던 굉음의 실체가 뭐란 말이야? 분명 심상찮은 무슨 일이 생겼을 텐데?'
  그는 폭우에도 아랑곳없이 미끄러운 절벽의 경사면을 조심스레 타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밤에 움막에서 들었던 소리의 실체를 떠올리며 상념에 잠겼다.

  지난밤 11시 무렵의 일이었다. 진수는 움막에서 잠들기 위해, 행장을 수습하고는 막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눈이 감길락말락할 무렵이었다. 느닷없이 '콰당' 소리를 내며 뭔가 절벽에 부딪히는 듯한 강렬한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그러면서 밤 내내 파도가 길길이 치솟아 절벽을 치는 듯한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깊은 밤, 호젓한 서해상의 무인도에서 그는 잠시 갈등에 휩싸였다. 소리의 발원지를 더듬어 나가 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잠시 궁리해 보았다.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냥 계속 잠들고 싶었다. 밤이 주는 으스스한 느낌에 덧붙여, 자신의 심사가 하도 복잡했기 때문이다.
 
  벼랑 아래쪽으로 '용굴'이란 이름으로 뚫린 동굴은 전형적인 해식(海蝕) 동굴이었다. 동굴은 유람선 두 척이 나란히 드나들 만한 높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었다. 너무나 세찬 폭우라, 도무지 눈앞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30대 후반의, 훤칠한 키에 몸매가 잘 다듬어진, 미모가 수려한 진수였다. 그는 동굴 입구에 자욱하게 드리워진 물안개를 헤치며, 자꾸만 벼랑 기슭으로 타 내려갔다. 아마도 십여 분쯤 가파른 절벽을 타며, 그렇게 벼랑의 발치에 이르렀을 때였다.
  음습한 물안개가 더욱 짙게 끼이면서, 시야가 아까보다도 더욱 더 흐릿해져 버렸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기만 할 뿐. 좀체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점점 짙어지는 안개 속을 향해, 돌멩이를 주워 날렸다.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혼란스러운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보려는 몸짓이기도 했다. 그 때 의식의 변두리로부터 과거의 상념이 슬그머니 밀려들었다.

  "아니, 진수 씨! 도대체 당신이 인간이야? 십여 년을 함께 부부로 살아왔지만, 도저히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렇게도 자신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가장이며 사회인이야? 어이구, 이젠 당신을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상해 미쳐 버리겠어."
  두 달 전의 사고가 터졌을 때, 아내로부터 혹독한 말을 듣게 된 진수였다. 그 때, 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하기만 했다. 그는 왜 자신의 내재된 심성을 조절할 수 없는가하여 부글부글 속이 끓어올랐다.
  아내로부터 가혹한 말을 들은 순간에 그는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이 잠시 집을 나섰다. 이제껏 그를 존경하며 사랑해 오던 아내였다. 그녀로부터의 혹독한 말을 들었으니 머리가 돌아 버릴 만도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아내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해 왔던 것처럼 그 역시도 아내를 지극히도 존경해 왔다. 그랬기에, 아내가 그에게 독설을 퍼부은 것에 대해선 충분한 사유가 있었던 터였다. 그는 그러한 아내의 독설조차도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연유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파트 뒤쪽의 북악산에 올라, 자신의 참담한 마음을 추슬러 보았다. 국민대 뒤쪽으로 뚫린 등산로를 찾아 들었을 때였다. 산을 오르는, 몸매가 근육으로 잘 다듬어진 두 청년들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자식들, 제법 운동을 했구먼. 오른쪽 놈을 제압하려면 먼저 갈빗대를 발로 차서 날려 버리면 되겠군. 왼쪽 놈은 뛰어 앞차기로 턱을 날린 다음에 뒤돌려 차기로 마무리지으면 되겠네. 근데, 자식들이 할 일이 없지. 왜 다들 근육을 키워 나의 비위를 거슬리느냐 말이야.'
  진수는 산을 오르면서도 주변에서 마주치는 사내들은 모두 적으로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눈을 부라렸다. 그가 주위의 사내들에 갖는 내재된 적대감과는 달리, 사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온화하기만 했다.
  '다들

 산에만 오면 가슴이 쩍 벌어지나 봐.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다들 바보 같은 미소를 지을 수는 없을 거야.'
  그는 북악산의 바위에 올라, 자꾸만 끓어오르는 무분별한 적대감을 삭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는 북악산에서도 끝내 울분을 삭이지 못해, 절해고도를 찾아 나선 거였다.

  진수는 가파른 절벽의 경사면에 엎드려, 바짝 고개를 내밀어 동굴의 입구를 들여다보았다. 흘낏 시계를 들여다보니, 정오를 막 지나고 있었다. 한낮인데도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두움으로 뒤덮여, 동굴의 입구를 제대로 관찰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심장의 박동이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그는 습관성인 듯,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눈빛을 빛내며 바다의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이 때였다. 느닷없이 거대한 철 덩이가 부딪히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쾅! 콰콰쾅!!'
  진수는 흠칫 놀라 청각을 곤두세우며 다시 동굴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짙게 엉겨 붙어 있던 안개 자락이 섬의 북서쪽으로 비껴 나가고 있었다. 바로 이 때, 그의 눈에는 거대한 괴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놀란 눈으로 재차 괴물체를 살펴보았다. 200 톤 가량의 소형 동력선이 동굴의 입구를 막은 채, 난파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선체는 상당 부분이 우그러들었으며, 수면과 20도 각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선체는 밀려드는 파도에 선회를 하다가 조금 전에 암초 위에 안착을 한 모양이었다. 그랬기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라앉지도 않았다.
  그는 점차 선박이 난파되어 있는 쪽에 가까운 절벽 쪽으로 이동했다. 여전히 강풍은 멈추질 않았고, 폭우는 매달린 나뭇잎을 찢어 버릴 듯이 기승을 부렸다. 아마도 십여 분 동안은 정성을 기울였으리라. 그는 가까스로 난파선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의 절벽 하단으로 내려섰다.
                    
