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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나비들의 비상

                                                                                                                                  손정모(孫廷模)

  서슬 퍼런 햇살이 산자락에 나부끼는 한낮이다. 얼굴이 고운 30대 초반의 여승(女僧)은 여전히 요지부동의 자세다. 나보다 사흘 뒤에 왔으니까, 여승이 좌선한 지도 벌써 한 달째다. 국민대 뒤쪽의, 자연의 풍치가 빼어난 북악산 중턱의 골짜기 부근이다. 한여름이라 흘러내리는 물줄기마다 유량이 풍부하고, 수목의 잎은 윤기로 빛난다. 여승은 20분 거리의 심곡사에 객승으로 와 있으면서, 언제나 너럭바위 위에서 좌선을 한다. 빼어난 미모에 하도 단아한 자세라, 나는 언제나 말을 걸기가 망설여진다. 나의 눈에 비친 여승은 한 마리의 우아한 학(鶴)이다. 31살의 미혼인 내게 비친 그녀는 절세의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옅은 산 안개가 살짝 얼굴을 내밀다가는 쏟아지는 햇살에 꼬리를 감추곤 한다. 너럭바위 위의 여승은 언제나 내가 그림을 그리는 위치로부터 십여 미터쯤 떨어져 있다. 나는 서양화 부분의 3년 연속 특선 작가라는 경력을 갖고 있다. 이만하면 어디를 가도 당당한 작가로 인정받는 처지였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놀랍게도 나는 작품의 한계를 느꼈다. 아무리 봐도 나의 그림에는 그림의 생명인 향기가 없었다. 이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나는 심각한 고뇌에 휩싸였다. 말하자면, 내겐 이것이 작품 활동 중에 처음으로 겪는 정체기인 셈이다. 지금까지 자만심으로 가득했던 마음을 비우고, 이곳 저곳의 전시장을 돌며 남의 작품을 살폈다. 남의 작품들에서도 쉽사리 향기를 맡을 수는 없었다. 간혹 향기 그윽한 작품들도 눈에 띄었지만 극히 드물었다. 그리하여, 관념상의 그림이 아닌 살아 숨쉬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나의 직장인 잡지사에는 3개월간의 휴직 신청을 해 놓은 상태였다. 북악산 중턱의 계곡에 형성된 공터에 자리잡으면서부터 자연의 숨소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북악의 실경(實景)을 묘사하면서부터 느껴 보지 못했던 감동에 젖을 때가 많았다. 나로서는 그림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큰 계기가 된 느낌이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사흘째에 접어들던 저녁이었다. 나의 눈앞에 돌연히 표정이라곤 전혀 없는 여승이 나타나더니만, 너럭바위 위에 올랐다. 젊은 여승은 나를 주의 깊게 바라보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잠시 말씀 좀 물을게요. 저는 도(道)를 구하러 입산한 여승이거든요. 지금  댁이 하시는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참선을 해도 되겠    죠? 둘러보니 참선 수행에 있어서 여기 만한 명당이 없을 것 같아서요. 부디 제게 구애받지 마시고 하시는 일을 해 나갔으면 해요. 그럼, 이만.”

  여승은 이 때부터 너럭바위에 가부좌로 참선 수행에 들어갔다. 여승은 이내 석상처럼 요지부동의 몰입된 자세를 취하였다. 머리엔 밀짚모자가 덩그러니 얹혀 쏟아지는 햇살을 가려 주었다. 여인의 백옥같이 청순한 얼굴을 대하는 순간, 이상스럽게도 마음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여태껏 세상에 태어나서 그녀만큼 수려한 미모의 여인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한 나의 심정으로는 그녀의 밀짚모자를 벗기고 마주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미모에 걸맞게 그녀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여인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해서 북악의 솔숲과 암벽을 그려 나갔다. 바람이 일 때마다 잠에서 깨어난 솔숲이 길길이 치솟으며 우쭐거렸다. 나부끼는 바람결마다 녹색의 음영이 달랐으며, 표출되는 산색(山色) 또한 시시각각으로 달랐다. 한 줄기의 바람결에도 이렇게 자연의 숨결은 다르게 깨어나고 있었다. 만약 실경을 무시한 채 관념상으로만 그렸다면, 그림은 틀림없는 껍데기에 불과할 터였다. 내겐 여승을 보는 순간부터 가슴 일각으로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왜 하필이면 승복을 입은 신세가 되어, 쉽게 접근할 수 없게 만들까하는 심정이었다. 모순스럽게도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서서히 내 마음속에는 잡념이 들끓기 시작했다. 나는 잡념과 싸우면서도 끝없이 북악의 경치를 화폭에 담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정작 참선을 해야 할 사람은 여승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전지(全紙) 크기의 켄트지 위에, 연방 붓을 들어 수채화 물감으로 경치를 형상화시켜 나갔다. 한 때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때도 있었다. 경치 정도는 보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그릴 수 있다고 자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회상해 보면, 객기에 가까운 호기였었고 의미가 상실된 죽은 그림이었을 뿐이었다. 벌과 나비는 향기로운 꽃을 찾아 허공을 날기 마련이었다. 에스테르(ester)의 향기가 나부끼는 그윽한 곳에 꽃은 신비한 꿀샘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꽃 모양이 좋다한들 향기가 없는 꽃이라면 어떻겠는가? 아마도 어떠한 벌과 나비도 찾아들지 않으리라.

