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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손 정 모

  새벽 세 시 무렵이다. 연이어 섬광이 밤하늘을 가른다. 아무래도 섬뜩한 느낌의 섬광이다. 여전히 굵은 빗줄기다. 번갯불이 일 때마다 우뢰가 섬 자락을 뒤흔든다. 상호는 비를 맞으며 바다를 바라본다. 배가 되돌아 와 그와 연희를 싣고 가기로 약속한 날로부터 보름이 지난날이었다. 그의 눈에선 눈물인지 빗물인지도 모를 물줄기가 마구 흘러내린다.
  그는 따끔거리는 눈을 억지로 추슬러 보려 한다. 하지만, 좀체 눈을 뜰 수가 없다. 며칠간을 눈을 못 붙인 탓이리라. 그는 핏발 선 눈으로 가까스로 수평선을 바라본다. 하지만, 시야에는 먹빛 같은 어두움만이 자리잡고 있다. 아무리 여름철이라곤 하나, 이렇게 오래도록 비가 내리다니! 벌써 이 주일째 계속 쏟아지는 빗줄기다. 바람이 일 때마다 물안개가 해면 가득히 피어올라 망사처럼 흩날린다.
  하염없이 수평선에만 머물 것 같던 그의 눈길이 슬며시 해변의 언저리를 더듬는 순간이다. 어느새 그의 의식은 과거의 상념으로 휩쓸려든다.

  서늘한 눈빛의 선장이 상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중국 쪽에 가장 가깝다는 서해의 무인도요."
  "이전까지는 사람이 살았다고 했잖소?"
  "물론 그랬지요. 벌써 몇 해 전의 이야기죠."
  "어쩌다 무인도가 되었소?"
  "그게 다 무장공비 때문이었죠. 두 가구만 살던 섬을 쓸어 버렸지 뭡니까?"
  "약속 날짜는 사흘 후의 오후 3시라고 했죠?"
  "그럼요. 다른 손님들 때문에 육지로 들어갔다가, 날짜에 맞추어 오겠소."

  그는 고개를 돌려 수평선 자락을 찬찬히 훑어본다. 아직도 눈에 보이는 거라곤 굵은 빗방울뿐. 바다는 태초의 암흑처럼 시커멓게 드러누워 있다. 무의식적으로 호주머니를 더듬다가 그는 서서히 손을 내린다. 답답한 가슴을 달래는 데에는 담배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담배를 굶은 지 벌써 열흘째다. 그는 어서 비가 그쳐 주기를 바란다. 배는 못 오더라도 비라도 좀 그쳐야 낫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참으로 갑갑하고 답답하여 미칠 지경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바닥을 들어올려 빗방울의 굵기를 가늠한다. 빗방울의 굵기는 조금도 가늘어지지 않는다. 이런 속상할 일이 있을까? 어젯밤까지도 빗방울이 이렇게까지 굵지는 않았어. 그는 슬며시 팔짱을 낀 채, 해변을 서성거린다.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해지면 걷기라도 해야지. 도대체 사람이 질식해서 나뒹굴 지경이니 원!

  문득 그는 폐가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연희를 떠올린다. 열 여드레 전 오후 2시 무렵이었으리라. 동력선인 황해호로 이 섬에 함께 내린 터였다. 실어 준 배가 섬의 모롱이를 돌아 자취를 감출 무렵이었다. 그녀는 잠시 입을 쫑긋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댁도 혹시 저처럼 독신주의잔가요?"
  "아뇨. 몇 개의 섬에 친구들이 분산해서 내렸어요."
  "아니, 왜 함께 내리지 않았어요?"
  "사흘 뒤에 만나 술 내기를 한 거죠."
  "술 내기를요?"
  "그럼요, 고기를 가장 적게 잡은 사람이 술을 사기로 한 거죠."
  "어머, 그래요? 나도 고기는 되게 잘 잡거든요."
  "아, 그러세요? 그럼 나 좀 도와 줘야겠군요."
  연희는 상호보다 세 살이 많은 서른 네 살의 여인이다. 첫눈에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의 빼어난 미모다. 갸름한 얼굴에, 초승달처럼 살짝 휘어져 올라간 눈썹. 흑백이 또렷한 눈망울과 오뚝한 코. 귀티가 나는 희뿌연 얼굴빛. 상호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에 넋이 반쯤 달아난 상태였다.
  '결혼을 하고 나면 미인이 안 보인다더니 이게 웬 일이야?'
  그는 프랑스에 가서 공부 중인 애인인 은지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그녀는 외모와 마음씨가 조화를 이룬 매혹적인 여자다. 애인을 떠올리자마자 말할 수 없이 그녀가 그리워진다. 그는 잡념에서 벗어나려는 듯, 머리를 두어 번 세차게 흔든다.
  그는 번갯불을 이용하여 시계를 들여다본다. 새벽 세 시 반이다. 슬슬 파고드는 추위로 인해 더 이상은 견디기 어렵다. 그는 연희가 잠들어 있는 숙소인 폐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자, 어느새 과거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으로 밀려든다.