  난파선을 바라보자마자 참담한 심사에 휩싸이며 진수는 과거의 상념에 잠겼다.
  지난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지하철 종각역을 지나 종로3가역을 향하고 있을 때였다. 전철 안에서 한동안 졸았던 모양이었다. 잠결에 들리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놀라 눈을 떴을 때였다. 40대 중반의 사내가 냅다 고함을 질러대며, 노인의 뺨을 마구 후려치고 있었다. 사내는 씨름 선수와도 같은 거구의 체격을 갖추고 있었다. 노인은 일흔 중반쯤으로 보였고, 체격은 한없이 왜소하게 보였다. 처음에는 사내가 뺨을 두어 대 치다가 말려나 싶었다. 하지만, 악을 써 가며 손을 휘두르는 품이 예사롭지 않았다.
  노인의 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니까, 말리지 않으면 절명할 듯이 위태로웠다. 급기야 여기저기서, 청년들이 일어나 사내를 말리려고 나섰다. 근데, 핏발 선 눈의 사내는 피식 웃음을 웃더니, 닥치는 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폭력은 너무나 위력적이어서, 벌써 서너 명의 청년들이 입술에 선혈을 쏟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진수는 사내에게 떠밀리던 사람들을 피하려고 자리에서 잠시 일어섰다. 헌데, 이러한 동작이 사내의 눈엔 싸움을 말리려고 일어서는 행동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사내는 순식간에 두 손으로 진수의 목을 꽉 죄며 뒤로 밀어붙였다. 진수는 졸지에 당한 기습이라, 시급히 빠져 나오고 싶었다. 사내와 접촉한 순간에 도저히 힘으로는 상대를 당할 수 없음을 느꼈다. 그리하여, 극한 상황에서 오른손을 꼿꼿이 편 채, 사내의 두 눈을 찔러 버렸다. 악에 받쳐 찔러 버린 터라, 순식간에 사내의 각막이 찢겨 피가 흘러 내렸다. 응급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실명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내는 격분하여, 몸을 뒤흔들며 경찰을 불러달라고 야단이었다.
  때마침 차내를 지나던 역무원의 신고로 사내와 진수는 곧바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싸움의 발단이 된 노인은 어느 틈엔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둘러싼 구경꾼들도 모두 등을 돌리고는 아무도 상황에 대한 증언을 하려 들지 않았다. 진수가 다친 곳은 아무 데도 없는 반면에, 사내는 줄줄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경찰은 단연코 진수의 말에 코방귀를 뀌며, 진수를 가해자로 취급했다. 이에 덩달아 사내도 자신은 일체 진수를 공격한 적이 없다고 발뺌을 했다. 경찰차로 실려간 사내가 안과에서 발급받아 온 진단서에는 4주 진단이 내려져 있었다.
  진수는 곧바로 구속되었다. 사내는 진단서를 제출하고 씽긋 미소까지 짓고는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떠나 버렸다. 떠나기 전의 사내는 진수를 향해 이빨을 하얗게 드러내며, 독설을 토해 냈다.
  "이 양반아, 내가 눈을 다쳐 평생 폐인이 될지도 몰라. 당신은 나를 평생 먹여 살려야 되는 거라구, 알겠어? 우린 앞으로 자주 만날 테니까, 서로 인상 쓰지 말자구. 이제 당신은 날 위해 모든 재산을 처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야."
  유치장과 구치소를 거쳐, 두 달만에 재판을 받아 1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전과 없는 초범인 점이 반영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은 터였다. 하지만, 그 동안의 정신적인 피해를 보상받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진수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기간 동안에, 그는 직장에서 면직되었다. 또한 그가 귀가한 뒤엔  그의 아내마저 이혼을 요구하여, 진수의 곁을 떠나 버렸다.
   
  진수는 일렁거리는 난파선을 향해 쌍안경을 들이밀다가, 땅바닥에서 일어나 나무를 움켜쥐었다.
  이 때였다. 폭우에 휩싸여, 연거푸 뇌성이 울어댔다. 연이어 세 번째로 강한 벼락이 섬을 내리쳤을 때였다. 지축을 뒤흔들 듯이 요란한 굉음을 쏟아내며 섬 전체가 마구 뒤흔들렸다. 섬의 곳곳에서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진수가 밟고 선 절벽에서도 마구 자갈이 허공으로 흩날리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왠지 섬의 어디엔가는 허리가 싹둑 잘려져 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하도 집요하게 내리퍼붓는 폭우라, 더 이상은 바깥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계속 비를 맞다간 폐렴이 걸리기 십상이었다. 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얼굴의 물방울을 내리훑고 있었다.  상체를 일으켜 세운 뒤에도 쉽게 발길을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오랜 동안 엎드려 있었기에, 전신의 근육에 마비 현상이 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몇 차례 몸을 뒤튼 연후에야, 그는 난파선으로부터 발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왠지 자꾸만 그의 의식계를 붙드는 듯한 묘한 부추김 같은 것이 있었다. 그는 짜증스러움으로 변할 듯한 감정을 추스르며, 다시 한 번 머리를 되돌려 보았다.
  헌데 놀라운 장면이 목격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선박의 우측 측면에 사람의 형상을 닮은 물체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는 놀라 눈을 휘둥그레 치뜨며 다시 선박을 향해 몸을 돌렸다.
  
