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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늪지대

                                                                                                                    손 정 모

   호수는 작렬하는 태양으로 눈부시게 남실거렸다. 벌려 놓은 낚싯대를 그대로 둔 채, 인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호수의 수면을 응시했다. 오로지 수면 위엔 청아한 빛살뿐이었다. 산바람이 일 때마다, 노송나무에 매달린 잎새들이 하늘을 향하여 길길이 치솟고 있었다. 때마침 물수리 한 마리가 평화로운 몸짓으로 솔숲을 향해 날아 내리고 있었다. 물수리의 활갯짓을 본 순간이었다. 어느새 과거의 상념이 환부에 박힌 유리 파편처럼 따끔거리며 밀려들었다.

  닷새 전, 일요일 아침 아홉 시 무렵이었다. 요란한 초인종 소리에 놀라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순간이었다. 대략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인들 셋이 곱지 않은 눈빛으로 인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한 눈초리가 보이더니, 깡마른 체구의 여인이 인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아저씨 이름이 권인수 씬가요? 여기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죠? 나 원 참, 동네가 창피할 일이지. 무슨 이런 일이 다 있어요? 잠시 우리하고 이야기 좀 해요."
  인수는 또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듣지 않아도 또 그 소리일 터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문을 열어 여인들을 맞았다. 여인들은 증오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거실 마루에 앉았다. 이 번에는 온통 심술로 꽉 찬 듯한 눈매를 지닌 거구의 여인이 말했다.
  "도대체 아저씨는 여자를 어떻게 다루기에, 그 지경이에요? 도저히 낯부끄러워서 말을 제대로 못 할 지경이에요.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어요, 그래? "

  호숫가를 거닐던 중에, 인수는 울화가 끓어올라 또다시 돌멩이 하나를 걷어찼다. 휭하니 돌멩이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는 금세 물 속으로 곤두박질쳐 내렸다. 이렇게 가슴이 답답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픈 충동마저 들끓곤 했다. 인수는 고개를 숙여 뒷짐을 진 채, 호숫가를 무작정 걷기로 했다. 터질 듯한 가슴의 열기를 어떻게 추스를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냥 발길 닿는 대로 걷기로 했다.

  여인들은 비디오의 화면을 재현하듯, 온갖 제스처를 동원하여 입을 나불거렸다. 듣고 보니, 과연 예상했던 대로였다. 인수의 아파트의 출입문 앞에서 미혜가 흐느껴 울기를 사흘간이나 계속했다는 거였다. 여인들의 말을 듣는 순간, 인수의 가슴에는 파르스름한 인광(燐光)이 일며 마구 가슴이 떨렸다. 그가 출근한 이후의 시각들이었기에, 자신만 모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여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과장된 음색으로 지껄이곤 했었다. 어쩌면 그리도 음색이 처절한지 통 일이 잡히지 않을 지경이라는 거였다. 그래, 미혜의 울음소리에는 애간장을 녹일 듯한 처절함이 배어 있곤 했다.