  동력선이 그들을 부리고 섬을 떠난 그 날의 일이었다. 배가 떠난 지 채 반 시간도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바닷바람이 점차 새된 소리로 울부짖더니, 급기야 폭풍으로 휘몰아쳤다. 휴대용 소형 라디오를 트니 아나운서의 열띤 목소리가 밀려들었다.
  "뉴스 속보를 알려드립니다

. 방금 서해 및 남해 해상에 폭풍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해상에 있는 모든 선박들은 신속히 대피해 주기 바랍니다."
  어느새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더니 폭우가 쏟아졌다. '휙휙'거리며 치솟는 바람 줄기가 연방 해변을 휩쓸었다. 섬의 남서쪽에 자리잡은 대나무 숲이 배를 바싹 바닥에 깐 채 허우적대었다. '쏴아아 쏴아아' 소리를 내며 쉴새없이 밀려드는 바닷바람이 섬 전체를 마구 뒤흔들었다. 아, 동력선은 무사히 육지에 닿았을까? 아니면 근처의 섬에라도 들어가 위기를 모면하고 있을까? 아닌게아니라, 폭풍 경보라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동력선엔 줄잡아, 이십 여명의 여행객들이 타고 있었다. 과연 그들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도 염려스러웠다.
  세찬 빗줄기를 피해, 상호와 연희는 인가를 향해 뛰었다. 대략 십여 분을 달렸을까? 둘은 마침내 인가에 도착했다. 쉬지 않고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비에 완전히 젖었다. 옷이 몸에 착 달라붙었고, 온몸에서는 물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가옥은 오래 된 슬레이트집이었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인해, 집에는 전혀 물이 새지 않았다. 하지만, 완연한 폐가였다. 방과 마루의 온 실내가 먼지에 휩싸인 채 거미줄투성이였다. 실내 곳곳에는 쥐똥이 아무렇게나 널려 퀴퀴한 냄새가 났다. 온돌 장치가 되어 있었지만 굴뚝이 막힌 지 오래였다. 세 평 넓이의 방 2개와 마루가 구조물의 전부였다. 아마도 변소는 야외에 있는 모양이었다. 방의 내부를 둘러보았지만 집기라곤 거의 없었다. 추측컨대, 공비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버려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방바닥만은 다행히 비닐 장판으로 깔려 아늑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식량이라거나 침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연희가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닦았다. 상호도 덩달아 비를 들어 마루를 쓸고 휴지를 치웠다. 반시간이 지날 무렵에야 집다운 면모가 풍겼다.

  둘은 가지고 온 가방 등속을 마루에 내려놓고는 방에 마주앉았다. 연희가 너무나 실망했던지 푸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인가가 두 채나 있다기에 이용 가치가 있으리라고 여겼어요. 이렇게 폐가로 전락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한 편 아닌가요? 최소한 잠은 잘 수 있는 곳이잖아요?"
  "하긴 그래요. 이마저도 없었다면 어쩔 뻔했는지 대책이 안 서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상호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폐가에는 귀기(鬼氣)가 서려 있다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만약에 제가 부담스럽지 않다면 저랑 같이 여기에서 머물면 안 될까요? 두려워서 그래요. 추호도 다른 뜻에서 말씀 드린 건 아니에요. 대신 식사라든지 빨래는 제가 해 드릴게요."
  상호는 다소 놀란 듯했다.
  '아니, 이 여자가 겁도 없이 나랑 같이 지내자고? 나를 언제 만났다고? 하여간 요즘은 여자가 더 기가 세다더니 정말인 게로군. 바로 대답해 버리면 속이 들여다보이겠지?'
  상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척하더니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딱 3일간이니까, 금세 시간이 흐르겠죠."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쉽게 허락해 주셔서 너무 기뻐요."
  그녀는 말을 마치더니 급히 뭔가를 찾는 기색이었다. 이윽고 핸드폰을 꺼내 들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머나, 세상에 물이 새어 들어갔네. 아유, 이런. 작동도 아예 안 되네."
  연희의 말을 듣는 순간 그도 안색이 홱 변하였다.
  그도 핸드폰을 점검했지만 그녀의 것과 마찬가지로 작동되지 않았다. 물기에 약한 액정(液晶)이라 비를 맞으면서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진 터였다. 이제 육지와의 교신의 수단이 끊긴 터였다. 그 때 뭔가 섬뜩한 절망감 같은 것이 그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상호는 또다시 손바닥으로 빗방울의 굵기를 가늠해 본다. 좀체 빗방울의 굵기는 가늘어질 것 같지 않다. 아직도 폐가까지는 30여 분을 더 걸어야만 한다. 그는 졸음에서 벗어나려고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거듭된 수면 부족이라 걸으면서도 잠에 휩쓸린다.
  수마로부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는 힘든 걸음걸이를 재촉한다. 그러는 사이에 또다시 상념에 휩쓸려 든다.