  진수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예감이 든 것은 오래 전부터였다. 삼 년 전의 봄철의 일이었다. 경기도 강화군 석모도의 보문사를 오르던 길이었다. 절 뒷산의 눈썹 바위 아래에 새겨진 마애 석불을 향해 계단을 오를 때였다. 먼저 석불에 들렀다가 내려오던 중에, 40대 중반의 두 사내와 우연히도 눈길이 마주쳤다. 사람을 비웃는 듯한, 사내들의 불량스러운 눈길이 진수의 비위를 슬며시 건드렸다. 진수는 처음엔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올라, 그냥 참고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동행 친구의 만류를 뿌리치고는 사내들 둘과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격분을 못 참아, 사내 중 한 명을 두들겨 패서 폭행죄로 입건되었다.
  사흘에 걸쳐서 피해자를 찾아다니며 합의를 받아 내어, 가까스로 처벌을 면한 적이 있었다. 경찰에서는 한 번만 더 걸려들면, 처벌을 받을 거라며 단단히 겁을 주었다.
  그의 아내는 그에게 말했다.
  "이제 한 번만 더 수사 기관에 붙들려 가 봐. 그 날이 바로 우리의 이혼 날짜가 될 거야, 알았어?"
  기가 찼지만, 그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떡거려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그의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젠장맞을 이게 무슨 고행이냐? 날마다 눈만 뜨면 나의 가슴을 옥죄어 드는 분노심과 적개심을 극복해야 하다니? 왜 다른 사람들은 그냥 웃어넘길 일을 나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이건 필시 나의 두뇌의 구조가 잘못되었던지 무슨 일이 있을 거야.'
  진수는 수시로 두 달 전의 일에 대해 깊은 고뇌에 잠겼다.
  '왜 하필이면 그 자식이 나의 목을 죄었을까? 다른 길이 있었을 텐데도 굳이 내가 그 놈의 눈을 왜 찔렀을까? 설사 그런 일이 있어도 그렇지. 아내까지 덩달아 이혼을 요구할 건 뭐란 말야?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내가 바로 그 꼴이군.'
       
  섬광이 줄줄이 허공으로 흩어져 내리더니만, 우레 소리가 천지를 뒤엎을 듯 귓전을 후려쳤다. 진수는 귀가 먹먹하여 한동안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속옷까지 파고든 빗물로 인해, 넓적다리 부위가 슬슬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넓적다리가 가려워지면서부터 문득 그가 밟고 선 무인도의 선착장 어귀의 정경이 떠올랐다. 선착장이라 이름 붙이기도 뭐한 곳이었지만, 거기만이 배를 댈 수 있는 지형이었다. 다른 곳은 삼면이 험난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선착장은 섬의 남쪽으로 열린 소쿠리형의 지형이었다. 반면에, 해식 동굴은 섬의 북서쪽 절벽 아래에,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바람결에 빗방울들이 우박처럼 진수의 전신에 내리꽂히곤 했다. 진수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폭우에 노출된 터라, 추위로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이제 심신 양면으로 지쳐 있었다. 그랬기에, 이제 그는 만사를 제쳐 두고 쉬고 싶었다. 그는 난파선에 매달린 사람의 형상마저도 뒷전으로 하고, 서둘러 그의 움막을 향해 달려갔다. 아침까지 머물렀던 움막을 찾아, 이십여 분을 달려갔을 때였다. 진수는 돌연한 변화에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니, 언제 산사태가 이다지도 크게 일어났을까?'
  그가 머물렀던 움막은 산사태로 뒤덮여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절벽을 찾지 않았더라면, 고스란히 흙더미에 묻힐 뻔했네. 그래도 못난 나를 조상이 보살펴 주셨어. 어쩜 이런 일도 다 있을까? 피곤해 죽겠는데 이제 어디로 가나? 옳아! 선착장 부근의 젊은 여인의 움막에나 가 봐야지.'
  섬의 남동 방향의 선착장 부근을 향해, 진수는 다시 달려 내려갔다. 이십여 분을 달려 내려가자, 이틀 전에 낚시를 하러 대절선으로 섬을 찾은 여인의 움막이 눈에 띄었다. 진수는 반가운 마음으로 여인의 움막으로 내달렸다.
  마침내 여인의 움막에 도착하자마자 진수는 냅다 고함을 질렀다.
  "보소! 아주머니! 추워 죽겠는데, 잠시 들어가도 되겠어요?"
  "어머나, 살아 계셨군요. 저는 댁이 흙더미에 묻혀 버린 줄 알았어요. 어쩜 이렇게 반가운지 모르겠군요. 그런데, 몸은 왜 이렇게 많이 젖었죠? 추울 텐데 어서 들어오세요."
  30대 중반의 여인은 늘씬한 몸매에 젖무덤이 유난히 돋보이는 골격이었다. 얼굴도 그만하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미모였다.
  여인은 마치 연인이라도 되는 듯이 진수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세상에, 이렇게 온몸이 다 젖도록 밖에서 무엇을 하셨어요? 빨리 아무 옷이나 갈아입으시죠. 여기에 체육복이 있으니, 갈아입고 저 방에서 좀 쉬세요."
  진수는 여인의 환대에 잠시 어리둥절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추슬러 체육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여인에게 감사의 표시로 목례를 한 다음에, 건넌방으로 들어섰다. '훅'하고 곰팡이 냄새가 후각을 찔러 왔다. 다음은 어떻게 되더라도, 일단은 휴식이 필요한 터였다. 진수는 그대로 방바닥에 쓰러져 눈을 감자마자 곤히 잠이 들었다.

