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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멸등


                                                                                                                                                    손정모


  경찰차의 사이렌이 청각을 뒤흔든다. 전경 수송차가 움직이는 모양이다. 골목마다 밤안개가 짙게 차오른다. 밤안개 속의 차량들의 비상등. 줄지은 점멸등의 흐름이다. 사력을 다해 깜빡임으로써 긴급 상황을 일깨운다. 유리문 밖에는 번잡한 4거리다. 골목은 언제나 습도가 높다. 해변 도시라서 그럴 것이다. 출입문에 매달린 방울소리와 함께 중절모가 들어선다. 쉰 살가량의 우람한 사내다. 중절모는 이틀마다 한 번씩 들른다. 아가씨, 최신 비디오 없어? 중절모가 찾는 건 포르노 테이프이다. 나는 세 번째 선반을 가리킨다. 모니터를 통해 중절모의 대여 상황을 살펴본다. 이 달 들어 13번째다. 월말이 가까운 모양이다. 더러 세상이 아득해질 때가 있다. 통유리에 갇혀 살다보면.
   데스크 안 실내를 둘러본다. 중절모 이외에 고등학생 둘과 아가씨가 셋이다. 그들은 비디오테이프와 만화 대여점인 ‘희망봉’을 찾는 단골이다. 데스크 오른쪽 벽면을 본다. 뻐꾸기시계가 걸려 있다. 밤 11시를 넘어서는 시점이다. 나는 백지에 연필로 낙서를 계속한다. 회사를 떠날 때부터 생긴 버릇이다. 마음이 술렁거려 그냥 있을 수가 없다. 가만히 있으면 가스가 차오르는 느낌이다. 들끓는    상념에서 벗어나려면 낙서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가 돌 지경이다.
연필은 자꾸만 과장의 면상을 표현하려고 한다. 나 자신도 모를 정도다. 과장은 30대 중반의 사내다. 과장만 떠올리면 다리에 맥이 풀린다. 회사를 그만두기 열흘 전이었다. 모텔에서 과장은 낯선 앨범을 내밀었다. 나 자신도 몰래 몸이 떨렸다. 나의 알몸을 어루만지며 과장이 지껄였다. 왠지 너는 달라보였어. 그래서 이걸 보여주는 거야.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이거 계산해 줘요. 고등학생이 만화책 한 질(열권)을 데스크에 올린다. 만 원짜리 지폐를 받고 5천원을 거슬러 준다. 메이저 리그와 관련된 야구 만화다. 고등학생이 돌아가자마자 핸드폰이 울린다. 폴더를 여니 남자의 전화번호가 어른댄다. 남자는 다섯 살 연상의 학원 강사다. 반가이 핸드폰을 귀에 댄다. 여전히 바쁘지? 힘이 실린 카랑카랑한 목소리다. 아니에요.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모레 월요일, 시간이 어때? 오전에 잠깐 집에 들러줄래? 나는 간단히 응답한다. 네, 그럴게요.
   점차 심야 손님들이 많아진다. 손님이 많아질수록 내 맘이 흡족하다. 급료를 넉넉히 주는 주인에 대한 사례의 정 때문이다. 대여점에서 근무하게 된 지 3년째다. 젊은 주인은 야망이 큰 사업가다. 그가 운영하는 체인점만 네 군데다. 밤8시부터 자정까지가 나의 근무 시간이다. 사거리에 자리잡은 탓일까? 희망봉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한참 선반을 뒤지던 중절모가 흡족한 듯 테이프 2개를 내민다. 마음속으로 쓴웃음이 인다. 바깥 그림만 요란할 뿐. 실속이 없는 테이프였기 때문이다. 중절모가 나가자 문틈으로 빗방울이 쏟아져 들어온다. 냉기 서린 빗방울의 감촉. 왠지 살기가 서린 듯해 섬뜩하다. 빗방울을 대할 때마다 온기가 그리워진다.
   온기의 전형적인 표상은 연인이었던 ‘그’였다. 제약회사에서 약품 개발을 담당하던 그. 재작년 여름철이었다. 포항의 내연산 계곡에서 수영을 할 때였다. 유난히 커다란 소(沼)에서였다. 십여 명의 남녀가 수영을 즐겼다. 그도 덩달아 수영을 하자고 했다. 흔쾌히 그와 나란히 헤엄을 쳤다. 헌데 그의 몸짓은 편안함 그 자체였다. 솜털구름 위를 나는 비행기처럼 아늑해 보였다. 자신이 편해야 하고 남들마저 편안하게 느끼도록 하는 경지. 요컨대, 그로부터 발산되는 느낌은 평온함이며 따스함이었다. 내 비상의 동반자는 그이려니 여겨졌다. 그 당시의 느낌으로는.
   평온함이 그리웠던 때는 유년기였다. 고공을 날던 비행기의 엔진음 소리. 아련함이 스민 평온한 느낌으로 밀려들었다. 웅웅거리는 엔진음을 들을라치면 세상이 편안하게 여겨졌다. 어떤 근심도 단숨에 씻길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밀밭 위로 휩쓸리던 산안개. 산안개가 피면 무수한 새의 깃털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마냥 비상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비행기의 엔진음과 산안개. 지금도 이들만 떠올리면 한없이 평온한 느낌에 휩싸인다. 고향은 외딴 산중 마을이었다. 십리를 더 가야 아랫마을에 이르는 곳이었다. 상추, 배추, 시금치 등의 채소를 가꿔 연명하는 궁핍한 생활이었다. 젊어서부터 허리를 다친 아버지. 남자 같은 결기로 일밖에 모르던 어머니. 자식이라곤 내가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나마 아버지가 경운기를 몰 수 있기에 생계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연중 궁핍하기만 한 생활이었다.