  그림의 향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토록 향기가 없던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3년 전 내가 군대를 다녀온 4학년 복학생일 때였다. 당시에 은숙은 대학 2학년에 재학중인 학생 모델이었다. 분명한 것은 은숙의 용모와 몸매는 어느 여체보다도 완벽한 조형미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에게 집착할 수 없었던 것은 그녀에겐 향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인의 향기란 단순한 살 내음 내지는 향수 냄새와는 전혀 무관한 터였다. 그건 뭐랄까?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은근하고도 신비한 매력을 말함이었다. 신비한 매력이란 결코 특출하거나 거창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교 있는 표정을 위시하여, 밝은 미소와 몸짓 등등 헤아리자면 무궁무진할 터였다. 하지만, 나와 은숙의 사이에는 여태껏 애달픈 점이 있었다. 이전에 은숙의 제안으로 일 주일간의 동해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한 여행중의 시간에도, 나는 향기에 젖기 위해 그녀와 열렬히 육체적 교접을 했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녀로부터는 향기를 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채색을 하며 흘낏 여승을 바라보았다. 여승을 바라보는 순간에 나의 내면은 여승의 알몸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무리 상상은 자유라지만, 불경한 죄를 지은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다시 팔레트에 물감을 개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엔 새털구름이 가뭇가뭇 떠 흐르며 한결 평온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한 시였다. 여승이 일어나 심곡사로 점심 식사를 하러 갈 때였다. 아니나다를까, 석상처럼 굳어 있던 여승이 가볍게 몸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느 때와는 달리 곧바로 내려가지 않고 나를 향해 다가오며 생끗 미소를 지었다.

  “방 선생님, 좀 쉬어 가면서 하세요.”

  “스님, 아주 도를 많이 깨치신 것 같군요. 얼굴에는 깨달음의 미소가 연신   흘러내리고 있구요. 하나만 여쭤 봐도 돼요? 스님께서 행하시는 참선의     화두(話頭)는 무엇인지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우린 만난 지 벌써 한 달째군요. 저는 처음에는 놀라서 믿지 않았거든요.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중견 화가가 제 곁에 머문다는 사실 말이에요. 선생님이 찾으시는 그림의 도와 제가 추구하는 도는 어쩜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저의 화두는 비상(飛翔)이에요. 기존 상념의 틀에서 새로운 상념으로의 비상이 바로 저의 화두예요. 비상이란 반드시 생명을 가진 개체만이 해 낼 수 있는 현상이 아니겠느냐구요? 선생님이 그림의 향기를 찾듯, 저는 일상적인 상념들의 비상의 의미를 찾고 있는 중이에요.”

  “스님! 오늘은 좀 여유가 있으신 것 같네요. 저와 말씀도 많이 나누시고 말이에요.”

  “바쁘시기는 선생님이 언제나 바쁘셨죠, 안 그래요? 마침 선생님도 잠시 휴식중이니까, 대화나 좀 하고 작업에 들어가자구요.”

  여승은 밀짚모자를 눌러 쓴 채, 나의 옆에 와서 나란히 앉았다. 나는 진작부터 여승과 나란히 앉고 싶었지만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곤 했었다. 그런데, 여승이 먼저 이렇게 나오니, 기선을 제압당한 기분이라 괜히 쑥스러워졌다.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들여다보니 더 한층 빼어난 미인이라, 온통 마음이 들떠 올랐다. 그녀는 생끗 웃으며 말했다. 나는 홀린 듯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녁 무렵이었어요.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어요. 현상철과 복미연 씨를 아느냐는 전화였었어요. 알다뿐이겠어요? 두 분은 바로 나의 부모님이셨고 사흘 전에 동해로 여행을 떠나셨기 때문이죠. 저는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된 느낌을 받았어요. 알고 본즉, 대관령 빙판 고개에서의 부모님의 승용차 추락 사고였어요. 초보 운전의 봉고 차량에게 떠받쳐 언덕을 굴러 내린 거였어요. 그 날 제가 함께 못 간 것은 달리 이유가 있었죠. 제 딴에는 부모님께 오붓한 시간을 드리려고 한 배려 때문이었거든요. 그런데, 일이 그 지경으로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 때 전 여상을 갓 졸업한 상태였지요. 순식간에 고아가 되어 버린 저에게는 모든 세상사가 다 의미가 없어져 버리더군요. 부모님을 땅에 묻고 삼일 밤낮을 훌쩍거리다가 저는 결국 삭발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갈 길은 이밖에는 없을 것 같더군요. 저의 생명이 붙어 있는 날까지 부모님의 왕생 극락을 기원하며 살기로 했죠. 제 나이 서른이니까, 벌써 12년의 세월이 흘렀군요. 그런데, 선생님의 연세는요? 서른 하나? 겉보기는 안 그래 보이는데 나보다 한 살이 더 많군요. 어쩜 이리도 미남이실까? 제가 승복만 안 입었다면 마구 추파를 던지고 싶어요. 사람을 놀리면 안 된다구요? 아뇨! 결코 농담이 아니에요. 지금껏 세상을 떠돌아 다녔건만 댁 만한 미남은 못 봤어요. 혹시 결혼하셨나요? 어머 정말이세요? 이건 너무 심하시다. 여태껏 결혼도 안 하고 뭐 하셨어요?”