  여인은 진수가 잠든 기색을 읽고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눈시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녀는 가만히 담배를 꺼내 들고는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금세 파르스름한 담배 연기가 허공을 날며 퍼져 흘렀다.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입술을 두어 번 오므렸다가 둥글게 열더니 연기를 내뿜었다. 그녀는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자신도 몰래 중얼거리고 있었다.
  '왜 예상 날짜가 지났는데도 안 오는 거야? 핸드폰도 연락 두절이고.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 생각할수록 알 수가 없네.'
  그녀는 다시금 과거의 상념에 휩싸이는 듯, 서서히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피우다 만 담배를 비벼 끄고는 그녀는 손을 비비며 자꾸만 입술을 깨물었다. 느닷없이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다시 몸을 추슬러 앉히며 눈을 멀겋게 뜨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섬에 왔는지 그가 제대로 이유는 알고 있을까? 아무리 부부가 긴 시간을 함께 걸어왔어도 최소한의 예의라는 건 있어야 했어. 어쩌다가 그는 그런 유별난 생각을 행동에 옮겨 나를 절망으로 내몰았을까? 근데,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는 왜 안 오는 거야. 아예 이 번 일을 계기로 나와는 등을 돌리려고 작정한 건가?'
  여인은 담뱃재를 털 생각도 않은 채, 하염없이 담배 연기만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인은 또 다시 왼 손가락으로 눈시울을 문지르며, 눈물을 찍어내었다. 여인은 어느새 과거의 상념에 잠겨 들고 있었다.

  이 주일 전의 일이었다. 올해 마흔인 미술대학 전임강사인 남편이 그 날도 연구실에서 유숙(留宿)하겠다고 전화로 연락해 왔다. 미술 작품 전시회에 관련하여 말할 수 없이 바쁘다는 거였다. 여인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굳이 연구실에서 유숙까지 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 날 따라 자꾸만 몸이 개운치 못했다. 남편의 품이 그립기조차 했다.
  남편을 놀래 주려고, 그녀는 차를 몰고 대학의 정문에 닿았다. 정문의 수위에게 남편을 만나러 왔다고 얘기를 했더니, 의아스러운 듯 수위가 말했다.
  "최 교수님은 아까 밤 8시경에 조교를 태우고 퇴근하셨는데요."
  "조교라니요? 혹시 누군 줄 아세요?"
  "아니, 사모님께서도 잘 아실 텐데, 민지원이라는 여자 조교랑 같이 퇴근하셨어요. 가는 길이 같은 방향이라고 거의 함께 퇴근해 왔거든요."
  "아, 그랬어요? 그러고 보니, 내가 날짜를 잘못 알고 왔네요. 이틀 뒤인데, 내가 왜 이러지?"
  그녀는 황급히 둘러대며 다시 차를 되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차를 몰면서 문득 생각했다. 문득 조교가 사는 마을은 시내 변두리의 통나무 마을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이전에 남편을 따라, 두어 번 함께 가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생각에 잠기다가 불시에 거기로 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핸들을 좌우로 꺾으면서도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여기엔 분명 뭔가 미심쩍은 일이 있어. 왜 오늘 연구실에서 유숙을 한다고 했을까? 그리고 왜 조교를 태우고 퇴근을 해? 물론 조교를 태우고, 전시회에 필요한 물품을 사러 갔을 수도 있겠지. 또한 같은 미술인들 끼리, 전시회의 구상을 하기 위해 함께 토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
  그러면서도 자꾸만 직감 같은 것이 그녀의 뒷머리에 휘감겨 들었다. 환영처럼 조교가 벌거벗은 엉덩이를 치켜들고, 남편은 물건을 꺼내 주체하지 못하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생각에 잠길수록 그녀에게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뒤끓기 시작했다.
  '내가 이전에 그를 의심해 본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었잖아? 누구보다도 나는 그를 사랑하며 신뢰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왜 자꾸만 마음이 불안해지는 걸까?'
  학교로부터 승용차로 30여 분 거리의 통나무 마을에 들어선 시각은 밤 11시 무렵이었다. 이전에 가 본 적이 있는 조교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조교는 31살의 미혼 독신녀였다. 시골 갑부인 부모의 배려로 그녀는 통나무집의 넓은 공간을 그녀 혼자서 차지하고 있었다. 통나무 마을은 통나무집이 이십여 채 지어져 있는, 아담한 촌락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바라보니, 남편의 흑색 그랜저 승용차가 주차장에 머물러있었다. 조교의 집 방문의 창을 통해 은은히 불빛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 중에서도 다행이다 싶어, 여인은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숨결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 조교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조교의 창문에는 옅은 커튼 자락이 연방 바람결에 나부끼고 있었다. 헌데, 간간이 남녀가 엉겨 붙은 듯한 그림자가 슬쩍슬쩍 내비치는 게 아닌가? 여인은 순간적으로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에 휩싸여 온몸을 떨었다. 여인은 살며시 차에서 내려, 조교의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콰르르릉! 콰르르릉!!'
  또 한 차례의 요란한 우레가 울리면서, 장대비가 마구 섬의 전역을 휘갈기고 있었다. 움막집이 떠내려가지 않을까 싶도록 흙탕물이 마구 골짜기로 쏟아져 흘렀다. 유리창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탁탁' 떨어지는 빗방울의 강도가 섬뜩할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여전히 진수는 입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꼼짝도 않은 채, 숙면에 취해 있었다.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슬며시 옆방의 문을 열어 보았다. 곤히 자고 있는 진수의 얼굴을 흘낏 바라본 뒤엔 다시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여인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와 벽에 등을 기대며,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인은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물고는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다가 연이어 과거의 상념에 잠겨 들었다.