  점차 현란해지는 물색을 바라보며, 인수는 하염없이 호숫가를 거닐었다. 어느새 또다시 머릿속으로는 과거의 상념이 살며시 얼굴을 내밀었다.
  작년 가을 무렵이었다. 안양의 산동네에서 기거를 하기 시작한 지 3개월째에 접어들던 때였다. 인수가 세 들어 살던 집엔 세 가구가 들어 살고 있었다. 그를 포함하여, 포장마차 부부와 밤무대 출연의 여가수가 살고 있었다. 포장마차 부부는 50대 초반이었으며, 여가수는 20대 후반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가수인 허정선은 인수보다도 두 살 위인 스물 아홉이었다. 정선과 인수는 동네 뒷산의 약수터에서 자주 마주치곤 하는 사이였다. 동네 뒷산의 약수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물줄기가 마른 적이 없었다.
  이른 아침 시각의 일요일이었다. 약수터에 이르는 길은 울창한 솔숲으로 이루어진 오솔길이었기에, 연인들의 산책로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약수터를 찾는 사람들은 새벽같이 오솔길에 올라, 약수를 물통 가득히 채워가곤 했다.
  "어머, 오늘은 좀 늦었네요. 저기 바위에 앉아 기다릴 테니까 같이 가자구요."
  "아뇨, 바쁘실 텐데 그냥 먼저 가세요. 저는 천천히 갈게요."
  인수와 정선이 알고 지낸 지는 삼 개월째였다. 이른 시각이어선지 의외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물통 가득히 약수를 채워 내려오자니까, 정선이 길섶의 바위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인수 씨! 오늘 아침의 물맛은 어땠어요? 제게만 좋게 느껴지는지 아니면 댁에게도 좋게 느껴지는지를 알고 싶어요."
  그는 대답 대신에 물통을 살짝 기울여, 통의 마개에 물을 받아 입에 갖다대었다. 입술에 물이 닿자마자, 물맛이 주는 감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정선의 왼손이 인수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그의 가슴이 떨려 왔다. 아, 어떻게 이럴 수가? 그냥 겨우 인사 정도만 하고 지낸 처지였기에 이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는 물통이 쓰러져 약수가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는 채, 당황하여 일어서려고 했다.
  "가만 좀 있어 봐. 사내가 그렇게도 숫기가 없어서야? 일어나서 나를 좀 따라와 봐."
  인수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대고 있었다.
  '어라, 이 여자 좀 봐라! 나를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반말을 하고 이래? 내가 아무래도 꿈을 꾸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
  "인수야, 내 말이 들려 안 들려? 내가 좀 마음이 괴롭거든. 어떻게 나의 상담역이 좀 안 돼 줄래?"
  인수가 여인을 따라 나섰던 곳은 바로 눈앞에 펼쳐진 호수였다. 그가 여인과 함께 산중의 호수에 닿으니, 빛살이 따가운 점심 무렵이었다. 호숫가에는 별장으로 쓰이다가 폐가가 되어 버린 통나무집이 한 채 있었을 뿐. 다른 건조물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통나무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텐트를 치고는 여인과 인수는 술잔을 기울였다. 가슴속의 고뇌를 털어놓으려면 아무래도 약간의 술기운이 필요하다며 여인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두어 잔의 술을 마신 후에는 호수를 향해 일어섰다. 덩달아 인수도 술잔을 들고는 호숫가로 나섰다.
  "인수야, 너는 왜 내게 반말을 안 써? 사람의 취향도 다양하다더니, 너도 문화재 중의 골동품 정도는 될 것 같애. 어휴, 고리타분한 책벌레 같은 사람 같으니라구."
  인수는 여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고작 여인과 인사 정도나 나누었을 뿐. 전혀 속내를 털어놓을 만한 관계는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도 왜 아침의 약수터에서 내게 상담을 청했을까?'
  생각할수록 쉽게 추측해 낼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무료함에서 헤어나기 위해, 조약돌을 주워 수면으로 돌팔매질을 했다. 돌은 이내 수면을 몇 차례나 튀어 오르며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흥! 물수제비뜨는 솜씨가 제법인 걸. 나도 한 번 시범을 보여 줘?"
  여인도 이내 얄따란 조약돌을 주워 들더니, 곧바로 수면을 향해 날렸다. 조약돌은 이내 은빛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을 하얗게 가르며 멀어지고 있었다. 인수도 내심으로 감탄했다. 곱고 섬세한 손길에서 어떻게 저런 기교가 나올까 싶을 정도였다.
  여인은 잔뜩 머리가 어지러운 듯, 수면을 향해 마구 고개를 뒤흔들어 댔다. 그러자 여인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려 마구 헝클어져 귀기(鬼氣)마저 서렸다. 그는 침착한 자세로 여인의 행동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여인은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수면을 향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울다가 그치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속으로 타는 설움이 진정 뭔가를 보여 주는 듯했다. 처음에 그는 그저 수면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점차 그녀의 애절한 흐느낌 소리에 마음이 뒤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해는 바싹 중천으로 치솟아 눈부신 빛살을 흩날리고 있었다. 어쩌면 바람결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인수는 물고기 떼처럼 파드득거리는 호수의 수면을 응시하며, 다시 과거의 상념에 휩쓸려 들었다.
  남을 어르고 달래는 데에는 도무지 재주가 없던 그였다. 그랬기에, 여인이 제 풀에 모든 설움을 떨쳐 낼 때까지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그는 기다리는 데에는 제법 이력이 붙은 사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여인의 행동을 주시하면서, 점차 끓어오르는 의혹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벌써 한 시간 가량이나 지났건만 여인은 여전히 흐느낌을 멈추지 않았다. 어찌 보면 독하다고까지 얘기할 정도의 흐느낌이었다. 그는 이제 완전히 팔짱을 낀 채, 하늘만을 올려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대관절 이렇게 흐느끼다가 여인은 어떤 자세로 돌변할 것인가? 설마 그녀 자신과 함께 죽어 버리자면서 내게 덤벼들지는 않겠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았어도 내가 여인에 대해 아는 거라곤 별로 없었다. 고작 여인의 이름과 직업과 나이뿐이지 않는가?'
  그 외엔 아무리 생각해 봤어도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인수야, 진작부터 이렇게 너랑 팔짱을 끼고 싶었어. 너도 싫지는 않지? 당분간 이렇게 있고 싶거든."
  이윽고 여인은 울음을 멈추었다. 흘낏 시계를 바라보니, 흐느껴 울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어느새 여인은 인수와 팔짱을 낀 채 호숫가를 거닐기 시작했다. 한낮인데도 하도 물안개가 끓어올라 텐트의 위치까지도 못 알아볼 정도였다. 그는 절대로 먼저 여인에게 말을 꺼내 묻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오후의 만남을 제안한 것은 어디까지나 여인이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금증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만 갔다.