  그녀는 슬쩍 밀짚모자를 벗더니만, 바싹 얼굴을 들이밀며 말을 이었다.

  “에이, 한 살 차인데 그냥 친구처럼 말 놓고 지내면 안 될까요?”

  이 때 상수리나무 숲을 거쳐 온 바람결이 계곡을 휩쓸었다. 시원한 느낌이 들며, 풋풋한 수목의 내음이 짙게 깔렸다. 이처럼 가까이에서 미모의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다니, 정녕 꿈만 같은 일이었다. 나는 그녀의 제안에 용기를 얻어, 조용히 그녀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스님, 나는 아직도 당신의 법호는 고사하고, 이름조차도 몰라요. 이제라도 선선히 가르쳐 주신다면, 스님의 뜻에 따르겠어요.

  “법호라고 내세울 정도는 아니고, 성함은 현수연 씨라구요?”

  나는 수연을 데리고, 너럭바위 위에 올라 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연 씨, 저도 왠지 스님으로서가 아닌 여인으로서의 당신을 사귀고 싶군요. 우리 정말 친구가 되겠다면 이 너럭바위 위에서 서로 삼배(三拜)를 나누는 게 어때요? 그리고, 삼배가 끝나면서부터는 서로 말을 놓기로 해요. 괜찮으시죠?”

  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연은 엄지손가락을 하늘로 치켜들며 활짝 웃었다. 잠시 후 그녀와 나는 동시에 엎드리며 세 번의 절을 했다. 나도 그랬으려니와, 그녀도 꽤나 경건한 자세로 삼배를 끝내고는 마주 섰다. 마음이 통했는지 그녀와 나는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수연아,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어 정말 기뻐.”

  “상현아, 내게 좋은 친구로 남아 주길 바래. 사실 난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어. 비구니가 된 처지에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건 처음이야. 지난 열두 해 동안의 수도가 단숨에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 두려워.  좌선을 한답시고 수행한 나보다도 한 달간 그림에 몰두한 네게서 참다운 선사(禪師)를 느꼈어. 지난 12년 동안에 내가 일궈 놓은 것이 대관절 무엇인지 자문해 보았어. 그렇지만,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어. 다만 산천 유람을 했다는 것뿐이었어. 상현아, 내가 좀더 네게 가까이 접근하면, 넌 달아나지 않을 거지? 만약 추호라도 그런 기색을 보이면 나는 널 친구로 삼지 않을 거야. 지금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일고 있어. 너는 대학을 나왔겠다, 게다가 명성도 드높은 화가인데도 왜 연인이 없을까 하는 점이야. 나의 견해로는 너의 눈이 너무 높았거나, 여태껏 인연이 못 닿은 탓으로 보여. 한 달간을 곁에 있었는데, 네 눈엔 내가 어떻게 보였니? 아니,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라 그 있잖아? 한 번 연애를 해 보고 싶다든가 내게서 여인의 매력을 느낀다거나 등등 있잖아? 에이, 엎드려서 절 받기지. 정말 그랬으려고? 정말 나와 같이 사귀어 보고 싶다구? 그럼 이렇게 하기로 해. 일 주일 뒤의 토요일 오후 5시에 관악산 연주암 마당에서 만나기로 해. 내가 지금 여기에 온 것은 갑작스러운 일정 변화로 인사나 하고 갈려던 참이었어. 나는 뭔가 준비할 게 있어서 잠시 후에 북악을 떠나야 해. 그럼 일 주일 뒤에 만나, 안녕!”

  계곡을 내려가는 승복 차림의 그녀의 몸매가 한결 경쾌하게 보였다. 나는 능선에 올라 그녀의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보았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면서부터 그녀는 뒤돌아보며 손을 번쩍 흔들어 주었다. 나도 덩달아 두어 번 힘껏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넋을 잃은 채 산기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리다가 만 전지 크기의 켄트지 앞에 앉았다. 이제 나의 그림의 곳곳에서는 향기가 일기 시작했다. 햇살과 바람의 강도에 따라 입체적인 향기를 내뿜으며 일어서는 솔숲이 있었다. 이제 그림의 골짜기에선 솔숲으로부터 불어 내려온 향긋한 솔바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아직도 완숙한 상태에 이르려면, 며칠을 더 그려야만 했다. 나는 좌선을 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편안히 하고 눈에는 서서히 힘을 뺐다. 북악의 청아한 바람이 ‘휙휙’거리며 달려들었다. 정오의 햇살과 서너 시의 햇살이 다르듯, 시각에 따른 하늘의 색조가 확연히 달랐다. 이제 사물을 바라보는 나의 눈에는 사물에 깔린 향기마저도 또렷이 비쳐져 보였다. 내가 붓을 들고 수련한 지 한 달만에 이루어진 수확이었다. 화폭에서 남실대는 향기의 방향과 강도만을 조절한다면, 가히 일류급에까지도 이를 수 있으리라고 여겨졌다. 나는 더욱 겸허한 마음으로 북악의 숨소리를 살려 내려고 애썼다. 이제 머릿속은 정화되어, 더 이상의 잡념은 들끓지 않았다. 나는 붓질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이며, 화폭의 그림을 내면적인 깊이로 형상화시켜 나갔다.

