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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점으로의 탈출

손정모

당신은 나무를 다듬는다. 두께는 20cm이며 각 변의 길이가 30cm인 정방형의 피나무 목판. 이게 당신의 작업 대상이다. 오른손에 왼손을 겹쳐 얹어 끌칼을 비스듬히 민다. 바닥과 30도 각도를 유지하면서 작업을 계속한다. 결의 진행 방향으로 끌칼을 들이민다. 황백색의 거스러미가 속치마자락처럼 얇게 벗겨진다. 얄따란 거스러미가 일어나면서 목향이 인다. 더불어 알싸한 그리움이 휩쓸린다. 당신은 봉긋한 여인의 젖가슴을 만들어내고 있다. 당신의 시선은 가끔씩 사진을 더듬는다. 여인의 젖가슴이 덩그렇게 드러난 알몸 사진이다. 땀이 밴 대자리 위에서다. 당신은 단아한 자세로 작업 중이다. 대자리는 사방이 엉덩이에 시달려 윤기가 난다. 당신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대자리를 대견해 한다. 대자리에 앉아 사진을 들여다보며 조각을 한다. 대자리는 당신의 숨결마저 식별하는 듯하다. 각 변의 길이가 3m인 정방형의 대자리. 당신에게 대자리보다 편안한 작업 공간은 없다. 동작을 멈추고 사진을 세밀히 관찰한다. 여인의 상체 중. 쇄골에서 배꼽까지의 몸통을 정방형에 새기려고 한다. 턱밑과 배꼽이 그리는 직선과 두 젖꼭지가 그리는 직선은 서로 수직이다. 직선의 교차점을 목판의 중앙에 할당한다. 봉긋한 돌출감을 표현하려면 끌칼과 창칼이 필요하다. 입체감을 찾기 위해 사진에 돋보기를 갖다댄다. 젖무덤의 입체감이 한결 도드라진다. 젖무덤에 실안개 같은 잔영이 드리워진다. 유리문을 통해 베란다를 내다본다. 내려다보이는 북한산 입구의 등산로가 정갈한 색채로 밀려든다. 남동 방향으로 해가 얼굴을 들이민다. 햇살은 노송나무가지에서 대롱거리다가 파도처럼 휩쓸린다. 등산로 쪽으로 돌출한 아파트여서 전망이 좋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난 겨울. 그 해를 넘기고서도 올여름까지는 그녀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당신은 나뭇결을 다듬는다. 대상은 목질이 부드러운 피나무 판목이다. 떠도는 목향에 그리움의 감정이 일렁인다. 투명 유리창이 훤해진다. 잠시 구름에 가려졌던 햇살이 성큼 내닫는다. 대자리와 당신은 햇살을 받아 눈부시다. 당신은 조각도를 내리고 잠시 사진을 들여다본다. 여인이 붙들고 선 느티나무가 파드득거리는 듯하다. 사진의 중앙엔 알몸의 여인이 서 있다. 돌출한 여인의 젖무덤이 도발적이다. 점차 도드라지는 조각상의 젖무덤에도 힘이 실린다.

당신에겐 해외로 나다니던 그녀가 떠오른다. 일순간도 멈출 수가 없다던 그녀였다. 작년 여름철이었다. 폭우 쏟아지던 공항 입구에서였다. 당신의 승용차에 오르며 그녀가 말했다. 거기는 쾌청한 날씨였는데 여긴 폭우가 내리네요. 그간 작품 많이 만드셨어요? 2주일간의 스리랑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그녀였다. 그저 그렇죠, 뭐. 여행은 재미있었겠네요. 당신의 가벼운 대꾸에도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서른두 살의 그녀는 종합병원장의 아내였다. 또한 그녀는 생명공학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 당신과 연인이 된 지는 2년째다. 결혼 초기부터 그녀는 남편과의 성격 차이로 고민해 왔다. 그녀는 정신적인 압박감에 우울증까지 겹쳐 허둥대었다. 그러다가 화랑에서 당신을 만난 거였다. 그 때 당신은 작품전을 열던 중이었다. 마침 당신은 이혼한 직후의 독신이었다.
차가 성산대교를 거쳐 강변북로에 접어들 때였다. 폭우가 가랑비로 변했다. 그러면서, 한강의 동편에 무지개가 성큼 떠올랐다. 우와, 좀체 못 보던 무지개예요. 그녀의 달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근데 무지개의 속성이 싫어요. 아름답지만 오래 못 가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그녀의 눈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사랑도 환상의 무지개일진대. 환상의 수명치고 긴 게 있을까?’