   어릴 때부터 뇌리에 새겨진 건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왠지 모르게 가난은 억압의 다른 유형으로 비쳤다. 비행기의 엔진음. 그 소리를 듣다보면 가난으로부터의 돌파구를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전신으로 평온한 느낌이 스며들기 때문이었다. 가난에서만 벗어난다면 어떤 삶이라도 아름다우리라고 여겨졌다. 설령 이후에는 가난보다 더 비참해지게 될지라도. 진정으로 가난으로부터 비상하고 싶었다. 비상의 형태가 어떤 양식이든. 설혹 비상하다가 눈물을 쏟는 한이 있더라도.

   비상(飛翔)을 떠올리자 과장의 얼굴이 밀려든다. 내가 시골에서 정보고교를 졸업한 뒤였다. 가난이 지겨워 무작정 상경했다. 먼 친척의 주선으로 구로공단에 취업했다. 웹(web) 디자인 계통이었다. 응용프로그램인 플래시(flash)와 포토샵(photoshop)에는 자신만만한 나였다. 각종 전자제품의 선전에 대한 웹 디자인을 맡았다. 서른여섯 살의 과장은 단연 전문가였다. 과장의 손길이 미치면 완전 새로운 영상화가 이루어졌다. 과장 밑의 10명 중 3명이 견습사원이었다. 1년이 지나야만 정식 사원이 되는 터였다. 과장은 사장의 인척이어서 인사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나는 과장을 잘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학력 차에 따른 대우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 진학하려면 직장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아예 직장을 그만 두지 않는다면.
   마침 견습 기간이 끝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정식이 되고 싶다며 과장의 의향을 물었다. 과장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맥주를 마시며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호프집에서였다. 연이어 내미는 500CC를 연거푸 마셔야만 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땅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몸을 가누었을 때는 모텔 방이었다. 취중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거니 여겼다. 이전부터 알려진 터였다. 견습에서 정식으로 넘어가려면 몸을 바쳐야 함을. 과장은 그 분야에선 달인인 듯했다. 과장의 기교는 혼을 빼앗는 듯했다. 어느새 과장에게 휘말려 흥분해 나뒹굴었다. 그 뒤론 과장의 인력권에서 헤어나기가 어려웠다.
   정식 사원이 된 뒤였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눈총이 따가웠지만 당당히 버텼다. 어차피 세월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동료 여사원들의 시샘이 극심했다. 다양한 형태의 도발적인 반응도 엿보였다. 하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비상을 꿈꾸는 내게 동료들의 시샘은 하찮은 몸짓일 뿐이었다. 비상하려고 들끓는 기류가 수시로 전신을 엄습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럴 때마다 비상할 날개를 찾았다. 제대로 비상하게만 된다면? 어떤 후유증이라도 달게 받을 작정이었다.
   정식 사원이 된 뒤엔 진학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듣던 비행기의 엔진음 탓이었다. 아늑하고 평온하던 그 소리에 취한 거였다. 그 소리만 들으면 훨훨 비상하고 싶었다. 비상은 가난을 청산하는 수단이었다. 숱하게 억압받아 온 가난의 굴레.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상경한 터였다. 정식이 된 건 비상의 한 단계였다. 또 다른 비상. 그건 대학에 진학하는 거였다. 처음엔 학원에 가서 지도받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인터넷으로 남자를 알게 되었다. 유명세를 누리는 학원 강사인 남자. 어느 교과도 속성으로 끌어올린댔다. 남자는 귀가 후 자택에서 과외지도를 했다. 과외비를 묻는 나에게 남자는 2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조건으로 제시된 매달의 수강료. 그건 2달치의 나의 급료와 맞먹었다.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었다. 의외로 다른 조건은 무료였다. 하지만 내용이 색달랐다. 2시간씩 2차례만 매주 모델이 되어 달라는 거였다. 아마추어 조각가인 남자의 모델이 되는 조건이었다. 게다가 누드모델이라고 했다. 나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누드모델이 되어 주는 이외에는. 그 때 처음으로 느꼈다. 누드가 때론 비상의 날개일 수도 있으리라고. 일단 누드로 부딪쳐 보고 싶었다. 설혹 비상의 통로가 아닐지라도.
빗줄기가 심해지면서 청년 둘이 실내로 들어선다. 둘 다 구면이다. 뚱뚱한 얼굴은 무협 비디오를 선호하고 갸름한 얼굴은 에로물을 즐겨 찾는다. 우산꽂이 통에는 우산들이 빼곡히 차 있다. 자정까지는 반시간이 남아 있다. 실내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기호물을 찾고 있다. 중고 학생들은 주로 만화를 선호한다. 대학생과 일반인들은 대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간다. 심야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잠이 없는 모양이다.
   심야 시간을 즐기기로는 남자도 남 못지않다. 남자의 취미는 조각이다. 남자는 은행나무를 조각의 소재로 취한다. 남자가 즐겨 쓰는 조각도는 신형 전동 조각도이다. 전기의 힘으로 회전되는 회전식 조각도다. 남자의 작업 시간은 보통 2시간이다. 자정에서부터 2시까지가 남자의 작업 시간대이다. 남자의 집은 교외의 단독 주택이다. 그래서 심야 시간의 작업이 가능하다.
남자는 여인의 하반신의 조각에 심취했다. 특히 넓적다리와 종아리의 질감을 살리려고 혈안이었다. 질감의 처리에 있어서 남자는 천부적인 듯했다. 남자의 손을 거치면 조각은 생명력을 찾는 듯했다. 조각도에서 분출되는 섬광. 금세라도 조각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만 같았다. 남자는 내 다리의 각선미에 만족스러워했다. 작업을 하면서도 연방 탄성을 내질렀다.