  어느덧 일 주일이 흘렀다. 연주암에서 바라보는 관악의 낙조는 처연하리만큼의 애조를 띠고 있었다. 연주암의 좁은 마당에는 십여 명의 등산객들이 자연 경관에 심취되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도 약속 시간은 십여 분가량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잠시 바닥에 돌을 깔고 앉아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관악산 기슭에서 피어오르는 저녁 안개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간 금세 사라지곤 했다. 벼랑 아래로 드리워진 노송의 허리쯤에서 박새 두 마리가 쉼 없이 뭔가를 주절거린다. 노송 위의 박새의 지저귐 소리를 듣고 있자니까, 문득 아련한 연민이 치솟았다. 저 박새들은 지저귐을 통해 서로에게 향기를 실어 보낼 수 있을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박새들의 지저귐 소리에 맞춰, 과거에 그토록 향기를 뿜어내었던 여인이 그리워졌다. 그토록 그윽한 향기를 피워 올리던 화초였건만, 안목이 어두웠던 나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었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다시 과거로 더듬어 올라가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꿇어 엎드려 매달리고 싶었다. 흘러간 과거가 그렇게 그립고 아쉬울 수가 없었다.

  내가 최초로 동침했던 그 여인은 미혜였다. 그녀와 나는 같은 이불 속에서도 단 한 번의 교접도 나눈 적이 없었다. 그것도 자그마치 한 달간의 동침이 아니었던가? 어찌 보면 나의 일생에서 소리 없는 메아리의 발생은 이 때부터였을 터였다. 은숙이 향기 없는 여인이었다면, 미혜를 대하던 때의 나는 확실히 향기 없는 사내였다. 너무나 농염하면서도 향기로운 화초에 주눅이 들어, 못난 자존심이나 떠올리던 이방인이었을 따름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의 동정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미래의 배우자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동정을 줄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나의 마음은 나의 법이었고, 융통성이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박새의 울음소리가 점차 멀어지면서, 나의 의식은 점차 무채색의 과거로 밀려나고 있었다. 벌써 11년이나 지난 과거의 일이었다.

  5월의 대학 축제 기간이었다. 신촌에서의 2년째 학창 생활을 누리던 나는 북한강 하류 부근으로 밤낚시를 떠났다. 경기도 가평군 방하리의 비령대 절벽 아래 부분의 북한강 수계(水界)였다. 밤낚시를 하며, 명상을 곧잘 즐기던 나였다. 평소의 습관대로 그 날도 네 개의 낚싯대를 설치해 놓고는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 2시를 넘어서자 외투를 걸쳤는데도 차가운 기운이 전신을 엄습해 왔다. 나 자신도 모르게 제법 졸았던 모양이다. 비몽사몽간에 첨벙거리는 물소리를 듣고는 가물거리는 의식 상태로 억지로 눈을 떴다. 놀랍게도 드리워진 낚싯대 부근을 시커먼 물체가 떠내려가면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물 속을 보았다.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으로 보아 여인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즉시 고함을 지르며, 그녀가 붙잡도록 대나무 낚싯대를 쭉 내밀었다. 구조된 직후에 여인은 두어 차례의 물을 토해 내고는 강변에 탈진하여 그대로 드러누웠다. 체온 유지를 위해, 젖은 옷을 벗겨 내고는 나의 외투로 그녀를 덮어 주었다. 그녀는 이내 탈진한 상태로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때마침 강 안개가 온통 수면을 뿌옇게 뒤덮고 있었다. 점차 동쪽 하늘이 밝아 올 무렵에야 여인은 눈을 떴다. 그 동안에 그녀의 옷은 말끔히 말라 있었다. 여인은 옷을 걸친 뒤에, 나의 좌대(座臺) 옆에 앉아 수면을 응시했다. 한동안 뜸을 들인 후에 여인은 말했다.

  “왜 저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 구하셨어요? 저는 정말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서, 저기 저쪽 절벽에서 뛰어 내렸었어요. 하도 물살이 거센 탓에, 여기   까지 떠밀려 왔나 봐요.”

  여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무심중에 떠오르는 대로 대꾸했다.

  “정말 생명을 버릴 만큼 삶에 최선을 다하셨던가요? 전 그런 분이 두렵고  도 존경스러워요.”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치뜬 채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시선을 수면으로 돌리며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머리를 감싸쥐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안절부절못하여 좌대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혹시 제가 자존심을 건드렸나요? 그렇담 제가 용서를 구할게요. 정말 미  안해요.”

  여인은 십여 분을 그대로 눈물을 뿌리며 소리 죽여 흐느꼈다. 순식간에 나의 애간장이 다 타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죄인인 양 불안한 가슴으로 마구 서성거리기만 했다. 일단 그녀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는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엔 없었다.