  섬에 내린 지 사흘이 지나 배가 오기로 한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둘은 열심히 짐을 꾸렸다. 바다엔 때마침 경보가 풀려 폭풍 주의보로 변해 있었다. 그러면서도 둘의 가슴엔 내재된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사흘 전의 배는 무사히 육지에 닿았을까? 무사히 닿았어야 그들이 구조하러 올 텐데. 설사 무사했더라도 폭풍 주의보를 뚫고 우리를 구조하러 올까? 약속을 했으니까 직접 못 오면 해양 경찰에 부탁이라도 했겠지. 그런데 만약 사흘 전에 변고가 생겼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말은 없었지만 연희는 그녀대로 깊은 근심에 잠겨 있는 눈치였다. 속이 타는지 그녀는 쉴새없이 손을 비비며 소리 없는 한숨을 토했다. 짐을 꾸리느라고 부산한 표정을 지으며 둘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하늘은 마치 구멍이 뚫리기라도 한 듯했다. 지속적인 폭우가 섬의 전역을 휩쓸었다. 기상대의 설명에 따르면, 습윤한 두 기단이 만나 정체전선을 이루며 폭우가 지속된다는 거였다. 짬짬이 연희가 빨래를 했지만 빨래는 좀체 마르지 않았다. 습도가 높아 숨쉬기조차 거북스러웠다.
  혹시 예정을 앞당겨 배가 오지는 않을까 싶어 둘은 아침부터 해변에 나가 섰다. 점심 무렵을 지날 때까지도 둘은 희망에 차 있었다. 하지만, 약속 시간인 오후 3시가 가까워지면서 둘은 급격히 속이 타올랐다.
  상호는 연희를 향해 말했다.
  "아침부터 계속 서 있었는데 힘들죠? 배는 제가 지켜볼게요. 오는 대로 곧바로 연락할 테니 집으로 들어가 쉬세요."
  "아뇨. 이미 비에 젖어 버린 몸인 걸요. 기다린 김에 조금만 더 기다릴게요."
  "그러다가 감기라도 들면 어떡할 거예요? 제 말대로 그만 들어가 쉬세요, 네?"
  "싫어요. 혼자 있기도 지루해요. 배가 올 때까지는 함께 기다릴게요."
  막 그녀의 말이 끝났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상호는 안색이 홱 변하며 언성을 높였다.
  "거 보세요. 내 말 좀 들으라고 했잖아요?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세요?"
  "아뇨, 가벼운 기침인 걸요."
  "자, 나랑 같이 집으로 가요. 혹시 나만 훌쩍 떠날까 봐 두려우세요?"
  순간적으로 여인의 얼굴은 노여움으로 달아오른 듯했다. 여인은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며 그를 향해 다소 격분한 듯이 말했다.
  "아니, 방금 뭐라고 했어요? 사람이 할 말이 따로 있지 어쩜 말을 그렇게 막 하세요?"
  "아니, 제 얘기는..."
  "듣기 싫어요. 누가 댁보고 저를 걱정해 달라고 했어요? 아예 신경 끄세요."
  상호는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잠자코 고개를 돌려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는 이내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연희 씨! 심리적으로 무척 힘든 건 알아요. 우린 이미 운명 공동체이잖아요? 여기에선 병이 들면 대책이 없잖아요? 알다시피 의사도 병원도 없어요. 하다 못해 비상 구급약조차도 없는 상태예요. 이러니 어찌 걱정이 안 되겠어요? 조금 전에 저의 언성이 높았다면 사과 드릴게요. 저는 진심으로 연희 씨의 건강이 염려스러웠어요."
  진정이 담긴 그의 얘기를 듣고는 연희도 밝게 웃으며 말했다.
  "누가 댁의 마음을 모르겠어요? 저를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제가 조금 전에 짜증을 부려서 미안해요."
  연희는 잠시 숨을 추스른 뒤에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임박했잖아요? 일단 약속 시간까지는 기다려 봐야죠."
  상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했다.
  "정 그렇다면 함께 기다려 봅시다."

  배가 오기로 한 날 그렇게 기다리다가 약속 시간을 넘긴 지 오래였다. 어느새 밤 9시 무렵이었다. 상호는 종아리가 무척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졸음을 깨려고 좀 걷겠다고 여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발걸음을 옮기기조차 너무나 힘들다고 느꼈다. 연거푸 쏟아져 내리는 졸음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부지런히 걸었다. 여인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해변에서였다.
  '아무리 정체전선이 형성되어 있다지만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냐? 이 많은 비가 왜 하필이면 여름철에 다 쏟아져 내릴까? 아, 이젠 내 몸조차 가누기도 힘들어. 이러다가 내가 먼저 병드는 건 아냐?"
  그는 졸음을 이기려고 허공을 향해 악을 써서 고함을 내지른다.
  "이야, 똥 같은 날씨 좀 보란 말이야."
  그래도 자꾸만 졸음이 오는지 그는 사타구니를 더듬어 내려갔다. 물컹거리는 느낌과 함께 성기가 손에 잡혔다. 애써 주물러 보았지만, 전혀 발기할 기색이 없었다. 그는 너무나 힘이 드는지 술 취한 사람처럼 고함을 내질러 말했다.
  "에라 이 똥물에 튀길 놈아. 그래, 벌써 몸이 그렇게 약해졌어? 정말 그런 거야, 응?"
  그는 허공을 향해 두 주먹을 날리며 졸음을 이기려고 애썼다.