  "나의 사내가 뭐랬는 줄 아니? 언제나 상대를 사귈 때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만을 사귀라고 했어. 만약에 사귀다가도 자신보다도 뛰어난 점이 없다면 과감히 걷어차 버리라고 했어. 확실히 눈빛을 보면 예사로운 남자는 아니었어. 항상 뭔가를 이루려고 시간을 아끼며 부지런히 노력하곤 했었어. 나는 그의 노력하는 자세에 이끌려 영원한 나의 남자이겠거니 여겼었어. 하지만, 웬걸? 그는 자신의 이론에 너무나 충실한 나머지, 나마저도 단숨에 걷어차 버리고 말았어. 유학을 떠난답시고 공항을 떠나던 날, 그는 내게 마지막으로 선물을 주고 싶다고 했어. 선물이라는 말에 나는 자칫 감동할 뻔했었지 뭐니?"
  여인은 말을 하다 말고 인수의 눈을 잠시 말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도 여인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마주 바라보았다. 헌데 바로 이 때였다. 여인은 다짜고짜로 그의 입에 가볍게 입술을 갖다 대었다. 비록 찰나간이었지만 일시에 부드럽고도 감미로운 느낌이 그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한 마디로 아찔한 느낌이요 떨림이었다.
  "그는 나의 귓전에다 대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속삭였어. 사람이란 자신의 수준만큼 사람을 사귀는 법이라구, 알겠어? 이 말 한 마디가 네게 주는 나의 마지막 선물이야, 알겠어?"
  그리고는 그는 새로 사귄 애인이랑 나란히 미국으로 날아가 버렸어. 슬펐지만, 그렇게 끝났어. 과거의 나는 지금의 너처럼 그렇게 아무런 숫기도 없었거든. 그랬기에, 떠나는 그를 향해 끝내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었어. 다만, 내가 왜 이렇게 못났을까하고 뇌까리기만 했을 따름이야. 어때 나 바보 천치 같지 않니? 제발 뭐라고 말 좀 해 줘? 너 설마 벙어리가 된 건 아니지?"
  여인의 말을 듣는 순간에 그는 펑하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느낌이었다. 여인과 미혜의 영상이 뒤엉키면서, 어느새 그는 미혜에 대한 상념에 젖어 들었다.

  "인수 씨 ! 다시는 전화 안 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어쩌다 보니 또 하게 됐네. 예전에 우리가 가졌던 애를 지우면서 뭐가 잘못되었나 봐. 남편이랑 함께 병원에 가 보고서야 알았거든. 의사는 내게 문제가 있다고 했어. 나의 수술이 잘못된 바람에 다시는 애를 가질 수 없다는 거야. 원래 시댁과 남편이 만만치 않았거든. 요즘의 분위기를 보니, 고액의 위자료를 주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내보내겠다고 야단이야. 순순히 물러나지 않으면 이혼 소송까지 할 모양인데, 난 어쩜 좋아, 응? 말 좀 해 봐, 제발! "
  그는 미혜의 전화를 받는 순간에 혈관이란 혈관은 죄다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아'하고 그도 몰래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한 마디로 이렇게 난감한 일은 일찍이 없던 터였다. 이치대로라면, 미혜를 평생 책임져야만 할 운명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에 가슴이 마구 떨렸다. 미혜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겹쳐져 왔다. 그는 이미 홀몸이 아닌 터였다. 미혜가 결혼할 무렵에, 그 역시도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었다.

  그는 새삼스레 덜덜 떨리는 심사를 가눌 길 없어, 한동안 수면만을 들여다보았다.
  "야, 인수야! 제발 내게 뭐라고 말 좀 해 달라니까! 너 정말 나를 무시할 생각이니? 너 오늘 한 번 혼나 볼래, 응?"
  여인은 혼미한 의식 속을 표류하는 그를 향해 거듭 오금을 박았다. 그는 다시 한 번 그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를 느꼈다. 그가 여인에게 뭘 잘못했기에, 호수에 불려나와 이러한 곤욕을 치르는가 싶어 짜증스러웠다. 그는 슬그머니 치솟는 울분을 추스르고는 다시 미혜에 대한 상념에 휩싸였다.

  그 누가 알 수 있었으랴? 산동네로 이사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절박한 상황을! 그의 머릿속으로 파르스름한 섬광이 일면서 지난날들의 기억의 편린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기 시작했다.
  산동네로 그가 이사 가기 한 달 전 무렵이었다. 그 때만큼 그가 혹독하게 정신적인 충격에 휩싸인 적은 없었다. 회사에서 돌아와 막 방으로 들어서던 순간이었다. 유난히도 높은 음색으로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약간은 의혹이 서린 느낌으로 그가 수화기를 들었다.
  "인수 씨! 나야, 미혜라구. 나 마침내 이혼하고 말았어. 끝내 매달렸지만, 재판에 지고 말았어. 나 어쩜 좋아? 너도 결혼한 몸이라, 나를 책임질 수도 없을 테고, 대관절 이를 어쩜 좋아? 나 좀 만나 어떻게 해 줘, 응? "
  그 날, 그는 들어서던 길로 곧장 미혜를 만나러 나갔다. 신촌 로타리 주변의 호텔 라운지에서 만나, 그는 미혜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와 동갑인 미혜의 얼굴은 마음의 근심으로 인하여 핼쑥하게 변하여 있었다. 미혜는 인수를 바라보자, 목이 메는지 잠시 얼굴이 상기되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인수야, 네 아내는 잘 있니? 나는 요즘 속이 타서 미칠 지경이야. 우리가 왜 과거에 아기를 지웠는지 정말 후회스러워 죽겠어. 나 요즘 신경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어. 의사는 무조건 과거를 잊으라고만 하는데, 사실은 그게 너무나 어려워. 원인이 명백한 만큼 치료에는 별 문제가 없으리라는 거야. 의사가 그렇게 잘 알면, 왜 정신 병원에 환자가 줄어들지 않느냐구? 왠지 점점 불안스러워. 세상 사람들이 나만 지켜보며 계속 입방아를 찧어 대는 것 같단 말이야."
  