  막 조교의 집 계단에 올라서서 문의 손잡이를 슬며시 돌려보았다. 의외로 손잡이가 돌아갔다. 여인은 마음을 단단히 다잡은 다음에, 지체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여인은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속치마만을 걸친 조교와 팬티 차림의 남편이 다정한 모습으로 포옹하고 있었다. 너무나 얼굴이 달아오르는 장면이었다. 그녀의 눈에 순간적으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여인은 그대로 달려들어, 조교의 머리채를 휘감아 쥔 채 방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이 때 남편이 여인을 말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면서, 말을 떠듬거리며 말의 맥을 잡지 못했다.
  "아니, 당신이 여기는 어떻게... 아, 참 뭐라고 해야 하나...아이 나 참."
  여인은 순간적으로 눈에 독기를 피우더니, 곧바로 달려들어 남편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만저만한 기세가 아니라서, 남편은 속수무책으로 얼이 빠진 기색이었다. 여인은 이어서 혈색을 바꾸며 고함을 내질렀다.
  "당신이 정말 내게 이럴 수 있어? 언제부터 조교 년을 갖고 놀았어? 당신 이제 끝장이야. 교수고 나발이고 내가 내일 총장을 찾아가 당신을 사직시키겠어. 어째 당신 같은 인간이 교수이며 내 남편일 수가 있어? 오늘 날짜로 당신과는 끝장이야."
  사내는 침울한 표정으로 창 밖을 멀거니 올려다보더니, 벽에서 바지를 찾아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악다구니를 하는 아내를 피해, 방문을 빠져나가 버렸다. 여인은 조교를 일으켜 세워 몇 차례를 쉬지 않고 뺨을 후려갈겼다. 어느새 조교의 입술이 갈라져 선혈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세 번째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가슴이 답답한지 방바닥에서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그렇게 사납게 퍼붓던 장대비가 이제는 가랑비가 되어,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었다. 움막집 앞으로는 황톳물이 콸콸거리며 기세도 흉흉하게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먼 데 하늘을 올려다보니, 온통 어둑어둑한 것이 한동안 비는 계속될 것만 같았다.
  여인은 문득 진수가 떠올라, 옆방의 문을 열어 보았다. 진수는 밀린 수면 부족이었던지 아직도 혼수 상태에 빠져 코를 골고 있었다. 그녀의 눈엔 순간적으로 측은한 듯한 눈빛이 감돌았다.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는 살며시 움막을 빠져 나와 선착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황톳물 일색이었다. 가파른 무인도에서 흘러내려 온 황톳물이 그대로 급류를 이루며, 바다에 이르고 있었다. 섬 전체는 자욱한 물안개로 뒤덮여 주봉(主峰)이 어딘지도 선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여인은 아까부터 이상한 예감에 휩싸였다. 뭔가 창자를 후벼파는 듯한 통증이 슬슬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히 어디가 따끔거리는지도 모르겠고, 또한 어디서부터 아파 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편에게 막 가는 말을 한 데 대한 후회의 감정이 자꾸만 피어올랐다.
  "당신 주제에 학생을 지도하는 교수라고? 그것도 학과에 소속된 조교를 농락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그리고도 가정이 더 지속되기를 바랐어? 남이 다 바람을 피우더라도 당신만은 절대 안 그럴 줄 알았어. 아내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남편이 무슨 남편이야? 이제는 영영 끝이라구. 나가서 거꾸러지든지 뒈지든지 내가 알 바가 아냐. 이 집은 엄연한 나의 소유물이고, 당신 것은 저기 책가방 하나밖에는 없어.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버리란 말이야, 알겠어?"
  남편은 그 말을 기다렸던 것처럼 정말 가방만을 들고서 집을 나가 버렸다. 집은 그녀의 친정 아버지가 사 주었고, 아내는 그녀의 명의로 등기를 해 버렸다. 그리하여, 언제나 집은 아내 자신의 재산이라고 믿고 있는 터였다.
  정작 남편이 집을 떠난 날, 그녀는 설움에 휩싸여 통곡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변명이라도 좀 하고, 사과의 말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남편의 눈엔 강렬한 증오심이 서려 있었다. 그러한 남편이 집을 떠나면서 말했다.
  "여보! 나는 원래 이 정도밖에는 안 되는 속물이었어. 나는 처가의 덕을 보고 자리잡았다는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차마 말을 않으려고 했는데, 말끝마다 처가 타령이라서 이제라도 그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당신이 총장을 찾지 않더라도 내 발길로 그 학교는 그만둘 거야. 그리고, 조교에 대해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구.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인이야. 나는 여태껏 당신에 대해 사랑의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어. 하지만, 조교의 경우에는 그게 아니었어. 내 온 생명을 다 주더라도 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내가 잃는 것이 있다면 당신일 테고, 얻는 거라면 진실한 사랑이야. 나는 진심으로 당신에게 고마움을 느껴. 이제라도 내 갈 길을 가도록 나를 풀어 준 데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
  남편은 당당하게 조교의 집으로 가 버렸다. 이혼 소송도 남편이 먼저 제기했다. 이혼 사유로는 자기가 간통을 했기 때문이라며, 남의 얘기를 하듯 당당하기만 했다. 법원에서는 다들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내의 용서에 무관하게, 자신이 자기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며 이혼시켜 달라는 거였다. 아내는 처음의 강경했던 태도와는 달리, 이혼에 응해 줄 수 없노라며 훌쩍거렸다. 결국, 법원에서도 이혼 신청을 기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남편은 그 날 이후로는 집에 있어도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아내를 생과부로 만들어 버린 터였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조교와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 남편에게 서해의 무인도를 찾아 며칠간 떠나 있겠다고 편지를 남겼다. 그리고는, 곧바로 육지를 떠나 서해의 끝자락에 붙어 있는 절해고도의 무인도를 찾은 거였다. 그 무인도가 남편과 함께 바다 낚시를 하러 방문한 적이 있던 지금의 섬이었다.