  어느새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난 밤 11시 무렵이었다. 연희는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상호를 향해 말했다.
  "이제는 완전히 길이 막힌 모양이에요. 끝장이 난 거라구요."
  그녀를 달래려고 그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연희가 가로채듯 말을 이었다.
  "설마 오늘은 오겠거니 여겼죠. 그런데, 이제는 완전 절망이에요. 핸드폰도 고장이 나서 연락 두절이잖아요. 아마도 사흘 전에 배가 사고를 당한 모양이에요. 이제 우리를 구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어쩌면 이럴 수가…"
  "힘을 내세요. 아마도 폭풍 주의보 때문일 겁니다. 이런 날씨에 배가 나올 수는 없었겠죠. 폭풍 주의보가 해제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 하세요. 아무래도 틀렸다니까요. 이젠 희망이라곤 없어요. 아무래도 사흘 전에 변고가 생긴 게 틀림없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실렸다. 작은 흐느낌이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그녀는 허리를 꺾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상호는 그녀의 말뜻을 잠시 헤아려 보았다. 그가 생각하기로도 그녀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덩달아 그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도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만약에 내색을 했다간 그녀의 절망이 급격히 증폭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 몰래 이빨을 악다물며 굽이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의 가슴이 자꾸만 저려 왔다. 밤 11시 무렵의 비 내리는 해변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가만히 숨을 추슬렀다. 한결 마음이 개운해지자 그는 그녀를 위로해 주려고 했다. 허나, 고개를 돌렸을 땐 그녀는 이미 의욕을 상실한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놀라 와락 달려들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를 일으켜 세웠는데도 그녀에겐 전혀 체중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아마도 의욕 상실로부터 오는 무력감 같은 게 그의 피부로 전달된 건지도 몰랐다.
  밤 11시를 넘기면서부터는 굵은 빗방울이 가랑비로 변하더니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점차 바람결도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그토록 하늘을 막고 있던 구름장들이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다. 먹구름에 갇혔던 별빛마저 눈부시게 밀려들곤 했다. 무척 오랜만에 보는 소강 상태의 날씨였다.
  상호는 집 앞 포구에 쳐 놓은 정치망(定置網)에 생각이 미쳤다. 연 사흘째 살펴보지 못했던 정치망을 들여다 볼 작정이었다. 정치망은 집에서 이십여 분 거리의 포구에 삼중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이윽고 상호와 연희는 썰물이 되기를 기다려 그물로 달려갔다. 눈부시게 밀려드는 별빛을 이용하여 그물을 살펴보았다. 파도에 휩싸여 소용돌이치던 부위들 중의 7할 정도는 구멍이 뚫려 너덜거렸다. 3할 정도에서 거둔 물고기의 양은 다섯 양동이를 넘길 정도였다. 사람의 팔 길이만큼의 길다란 감성돔과 우럭들로 그들먹했다. 일단은 생계가 문제였으므로 잡힌 물고기들을 속을 타서 말리기로 했다. 거의 쉴새없이 비 내리는 날씨라, 천상 실내의 마루에 말리기로 작정했다.
  연희는 근심 서린 얼굴로 상호에게 말했다.
  "이젠 반찬거리마저 다 떨어졌어요. 쌀은 이미 지난밤에 다 떨어졌구요. 이젠 비린내 나는 생선만을 뜯으며 목숨을 유지해야 할 판이에요."
  "그래도, 이만하기가 다행이잖아요? 정치망이 있어서 물고기나마 양껏 먹을 수 있잖아요? 그래도 대자연이 우리에게 뭔가를 배려해 준 느낌이 들어요."
  "어유, 그래서 무척이나 행복하시겠어요. 그런데, 갑자기 라디오의 소리가 왜 죽었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한 번 살펴볼게요. 어라, 건전지의 액이 흘러나온 게 아마 수명이 다 된 모양입니다. 혹시 여분의 새 전지는 없죠?"
  "전지의 수명이 좀 긴 편이잖아요? 그래서 여분의 전지는 생각지도 못했죠. 아이, 이걸 어쩌나요? 그럼, 이제 육지로부터의 소식마저 끊기는 건가요? 아유, 이렇게 끔찍할 수가?"
  연희는 마침내 억장이 무너지는 듯.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상호의 마음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해졌다. 그는 이제 그녀를 달랠 만한 여력이 없었다. 단순히 그녀를 달랜다고 하여 근심이 해결될 성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남으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할 처지였다. 그는 잠시 심각한 번민에 휩싸였다.
  '내가 뾰족한 수도 없이 어찌 저 여자를 달래겠는가? 우선 내가 속이 타서 못 견디겠어. 무슨 일이 이런 일이 다 있어?'
  상호는 흘낏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자정을 막 지나고 있었다. 그는 갈등 끝에 잠시 그녀를 혼자 내버려두고 싶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한다면 그 자신이 혼자 있고 싶었다. 그는 끓어오르는 고뇌를 가까스로 견디며 그녀에게 말했다.
  "잠시 저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금방 돌아올게요."
  그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그녀는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고는 훌쩍거리기만 했다. 그녀의 흐느끼는 모습을 보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발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
  '아, 무슨 일이 이렇게 뒤얽힐 수가 있어? 도저히 미치지 않고는 못 견딜 지경이군. 하필이면 건전지까지 수명이 다 되다니? 핸드폰도 끊겼고 라디오도 죽어 버린 이 시점에서 내가 할 일은 뭘까?'
  그는 아끼던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섬에 들어오면서 열 갑을 산 거였다. 이제 달랑 남은 마지막 한 갑 중의 첫 개피였다. 그는 이내 뽀얀 연기를 가슴 속 가득히 머금었다가 천천히 밖으로 내뿜었다. 그는 전망이 빼어난 바위 벼랑에 올라서서 바다를 굽어보았다.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그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망사처럼 흩날렸다. 그는 조금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이었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생각할수록 자꾸만 속이 끓어올랐다. 생각지도 않게 요의(尿意)가 느껴졌다. 그는 잠자코 성기를 꺼내 바다를 향해 오줌 줄기를 날렸다. 오줌이 찬 탓인지 제법 성기가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결로 인해 오줌 줄기가 연방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다. 반대로 몸을 돌려보았으나 여전히 오줌 방울은 얼굴을 향해 마구 흩날렸다. 바닷가에서는 누구나 한 번씩 겪는 경험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바지를 추슬러 입고는 천천히 해변을 거닐기 시작했다.
  '나를 섬에 부리던 그 날, 만약에 그 배가 조난을 당했다면? 애초부터 희망도 없는 일에 너무나 매달렸던 건 아닐까?'
  그는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이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한 건 그를 섬에 부린 날에 내려진 폭풍 경보였다. 폭풍 경보가 내려진 그 날의 바다를 어찌 잊었겠는가? 하늘과 바다가 온통 암흑에 휩싸인 채, 폭풍우만이 길길이 날뛰던 날이었다. 그 날의 배는 아무래도 바람에 휩쓸려 가 버렸을 것만 같았다.
그 배가 무사히 육지에 닿았어야만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터였다.
  생각할수록 못 견디게 가슴이 쓰렸다. 하필이면 그 배가 섬을 출발한 지 반 시간만에 경보가 내려졌던가?