  어찌 보면 이런 모든 일들이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 탓이라고도 여겨졌다. 인수는 미혜와 헤어진 당시의 상황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그는 공대를 졸업한 뒤에, 곧장 구로동의 전자 회사에 취직을 했었다. 구로동이 예전에는 제조 공장들로 즐비했지만, 근래에는 전자 계열의 벤처 회사로 번성하고 있었다.
  인수가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미혜와 사귄 지 1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점차 미래를 설계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때였다. 직장 생활을 한 지 처음 맞는 연휴를 기해, 그들이 속초를 찾았을 때였다. 철썩거리는 해변의 파도를 내다보며 비치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해변의 정서에 취해, 깊은 애무를 하다 보니 욕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밤 내내 피임 도구도 없이, 욕정을 불태웠었다. 그러던 게 그만 덜컥 임신이 되고 만 거였다. 결혼할 여건이 못 되는 데도 임신이 되어 버린 거였다. 그랬기에, 심리적인 불안감이 가중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와 미혜와의 합의하에 중절 수술을 진행하고 말았다. 속초를 다녀온 지 3개월만의 일이었다.
  수술을 한 지 2개월쯤 지난 뒤였다. 문제의 상황은 그가 회사의 연수 프로그램에 따라, 1년간 캘리포니아에서 머물 때 발생했다. 못 만나는 사이에, 창업주의 아들이 미혜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거였다. 정기적인 업무 미팅에 이어, 잦은 회식에 이르기까지 창업주의 아들과 접촉하면서부터였다. 미혜에게 있어서, 처음에는 어림도 없는 일로 여겨지던 것이 점차 현실로 나타났다. 어느 날부터였다. 점차 인수와 창업주의 아들이 가문의 배경에서 비교가 되더라는 거였다. 서서히 좋은 배경을 가진 창업주의 아들 쪽으로 마음이 기울더라는 거였다. 다음부터는 창업주의 아들에게 인간적인 매력으로 인해, 이끌리기 시작한 거였다. 그러다가, 잦은 업무적인 접촉으로 창업주의 아들의 손길이 노골적으로 미혜에게 뻗치기 시작한 거였다.
  단체 회식에서 빠져 나와 나이트며 카바레를 거치는 동안에, 점점 접촉 빈도가 잦아졌다. 처음에는 살짝살짝 등과 종아리에 와 닿던 손길이 점차 내밀한 곳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처음 얼마 동안에는 강한 거부감으로 물리쳤던 손길이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미혜는 점차 심리적인 갈등과 고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창업주의 아들과 술을 마시다가 삼차를 넘기고, 새벽을 맞은 날이었다. 미혜는 슬며시 사타구니를 파고든 사내의 손길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 날부터 미혜는 때때로 창업주의 아들과 동침하기  시작했다. 그 기간 동안 얼마나 심리적으로 고뇌에 휩싸였을 것인가를 추측할 만했다. 그러다가, 미혜로부터의 소식이 점차로 뜸해지더니만, 결국 인수와의 절교를 선언해 왔다. 그런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창업주의 아들과 결혼하게 되었다. 미혜가 결혼하겠다는 말을 듣고서도 인수는 귀국할 생각을 못 했다. 그랬기에, 그녀를 붙잡지 못한 데에는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 탓도 컸을 터였다. 어쨌든 해외에서의 연수를 받던 중에, 그는 미혜를 잃은 거였다. 그리하여, 황량한 마음을 달래려고, 귀국하여 지금의 아내와 서둘러 결혼한 거였다.
  그는 그 때를 회상하면 할수록, 슬픔이 괴어올라 전신이 파들파들 떨리곤 했다. 그도 몰래 울적한 마음이 들어, 또다시 돌멩이에 발길질을 가했다.

  또다시 그의 의식은 작년 가을 무렵의 장면을 더듬고 있었다. 여인은 산발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바람에 나부끼며, 그에게 계속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떤 순간이었다. 여인은 그를 향해 왈칵 달려들더니 그를 얼싸안았다. 미혜로 인해 잔뜩 마음이 심란해 있던 차에, 여인에게 안기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그가 만약 여인을 안게 된다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다분했다. 순간적으로 그는 갈등에 휩싸여 몸을 떨었다. 마음을 추스르기에는, 풍란의 향기를 닮은 여인의 향수 내음이 너무 강했다. 프랑스에 있는 아내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지만, 그가 여인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았다. 그가 여인의 향긋한 살 내음을 맡자마자, 전신의 욕정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여인의 손길은 서서히 그의 전신을 어루더듬기 시작했다. 여기에 호응하여, 어느새 그의 손길도 여인의 블라우스 자락을 들추며 젖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윽고 여인과 그는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호숫가에서 알몸이 되어 엉겨 붙었다. 둘 다 무척 오랜만에 느끼는 이성의 체취라,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여인은 숨을 할딱거리면서도 좀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둘 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의 애무와 성교가 끝난 뒤였다. 이윽고 여인과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란히 풀밭에 드러누웠다. 곧바로 나른한 느낌이 전신을 덮쳐 오면서, 수면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 날 이후로 마음이 울적할 때면, 여인과 그는 종종 호숫가를 찾고는 했다. 여인은 상고 출신의 밤무대 여가수였기에, 때때로 수면을 향해 노래를 불러 대곤 했다. 언제나 산중의 호수를 찾아 귀를 기울이면, 여인의 한 맺힌 노래가 들려오는 듯했다. 여인은 남자에게 배신을 당하고부터는 지기(知己)를 만날 때까지는 마음을 열지 않으려고 했다. 남자의 애무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으로서는 언제나 밤이 공허하기만 했다.