  여인은 틈만 나면 번민에 휩싸여, 눈이 충혈이 되도록 훌쩍거렸다. 까짓 남편을 왜 단념할 수 없는지를 스스로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이혼녀라는 사회적인 통념 때문에 용기를 못 내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십 년을 넘게 사랑해 온 남편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여인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꾸만 가슴이 저려 왔다. 제발 이제라도 남편이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여 돌아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여인은 머리를 풀어헤쳐 바람에 휘날리며, 연방 먹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염없이 흩날리는 빗방울. 하늘을 올려다보면 볼수록 자꾸만 가슴이 북받쳐 올랐다.
  '아아, 아무래도 다시는 남편을 못 볼 것만 같애. 왜 자꾸만 가슴이 이리도 허전해질까? 그래, 내가 싫다는 인간에게 다시는 짐이 될 수는 없는 일이지. 대관절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어쩜 그리도 야속한 말을 쏟아 놓을 수가 있었을까? 뭐라고? 여태껏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 내가 이런 소리를 듣고도 왜 이혼을 못하는 거야? 왜? 왜? 왜??'
  그녀의 눈시울이 발그레하게 변하더니, 그녀는 급기야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바람결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나부낄 때마다, 그녀는 자꾸만 콧등이 시큰거렸다. 그녀는 바위에 올라, 바다를 굽어보며 자꾸만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바람에 휩쓸릴 적마다 바다는 검푸른 몸체로 줄줄이 이랑을 만들며 밀려나고 있었다. 바람에 휩쓸리며 짙푸르게 드러나는 물결을 바라보면서도 여인은 여전히 속이 타기만 했다.
  '아, 이 일을 어떻게 해? 어떻게 해결하면 좋아? 내가 용서해 주려고 해도 용서를 받지 않겠다는 건 뭐냔 말이야? 왜 내 인생의 꼴이 이렇게밖에 되지 못할까? 내가 생각해도 참말로 지랄 같은 삶이지 뭐야? 제발 그가 마음을 돌려 나를 사랑할 수는 없을까? 정말 중요한 점은 아직도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야. 대관절 사랑이 뭐기에, 나는 이다지도 그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왜 그럴까?'
  그녀는 불타는 듯한 울화를 삭이지 못해, 돌멩이를 주워 바다로 날려보냈다. 돌멩이가 허공을 날아, 하얀 포말(泡沫)을 피워 올리며 수면으로 곤두박질치곤 했다. 그녀는 마치 마음속의 고뇌를 털어 버리기라도 하듯, 전력을 다해 돌멩이를 날렸다.
  
  진수가 놀라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오후 다섯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눈을 비비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말라붙은 침이 입술과 턱을 지나 목까지 허연 자국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대충 얼굴을 닦고는 이내 옆방의 문을 두드렸다. 귀를 기울여 봤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는 문을 열어 볼까하는 마음도 일었지만, 혹시라도 오해를 살 세라 그만 두었다. 그는 큰 소리로 방안을 향해 말했다.
  "아주머니! 잘 쉬다가 갑니다. 섬을 둘러본 뒤에 제가 나중에 다시 들를게요."
  진수는 곧장 신발을 신고는 움막을 나섰다. 움막을 나서는 순간, 해변에 망연히 서 있는 여인을 보게 되었다. 진수는 순간적으로 섬뜩한 느낌에 휩싸여 진저리를 쳤다. 그러면서 그는 여인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이제야 일어났어요. 제 궁둥이가 어지간히도 질기죠? 전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근데, 아까는 말씀을 못 드렸지만, 섬의 북서쪽 동굴 입구에 배가 좌초되어 있었어요. 혹시 아주머니께서 기다리던 배는 아니었는지 함께 가보지  않을래요?"
  "어머나! 왜 그 말을 이제야 하는 거예요? 당장 저랑 함께 가요. 그나저나 그 배를 언제 처음 봤어요?"
  "아까 제가 섬을 내려오기 직전이었어요. 그 땐 제가 너무나 피곤해서 당장 쓰러지기 직전이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제가 잠들었었나 봐요. 아무튼 같이 가 봅시다."
  