  배가 오기로 약속된 날로부터 열흘이 지난 새벽 무렵이었다. 창 밖에는 '후두둑'거리며 또다시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해양성 기단과 시베리아 고기압이 서해 해상에서 만나 이루어진 정체전선 때문이라고 했다. 하루 걸러 나흘씩으로 비는 연일 쏟아져 내렸다. 창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로 인하여 금세 유리창은 뿌옇게 흐려졌다. 연방 '휙휙'거리며 바닷바람이 달려들어 유리창을 마구 흔들어댔다. 창문이 덜컹거릴 때마다 음습한 대기가 실내로 차갑게 밀려들곤 했다.
  그녀는 창백하게 드러누워 숨결마저 미약한 상태였다. 그녀를 향해 그는 천천히 팔을 내뻗었다. 그녀를 방바닥에 일으켜 앉힌 다음 그는 잠시 숨결을 추슬렀다. 그녀의 등 쪽에서 무릎 꿇은 자세로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양쪽 귀 아래의 목덜미 부분에서였다. 밥 알갱이 같은 멍울들이 대여섯 개나 만져졌다. 일 주일 전보다도 다소 더 커진 느낌이었다. 멍울을 삭히려고 목덜미 주변을 서서히 어루만져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안마했다. 멍울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며 목 주변을 서서히 어루만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의 멍울은 악성 종양일 것만 같았다. 빨리 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녀는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의 생각으로, 그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문제는 그녀의 생명이었다.
  그녀의 목을 어루만지면서도 그는 깊은 고뇌에 휩싸였다.
  '배가 끝까지 못 온다면? 그리하여, 연희가 목숨을 잃는다면? 아, 생각만으로도 끔찍해. 이렇게 섬에서 애처로이 숨을 거둘 수는 없어. 제발 지나는 외국 상선이라도 좀 들러 주었으면 좋겠어. 오, 신이여 정말 있소? 있다면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나를 좀 구해 주소. 그러면, 나는 당신의 전능을 믿겠소.'

  육지와의 통신은 완전히 두절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립된 지 열흘째였다. 헤쳐 나갈 길이라곤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멍울 주변을 다시 한 번 어루만져 보았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은 살 덩어리였다. 그는 소리나지 않게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방바닥에 얇은 담요를 깐 뒤에 그녀를 조심스레 눕혔다. 얇은 이불로 그녀를 덮어준 뒤에 그는 조심스레 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흘낏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새벽 네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마당에 내려서자마자 굵은 빗방울이 곧장 옷에 내리꽂혔다. 금세 전신에 한기가 차 오르며 몸이 떨렸다. 이대로 계속 비를 맞다간 그대로 몸살을 앓을 것만 같았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비를 맞으며 집 밖으로 나설 것인지? 아니면 방으로 되돌아 갈 것인지? 한동안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헌데 자꾸만 갑갑증이 일면서 발광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마침내 그는 온몸에 비를 맞으면서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는 주먹을 잔뜩 움켜쥔 채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렸다는 듯이 빗줄기가 금세 전신에 휘감겨들었다. 그에게 이제 빗줄기는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는 공허한 마음으로 천천히 해변을 향해 걸었다. 그는 땅바닥만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문득 배가 오기로 한 날을 하루 넘긴 저녁 무렵의 일이 떠올랐다. 연희는 그와 식사를 하던 중에 이마에 미열이 있다면서 살그머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는 즉시 밥상을 물리고는 그녀를 부축하여 자리에 눕혔다. 그녀의 양해를 구한 뒤에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갖다대었다.
  아닌게아니라, 이마에는 점차 열기가 느껴졌다. 마지막 상비약인 아스피린 두 알을 숟가락에 풀어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간신히 받아 넘겼다.