잠시 잡념을 추스르는 듯. 당신의 입술이 움찔대었다. 왕십리로 갈까요? 그녀가 활짝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의외로 도로가 펑 뚫렸다. 어머, 벌써 모텔 골목이네요? 그녀보다 세 살 연하의 당신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따스한 물침대가 있는 모텔로 향했다. 원형의 침대 위에서 당신은 자연스레 그녀와 뒤엉켰다. 아늑하고도 향긋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체온과 더불어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 날 새벽에 콜롬보를 떠난 그녀였다. 오후 4시에 인천공항을 빠져 나올 무렵. 그 때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승용차에 그녀를 태우며 당신이 입을 열었다. 여행의 감회는 어땠어요? 당신의 말에 그녀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캔디 호수의 불치사(佛齒寺) 주변으로 펼쳐지던 페라헤라 축제와 야간 행렬의 이미지가 강렬했어요. 속삭이듯 그녀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더욱 압권이었던 건요. 5개의 석동으로 구성된 담불라 석굴이었어요. 석동마다 들어찬 석불과 벽화로 체온을 느낄 정도였어요. 석동에서 바라다본 180m 높이의 바위산에 내걸린 초승달. 초승달이 빚어내는 정취가 너무 서러워 몸을 떨었어요. 달빛이 스러질 때까지. 마냥 바위산 언저리를 서성거렸죠. 그녀의 마지막 음절에는 울음기마저 서렸다. 잠시 그녀의 시선이 창 밖으로 던져졌다. 당신의 시선도 그녀의 눈길을 쫓았다. 습기 찬 골목에 밤안개가 피어올랐다.

창칼로 우측 쇄골의 하단부를 다듬는다. 사진에 드러난 쇄골엔 잔물결이 일렁댄다. 너무나 섬세해서 가슴이 떨릴 지경이다. 살짝, 아주 살짝 패게 골을 다듬어야 한다. 이러자면 창칼과 둥근칼을 조화롭게 써야 한다. 창칼이 지나간 홈은 둥근칼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곡면과 평면의 적절한 배합. 환상적인 배합을 찾아야만 한다. 이건 바닥면과 조각도의 각도와 조각도의 삽입된 깊이에 의해 다스려진다.
해는 정남을 지나고 있다. 온 베란다 안이 환해진다. 당신은 잠시 휴식을 취한다. 베란다 바깥의 경치에 눈이 이끌린다. 이십대 초반의 아가씨들이 등산로에 들어선다. 타이트한 옷으로 인해 젖가슴이 도드라져 보인다. 나긋나긋한 여자들의 몸매. 여자의 몸매를 떠올리자 사진의 여인이 생각난다. 여인은 누드 사진 모델인 스물네 살의 아가씨다. 여인은 초등학교 2학년 때에 부모를 잃었다. 빙판길 추락 교통사고였다. 학업을 마치고도 자폐증으로 시달리던 여인이었다. 일시에 사랑을 잃어버린 여자이기도 했다. 누드모델로 당신의 카메라 앞에 서던 날이었다.

“아저씨가 내 마음을 벗겨야만 옷을 벗을래요.”