  연주암을 스쳐 가는 바람 줄기에는 서서히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다복솔이 머리채를 풀어헤치며 몸을 바람에 내맡기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은 여전히 풍성한 일조량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연주암의 벼랑에는 제법 몇 사람이 불어나 그들먹한 느낌이 들었다. 맑은 공기와 청아한 솔 향기가 어우러져 연주암의 여름은 쾌청하기만 했다. 아직도 약속 시간까지는 몇 분이 남아 있었고, 나는 평온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와 연배가 비슷한 것 같은데 학생이시죠? 미대 미술학과 2학년생이라구요? 저는 인문대 국문학과 2학년인 서미혜라고 해요. 조금 전에 삶에 최선을 다했느냐고 물었죠? 저는 몸과 마음은 물론 제 모든 혼을 다해 학과 선배를 사랑했어요. 딱 6개월 동안을요. 그런데 그 선배는 사흘 전에 약혼녀를 데리고는 파리로 유학을 떠나 버렸어요. 비록 그 선배가 내게 약혼녀가 있다는 말을 이전부터 분명하게 했음에도 말이에요. 난 그가 무조건 좋아 맹목적인 사랑으로 그에게 매달렸어요. 다시 태어나더라도 그와 같은 남성을 만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죠. 알몸으로 그와 엉겨 붙으면서도 내 생명을 다해 그와 사랑을 나누리라고 굳게 다짐했죠. 헌데, 결국엔 그는 떠나 버렸고, 나는 처절한 패배자가 되고 말았어요. 무엇 때문에 약혼녀 있는 선배를 사랑했느냐구요? 어디 남녀 관계가 냉철한 이성만으로 다 해결되던가요? 하지만, 약혼녀 있는 선배를 사랑한 것은 분명 제 잘못이었죠. 그래서, 내가 바보 천치 같은 생각이 들어 강물 속에 몸을 던졌잖아요? 차라리 그 때 그대로 죽게 내버려두었더라면 지금의 슬픔이 재현되지는 않았을 게 아니냐구요? 이제 내 가슴속에 새롭게 머리를 치켜드는 이 처절한 슬픔을 어쩌나요? 댁이 저를 구하셨지만, 저는 이제 갈 곳이 없어요. 자살을 결심하고는 일기장도 태우고 머물던 집도 정리해 버렸거든요. 그런데, 이제 제가 다시 살아났으니, 돈도 없을뿐더러 갈 데도 없잖아요?”

  나는 대꾸할 말을 잊었다. 아니, 잊었다기보다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하는 얘기는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로부터의 기대할 만한 응답이 없자, 그녀는 또 고개를 숙이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한이 실린 음성이라, 듣는 것 자체부터가 괴로움이었다. 자꾸만 훌쩍이는 그녀를 보자 정말 내가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그녀의 태도로 봐서는 죽이든 살리든 이제 전적으로 내게 맡기겠다는 뜻이 역력했다. 시간을 물릴 수만 있다면 나는 도로 시간을 물리고 싶었다. 밤낚시를 통해 사색을 즐기려고 왔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누가 뭐래도 나는 근심거리 하나를 떠맡은 터였다.

  당시에 나는 완도에서 단신으로 상경하여 향학에 불타던 상태였다. 중고생들 대상의 과외 지도를 통해, 신촌 부근에 전셋집 하나를 얻어 두었던 터였다. 그 날 나는 나의 전셋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겉보기로는 일상의 안정된 리듬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차를 준비하고,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꽃병에는 꽃을 꽂았다. 일사불란한 동작에 흐트러짐이라곤 추호도 없었다. 집에 도착한 첫 날이었다. 마루 정리를 마치고는, 미혜는 다소곳한 자세로 나의 앞에 무릎을 비스듬히 꺾어 앉았다. 그녀는 수줍은 듯 나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상현 씨, 저는 이제 살았어도 죽은목숨이에요. 제가 활기를 되찾을 때까지만 제가 여기서 머물면 안 될까요?”

  “미혜 씨! 그 기간이 얼마 정도면 되겠어요?”

  “왜, 벌써 제가 부담스러운가요? 만약 제가 부담스럽다면 지금이라도 소리 없이 떠날게요. 하지만, 정말 조금이라도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신다면 저를 곁에 머물게 해 주세요. 분명한 것은 머무는 기간이 1개월을 넘진 않을 거예요. 1개월 동안 둘의 뜻이 통하여 약혼자가 된다면 더 없이 좋겠구요. 만약 그게 어려우면 제가 생계 대책을 세워서 조용히 떠날게요.”

  나는 그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녀가 머무는 기간 동안은 최선을 다해 따뜻이 대해 주기로 했다. 미혜는 장차의 포부를 시인이 되겠다고 밝혔다. 오뚝한 콧날, 반달처럼 휘어져 올라간 눈썹, 갸름한 얼굴에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이러한 요건들을 갖춘 여인이 바로 미혜였고,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언제나 미풍이 나부끼는 느낌이었다. 한 마디로, 그녀는 누구든 첫눈에 확 끌려들게 만드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보면 볼수록 호감이 가는 얼굴형이었다.

  만약 그녀가 자살하려고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스스로 무릎을 꿇어 구애했을 터였다. 자칫하면 그만 그녀에게 홀려 버릴 것만 같아 나는 항시 긴장을 풀지 않았다. 여기에는 무조건 휩쓸려 들지 않으려는 나의 오기심이 크나큰 몫으로 작용했다. 나는 명확한 의견을 제시했다.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 육체 관계마저 서로 허락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또한 서로의 육체를 내맡길 때엔 반드시 사랑의 감정이 싹튼 다음이어야 한다고. 나도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었을 때 그녀를 갖고픈 마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마다 나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비령대 아래쪽의 장면이었다. 이미 한 남성에게 혹하여 생명을 버릴 만큼 사랑한 그녀가 아닌가?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싶어도, 파리로 떠난 남성과 비교되어질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을 가볍게 강물에 던지려고 했던 그녀의 정신이 마음에 안 들었었다. 어쩌면 이것은 문제의 남성에 대한 나의 질투심일지도 모를 터였다. 때때로 잠결에 나의 손길이 그녀의 허리에 올라가 있는 것을 알아차릴 때가 있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기겁을 하여 돌아눕곤 하였다. 사랑하지도 않는 미혜와의 동침은 어느덧 고통으로까지 느껴졌다.