약을 삼키고 나서 연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때문에 너무 힘들죠?"
  잠시 말을 끊고는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뭔가 슬픔이 끓어오르는지 그녀의 눈가엔 서서히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시선과 시선이 허공에서 만나 잠시 서로의 표정을 더듬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추스르느라고 입술을 깨물면서 말을 이었다.
  "이것도 운인가 봐요. 처음부터 내 가슴 깊숙이 파고든 댁의 인상이 심상치 않았어요. 나는 한 남자로부터 헤어나기 위해 섬을 찾았어요. 가까스로 헤어났다고 여긴 순간에 변수가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요? 어느 날부턴가 나는 댁의 그늘로 휩쓸려 들고 있음을 느꼈어요. 아, 이걸 무엇으로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그의 손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그 날 그녀는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섬에 닿은 지 사흘이 지나 배가 끊기면서부터였다. 그 때부터 그녀의 마음속으로 왠지 의지할 곳이 필요하게 되었다. 묘하게도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차 그에게로 마음이 이끌렸다. 그녀보다 세 살 아래인, 서른 한 살의 청년인 그였다. 항상 그녀를 먼저 배려해 주는 넉넉한 마음씨와 온화한 느낌이 좋게 느껴졌다. 상대인 그가 해외에 유학중인 애인을 둔 총각이며 전자회사의 회사원이라는 데에도 구미가 당겼다. 그가 아직 미혼인 상태라면 많은 변수가 있으리라고 여겨졌다. 기이한 점은 그녀가 그에게로 마음이 이끌리면서부터 자꾸만 피로감이 쌓이고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사별한 지 2년이나 되는 남편에 대한 스트레스가 쌓여 힘든 줄만 알았다. 그러다가, 몸이 점점 아파 오자 통증을 그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때마침 미열이 일기에 좋은 기회라 여겨 숟가락을 놓으면서 그에게 마음을 열기로 했다.

해변에는 강풍을 맞아 가지가 찢겨 너덜거리는 나무들이 적지 않다. 계속해서 빗줄기는 시야를 뿌옇게 뒤덮으며 흩날린다. 떨어져 내린 빗방울들이 사방에서 하얀 물안개로 피어오른다. 그는 헤어날 수 없는 막막함에 사로잡혀서 숨을 가느다랗게 내쉬며 해변을 둘러본다. 섬의 북쪽 면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다. 만약에 배가 온다면 반드시 그 쪽의 절벽을 감돌아야만 한다. 거기를 거치지 않고서는 남쪽의 선착장에 이를 수가 없는 지세이다.