  그가 안양의 산동네로 집을 옮긴 뒤 얼마 안 되던 날이었다. 그가 직장으로 나선 직후였다는 거였다. 미혜가 산동네의 그의 집을 찾아 와서는 계속 흐느껴 울고만 있더라는 거였다. 오후가 되어 인수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미혜는 떠나 버리고 없었다. 혹시 남겨 놓은 메모라도 있나 싶었지만, 그런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예사로운 마음으로, 다음 날 아침에 그는 직장을 향해 떠났었다. 놀랍게도 이 번에도 그가 출근한 뒤에 곧바로 미혜가 들이닥친 거였다. 그리하여, 또 마냥 흐느껴 울다가 저녁 시간만 되면 몸을 사리며 떠났다. 이러기를 사흘을 반복하자 인근의 주민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는 그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제발 좀 산동네를 떠나 달라던 주문이요 협박이었다. 아무래도 동네가 창피하여, 더 이상 이러한 곳에 머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러, 미혜를 만나 애환을 달래어 주었다. 미혜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다시는 산동네를 찾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산동네의 골목길을 떠나가는 미혜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가슴 아파한 것이 엊그제 같았다.
  
  그 날 이후로 지난달까지는 미혜는 일체의 발걸음을 끊었다. 소식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상태에서, 지난달에는 그가 안양 시내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그랬는데, 미혜가 또 지난주부터 그의 아파트에 나타나서 내리 사흘간을 통곡을 해대었다는 거였다. 물론 주소 정도야 동사무소에 가서 바로 알 수 있었을 터였다. 주소만 안다면 집을 찾는 것쯤이야 복덕방에 걸린 지도만 보면 문제도 아닐 터였다.
  그는 다시금 가슴이 끓어올라 어쩔 줄 몰랐다.
  '어디 미혜가 잘못된 원인이 내게만 있었던가? 누가 미혜에게 나의 해외 연수 기간 중에, 마음을 풀어놓으라고 했었던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질 일이야.'
  아파트의 여인들 다섯이 찾아왔던 날, 그는 차분히 여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의 정황을 충분히 이해시켜 그녀들을 돌려보냈다.  

  아무래도 그 날의 일은 끔찍하기만 했다. 여인들이 그에게 따지려고 왔던 닷새 전의 일이 가슴 저미도록 섬뜩하기만 했다.  
  키가 작고 여윈 몸집의 여인은 통장이라고 했다. 키가 중간 정도이고, 표범 무늬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맵시를 부린 여인은 반장이었다. 그리고, 하마처럼 몸집이 무절제하게 발육된 거구의 여인은 부녀회의 회장이라고 했다. 통장과 반장과 회장이 어우러진, 사십 중반의 '장급(長級)'의 여인들이었다.
  그는 여인들을 이해시키려고, '한 시간 이상'을 노력했다. 애써 상냥한 목소리와 없던 인내심까지를 동원하여, 성실하게 미혜의 정황을 설명해 주었다. 처음에는 서슬 퍼렇게 설치던 그녀들도 눈시울에 눈물을 매달며, 오히려 그를 달래며 떠나갔다.