   “그래, 치솟는 힘, 바로 그거야.”
주먹을 불끈 쥐었다 펴면서 쾌재를 불렀다. 모델로서 작가에게 기쁨을 주는 건 행복이다. 과외지도를 받는 1년 동안. 매주 두 번씩 남자의 모델이 되었다. 남자는 조각을 함에 있어서 언제나 경건했다. 내겐 남자의 예술관에 대한 자존심이 돋보였다.
유년기의 자존심에 생각이 미치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중학교 점심시간 때였다. 반찬이라곤 연중 김치뿐인 도시락을 펼칠 때였다. 짝이 가소롭다는 듯 떠들었다. 도시락 반찬이 1년 내내 뻘겋잖아? 이래도 나보다 공부를 어떻게 잘 하지?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머리채를 그대로 끌어당겨 버리고 싶었다. 격분하여 그대로 밀쳐 버리고도 싶었다. 하지만 끝내 참았다. 더 비참해지기 싫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남자는 작품에 대한 관점을 얘기하곤 했다.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조각을 한다는 건 새로운 의미의 부여이거든. 의미의 부여가 뭔지 알지? 대꾸 대신 남자의 눈을 응시했다. 이전에 없었던 뜻을 새겨 넣는 거야. 새로운 뜻, 내 말 알겠어? 들을수록 갑갑한 느낌이었다. 중요한 듯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조각에 뜻을 부여해서 어쩌자는 건가? 남자는 조각도를 들면서 내뱉었다. 덩그런 질감만이 허벅지를 나타내지는 않아. 조각이 살려면 거기엔 숨결이 일렁거려야 돼. 살아있는 숨결 말이야. 남자의 조각에는 실물만큼의 생동감이 느껴졌다. 남자가 추구하는 게 그거였다. 남자는 1년 동안을 나를 모델로 조각했다. 그 덕에 나도 대학에 붙었다. 개인 과외의 효과는 놀라웠다. 감격한 나머지 대학 4년 동안도 자발적인 모델이 되어 주었다. 모델이 되면서도 나는 감탄했다. 남자의 집요한 예술의 혼에.
   눈빛이 매섭기로는 과장도 예사롭지 않았다. 견습사원의 딱지를 떼 주는 방편이 여자를 취하는 거였다. 견습사원들은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취업의 문이 별 따기인 세상이니까. 오히려 과장이 부르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다. 여자를 취하고 나선 사진을 찍었다. 숙명적인 일이나 되는 것처럼. 그리고는 앨범으로 묶곤 했다. 여자와 결별할 때면 다른 여자의 앨범을 보여주곤 했다.
남자와 과장을 떠올리자 개켜진 상념이 피어올랐다. 빛줄기 앞에 음영이 드러나듯. 세상은 시시각각으로 다른 음영으로 명멸하는 느낌이 들었다. 벽촌의 가난이 그늘이었다면 상경은 빛줄기였으리라. 취업과 대학의 진학이 빛이라면 과장과의 불륜은 그늘이었으리라. 명암이 혼재하는 일상의 궤적. 그 어디서도 삶은 충분한 의미를 가진다고 여겨졌다. 그러면서도 불시의 세파와 어우러지면 불안에 버둥거려야 했다. 마치 천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하듯. 어디에서든 가슴은 늘 답답함에 시달렸다. 어려운 여건에도 언젠가는 빛줄기가 비춰지리라 여겨졌다. 빛이 없는 가슴엔 언제나 답답함이 서린 느낌이었다.
   답답한 가슴에도 청량제와 같은 건 애인의 숨결이었다. 그만 곁에 있다면야. 낮엔 일하랴 밤엔 야간학부에서 공부하랴 힘들 때였다. 때때로 과제물이 부여되었다. 응용 프로그램의 활용만이 아닌 프로그램의 개발에 관한 거였다. 새로운 프로그램의 개발에는 아이디어가 필요한 터였다. 아이디어를 짜낸다는 건 언제나 고통이었다.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건 그의 얼굴이었다. 골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였다. 도서관에서 나오면서 그가 나를 이끌었다. 잔디밭 아래엔 빌린 승용차가 있었다. 휴일에만 차량 대여소에서 잠시 빌리곤 했다. 중고 엘란트라였다. 대뜸 가평으로 가자고 했다. 북한강가에 이르러 둘은 차에서 내렸다. 파드득거리는 물결에서 무한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강물을 바라보던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아이디어란 출렁이는 물결과도 같은 거야. 가물거리면서도 연신 살아 있잖아? 소멸될 듯하면서도 새로운 활력으로 일어서는 것. 아이디어란 바로 이런 데서 얻어야 돼.”
   그의 말이 생명수로 느껴졌다. 두 시간 가량을 강물을 바라보다가 나름으로 뭔가를 얻었다. 전율할 듯한 새로움이었다. 어때? 해답을 얻은 거 같애? 설사 해답이 아니어도 좋았다. 긴장했던 정신의 완화. 경직 상태를 벗어나면서부터 활력이 생기는 것이리라. 강가에 앉아 처음으로 그의 품에 안겼다. 그를 사귄 지 두 달만이었다. 세상이 그처럼 아늑할 수 없었다. 어떤 걱정거리조차 걱정스럽지 않은 상태. 그의 여유는 미소로부터 생기는 건 아닐까도 싶었다. 언제나 얼굴 가득 남실대던 미소. 그의 미소엔 잠재된 힘이 느껴졌다.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마냥 감미롭기만 했다. 이따금씩 퍽퍽 물 튀기는 소리가 났다. 물고기 떼가 튀어 오르는 모양이었다. 이래저래 생동의 현장이 되었다.