  계속하여 연희는 그의 손을 움켜쥔 채 그녀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이미 남편과 사별한 지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눈 쌓인 겨울철에 대관령 고개를 넘다가 브레이크가 파열되면서 변을 당한 남편이었다. 결혼한 지 3년만에 일어난 사고라 온 세상이 막막하기만 했다. 서글프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그녀는 수시로 여행을 나다녔다. 그러다가 마침내 섬에까지 온 거였다.
  그는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남편을 잃은 슬픔에 관한 이야기로 두 시간 가량이 흘러갔다. 슬픔의 응어리를 풀어내려는 그녀를 그는 잠자코 도와 주고 싶었다.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한동안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며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어떡해서든 슬픔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어요. 하지만, 감정의 처리란 게 간단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 산으로 바다로 넋 나간 사람처럼 돌아다녔죠. 그랬어도 가슴은 여전히 펑 뚫려 있을 뿐이에요. 그러다가 댁이 점차 내게 위안이 되기 시작한 거예요. 비록 애인이 있다고 들기는 했지만, 나 자신이 자꾸만 댁에게 끌리는 느낌이에요."
  그는 잠시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의 손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길이 싫지 않았다. 처음엔 다소 얼떨떨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었다. 과연 섬에서 빠져나갈 수 있겠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의 마음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미열에 시달리는 여인의 이마를 짚어 보고 싶었다. 그가 생각하기로도 무슨 마음의 작용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창졸간에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감격한 듯, 여인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더니 눈물 방울이 맺혔다. 땀이 흘러 괴로운지 그녀는 이불자락을 젖혀 상반신을 드러냈다. 민소매 티로 드러나는 그녀의 육체가 서서히 그의 욕정을 불러일으켰다. 갸름한 얼굴에 초승달처럼 살짝 휘어져 올라간 눈썹. 오뚝한 콧날 위로 수정처럼 맑은 눈. 촉촉이 젖은 입술에 물결처럼 흐르는 우아한 미소. 정녕 그녀는 첫눈에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의 빼어난 미인이었다. 그가 일단 그녀에게 끌려들면 다시는 헤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도 질세라 그의 눈을 응시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그는 잠시 갈등에 휩싸였다. 자칫 감정의 유희에 휩쓸리다간 그대로 그녀에게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는 애인인 은지를 떠올려 보았다. 내년이면 프랑스에서 돌아와 대학에 자리잡을 여인이었다. 외모와 심성의 양면에 걸쳐 조화를 이룬 다정다감한 연인이기도 했다. 은지를 떠올리자마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는 일단 마음을 다잡고는 연희를 돌봐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그를 향해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자꾸만 힘이 부쳐요. 미열 때문에 곧잘 머리가 어지럽거든요. 전신에 맥이 풀려 견디기도 힘들어요. 목 주위가 자꾸만 뻣뻣해지는 게 아무래도 이상해요. 죄송하지만 목 주위를 안마해 주지 않을래요?"
  가까스로 말을 끝낸 뒤에 그녀는 양팔을 늘어뜨린 채 눈을 감았다. 감은 여인의 눈가로 물기가 배어 반짝였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그래, 일단은 그녀의 원대로 해 주자. 저렇게 쇠진한 몸을 추스를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해 주랴?'
  그는 마음을 경건하게 가다듬고는 그녀의 목에 손을 갖다대었다. 손가락의 끝이 막 그녀의 살갗에 닿는 순간이었다. 가볍게 경련이 이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그녀는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손가락 끝을 통해 여인의 섬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자신도 몰래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는 서서히 그녀의 목을 어루더듬었다. 경추를 따라 나란히 지압을 해 나갔다. 어깨에 가까운 경추 부분을 안마할 때였다. 다른 곳과는 달리 멍울이 잡혔다. 처음에는 잘 몰랐던 멍울이었다. 반복하여 만지다 보니 다른 부위와는 비교가 되는 살덩이로 느껴졌다. 자꾸만 기력이 떨어지고 곧잘 피곤해지는 현상의 실체이기도 했다.
  멍울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남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마주쳤다가는 스르르 풀려 내렸다. 결국 그녀는 절망에 휩싸인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흑!"
  그의 머리도 '윙윙'거리며 울렸다. 혹시 림프 결절을 잘못 더듬어 멍울로 느낀 건 아닌지 두려웠다. 그에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다. 침착하게 그녀를 향해 말했다.
  "림프 결절일지도 모르니까 며칠만 더 지켜봅시다."
  그녀는 대꾸 없이 고개만 좌우로 흔들었다. 그녀의 눈시울을 따라 물기가 뽀얗게 서렸다. 그는 그녀를 자리에 눕혀 잠시 위로해 주고는 방 문을 나섰다. 그 날 이후로 그는 그녀를 돌보랴 배를 기다리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는 잠시 시계를 들여다본다. 새벽 세 시 반을 지나고 있다. 그는 온통 비에 젖어 축축한 몸으로 천천히 해변으로 향한다. 반석 위에 올라앉아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갖다대다가 멈추고 만다. 다 떨어진 담배를 찾아 무의식적으로 손길이 뻗친 거다. 그는 손을 움츠린 채 마냥 수평선을 바라본다. 허탈하기 짝이 없다. 새벽에 몸을 뒤채며 끙끙 앓고 있던 그녀를 떠올리자 마음이 영 편치 못하다. 점차 생명이 시들어 가는 그녀를 생각하자 목이 멘다. 그가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일이란 식사를 돕는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기에 그는 식사 때마다 마음이 괴롭다. 아무래도 멍울은 종양으로 의심되기에 더욱 그렇다. 단백질은 종양 세포의 증식에 말할 수 없이 좋은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는 섬에 널려진 쑥과 솔잎을 찧어 즙을 만들어 그녀에게 먹인다. 토끼가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을 찾아 소금으로 절여 놓았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 삭힌 후에 물에 묽혀 그녀에게 먹인다.
  그 날의 새벽도 탈진한 상태의 그녀에게 즙을 먹인 후에 해변으로 나섰다. 그녀의 곁에서 그녀의 신음을 듣고 있는 건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잠이 쏟아질 경우라면 모를 터이지만 그렇지 않을 땐 차라리 해변이 낫다. 도와 줄 처지가 못 되면서 마음으로만 안타까워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형벌에 가까운 고통이다. 생각할수록 처절한 심사이다.
  그는 반석 위에 올라앉아 턱을 괸 채 수평선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멍울이 생겼다고 해서 반드시 종양이란 근거는 없잖아? 아니지. 무슨 소리야? 친척들 중 목에 멍울이 생겨 발견된 암 환자가 좀 있었어? 이건 경험상 완전히 폐암 계통이야. 근데 내가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잖아? 정말 아무 것도 없는 현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군.'
  그러다가 그는 먼저 자신의 입장을 떠올린다.
  '내가 지금 그녀의 입장이나 생각하고 있을 처진가? 당장 나의 운명은? 만약 배가 섬을 찾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되지?'
  그는 끓어오르는 마음을 도저히 추스를 수가 없다. 그는 자리에서 반석에서 일어나 곧장 해변을 거닌다. 비는 여전히 쉴새없이 쏟아져 내린다. 온 몸에 한기가 차 오르지만 거기에 신경 쓸 계제가 아니다.
  그는 주먹을 말아 쥐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섬뜩하도록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을 향해 떨어진다. 자신도 몰래 진저리를 치며 그는 고개를 바로잡는다.
  생각할수록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제 구조되지 못하면 그는 어쩜 평생을 섬에서 살아야 할지 모를 일이다. 아무래도 섬은 다른 서해의 도서와는 다른 터이다.