  닷새 전에 여인들을 설득하여 돌려보낸 뒤로부터 영 마음이 부글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울적한 마음을 추슬러 보려고 정선과 거닐던 호수를 찾았다. 그는 주머니에 깊숙이 손을 찔러 넣고는 천천히 호수를 거닐며 상념에 잠겼다.
  사흘 전 인사동의 전통찻집에서였다. 모과 차를 사이에 두고 그는 미혜와 마주 앉았다. 그는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근심 서린 얼굴이긴 했지만 타고난 미색은 감출 수가 없었다. 창천을 흘러가는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썹, 갸름한 얼굴에 오뚝한 콧날. 촉촉이 젖어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망울. 선홍색의 고운 입술에 윤기가 나는 희뿌연 피부. 바라볼수록 그대로 숨이 넘어갈 정도의 미모였다.
  그는 자신도 몰래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현실이 가슴 아팠다. 자신이 연수 가 있던 기간 동안의 그녀의 심경 변화를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그녀의 회사 창업주의 아들이 유혹했다고 치더라도 아귀가 잘 안 맞는 느낌이었다. 정황으로 보아 일방적으로 겁탈당한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더 그의 마음이 괴로웠다. 겁간을 당하여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되었다면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비록 그녀의 설명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모과 차를 마시며 그는 그녀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나를 직접 찾아오지 않고 내가 없는 아파트에서 흐느꼈어? 아직도 내가 그렇게 미워?"
  그녀는 잠시 초점 없는 시선을 허공으로 던지더니 이윽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왜 당신이 밉겠어? 당신을 버리고 유혹에 넘어갔다가 이혼당한 내 신세가 너무나 슬퍼서 그렇지. 어디서든 크게 울고는 싶었는데 내 잘못이 커서 당신 앞에서는 울 염치가 없었어. 그렇다고 울지 않고는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어. 줄곧 정신과 치료를 받아 왔지만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었어. 그리하여, 당신이 출근한 뒤의 당신의 집 앞에서 흐느껴 울게 되었어. 처음에는 소리 없이 훌쩍이려고 했는데 그만 설움을 못 견뎌 울음소리가 커졌나 봐."
  그녀는 도자기로 만들어진 포크를 들어 찻잔 속의 물을 찔러대고 있었다. 거기 그 어디쯤에 자신을 미궁으로 몰았던 실체를 찾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문이 열릴 때마다 청량한 소리의 풍경이 울어대었다. 산사에서나 들을 수 있는 풍경 소리가 인사동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었다. 풍경 소리가 허공에 드리워졌다가 천천히 가라앉을 때까지의 적막도 이를 데 없는 운치였다. 세월을 초월하여 연인들이 은근한 목소리로 사랑을 털어놓는 곳. 사랑의 정감이 맑은 샘물처럼 흘러 넘치는 인사동의 찻집은 연인들의 사랑의 산실이었다. 그는 눈길을 돌려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다. 전부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반짝이는 눈빛. 애교 서린 표정들. 살며시 손을 맞잡은 채 미소를 교환하는 연인들. 사랑의 여울 속에 전통 찻집은 더욱 그윽한 풍취에 휘감겼다.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던 그녀가 한결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만약 당신과 결혼했더라면 애 문제로 괴로워하지는 않았겠지. 내가 왜 당신을 버리려고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 걱정하지 마. 오늘 이후에는 내가 절대로 당신을 찾는 일은 없도록 노력할게."        
  그는 낚싯대가 드리워진 곳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호숫가에 드리워진 솔숲으로부터 흘러드는 솔 향기가 꿈결처럼 감미롭게만 했다.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달래려고 호수를 찾았건만 가슴은 더욱 답답해지기만 했다.
  '인사동에서 비록 그녀를 달래 보내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슴이 답답할 수가? 아직도 정신과 치료를 받는 그녀가 온전한 인생을 누리기는 할까? 내가 결혼만 하지 않았더라도 그녀를 데리고 살면 모든 게 그만이지 않겠는가? 어째 삶이란 이렇게 곤혹스러운 걸까?'
  그는 자신도 몰래 솔가지를 꺾어 들고는 사방으로 휘돌렸다. 휙휙 소리가 날 지경으로 휘두르는 데도 답답한 가슴을 씻어 낼 수가 없었다. 진정으로 그녀의 처지가 가엾고 애달파 보였다. 그녀의 아픈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생각할수록 눈물만 가슴 가득 끓어올랐다.
  '왜 내가 결혼도 하지 않고 성급히 그녀를 가졌을까? 생긴 아이를 지우지만 않았더라도 그녀의 불행은 안 생겼을 텐데. 제발 과거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걷다가 보니 둥치가 우람한 노송나무 아래에 이르렀다. 그는 나무를 부둥켜  안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너무나 청아하여 올려다볼수록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그는 자신도 몰래 손에 쥔 솔가지로 나무의 둥치를 하염없이 두들겨 대었다.
  '내가 콘돔이라도 끼었더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아, 내가 왜 그런 중대한 실수를 했을까?'
  그는 나무의 둥치를 때리다가 잠시 동작을 멈춘 채 귀를 기울였다. 분명 자동차 엔진 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보았다. 잘 닦여 반짝거리는 정선의 자주색 레간자였다.