   생동이란 말에 문득 물안개가 연상된다. 유리문이 열리면서 청년 셋이 들어선다. 온몸이 물에 젖어 번들거린다. 우산을 썼음에도 폭우 탓이리라. 우기가 서릴 무렵이면 늪지대엔 물안개가 핀다. 피어오르는 물안개에선 비상의 기세가 내비친다. 때론 부드럽게 물결처럼 흐르기도 한다. 그러다가 폭우처럼 휩쓸리는 야성도 드러낸다. 물안개가 서걱대는 날이면 가슴이 들끓는다. 물안개에서 야성이 들끓듯. 나의 신체도 성적으로 흥분한다. 과장으로부터 사내의 맛을 알아 버린 나다. 치솟는 물안개만 보면 발기된 남근을 떠올린다. 넘치는 힘으로 끄떡대는 실체. 물안개만 피면 내 눈엔 핏발이 선다. 아련한 세계로의 비상이 그립기 때문이다.
시내와 해변 마을의 경계에는 점멸등이 서 있다. 내가 일하는 비디오 대여방과 노래방은 이전엔 늪지대였다. 늪지대를 시에서 택지로 조성하여 신시가지로 만들었다. 해변의 돌섬 부근에 고개가 있다. 바다에서 고개를 올려다보는 왼쪽 길이 시내로 통한다. 오른쪽 길이 늪지대로부터 조성된 신시가지인 해변 마을로 통한다. 점멸등은 두 길의 분기점이 있는 고개에 세워져 있다. 해변마을엔 신시가지라 고층건물이 많다. 시내에서는 규제로 까다로운 모텔, 여관, 호텔, 나이트클럽 등이 난립한 상태다. 사람들의 열기로 뜨거운 곳이지만 저지대의 특성만큼은 어쩔 수 없다. 늪지대였던 원인으로 우기만 되면 해변마을 전역이 물안개로 자욱하다.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도 생동하는 삶의 현장. 이게 해변을 낀 신시가지의 특성이다. 사람들은 음모라도 꾸미듯 안개자락에 휩쓸려 신시가지를 넘나든다. 해변마을이 물안개에 휩싸이면 금방이라도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듯하다.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위기감에 시달린다. 유리문 밖으로는 사방이 캄캄하다. 인근 건물의 불빛이 스며든다곤 하지만. 유리문에 흐르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내 나이 스물셋에, 언제까지 늪지대에 머물러야 할지 암담하기만 하다. 어쩌다 이곳까지 흘러들었는지 생각할수록 눈시울이 젖어든다. 빠져나갈 탈출구가 있기나 한지? 아니면 비상의 날개가 예전부터 꺾였던 건 아닌지? ‘휭휭’대는 바람결에는 살기마저 실린 듯하다. 달려드는 바람결이 버거운 듯 유리문은 연신 비틀댄다. 이렇게 폭우가 내리다간 신시가지는 수중으로 잠길지도 모를 일이다. 이 상태로 세 시간만 내린다면? 신시가지는 물론 시내까지도 위험할 지경이리라. 물이 차오르면 소용돌이가 일 것이다. 소용돌이를 생각하면 과거의 잔상이 떠올라 괴로워진다. 때때로 의식 속으로 밀려드는 잠언이 있다. 소용돌이는 비상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라는. 소용돌이를 헤쳐 나가야만 비상에 이르리라는 거라고.
   뻐꾸기시계가 열두 번을 울어댄다. 문을 닫아걸고 노래방으로 갈 시간이다. 시간 다 되었어요. 내 목소리에 사람들이 줄지어 테이프와 만화를 내민다. 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를 채운다. 여전히 빗줄기는 그치지 않는다. 나는 마음이 급해진다. 이제 해변으로 돌출된 노래방 ‘자메이카’로 가야 한다. 거기에서는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파트타임으로 근무한다. 급히 시동을 걸어 차를 몬다. 차에 오르는 사이에도 옷이 많이 젖었다. 빗방울의 굵기가 예사롭지 않다.
   노래방에 닿으니 여주인이 반색하며 맞는다. 왔어? 옷이 많이 젖었네. 어서 안으로 들어가. 40대 중반의 여주인은 마음이 너른 여장부다. 주변의 어떤 사람과도 이해관계로 다투는 모습을 본 일이 없다.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산다. 데스크에 다가서니 여주인이 5호실을 가리킨다. 한의사 김씨야, 방금 들어갔어.