육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라 방문객들이 흔치 않는 섬이기 때문이다. 일년 내내 찾아드는 사람이 없다면 육지로 돌아갈 기약이 없는 셈이다. 육지와는 완전히 단절된 삶이라니?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하여 미칠 지경이다.
  정치망의 물고기로 인하여 어떻게 연명은 한다고 치더라도 삶의 의미가 없을 터이다. 설사 백 살이 되도록 건강하게 산다고 치더라도 무슨 낙이 있을 것인가? 그저 살아만 있다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싶어 끔찍하게 여겨진다. 인간의 문명과는 완전히 단절된 세상에서 도깨비 같은 삶을 살게 된다면? 생각할수록 끔찍스럽다.
  갑작스럽게 인간 세상이 그리워진다. 이전에 그토록 밉던 사람들마저 그리워진다. 세상 사람들의 힘과 기여가 그 얼마나 컸던가 새삼스레 느껴진다. 섬에서는 병에 걸려도 치료해 줄 사람 하나 없지 않은가? 섬에서는 돈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명예가 무엇에 쓰이랴 싶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이웃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 짐작이 간다.
  그는 하염없이 해변을 거닐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라디오마저 불통이 되니 전혀 세상 소식마저 단절된 터이다. 이렇게 단절된 세계에서 연명을 하는 의미가 뭘까 싶다. 사람의 체온이 그리워진다. 만약 구조선이 섬을 찾게 되면 인생을 새롭게 살겠다는 각오마저 새로이 한다. 문득 연희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쩜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대할 인간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이제 시간이 아쉽다는 생각이 절실해진다.
  그는 다시 연희의 고통에 휩싸인 신음 소리에 생각이 미친다. 피를 말리는 듯한 신음 소리를 어떻게 참아내야 할지 막막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제 그 신음 소리에도 진한 애착이 간다. 그리하여, 그는 서둘러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십여 분이 지난 뒤다. 그는 숙소로 정한 폐가에 이른다. 방 문을 살며시 열고 방에 들어서니 연희는 고른 숨을 쉬며 잠들어 있다. 눈시울에는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그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담요를 펴고는 눈을 붙인다.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던지 눈을 뜨니 아침 일곱 시 무렵이다. 창 밖엔 여전히 비가 굵은 빗방울이 듣고 있다. 그는 놀라 고개를 돌려 옆을 본다. 하지만 옆 자리의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는 급히 옷차림을 가다듬고는 마당으로 내려선다. 마당에도 그녀의 자취는 없다. 그러다가 잠시 화장실에 들렀는지도 모르리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기다려 보기로 한다. 침구를 개고 방 청소를 끝낼 때까지도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곧장 해변으로 달려나간다. 집 밖의 해변에 닿자마자 그녀의 모습이 한눈에 띈다. 울컥 반가운 마음이 끓어올라 그녀에게로 뛰다시피 달린다. 달리면서 바위 위에서 조용히 잠자듯 웅크린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연희 씨! 여기 나와 있었군요."
  "......"
  그는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들어 곧바로 그녀에게로 달려든다. 그녀는 커다란 바위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가져간다. 이마에 손을 갖다대자마자 그녀가 나무토막처럼 쓰러진다. 그는 놀라 황급히 그녀의 눈까풀을 뒤집어본다.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는 너무나 놀라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아무래도 몸이 쇠약해져 움직이지 못한 상태에서 비를 맞아 심장마비로 죽은 모양이다. 갑작스레 그의 머릿속이 윙윙거리며 울려온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뭉클거리며 눈시울이 젖어든다. 일시에 그의 가슴이 허전해지면서 눈물이 마구 흘러내린다. 그는 물기 젖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에는 여전히 폭우가 내린다. 빗방울의 형세가 완연한 장대비다. 이다지도 비가 줄기차게 내리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는 바위 위에 쓰러진 그녀의 시신을 가슴으로 안아든다. 체중마저 줄어들어 한 마리의 새를 드는 기분이다. 육지로부터 더 이상의 구원은 기대할 수 없다. 사실상 구원의 꿈은 사라진 느낌이다. 육지로부터 아득히 떨어진 무인도를 향해 더 이상은 와 줄 배도 없으리라. 시신을 안아든 그의 동공이 점차 떨리면서 왈칵 외로움에 휩싸인다. 시신을 안아든 그의 가슴으로 한기가 치밀어 오른다. 갑자기 그의 목이 경직되면서 침 한 방울도 삼키기 어렵다. 이젠 마지막 대화의 상대자마저 떠난 것이다. 어쩌면 두 번 다시 사람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도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 무인도이기 때문이다. 먼 황해의 끝자락에서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일렁거리는 무인도. 무인도의 해변에서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수평선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자신도 몰래 시신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댄다. 왈칵 치닫는 냉기에 그는 몸서리를 치며 허둥댄다. 또다시 그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처절한 외로움이 치민다. 그는 폐가를 향해 허청거리며 발걸음을 내딛는다. 점차 해변에서 멀어지는 그를 향해 물안개마저 잔뜩 휘감겨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