  차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목소리부터 먼저 날아들었다.
  "인수야, 나야. 여기에 오면 널 만날 줄 알았어. 혹시나 못 만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만나서 너무 기분이 좋아."
  "근데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지?"
  "남자나 여자나 추억을 반추하는 동물들이지. 집으로 전화해도 없기에 직감으로 네가 여기 온 줄 알았어."
  홀가분한 평상복으로 차려 입은 그녀였다. 그녀는 뜻밖에도 바이올린을 들고 그에게로 다가섰다. 그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니, 오늘은 웬 바이올린이야? 기타라면 또 모르겠는데."
  "내가 밤무대 가수이잖니? 가수란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라 악기도 연주할 줄 알아야 해. 원래 기타를 즐기지만, 바이올린은 새로운 취미 생활로 익히기로 했어."
   그녀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자리를 잔디 위에 깔고는 그를 곁으로 불렀다. 그는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의 손짓에 이끌려 그녀의 곁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녀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담뱃갑을 그에게로 내밀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 놀랍다는 듯, 의아스러운 듯 그녀가 그를 흘깃 바라보더니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두어 번 가볍게 연기만 내뿜더니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나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담배 골초가 담배까지 마다하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지?"
  그는 두 손에 깍지를 낀 채 물끄러미 수면에 부서지는 빛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미혜만으로도 정신이 산란한 판인데 정선까지 곁에 있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자줏빛 블라우스에 청바지 차림의 정선은 그의 품에 어깨를 살짝 기대었다. 그러자 그의 후각으로 은은한 찔레를 닮은 향내가 밀려들었다. 그는 잠시 숨을 추스르며 긴장했다. 오늘 이러다가 또 알몸으로 뒤엉킬지도 모를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는 생각했다. 불륜은 오래 끌수록 양쪽 다 치명상을 받기 마련이라는 생각에 잠겼다. 빨리 벗어날수록 후유증을 덜 남기게 될 게 뻔했다. 그는 마음이 서서히 다급해졌다. 대개가 그렇듯 불륜은 처음에만 호기심을 자극할 뿐, 이내 시들해지는 습성이 있는 터였다. 시들해지지 않게 하려면 서로간에 부단한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터였다.
  그는 가볍게 그녀를 안는 듯한 자세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직 애인 없어? 남자는 누구든 꼬리를 치면 쉽게 무너져 내리는 습성이 있거든. 마음에 맞는 애인을 빨리 찾아야지."
  "뭐라구? 애인이 없느냐고? 애인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내게 치근거리는 애들은 두어 명 돼. 하지만, 나는 마음을 좀처럼 열 수가 없어."
  햇살은 살갗을 태울 정도로 따갑게 느껴졌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휘청 늘어진 솔가지에선 바람이 일 때마다 솔방울이 이따금씩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언제부턴가 호숫가의 갈대가 허리를 꺾으며 바람결에 요동치고 있었다.
  이 때 잠시 그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쾌활하고 상냥하여 주변을 편안하고 아늑하게 만들어 주는 성격이었다. 그녀의 곁에만 있으면 세상의 온갖 시름도 물안개처럼 걷혀 버릴 것만 같았다. 다른 여자들은 19세기의 매음굴의 창녀처럼 머리를 울긋불긋 물들였지만 아내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원래 머리카락의 염색은 창녀촌으로부터 유래된 줄을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내는 윤기 나는 흑발의 미녀의 진수를 보여 주곤 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윤기 나는 흑발을 보노라면 그렇게 눈부실 수가 없었다. 모든 색채들 중에서 최고급에 속하는 색깔이 백색과 흑색이라고 알려진 터였다. 그의 눈에 비친 아내의 검은 머리카락은 가히 환상적인 꿈의 궁전으로까지 비쳤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들여다보노라면 과거의 어머니들의 멋들어진 노랫가락과 함께 고운 미소가 떠오르곤 했다.
  아내는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에 그의 품에 기대어 속삭였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해마다 여름철이면 꼭꼭 들를게. 공부가 좀 힘들기는 해도 지도교수님의 배려로 유학만 다녀오면 모교에 자리잡을 것만 같애. 힘들어도 딴 생각하지 말고 잘 견뎌 내, 알았지? 나는 당신을 믿어."
  그는 문득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정선을 내려다보며 순간적으로 얼굴을 붉혔다. 정선은 평온한 표정으로 호수의 수평선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도 눈빛이 너무나 깊어 보였다. 눈빛이 깊으면 많은 사연을 감추고 사는 게 사는 게 보통이라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미혜로 인해 가슴이 아팠다. 그가 그녀를 임신시키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까지 번민에 휩싸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왜 멍청하게 실수를 했을까? 임신시켰으면 왜 아기를 낳고 결혼할 생각을 못했을까? 신성한 생명체를 무단으로 지운 죄 값을 똑똑히 치르고 있어. 죄 값 치곤 너무나 혹독해. 너무 가혹하단 말이야.'
  그는 또다시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정선이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움찔 놀랐으나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그녀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그의 눈을 한동안 말없이 들여다보던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걱정이 있나 봐. 네 얼굴에 그렇게 쓰였어. 나한테 털어놓을 수는 없니? 내가 상담해 주면 안 되겠어?"
  그는 잠시 얼굴을 붉힌 뒤에 그녀를 향해 말했다.
  "우리 이왕이면 저 쪽 낚시터로 가자. 고기가 몇 마리나 걸렸는지 살펴보자구."
 