   호색가로 알려진 50대 중반의 사내다. 5호실에 들어서니 사내가 기쁜 표정을 짓는다. 비 많이 맞았구나. 물기 좀 닦아야지. 머리의 가운데 부분이 벗겨진 사내다. 탁자 위의 티슈를 내게 건네준다. 그리고는 맥주잔을 맞부딪친다. ‘챙’하고 맑은 선율이 흩어진다. 나보고 먼저 노래하라고 한다. 50대의 정서에 맞추느라고 ‘하숙생’을 부른다. 한의사는 일어서서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춘다. 스텝을 살펴보니 숙련된 춤꾼이다. 내게 퍼런 지폐 다섯 장을 들이민다. 그리고는 브래지어 캡을 벗긴 채 젖가슴을 애무해댄다. 손길이 여자보다도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 노래가 끝나자 마이크를 건네받고는 ‘바닷가의 추억’을 부른다. 그 나이에 무슨 바닷가의 추억이랴 싶다. 굵은 목소리가 안정감을 준다. 열창하는 노래의 느낌상으론 어떤 추억이 있을 것도 같다. 세월을 건너뛰어 노래하는 그의 젖은 눈빛이 애절해 보인다. 나는 사내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는다. 자신이 노래할 때만은 사내의 손이 얌전하다. 내가 노래할 때면 어김없이 젖가슴을 애무한다. 악력이 대단하여 젖무덤이 터져 버릴 지경이다. 노래방 생활에 익숙한 정경이다. 그러다가 마음에 맞으면 모텔이나 여관으로 가면 된다. 하지만 2차까지 가는 남자들은 별로 없다. 그저 상체만을 어루더듬을 뿐. 그리하여, 그들의 지난날의 포근한 추억을 떠올리는 것이리라. 추가 시간을 주어도 사내는 한 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시간이 되면 자리에서 딱 일어난다. 그의 단아한 예절 하나는 돋보인다. 사내가 ‘꿈꾸는 백마강’을 부를 때 핸드폰의 불빛이 깜빡인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실외에서 전화를 받는다. 쉰다섯 살의 양장점 주인 신 씨다. 몇 시에 끝나? 간단히 응답한다. 새벽 2시요. 잘 알잖아요? 털털한 신 씨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오늘 새벽 괜찮지? 섹스하고 싶다는 주문이다. 흔쾌히 좋다고 대답한다. 신 씨는 나의 고객 중의 하나다. 이 바닥에서는 고객의 확보가 중요하다. 고객의 수는 생계 기반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나이가 젊고 피부가 윤택할 때. 최대한 고객을 확보해야 한다. 나이 들면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폴더를 닫고 5호실로 되돌아가는 과정에 주변 호실을 슬쩍 살펴본다. 대부분의 남녀가 끌어안고 있다. 그런 자세로 뜨거운 애무를 해댄다. 남녀가 노래방을 찾는 일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취기도 가눌 겸 조금 더 옆방을 둘러보기로 한다. 다들 남녀 둘씩 뒤엉켜 있다. 느낌으로 대다수가 불륜의 커플들이다. 모텔이나 여관으로 들어서기 직전의 방문 코스인 듯하다. 누군들 욕정이 일면 온전하랴만 간혹 특이한 사람이 있기는 했다.
   학원 강사인 남자가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넓적다리를 들여다보며 조각하면서도 욕정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것도 줄곧 5년간이나. 작품을 만드는 이외에는 일체의 잡념이 배제된 상태였다. 조각에 임하는 남자의 눈빛은 시냇물처럼 맑았다. 자세마다 경건함이 서려 품격이 돋보였다. 한 마디로 남자는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다. 흥분에 몸을 떤 건 오히려 내가 아니었나 싶다. 나의 질 액이 샅을 적셔도 남자는 초연했다. 남자는 작품으로만 의사를 나타내는 작가였다.
   남자는 내가 졸업하면서부터 나를 모델로 쓰지 않았다. 남자의 조각 기술이 향상된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동 조각도를 잡은 순간의 남자는 경건한 예술인이었다. 탐미적으로 반짝이던 눈빛. 모터의 전동력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감응하던 남자였다. 남자를 못 만난 지도 벌써 6개월째다. 언제였던가? 마지막으로 그를 본 건? 아마도 졸업한 지 한 달만인 3월 하순경이었으리라.
건물 바깥에는 여전히 폭우가 위력적이다. 5호실로 되돌아가기 전에 건물 밖을 내려다본다. 우중에도 바깥은 네온사인의 불꽃으로 눈부시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5호실로 돌아갈 작정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날. 연인인 그도 함께 졸업했다. 그는 나보다 3살 연상이다. 졸업하기 전에 제약회사로 취업이 확정된 그가 마냥 부러웠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대학 3학년 때였다. 그를 만나는 순간부터 가슴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 이미 사내의 몸을 알아 버린 나였다. 과장과는 이미 3년 동안이나 육정을 나누어 왔다.
   그를 만나 연인이 되면서부터 과장과 회사로부터 벗어났다. 당장의 생계를 해결이 필요했다. 그래서 비디오 대여점의 종업원이 되었다. 좋은 주인을 만난 탓에 급료가 괜찮은 편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시기엔 취업이 우선 과제였다. 그랬는데도 정규직으로의 취업은 너무나 어려웠다. 양성 평등이란 이론이 통하지 않는 사회였다. 여자 채용에는 결혼과 산휴로 인한 손익부터 따지는 터였다. 그 때부터 가슴이 뒤흔들렸다. 대여점의 급료만으론 미래가 불투명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노래방의 파트타임 근무였다. 처음엔 손님과 함께 노래만 하자고 마음먹었다. 달포가 지나자 생각이 달라지려고 했다. 기왕 돈을 벌려면 적극적이어야 함을 동료들로부터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겐 연인과의 사랑이 소중한 터였다. 어떤 유혹이라도 참아내기로 했다. 단지 함께 노래만 불러주는 것으로 일관했을 따름이다.