그러면서 불신의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보았다. 창졸간에 당신은 당황스러웠다. 마음을 벗기라니? 어떻게 마음을 벗겨? 마음을 벗기라는 말에 당신은 산울림을 떠올렸다. 발성체가 있어야만 되울리던 음파의 소절들. 발성체를 찾느라고 당신은 잠시 먹먹한 심경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쓸 듯이 들여다보았다. 시냇물이 흐르면 괼 듯한 곳이 눈동자였다. 무형의 힘에 이끌리듯. 당신은 천천히 여인에게로 다가섰다. 샘물이 바람결에 휩쓸리는 심정. 이런 심정으로 당신은 여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너무나 그윽하여 깊이를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당신은 잠시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러다가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당신은 여인의 입술에 당신의 입술을 갖다대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억압이라도 받은 듯했다. 그 때 당신의 눈은 절반쯤 감긴 상태였다. 눈을 번쩍 뜰 만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당신의 가슴은 뛰었다. 눈에 불이 번쩍 일게 따귀를 맞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여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친 순간이었다. 당신의 심장은 펄떡거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머리가 핑핑 돌고 현기증마저 이는 느낌이었다. 놀랍게도 여인은 당신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어느새 여인의 혀가 당신의 입술로 파고들었다. 달뜬 시간이 지난 뒤였다. 당신은 그녀에게 물었다.

“입술이 마음이에요?”

여인이 샐쭉 웃는다. 천천히 고개를 흔들더니 대답한다.

“어찌 같을 수가 있겠어요? 잠시 후에 얘기해 드릴게요.”

여인은 이내 옷을 벗고 자세를 취했다. 북한산을 배경으로 필름 한 롤을 소모했다. H칼라 36판 짜리 필름이었다. 옷을 입고는 여인이 당신 곁에 앉았다. 여인의 매끄러운 입술이 움직였다. 부모를 잃고는 내내 외가에서 자랐어요. 중학교에 올라서자 외할아버지마저 뇌졸중으로 숨졌어요. 그 때부턴 현실이 암흑 자체였어요. 여인은 당신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 이후로 오랜 세월 동안. 여인은 어릴 때부터의 상실감 때문에 자폐증에 시달렸다. 누드모델은 감춰진 나를 찾기 위한 최종의 몸부림이에요. 지금은 얼마큼 저를 이해할 수 있나요? 당신은 추측하기 어려우리라는 듯 여인이 고개를 내흔들었다.
여인의 이야기가 당신의 아련한 기억을 들추었다. 당신의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딴 여자와 눈이 맞아 아버지가 떠나던 날. 당신의 기억 속에는 아버지의 존재가 사라졌다. 중후한 기운으로 가정으로 밀려들던 아련한 향수마저도. 그 날 이후부터였다. 어머니는 포장마차로 생계를 이었다. 산동네를 오르내리다 보니 관절도 시원찮았다. 수면 부족으로 언제나 눈가엔 눈물이 그렁거렸다. 퀭한 눈엔 결기마저 서렸다. 그 날도 바람이 많이 불던 겨울날이었다. 당신은 어머니를 도우러 서둘러 집을 나섰다. 수능을 치른 지 일 주일만이었다. 며칠 전부터 뒷골이 무겁다던 어머니였다. 포장마차엔 사람들로 북적대었다. 구급차의 비상등도 요란히 돌아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섬뜩했다. 당신은 포장마차의 문을 급히 열려고 했다. 경찰 두 명이 제지를 했다. 아들이라고 밝혔는데도 경찰은 출입을 막았다.

당신은 고개를 흔들다가 조각도를 든다. 조각도만 들면 마음이 쉽게 정화된다. 당신이 조각의 소재로 삼는 건 여인들의 젖가슴이다. 숱한 여인들의 젖가슴. 이들을 조각하여 전시회를 열곤 한다. 관람하기 전에 사람들은 의아심을 드러내곤 한다. 하필이면 왜 여인들의 젖가슴이냐고? 관람을 마친 뒤엔 하나같이 감동한 표정들이었다. 더 이상 왜냐고 묻는 사람들이 없었다. 우측 쇄골의 얕은 골(谷)의 다듬기 작업을 마친 직후다. 이젠 좌측 쇄골로 옮겨갈 차례다. 둥근칼과 창칼의 배합이 민활하기만 하다. 황백색의 나뭇결에서 흩날리는 목향이 은은하다. 출입을 막던 경찰관이 당신을 불렀다. 늙수그레한 경찰 몇 명이 둘러선 자리였다.