 "고기가 어딜 가겠니? 꼭 지금 봐야 돼?"
  말은 그렇게 뇌까리면서도 그녀는 일어나 자리를 접었다. 말끔하게 접은 자리를 그녀로부터 받아들고 그는 낚시터를 향해 걸었다. 그녀도 그의 팔짱을 끼고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낚시터에 이르러 나란히 낚시 걸상에 앉았다. 담가 놓은 여섯 개의 낚싯대를 들어올려 보았다. 낚싯대마다 붕어나 메기가 매달려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얼굴이 환해지며 잡힌 고기를 물 속의 작은 어망에 담갔다. 어망 속에는 잡힌 메기와 붕어, 갈겨니, 피라미들로 그들먹했다. 그녀도 어망을 들여다보며 함빡 웃음을 깨물었다.
  이 때였다. 그녀가 흘깃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머 벌써 점심 시간이 되었네. 내가 매운탕을 끓일게. 쌀이랑 반찬은 텐트 안에 있지?"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곧바로 양은 냄비를 찾아들고는 호숫가로 다가섰다. 금세 팔을 걷어붙이고는 그릇들을 씻어 헹구기 시작했다. 그도 팔을 걷어붙이고는 칼을 꺼내 물고기의 비늘을 훑어내기 시작했다. 도마 위에서 벗겨진 물고기의 비늘들이 은빛의 빛살을 허공으로 되쏘고 있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진 매운탕 냄비가 끓으며 보글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자극했다. 더불어 구수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흐르며 식욕을 자극했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는 여성으로서는 조금도 나무랄 바가 없었다. 다만, 애인으로부터의 배신이 너무나 가슴 아팠기에 안절부절못하는 것만이 애달파 보일 따름이었다.
  이윽고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과 김치를 곁들여 매운탕을 먹으며 그들은 대화를 나누었다. 매운탕의 맛에 황홀해 하며 그가 밥을 먹는 사이에 그녀가 속내를 터놓았다.
  두 달 전부터 알고 지낸 한의사의 이야기였다. 한의사는 나이 서른 일곱으로 여태껏 미혼이라는 거였다. 결혼 적령기를 넘기고 보니 아무 여자도 결혼 상대로 거들떠보지 않았다. 결혼 자금으로 마련해 놓은 돈은 적지 않았지만 이래저래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한약방 단골이던 정선과 마음을 털어놓게 된 거였다. 둘은 서로의 처지를 안타까이 여겨 나날이 만나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꾸만 이전의 애인의 늪에 갇혀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래, 한의사는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면 결혼해야지. 망설이긴 왜 망설여. 그런 일일수록 시기를 놓치면 다른 사람들이 끼어 들 수도 있어."
  "근데 나는 그가 너처럼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품위와 체통 때문인지 나를 만날 때도 항상 긴장한 모습의 그를 보기만 해. 그 나이에도 긴장할 수 있다는 게 대견스럽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떨떠름해."
  "세상 사람이 어디 별다른 사람이 있겠어? 다 그게 그거지. 마음 편히 생각하고 새 출발해 봐. 진심으로 축하해 줄게."
  "아이, 새삼스럽게 무슨 축하는? 근데 넌 어떡할 거야? 만날 이렇게 마음을 추스른답시고 호수나 찾아다녀야겠니? 어지간하면 마음을 추슬러 봐. 지나간 일을 아무리 가슴 아파해도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래, 그건 네 말이 맞아. 네 말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내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데 어떡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점심 식사를 말끔히 해 치웠다. 둘은 금세 설거지를 마친 뒤에 자리를 펴고 나란히 앉아 호수의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배도 부르겠다 햇살도 따스하겠다하여 슬며시 졸음이 밀려들려고 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졸음을 털어 내려고 둘은 일어나 호숫가를 나란히 산책하기로 했다.
  인수의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 정선이 그에게 말했다.
  "어때? 아직도 미혜 씨의 일을 잊기가 어려워? 사람인 이상, 완전히 잊기는 힘들 거야. 설사 잊고자 해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을 테고 말이야. 그래도 어쩌겠어? 걱정한다고 해서 과거의 상처가 없어지지는 않잖아?"
  인수는 묵묵히 발길을 옮기며 마음속으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이제는 악몽의 숲으로부터 벗어나야 해. 언제까지나 악몽의 늪에서 허둥댈 수만은 없는 일이지.'
  마음은 그렇게 다잡아먹으면서도 아무래도 가슴의 답답함만은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주먹을 불끈 말아 쥔 채 마음을 추슬렀다.
  그는 이 때 흘깃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도 진지한 표정으로 땅바닥을 바라보며 미래의 일을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그의 뇌리에 결단의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법이라고 여겨졌다. 그는 발걸음을 멈춘 채 그녀의 두 손을 맞잡은 채 숨결을 가다듬었다. 그녀도 뭔가의 결론에 이른 듯 눈빛이 확연히 빛나고 있었다. 이심전심이라고 했던가! 둘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서로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마치 약속이나 하듯 둘의 입이 거의 동시에 열렸다. 그러자 그녀가 먼저 양보를 하며 그에게 말했다.
  "먼저 말해 봐. 내 잘 들을게."
  그는 또다시 숨을 추스른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선아, 이제 너는 한의사를 놓쳐서는 안 돼. 마음을 굳게 정하고 이후로는 언행에 있어서 조신(操身)해야 돼.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줄게. 나도 미혜의 늪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노력할게."
  "우린 마음이 통하는 데가 있나 봐. 나도 조금 전에 그렇게 생각했어. 실천하기가 쉽지 않더라도 우리 최선을 다하자, 응? 그럼,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그야 우린 순수한 친구로 거듭 나야지. 서로 어려울 때 정신적인 위안을 주는 순수한 지기(知己)로 남으면 안 될까?"
  "좋아, 우린 지기로 남기로 하자구. 지금껏 해 온 게 있어 육체적 유혹을 떨쳐 버리기가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이를 악물고 노력할게."
  둘은 마음이 통한 듯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며 마음을 다졌다. 그들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때마침 밀려든 솔바람이 그들을 따사롭게 휘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