   노래방 실내로 들어서기 전에 재차 바깥을 바라본다. 지하가 아닌 7층이어서 전망이 아주 좋다. 여전히 바깥은 폭우와 강풍으로 흐느적거린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자 지난 8월의 일이 생각난다. 벌써 한 달 전의 일이다. 한탄강 중류에서 래프팅을 할 때였다. 계곡이 가파르고 물살이 세었다. 보트에 오를 때만 해도 뭉게구름이 피는 맑은 날씨였다. 30분이 경과할 때였으리라.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계곡의 물이 불어났다. 그러면서 주변의 급경사지에서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좁은 바위틈으로 물살이 회오리쳐 내렸다. 접안하려다 고무보트가 진동에 의해 흔들렸다. 뒤쫓아 내려오던 다른 고무보트에 다시 들이받혔다. 몇 사람이 일시에 물속에 처박혔다. 구명조끼 덕에 대부분 금세 강가로 벗어났다. 구명조끼가 벗겨지면서 친구 윤지가 급류에 휩쓸렸다. 구명조끼의 플라스틱 연결고리가 끊긴 탓이었다. 감식 경찰은 보트가 충돌할 때 사람끼리 부딪히면서 파열된 거라고 추정했다. 창졸간의 일이라 구명 조교들도 쩔쩔매었다. 물에 잠긴 고목 뿌리 밑으로 윤지가 떴다 가라앉았다하며 떠내려가는데도 조교들마저 속수무책이었다. 아래로는 급경사의 골짜기였고 물살은 완연한 급류였다. 이 때 그가 뛰어들었다. 수영 실력이 탁월한 그였지만.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조교들도 못하는 일에 뛰어들다니? 순간적으로 혼란이 일었다. 당장 되돌아 나오라고 외치고 싶었다. 창졸간의 일이었다. 소용돌이에서 두 바퀴나 윤지가 맴돌았다. 발악적으로 그가 윤지를 물가로 밀친 순간이었다. 그가 균형을 잃으며 바위에 머리를 부딪고는 나뒹굴었다. 윤지는 구조되었지만 그는 두개골 파열로 절명했다. 하도 찰나간의 일이어서 눈이 미심쩍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나는 연인을 잃고 말았다. 빗줄기만 보면 언제나 그가 그리워진다. 사무치게 그립지만 이제 어디서 만나랴? 나도 몰래 눈시울에 이슬이 맺힌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공황감에 젖어 지냈다. 아무리 가슴을 달래려고 해도 눈물부터 먼저 비쳤다. 현실이 아무리 고달파도 벗어날 마지막 위안처였던 연인. 그를 볼 수 없다니? 나의 혀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텔레비전 화면에 매혹되어 래프팅하러 가자고 그를 졸랐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도 나에 대한 배려는 유달랐던 그였다. 제약회사 연구실에서 그는 인터넷을 검색했다.
   “흐음, 한탄강이 좋겠네. 동강에도 있지만 경사도라든가 박진감은 한탄강이 낫겠어.”
말을 마치자 그의 시선이 나의 얼굴에 머물렀다. 동의하느냐고 묻는 터였다.
   “그래, 준서 씨 제안대로 할게.”
그는 만족한 듯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잠시 멈칫거렸다. 그의 연구실에 드나들 다른 사원들 때문에 불안했기 때문이다. 나의 눈치를 챘음일까? 괜찮아. 여기는 제한 구역이라 아무나 못 들어와. 포근한 느낌에 흡수되듯 그의 가슴에 기대었다. 그가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범절을 지키느라 그랬으리라. 그가 나타내는 최상의 애무는 포옹과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일이었다. 연애 기간 3년 내내. 애무에 있어선 완전히 답보 상태였다. 어떨 때엔 그가 진정 나를 사랑하는지도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그가 죽기 전까진 과장에게만 몸을 허용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는 터였다. 노래방 고객 중 누구든 마음만 맞으면 몸을 주기로 했다. 어차피 노래도 흐르고 세월도 흐르는 터였다.
   이제 5호실로 다시 들어갈 시간이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내게 의욕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 유리문을 밀치며 실내로 들어선다. 한의사가 연거푸 혼자 열창을 하고 있다. 최신의 팝을 불러대고 있었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노래들이다. 노래를 부르면서 힐끗 나를 쳐다본다. 전화가 웬 이리도 길었어? 이렇게 묻는 듯하다. 화장실까지 들렀다 왔어요. 한의사가 고개를 끄떡인다. 한의사는 좀 특이한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주변 사람들의 얘기로 한의사는 한량이다. 한의사는 악기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재주꾼이다. 내가 느끼기에 한의사는 화술에 있어서도 달변가다. 한 마디로 사람에 대한 흡인력이 대단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한의사를 좋아한다. 어떨 때는 돈을 받지 않고도 한의사와 몸을 섞는다. 한의사가 마이크를 내게 건네며 미소짓는다. 난 멀리 도망 간 줄 알았어. 나는 수줍은 듯 웃으며 노래를 시작한다. 노래가 흐르면서 마음에 뜨거운 것이 치솟는다. 그러면서 애틋한 연민이 가슴으로 밀려든다.
   강사인 남자와 딱 한 번 데이트를 나선 적이 있다. 모델 역할을 끝내고 남자의 집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남자가 나를 불렀다. 내일 나랑 소양호에 안 갈래? 나는 날짜를 헤아렸다. 토요일 오후라서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기꺼이 동의했다. 토요일 오후의 경춘가도는 펑 뚫려 있었다. 차가 호반에 이르렀을 때였다. 소양호가 내뿜는 정취가 한없이 황홀했다. 파랗게 가라앉은 물색과 우아한 자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청정해지는 느낌이었다. 수려한 호반을 산책할 때였다. 내가 왜 조각에 몰입한 줄 알아? 알 수 없어 나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왠지 너에게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늘마저 유난히 쾌청한 날씨였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모르지만 궁금한 마음이 일었다. 소양호에까지 와서 이야기를 할 정도라면.