“네 엄마가 맞는지 확인해 봐.”

포장마차의 실내엔 흰 천을 둘러쓴 어머니가 쓰러져 있었다. 세상의 소요로부터 초탈한 모습이었다. 쉰 살가량의 경찰이 말했다. 신고를 받고 도착해 보니 운명한 상태였어. 사인 확인을 위해 병원으로 가야 되거든. 넌 나랑 같이 경찰차에 타. 당신은 울먹일 새도 없이 경찰차에 실렸다. 생후 처음으로 가슴 저린 슬픔을 느꼈다. 경찰차에 실리는 순간. 억눌렀던 울음이 터졌다. 경찰들도 외면한 채 말이 없었다.

당신은 좌측 쇄골의 길쭉한 골을 다듬는 중이다. 둥근칼로 파도치듯 살짝살짝 다듬질을 한다. 사인은 뇌졸중이라고 했다. 불규칙적인 식사와 수면 부족이 불러온 질환이었다. 결기가 사무쳐 매장할 때까지도 이혼한 아버지는 부르지 않았다. 당신은 쇄골 언저리를 다듬으며 무척 신경을 쓴다. 그 부위의 처리상태에서 숨결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당신에겐 어머니가 온 우주였다. 어머니를 잃은 당신은 한 때 얼이 빠진 상태였다. 시린 겨울철에 들끓던 안개들. 어쩌면 안개들이 어머니를 데려간 게 아닐까도 싶다. 어머니가 세상 떠나기 3주 전이었으리라. 공부하다가 지쳐 잠시 잠든 때였다. 책상에 엎드린 상태였다. 불을 끄고 어머니가 당신을 방바닥에 눕히려고 했다. 시간이 아쉬워 당신은 금세 깨어났다. 그런 당신을 자리에 앉혀 어머니가 속삭이듯 말했다. 마지막까지 남는 건 결국 추억이란다. 시간이 변해 추억이 되겠지. 모든 추억이 다 아름다울 수는 없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눈시울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면서 가슴이 못내 안타깝기만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를 잃은 날. 그 날 내내. 당신의 의식은 소실점의 극한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당신을 두 번째 만나던 날. 여인은 당신에게 몸을 열었다. 그 날 당신은 꿈을 꾼 기분이었다. 북한산의 골짜기를 배경으로 몇 컷을 한 뒤였다. 당신에게서 어머니의 사망 얘기를 듣고 난 다음이었다. 여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더니 흔들렸다. 여인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자신을 가두었던 창은 자신만이 깨뜨릴 수 있어요. 묘하게도 피사체가 되는 순간에 이걸 깨달았어요. 순간적으로 여인의 눈빛이 섬광처럼 분출되었다. 가슴이 섬뜩할 정도였다. 알몸으로 피사체가 된 여인. 그 때마다 변신을 시도한 의지가 놀라웠다.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여인에게 당신이 질문했다. 누드모델 말고는 직업이 없나요? 아뇨, 잡지사 편집 기자로도 일해요. 의외로 여인의 대꾸는 빨랐다. 매주 화요일만 누드모델로 뛰어요. 당신은 여인의 성실성에 혀를 내둘렀다.
여인과 산을 내려오니 북한산 입구에 어스름이 지고 있었다. 여인이 동동주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당신도 기꺼이 좋다며 전통주점으로 갔다. 노릇노릇하게 익은 파전을 안주 삼아 술잔을 건넸다. 표주박에 실리는 동동주의 느낌이 포근하다고 여겨졌다. 여인은 그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부모의 사망 시점부터 자신을 옭아맨 그물에 관해서였다. 여인의 그물 얘기가 예사롭지 않은 여운으로 밀려들었다. 잡지사 기자로도 누드모델로도 열심히 비상하려는 여인에 대해 존경심이 생겼다. 가히 우러러 볼만하다고 생각되었다. 대화를 하면서 때때로 여인의 손을 당신이 어루더듬었다. 그 때마다 여인이 쌩긋 웃곤 했다. 웃음의 여운이 맑게 느껴졌다. 청정한 시냇물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얼마나 잔이 돌았는지 모를 때였다. 취기로 얼얼한 상태였다. 여인이 지나는 택시를 불렀다. 여관의 문을 걸자마자 여인의 손길이 당신의 몸에 닿았다. 당신도 여인의 옷을 벗겨 나갔다. 유리문이 강풍으로 계속 덜컹거렸다. 바람의 시린 날에 몸이 으스스 떨릴 지경이었다. 샤워를 마친 후 이내 둘은 뒤엉켰다. 하염없이 서로를 갈구하는 듯. 뒤엉킨 몸은 좀체 풀리려 들지 않았다. 설움으로 물든 그리움이 실내를 둥둥 떠다녔다. 뒤엉킨 육신으로 물결이 남실대었다. 당신의 상실감과 여인의 외로움이 어우러진 물결이었다.