  여전히 비는 이슬비의 형태로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사납던 바람결도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따금씩 천둥소리는 들려왔지만, 아까보다는 빈도가 현저하게 줄어든 상태였다.
  마침내 이십 여분의 시간을 들여, 북서쪽의 해식 동굴이 있는 해변에 이르렀다. 해변은 깎아지른 지른 듯한 절벽으로 되어 있어서, 해변에 닿기가 수월치 못했다. 절벽에 돌출한 다복솔을 붙잡으며 천천히 아래로 길을 열어 마침내 절벽 하단에 도착했다. 절벽 하단의 동굴 입구에는 난파된 선박이 암초 위에 들어올려져 있었다. 배는 승선 인원이 10명에 국한되는 소형 동력선이었다. 동력선 위에는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고, 2구의 시체만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뭔가 낌새를 느꼈는지 여인의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굴이 표백이라도 된 듯, 창백해져 갔다.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진수도 막연히 불안감을 느꼈다.
  진수와 여인은 조심스럽게 발을 놀려 난파선 위로 올라섰다. 진수가 엉겨붙어있는 2구의 시체를 뒤집어 얼굴을 막 노출시켰을 때였다. 여인은 느닷없는 외마디 고함을 내지르더니 통곡하기 시작했다.
  "어머나! 당신이 죽다니! 끝내 당신이 나를 버리고 떠났어. 끝내 말이야."
  여인의 울음소리는 하도 구성져서, 듣는 이로 하여금 금세 눈물을 쏟게 만들 지경이었다. 진수는 여인의 울음소리가 멈출 때까지 하염없이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여인은 가까스로 울음을 추스르며,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진수에게 말했다.
  "이 사내가 나의 남편이에요. 옆의 여자는 나의 마음을 끝까지 분노에 떨게 했던 연적이에요. 같은 대학의 유급 조교라나 봐요."
  진수는 시신은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기관실로 들어가 엔진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는 회사에서의 경험을 살려, 엔진의 각부를 차근차근히 살피며 점검해 보았다. 그의 눈에 엔진은 살아 있었다. 엔진 다음으로는 선체에 구멍이 뚫리지는 않았는지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크게 우그러져 뒤틀려 있을 뿐, 구멍이 나 있지는 않았다. 우그러진 부분은 절벽과 부딪치면서, 그 충격으로 생긴 자국인 모양이었다. 또한 엔진 가동에 필요한 배터리의 상태를 점검하고, 전원 연결부를 점검했다. 다음으로, 기름 탱크의 뚜껑을 열어 벙커시유의 양을 확인했다. 진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흠, 이 정도면 육지까지 건너가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겠군. 해도는 조타실에 있겠군. 남은 건 암초 지대를 잘 파악해야 하는데, 그게 문제야.'
  진수는 배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혹시 이 배를 몰고 가다가 암초에 부딪힌다면 그 순간이 제삿날이 되겠지. 적어도 나랑 운명을 같이 할 여자가 한 사람은 있다는 데에 만족해야지.'
  진수는 갑작스레 놀라, 몸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아무리 눌러도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폭우로 액정에 물이 들어가, 핸드폰이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아주머니, 혹시 움막에 핸드폰이 있어요?"
  "근데, 배터리가 다 되었나 봐요. 작동이 안 돼요."
  
  갑작스레 경직된 분위기가 뱃전을 휩쓸었다. 진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핸드폰으로 육지에 연락할 길은 막혀 버렸어. 그야말로 여기는 서해의 절해고도인데, 보통 문제가 아니군. 여기서 육지까지 몇 시간 동안을 배를 몰아야 할지 대책이 안 서네. 하여간, 일단 암초 위에서 배를 옮겨야지. 그러려면, 일단 밀물 때까지는 기다렸다가, 배를 움직여야겠어. 그 때까지 이 여자로부터 시신에 대한 사연이나 들어볼까 ?'

  진수는 시신을 갑판에 올려놓기 위해, 시신을 끌어올리려고 애를 썼다. 헌데 사내의 시신 중 오른쪽 다리가 우그러진 선체의 철판의 틈새에 끼어 있었다. 진수와 여인이 함께 힘을 합쳤어도 끌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사내의 목에는 조교의 두 팔이 꽉 감겨 있었다. 이를 두고 진수는 여인과 의견을 나누었다.
  "아주머니, 내 생각인데요. 이 배엔 이들 이외에도 선주나 기관사 등의 사람들이 함께 탔을 거라고 생각해요. 배가 섬을 향해 다가오던 중에, 거센 파도에 휩쓸려 그만 절벽에 부딪혔을 겁니다. 아마도 커다란 충격이 몇 번 있었을 거예요. 그 때 선체가 우그러들면서 벌어진 철판에 부군의 다리가 끼었으리라 여겨져요. 부군의 곁에 있던 조교는 부군의 몸을 껴안고 있었을 테죠. 다른 사람들은 절벽과의 충격으로 인해 바다로 실종되어 버리고, 둘만 남았겠죠. 근데, 왜 끝까지 조교의 팔이 부군의 목을 감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거기에 대해선 내가 말해 볼게요. 남편은 다리가 끼어, 배가 아무리 진동을 해도 배에 남을 수 있었겠죠. 조교는 남편을 끌어안고 있다가, 두 팔이 왜 목까지 갔느냐가 문제죠. 내 생각으로는 배가 좌초되었을 때, 아마도 밀물이 들어섰을 거예요. 그 때, 배도 암초의 틈바구니 어디엔가 끼었을 거예요. 밀려드는 물결은 순식간에 배에 차 올랐을 거예요. 그 때 남편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 죽었을 거구요. 조교는 달리 살아남을 길이 없어 보이자, 남편의 목을 끌어안게 된 거겠죠."
  "합리적인 추리라고 판단됩니다."
  "저도 진수 씨의 추리가 합당하다고 믿어요."
  시체를 갑판 위로 끌어올린 뒤였다. 진수와 여인은 시체를 내려다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점차 하늘이 개고 있었다. 하늘을 가득 메웠던 구름 더미가 서서히 걷혀 가고 있었다. 덧붙여, 하늘의 해도 점차 눈부신 빛살을 쏟아내고 있었다. 점차 하늘의 먼 언저리로부터 파란빛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진수는 여인과 함께 시체를 내려보면서도 마음에 이는 생각은 확연히 달랐다.
  '내가 이렇게 남의 시체나 들여다보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하지만, 여인이 통곡할 자리에 내가 남아 있다는 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진수는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머니, 이 자리는 아주머니가 통곡해야 할 자리인데, 저 때문에 불편하시죠? 제가 잠시 저기 절벽 아래로 가서 기다릴 테니, 마음속으로 망인과의 대화를 가지세요."
  "그래 주실래요? 정말 거기에까지 배려해 주셔서 고마워요."