   난 현재까지 애인이 없어. 물론 한때는 있었지. 군복무 중일 때까지는. 힘든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마중 나오기로 한 여자가 안 보였어. 전화를 해도 전원이 꺼져 있다는 메시지만 들리더군. 가슴에 안개가 차오르는 느낌이었어. 내 이 기분 알아? 나는 말끄러미 남자의 눈동자만 들여다보았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애달픈 생각이 들었다. 호반의 한적한 곳에서였다. 맥주 캔과 구운 오징어를 남자가 내밀었다. 캔 뚜껑을 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치 세상을 다 살기라도 한 듯. 남자의 얼굴엔 체념의 색채마저 짙게 드리워졌다. 제대 후 한 달이 걸려서야 여자를 만났어. 그것도 내가 화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랬더니 여자가 뭐랬는지 알아? 내가 여자한테 보여준 절제보다는 다른 사내가 드러낸 용기가 더 인간적이었다는 거야. 똑똑히 한 방 맞은 셈이었지. 그러한 여자에게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어? 그게 그 여자와의 마지막이었어.
   근데 헤어지고 나서부터 내 마음이 자꾸만 끓어오르는 거야. 수시로 언제 어디서든 말이야. 이를 잠재울 만한 돌파구가 필요했어. 돌파구가 없이는 정신이 병들 것만 같았어. 그래서 착수한 것이 조각이었어. 조각을 하다 보니 여자에 대한 그리움이 떠오르더군. 그리움의 대상을 찾아 나서는 신체의 부위가 다리이잖아? 그래서 여자의 다리가 내 조각의 중요 영역이 되었어. 마치 조각에 마음이 실리면 여자가 나를 찾아올 것만 같았거든. 여자의 매끈하고도 건강한 다리로.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가슴에 찬바람이 일었다. 은행나무에 그토록 생명감을 실어 표현하던 여인의 넓적다리. 그게 결국 황량한 마음을 달래려던 수단이었다니. 남자의 애잔한 마음에 눈시울이 젖었다. 여자와의 이별로부터 생긴 숱한 애상의 편린들. 그걸 조각으로 추스르던 남자가 애달파 보였다. 그 날. 내게 조금이라도 남자에 대한 연모의 정이 있었다면. 나는 기꺼이 남자와 어우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텅 빈 남자의 마음임에랴. 애잔스러웠지만 이미 나의 관심 밖이었다. 소양호를 되돌아올 때 남자와 나는 거의 말이 없었다. 이미 공통의 화제를 상실한 터였다. 귀경하는 내내. 내 가슴은 남자에 대한 연민으로 들끓었다.
   한의사가 나의 유두를 어루만진다. 한의사의 손길은 부드럽고도 따스하다. 맥주 캔을 들려주며 한의사가 눈짓을 한다. 한 모금 마시라는 거다. 후렴을 마치기도 전에 유리문을 주인 여자가 두드린다. 다른 호실로 갈 시간이 되었다는 신호다. 아닌 게 아니라 한 시간이 경과되었다. 한의사를 전송하고는 7호실로 들어간다.
   중고 자동차 매매상이라는 사내다. 40대 후반의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사내다. 서로 눈짓으로 인사를 나눈다. 이 사내도 고객 중의 한 사람이다. 열 번 만나면 한 번 섹스를 원할 정도다. 사내는 주로 노래를 즐기는 편이다. 보이지 않게 자신의 관리에 엄격한 사람이다. 그가 건네주는 맥주잔을 든다. 차가운 액체가 그대로 흡수되는 느낌이다. 사내는 오로지 트로트만을 불러댄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파들거린다. 폴더를 여니 신 씨다. 잊지 말라는 확인 전화다. 다시 사내의 노래 네 곡을 들으니 새벽 2시다. 이젠 노래방을 닫을 시간이다.
   건물의 계단을 내려서니까 신 씨가 손짓을 한다. 흑색 에쿠스 승용차 안에서다. 문을 닫으니 차가 꿈속처럼 가물거리며 흘러간다. 나의 나른한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사내가 말한다.
   “피곤하면 눈 좀 붙여. 대성리에 가서 깨울게.”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는다. 어느새 잠이 들었나 보다. 사내가 나를 깨운다.
북한강 물이 흘러내리는 경기도 대성리 별장이다. 사내의 아내는 아들을 만나느라 미국에 체류 중이라고 한다. 실내에는 박하향이 은은히 감돈다. 사내와 양주잔을 기울이며 음악을 듣는다. 몇 병째인가 양주병이 마루에 쓰러진다. 점차 취기가 오른다. 사내가 오디오를 만지더니 블루스곡이 흘러나온다. 넓은 마루에서 사내와 블루스를 춘다. 온 몸에 땀이 흐르도록. 세 시간가량 춤을 추었다. 몸이 젖자 사내가 나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선다. 함께 욕조에 들어가 눈을 감는다. 꽤나 시간이 흐른 모양이다. 다시 마루에 들어서니 아침 햇살이 드리워져 있다. 그와 뒤엉켜 색정을 나눈 후에 나란히 눕는다. 전생의 부부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대로 평온한 자세로 잠이 든 모양이다.
   잠결에 핸드폰이 심하게 울어댄다. 폴더를 여니 시골 전화번호다. 이내 귓전으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밀려든다.
   “엄마가 많이 아파. 바빠도 잠시 다녀가렴.”
뒷말은 다 듣지도 못했는데 실수로 폴더가 닫혔다. 전화를 받고 보니 머리가 어지럽다. 고향을 떠날 때의 각오가 선명히 되살아난다. 뜻을 이루고야 귀향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랬기에 아직은 돌아갈 시기가 아니다. 뭐라고 핑계를 대나? 머릿속이 잠시 혼란스럽다. 제일 좋은 건 잠을 자며 잊는 것이다. 이게 수면의 장점이다.

   장례식장에는 친척들이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친척들의 눈빛에는 하나같이 노기가 잔뜩 서렸다.