당신은 둥근칼로 살짝살짝 나뭇결을 치뜬다. 쇄골 부분은 거의 완성 상태다. 여인의 실제 속살처럼 정교하다. 젖무덤 상단과 쇄골 사이의 상반신. 이 부분의 감각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당신은 넓은 폭의 끌칼을 사용한다. 1주일째 끌던 작업이다. 오늘은 여하간 도색까지 마무리할 작정이다. 그러려면 부지런히 작업해야 한다. 작업을 떠올리자 지난날이 떠올랐다.
당신이 막 중학생이 된 해였다. 크레인의 작업 소리가 요란한 건설현장이었다. 하천 일대에 먼지가 풀풀 날렸다. 농수용 저수지 축조 현장이었다. 아버지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 석 달이나 집을 비운 아버지.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 당신과 함께 현장을 찾았다. 현장 부근의 사원용 숙소에 들어섰다. 아버지 전용 침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책상 위를 둘러보던 어머니의 표정이 돌변했다. 기급하는 표정이더니 당신을 밖으로 내보냈다. 몸을 돌이키기 직전. 눈에 띈 건 몇 장의 사진들이었다. 뭔가 놀랄 만한 장면이 담긴 모양이었다. 왠지 아버지를 두둔하고픈 마음마저 일었다.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니까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어머니가 흐느끼고 있었다.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였다. 사진들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방구석엔 낯선 여자의 치마가 나뒹굴고 있었다. 까닭 모를 불안감이 당신에게 엄습했다. 뭔가 말을 해야겠는데 답답하기만 했다. 당신은 문을 쾅 닫고는 하천으로 내달렸다. 하천을 거닐면서도 어머니의 애절한 울음소리를 떠올렸다.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겨드랑이에서 가슴 중앙까지의 공간. 거기엔 갈비뼈로 이루어진 골이 살짝 내비친다. 생각 같아서는 사포를 쓰고 싶다. 하지만 작업이 종료될 때까지 써선 안 된다. 사포의 입자가 조각도의 날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중간 폭의 끌칼을 사용한다. 마음먹은 바라서 진도는 잘 나가는 편이다. 신체적인 진도라면 당신은 잠을 잘 자는 편이다. 현장 숙소에서의 밤이었다. 당신은 여행에 지쳐 초저녁부터 잠들었다. 새벽에 잠시 의식이 들 때였다. 창을 넘어 의외의 음절들이 날아들었다. 잔뜩 목소리를 낮춘 상태였다. 마당 구석의 목련나무 아래에서였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곤 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나도 마음을 가누기가 힘들어.”