  미혜와의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약속대로 한 달째가 되던 날 청산되었다. 집을 떠나기 전 날 밤이었다. 그녀는 자존심을 죽여 가며 조심스레 내게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제게 잘 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하지만, 제가 상현 씨의  눈엔 여자로 비쳐지지 않았다는 게 너무도 슬펐어요. 정녕 제가 싫으시다면, 미련 없이 떠나갈게요. 부디 마음에 맞는 분을 만나 행복하게 사세요.”

  나는 달관한 듯한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허우적거렸다.

  “미혜 씨, 댁은 어딜 가나 좋은 배우자를 만날 거예요. 저는 재산도 없는데다가 도량도 좁기에, 결코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언제나 맑고 따스한 마음을 가진 당신을 잊을 순 없을 겁니다. 부디 가시는 길에 행운이 함께 하길 빌게요.”

  다음 날 아침에, 미혜는 애써 태연한 표정이었지만 얼굴 가득히 슬픔이 넘쳐흘렀다. 급기야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순간엔 눈가에 뽀얀 이슬이 맺혀 흘렀다. 나도 목이 메어, 그녀를 집 앞 공터에서 사라질 때까지 전송하며 손을 흔들었다.

  오후 다섯 시 정각이 될 때였다. 나는 눈을 들어 주변을 살폈으나 여승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연분홍 티셔츠에 자주색 미니스커트 차림의 머릿결이 고운 여인이 눈앞을 막아섰다. 나는 눈앞의 여인을 알아내려고 잠시 혼란에 빠졌었다. 역시 그랬었다. 눈앞의 여인이 바로 내가 기다리던 여승인 수연이었다. 추측컨대, 결이 고운 머리 가발을 어디에선가 빌려서 쓰고 왔을 터였다. 수연은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나의 팔짱을 꼈다.

  “상현아, 저 아래 절로 내려가 국수나 한 그릇씩 하자구.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안양 유원지 쪽으로 내려가 함께 밤을 보내자구. 밤을 함께 보낸다? 말을 하고 보니 꽤 운치 있는데? 자, 내려가, 응?”

  나는 수연과 손을 맞잡은 채 연주암을 빠져 나왔다. 바위 중간에 설치해 놓은 안테나들이 바람을 맞아 을씨년스러웠다. 국수를 먹고 갈참나무 숲에 들어서자마자 수연은 이내 귓속말을 했다.

  “상현아, 나 이뻐? 나도 네가 좋아 죽겠어. 내가 마음에 들면 오늘만큼은   네가 뭘 원하더라도 다 들어줄게. 그런데, 중요한 건 내가 왜 이렇게 꾸미고 널 찾았는지 이유를 알고 있니?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일생 동안 간직할 만한 소중한 추억이 필요한 거랬어. 나는 나의 안목에 모험을 걸고, 한 사람의 지기(知己)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야.”

  문득 나는 수연의 향기를 붙잡아 둘 매체로 누드 사진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 갈참나무 숲은 한적한 등산로거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하루 종  일 있어도 정말 인적 없는 곳이 있어. 무슨 말인 줄 알아 들었다구? 그렇    게 이해가 빨라? 거기서 네 누드 사진을 몇 장 찍고 싶은데 허락해 주겠니?”

  “물론이지. 그런데, 상현아! 나의 사진만 찍을 거야? 그 카메라 자동이지? 자동으로 맞춰 놓고 아예 둘이 같이 찍자구. 왜 놀라는 표정이야? 같이 찍으면 안 되는 누드 사진도 있어?”

  마침내 인적이 뜸한 외진 숲의 중심부에 닿았다. 갈참나무들이 빽빽하게 둘러서 있어서, 바로 지척이 아니고서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헌데, 공교롭게도 숲의 중심부쯤에선 지형이 가파른 모습을 보이다가 급기야는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었다. 낭떠러지는 제법 십여 미터로 치솟았으며, 그 아래로는 계곡의 물줄기가 힘차게 흘러내렸다. 낭떠러지 꼭대기의 수연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내가 다가서자마자 그녀는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상현아, 너는 저쪽 바위 뒤에서 옷을 벗고 와. 나는 여기서 벗을게. 뭐라구? 여기서 동시에 벗자구? 그건 싫어. 각자 벗고 나오는 거야, 알겠어? 그럼, 잠시 후에 봐.”

  잠시 후에 나는 발가벗은 몸으로 사진기만을 든 채, 바위 꼭대기의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예사로 그녀도 발가벗고 있겠거니 여겼다. 하지만, 그녀는 봉긋한 젖가슴까지도 드러낸 채, 속치마만 걸친 차림새로 우아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눈빛보다도 하얀 속치마만을 걸친 채, 그녀는 다가서는 나를 제지하며 말했다.