  진수는 난파선으로부터 백여 미터 떨어진 거리의 절벽 하단에 주저앉았다. 그는 자꾸만 남을 향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감정을 근원적으로 다스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절해고도의 이 섬을 찾은 터였다. 무인도의 움막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에 섬의 절벽에 올라 폭우를 맞았다. 폭우를 맞다가 선착장으로 되돌아갔을 때는 그의 움막은 토사에 깔려 사라지고 난 뒤였다. 진수는 이틀간의 변화를 두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진수는 자신의 마음을 추슬러 보려고 애를 썼다. 그에겐 이미 아내와 직장도 사라지고 없는 터였다.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절벽 하단의 퇴적암 조각을 들어올렸다. 작은 돌멩이에 불과했지만, 돌멩이엔 역사가 숨쉬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나란히 층이 진 돌멩이를 들여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내가 왜 이렇게도 남에 대한 노화를 견딜 수 없었을까? 나의 마음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 걸까? 무엇 때문에 나는 노여움이란 연못에서 떠나지 못하는 걸까? 제발 내 가슴에서, 남에 대한 증오심을 제거해 버릴 수는 없는 걸까? 남들은 그렇게도 타인을 만나는 즐거움에 취해 허허거리는데, 나는 대체 어찌 된 사람일까? 아무리 나의 유년 시절의 환경이 삭막했다고 할지라도, 이 나이에 남을 칠 생각이라니? 왜 내가 남을 치고 때리고 차야만 하는 걸까? 꼭 그래야만 보상을 받는 무엇이라도 있다는 걸까? 그런데, 하필 사내들만 보면 적개심부터 이는 거냐 이 말이야? 나의 의식 구조를 다스리는 두뇌 혈관계에 몹쓸 뱀의 기생충이라도 서식을 해서 그런가?'
  진수는 무인도에 와서, 잠재된 노화의 근원이 뭔가를 찾아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의 정신의 눈을 번쩍 띄울 만한 계기가 없었다. 그랬기에, 그의 가슴은 나날이 근심의 그늘로 짙게 드리워지기만 했다. 정녕 남에 대한 노여움이 없이 살 방법은 없는지를 탐구하고 싶었다.
  '노여움에 대한 탐구라? 노여움이 대관절 뭔데? 아, 이렇게도 심성의 조절이 어려울 줄은 몰랐어. 인간 심성의 조절이 이다지도 어렵다니?'
  진수는 쥐고 있던 돌멩이에 자신도 몰래 불끈 힘을 주었다. 그는 돌멩이를 힘껏 움켜쥔 뒤에, 다시 스르르 힘을 빼었다. 그러다가 재차 힘을 주었다. 진수는 자신의 상념에 잠겨, 끝이 보이지 않는 암담함에 자신도 몰래 진저리를 쳤다.
  바로 이 때였다. 사별한 남편에 대한 정한으로 오열하는 여인의 울음소리가 귓전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아울러 시린 바람결과도 같은 여인의 탄식 소리도 함께 귓전을 스치며 지나갔다.
  "애고,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눈을 감았으니 무지 좋겠소. 조교보다 못한 나는 어찌 살라고, 나만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소? 어이구, 무정한 양반아!"
  들으면 들을수록 애가 다 타는 듯한 울음소리였다. 진수는 여인의 사무치는 듯한 애절한 울음소리에, 자신도 몰래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이 때 뭔가 섬광처럼 진수의 가슴을 환히 밝히며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 절벽이었구나. 생의 허리를 잘라낸 것도 절벽이었고, 삶을 건져준 것도 절벽이었어. 생명과 맞바꿔 얻은 게 뭔가? 아, 상대에 대한 따스한 배려, 그것이었구나. 으음, 바로 그거였어."
  진수는 깨달음에 이르러, 자신도 몰래 신음을 토했다. 그에겐 비로소 이 세상에 따스한 기류가 흐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칫 크게 소리를 내지를 뻔했지만, 가까스로 절제하며 여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