   “쟤네 엄마가 저렇게 아팠어도 얼굴 한 번 안 디밀었어? 저런 줄 알았다면 누가 뼈 빠지게 자식을 공부시켰겠어? 아주 못 된 년이야.”
이래저래 핑계를 대다가 엄마가 죽고서야 고향에 닿았다. 엄마의 잠든 얼굴만 잠시 들여다보다가 떠나온 나였다. 그랬는데 이렇게 세상을 떠날 줄이야?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상복이 다 젖을 정도로 눈물이 흘렀다. 이제 와서 저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아주 형편없는 년이야. 텅 빈 가슴이 자꾸만 떨렸다. 아버지의 전화를 받는 순간에 왜 시골로 내려가지 않았던가? 생각할수록 자꾸만 설움이 치솟았다.
   “어이, 왜 이래? 어디 아파?”
사내가 나의 뺨을 두드리며 나를 깨운다. 사내를 보자 이내 안심이 된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한 정경이었다. 세상을 떠나기엔 아직 어머니는 젊은 편이다. 하지만 혹시 예지몽은 아닌지 두려워진다. 그랬어도 현실의 나를 떠올리자 슬그머니 생각이 바뀐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라니깐.
   우기에 휩싸인 고개. 가랑비 사이로 점멸등의 불빛이 비칠댄다. 새벽 네 시를 갓 넘긴 시점이다. 신 씨는 고개에서 나를 내려주곤 사라진다. 고개의 주차장엔 나의 카니발이 엎드려 있다. 나는 서서히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 나온다. 점멸등 앞에만 이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신시가지로 차를 꺾을 때마다 시내 방향으로 시선이 끌린다. 가 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해변 마을엔 안개가 잔뜩 끼어 있다. 안개의 소용돌이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소용돌이만 일면 가슴이 저리다. 샅이 젖어들면서 성적인 흥분을 느낀다.
   어디서 날아든 걸까? 매 한 마리가 공중을 선회한다. 이른 새벽에 잠을 못 든 탓일까? 아님 물줄기를 찾지 못해 비상했을까? 갖은 상념이 떠올라 잠시 혼란스럽다. 매에겐 그래도 기류를 헤어나갈 날개가 있지 않은가? 그 날개 하나면 어떤 소용돌이도 문제가 없으리라.
   매가 안개에 묻히면서 과장의 얼굴이 생각난다. 채워지지 않는 욕구 불만으로 버둥대던 사내. 지금은 몇 번째 여인의 팬티를 벗기고 있을까? 혹시 이제는 욕구 불만에서 벗어났을까? 생각할수록 궁금하다.
   어느새 매가 안개더미 위로 치솟는다. 매가 비상할 때는 그가 그리워진다. 언제나 따스한 마음으로 대해 주던 그. 상대의 아픈 곳일수록 조심스레 배려해 주던 그. 우기가 끼는 날이면 가슴으로 밀려드는 그의 얼굴. 생각할수록 목이 멘다. 내가 래프팅을 조르지만 않았더라면? 그 날 폭우가 내리지만 않았더라도. 생각이 깊어질수록 그에 대한 회한만 깊어질 뿐이다.
   어느 순간 매가 안개와 수평으로 난다. 수평으로 나는 매의 모습은 경이스럽기까지 하다. 수평 비행이 지속되는 동안. 이 번엔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변심한 연인에 대한 정한을 조각으로 추스르던 남자. 회전 조각도에 깎여 나가던 은행나무의 여릿여릿한 거스러미들. 남자는 지금 어떤 여인을 세워 놓고 조각할까? 혹여 조각이 끝나면 울지나 않을지? 스산한 느낌으로 몸이 움츠러든다. 잠시 눈을 좀 붙이고 아침이 되면 남자를 만나러 가야 한다. 지난봄 이후로는 못 만난 남자. 남자가 나를 찾는 이유는 뭘까? 아직도 애인을 못 잊어서 나를 조각하려는 건지? 아무튼 기다려 볼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피곤하여 아무 데나 드러눕고 싶다. 피곤한 나날들. 잠들어 버리면 다시는 이승으로 못 깨어날 것만 같다. 왠지 그런 느낌이 차가운 안개더미로부터 느껴진다. 남자를 만나고 나서는 병원에 들러야겠다. 길이 팼는지 바퀴가 쿨렁인다. 차체마저 심하게 흔들렸음일까? 뒤차의 경고용 전조등 불빛이 흔들린다. 뒤차가 곁을 추월하며 연방 뭐라고 떠들어댄다. 눈이 자꾸만 감기려고 한다. 신시가지에 들어서면서부터 부쩍 심한 증상이다. 비상등을 켜고 차를 안전한 곳에 정차시킨다. 깜빡이는 비상등을 바라본 순간. 가물거리던 의식 속에서 소스라치게 놀라 깬다. 고개에 매달린 점멸등을 나의 비상등에서 다시 보게 되다니. 깜빡이는 비상등의 불빛에 힘이 없어 보인다. 저렇게 깜빡이다가는 언제 멈출지 모를 일이다. 차량에게도 나에게도 점차 짙은 안개더미가 몰려든다. 도로를 질주하던 차량들로부터 비상등이 도깨비의 불빛처럼 살아난다. 스르르 졸음이 몰려든다. 비상하기엔 너무나 조용한 시각이라 느껴진다. 잠시 차에 엎드려 기댄다. 이 때 느닷없이 그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든다. 날개를 가져야 돼. 소용돌이를 헤쳐 나가려면. 가물거리는 의식 속. 교통경찰이 다가서는 듯하더니 이내 영상이 끊긴다.

(200자 원고지 92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