  “상현아, 문득 이 벼랑 아래로 뛰어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껴. 삶에 있어서 하나의 획을 긋기는 그어야 할 텐데,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지?”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한 쪽 다리를 들어 우아한 춤 동작을 취하며 선회했다. 저녁 무렵이라 서서히 산바람이 이빨을 드러내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산바람이 일 때마다 속치마자락이 휘말려 오르면서, 그녀의 하얀 엉덩이와 치모가 연방 드러났다. 나의 내면에 깃 든 늑대들의 야성이 스멀스멀 일어나려고 기승을 부렸다. 그러면서도 왠지 머리가 섬뜩해지는 찬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며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제 주위에는 관악의 저녁을 불사르는 석양과 바람 줄기만이 살아 있을 뿐. 숲은 순식간에 죽음 같은 고요에 휩싸였다. 여전히 그녀는 세련미에 넘치는 경쾌하고도 절제된 춤 동작을 멈추지 않으며 내게 말했다. 그녀의 말은 천년 세월을 침묵하고 있던 산울림인 듯 은밀하게 귓속을 적셔 왔다.

  “상현아, 나는 이제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느낌이야. 이 깨달음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을 산 보람이 있어. 이제 정녕 나의 몸을 던져 대자연에게 보시를 해도 아깝지가 않아. 아니, 그러고 싶어. 네가 그림 속에 깃 든 향기를 찾았듯이, 나도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거야. 하나의 도를 이룬 이상 더 이상은 비구니라는 허상에 머물고 싶지 않아. 너를 향해 옷을 벗으려고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약간의 장난기가 없지 않았어. 문제는 옷을 벗는 과정에서 미처 예견치 못했던 깨달음을 얻게 된 거였어. 이 놀라운 변화에 직면하여, 너의 그림의 향기가 떠올랐어. 상현아, 나는 이제 너로부터의 진정한 선택을 받고 싶어. 나를 달갑잖게 여긴다면, 나는 깨달음만으로 만족한 채 벼랑 아래로 몸을 날리고 싶어. 만약에 나를 배우자로 취하고 싶다면, 나의 마지막 헝겊을 벗겨 주길 바래.”

  생사를 초월한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숭고해 보여,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찰나간이었다. 머릿속을 오가는 수많은 불꽃 무늬가 상념의 계곡을 넘나들더니, 마침내 하나로 집결되었다. 잠시 후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나비 떼들의 비상을 지켜보며, 오늘이 있기를 기다려 왔어. 이제 나는 진정한 꽃샘을 찾았고, 너는 나의 영원한 반려자가 되어 주어야만 해. 이제 너와 나 사이엔 두 번 다시 번민이나 방황은 없을 거야.”

  서늘한 산바람이 은 비늘처럼 파드득거리며 관악의 솔숲을 타넘고 있었다. 때마침 석양 무렵의 저녁놀이 핏빛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상현아, 고마워. 단지 지금은 고맙다는 말밖에는 달리 고마움을 표시할 말이 없어. 너의 선택에 언제나 포근함과 아늑함으로 보답해 줄게.”

나는 마침내 흥분되어 떨리는 손으로 수연의 속치마를 벗기기 시작했다. 알몸이 된 그녀와 나는 가슴 벅찬 감동으로 서로를 힘껏 부둥켜안았다. 마침내 서로의 뺨이 처음으로 맞닿는 순간이었다. 불에 덴 듯한 열기에 전율하며, 나는 가만히 수연을 잔디밭 위에 드러눕혔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 위로 나의 몸을 포개면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창졸간에 숨이 멎는 듯한 열기에 젖어 들었다가, 이내 포근한 심연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수연은 몸을 활짝 열고는 달뜬 숨을 몰아 쉬며,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와 나는 전신을 휩쓸고 지나가는 격렬한 황홀경에 떨며,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옷을 추스르며 바로 앉을 무렵이었다.

  핸드폰이 울어대고 있었다. 통화 목소리를 들으니 미혜였다. 그녀와는 근래에도 간혹 한 번씩 만나 옛 날을 얘기하는 사이였다. 사업가의 아내인 그녀는 두 남매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고, 언제나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근래에 들어서 미혜와 나는 서로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어떻게 알았던지 은숙과도 잘 어울려 다니곤 했다.

  “상현아, 나야 미혜라구. 내일 오후에 시간이 있니? 그럼 잘 됐네. 오후 7  시에 요정 신궁으로 나와. 은숙이랑 같이 갈게. 특별한 용건이 있는 건 아니   고,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그래. 뭐라구? 너도 여자 친구를 데리고 오겠다   구? 내가 모르는 너의 여자 친구가 있었어? 누군지 놀랍기도 하고 궁금해   지네. 그럼, 내일 봐.”

  통화를 하면서 잠시 수연에게 의견을 물어, 수연을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이 날 밤 수연과 나는 신림동의 청수장 여관이란 곳엘 들러 밤을 태웠다. 나는 이 날 밤 내내 풍란의 향기처럼 그윽한 여인의 향기에 듬뿍 취했다.

  하루가 흘렀다. 신림동의 고급 요릿집인 신궁에 수연을 데리고 도착하니 밤 7시 5분 전이었다. 우측 편 호화 밀실인 학실(鶴室)에는 이미 은숙과 미혜가 도착해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잡으니, 호스트가 나와 음식을 가져 왔다. 미혜가 팁으로 수표를 건네자마자, 호스트는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9시까지는 찾지 않겠다며 사라졌다. 만나자마자 넷은 서로간에 얘기를 나누기에 정신이 없었다. 30분이 지나자, 미혜가 본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상현아, 난 아무래도 미치겠어. 알다시피 두 아이의 엄마인데도 나는 한 해  에 한 번 정도는 네가 그리워. 아무리 자제를 하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어. 원래의 나의 피가 뜨거웠던 것 같애. 그런데도 11년 전에는 내가 어떻게 석녀(石女)로 한 달간을 견뎠는지 알 수가 없어. 어쩜 그 때는 순전한 오기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서 지냈던 세월이 아닌가 해. 세상 사람들이 흔히들 사회관 운운하는데, 대관절 사회관이 뭐냐구? 결국은 사회의 통념으로 인간의 내면적인 자유를 속박한 것에 불과하잖아? 나의 말이 너무 비약적이라구? 나의 견해로는 결코 그런 것은 아냐. 지난 세월 동안의 깨달음을 통해 알았거든. 인간 개인의 출현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어. 나는 윤리관도 존중하지만, 거기에 못지 않게 인간의 내면적인 자유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자, 우리 다들 오늘의 만남에 소중한 의미를 부여해 주길 바래. 우리의 만남은 인생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몸짓일 수도 있잖을까? 아니면, 어디까지나 내면적인 자유를 향한 흰나비들의 눈부신 비상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래. 이건 결코 지향점 없는 방종은 아니란 점을 강조하고 싶어.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이, 1년에 한 번씩은 자유로운 마음으로 이렇게 만났으면 해. 만약에 동의한다면 박수를 쳐서 통과시키자구.”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제히 요란한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박수 소리가 가라앉자마자, 미혜와 은숙은 요리상을 밀어 놓고는 밀실의 출입문을 잠갔다. 어느 틈에 미혜가 오디오를 켜 헝가리 무곡을 틀고 있었다. 잠시 후에 세 여인과 나는 손을 마주잡고는 원형으로 둘러섰다. 다들 얼굴이 충혈되어 있었다. 미혜가 먼저 스텝을 밟자마자, 이내 둘러선 남녀들은 뒤엉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땀을 흘리며 신들린 듯 넷은 어우러져 정신 없이 서로와 춤을 추었다. 전율할 듯한 절정감에 휩싸였던 1시간 반이었다. 이윽고 음악이 멈췄다. 넷은 기진맥진하여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샹들리에의 화사한 불빛을 바라보았다. 문득 예전에 본 적이 있는, 목련꽃 위를 날던 흰나비 떼가 떠올랐다. 향기 없는 목련꽃 위를 하염없이 활갯짓을 하다가는 공허하게 사라지던 나비 떼들이었다. 나비가 꽃을 찾을 땐 꿀을 채취하기 위함이다. 겉모양은 그럴싸해도 정작 꿀을 주지 못하고 고뇌에 떠는 꽃들이 많은 터였다. 봄 하늘에 꽃잎을 나풀거려도 보지만, 이내 공허한 메아리에 젖고만 마는 꽃들이 있었다. 또한 이들 꽃을 찾다가 탈진하여 울음을 삼키고 돌아서는 나비 떼들이 있었다. 향기를 잃은 현실의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나부대는 나비들의 몸짓이 여인들과 나의 전생은 아니었을까? 나는 자꾸만 휘감겨 오는, 비령대의 첨벙대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는, 탈진한 나비 떼들을 가까스로 일으켜 세워 신궁을 나섰다.

  밤 9시에 신궁을 나서는 넷은 다리가 떨려 마구 후들거렸다. 먼저 미혜와 은숙이가 나란히 떠나갔다. 나는 남겨진 수연에게 물었다.

  “수연아, 너는 당장 오늘부터 나와 함께 생활해 줄 수 있니? 아니면, 일정 기간 동안 너를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너의 깨달음이 현실화될 때까지의 시간도 얼마나 걸릴지 궁금하고 말이야.”

  “그렇잖아도 내가 얘기해 줄려고 했어. 바로 나의 깨달음이 무엇이었던가를 말이야. 인간의 삶은 유한하며, 유한한 삶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깨달음이었어. 너무나 평범하다고 얕볼 수도 있겠지만, 절대로 그렇게 만만한 깨달음은 아니야. 이틀간 많이도 생각해 봤거든. 사람은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만 진정한 도를 구할 듯싶어. 그 동안 많은 깨달음을 주어서 고마워. 내가 어디로 가서 당장 무엇을 할 건지는 당분간 묻지 말아 줘. 왜냐하면, 나에게도 우리의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야. 보고 싶을 땐 언제든 핸드폰으로 연락할게. 그럼, 다음에 만날 때까지 안녕.”

  “수연아, 나도 너로부터 많은 걸 얻었어. 조만간 다시 만날 때까지 언제나 건강하며 행복하길 빈다. 잘 가.”

  밤 9시 무렵이었지만 여전히 무더운 열기가 골목마다 깔렸다. 수은등 아래로 도착한 택시에 수연을 태워 보내며 나는 손을 흔들었다. 그녀를 태운 택시가 골목을 빠져 나가자마자, 나는 걷잡을 수 없이 공허해졌다. 이제 무더위가 내려앉는 이 골목에서는 나는 철저한 이방인일 따름이었다. 나는 마음의 심층부로부터 진한 고독감이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아무리 몸을 비벼대도 나는 철저한 외톨이었을 뿐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콧날이 시큰거리며 나의 눈에서는 뽀얗게 이슬이 맺혀 흘렀다. 고개를 드니, 하늘의 별들이 무더기로 빛을 뿜으며 몰려들었다. 때마침 더위로 잠을 설친 몇 마리의 새 떼가 허공으로 날아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