  어머니의 훌쩍이는 소리. 애써 소리를 낮추려는 신음까지도 들렸다. 가슴이 타는 듯 답답했다. 뭔가 자꾸만 비틀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음껏 울지도 못하는 어머니. 마냥 안쓰럽기만 했다. 멀리까지 찾아온 어머니인데.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가 울리다니? 도대체 뭘 잘 했다고 어머니를 울리느냐고? 가슴이 뒤집히면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들끓었다.
   당신은 경건한 자세로 조각도를 놀린다. 조각도가 지나는 자취마다 나뭇결이 꿈틀대는 듯하다. 가라앉은 눈빛. 절제된 숨결에 실려 조각도가 움직인다. 조각도의 칼날마저 섬세한 선율로 나부대는 듯하다. 서서히 젖무덤 위의 가슴살이 살아난다. 성큼 만지고픈 충동마저 일으킬 정도다.
   현장 숙소의 밤을 지새면서부터였다. 당신에겐 여자의 가슴이 궁금하게 여겨졌다. 생활 자체를 뒤흔드는 정서가 서린 가슴. 슬퍼도 좀체 내색을 않으려는 여자의 가슴에 연민이 일었다. 슬픔을 삭이다가 승화시켜 버리는 곳. 거기가 여자의 가슴이 아닐까 싶었다. 그 날의 어머니의 가슴은 어땠을까? 설움을 삭이다가 멍들지는 않았는지? 세상의 사물이 스러졌다가 소생하는 곳. 어머니의 가슴은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여겨졌다. 모순스레도 어머니의 젖가슴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생경스러웠다. 아득한 유년기에나 접촉했을 뿐. 어머니의 젖가슴을 떠올리다가 회화의 소실점이 연상되었다. 원근법이 적용되는 극한점. 그 극한점을 통해 현실의 의미가 되살아날 터였다. 그 날 이후로. 당신에겐 여자의 젖가슴이 소실점으로 비쳤다. 그 소실점이야말로 현실을 승화시키는 곳이라 여겨졌다.

당신의 눈길이 조각의 젖무덤에 이른다. 여전히 묘의 봉분 같기만 하다. 거칠게 형상만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질감이 나려면 더 다듬어야만 한다. 숱한 여자들의 상념이 들끓는 곳. 그녀의 거기를 처음 어루만지던 날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몸을 떨며 속삭였다. 가능한 한 서서히 만져 줘요. 왜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그냥 느낌으로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결혼 초기부터 부부의 성격 차이로 전율했다. 어지간하면 넘기리라 마음먹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참담하기만 했다. 알몸으로 당신의 밑에 깔려 속삭였다. 연애 기간만 가졌어도 그렇진 않았을 거예요. 연인이란 연애를 통해서 맺어지는 게 자연스러운가 봐요. 그녀의 젖은 눈시울을 닦아주며 당신이 말했다.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아요. 그녀의 눈이 한결 공허해진다. 당신의 손길이 그녀의 젖무덤을 서서히 어루만진다. 그녀의 입술로 가녀린 비음이 새어 나온다. 유두를 통해 그녀의 기가 발산되는 듯하다.
문득 당신의 시야에 안개가 차오르는 느낌이다. 이혼한 아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시내나 강에선 새벽마다 늘 피어오르는 안개다. 결혼하면서부터 생각이 달라진 아내였다. 아기를 갖고픈 당신이었다. 언제부터 마음이 달라진 건지? 아내는 당신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밤에 꾸는 꿈을 따져 보자구요. 꿈에서 일어나는 장면도 현실과는 별개예요. 동일한 사람의 몸에서 이뤄지는 현상인데도 말이에요. 이럴진대, 자식은 부모와 얼마나 이질감을 갖겠어요? 나는 차라리 애를 안 가졌으면 해요. 정 당신이 애기를 원한다면 이혼해요, 우리. 나는 부부만 행복하다면 충분히 족하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틈나는 대로 아내에게 일깨웠다. 자식의 소중함을. 다음 세대의 계승자의 의미에 대해서도. 자식이 아니면 누가 시신을 거두겠느냐고도 했다. 그랬건만 아내는 치를 떨듯 대들며 말했다.

“당신 왜 그리 꽉 막혔어요? 사람이 죽고 나면 그뿐이잖아요? 꼭 시신을 수습해야만 되나요? 몽고에는 풍장이라는 것도 있어요. 시신을 던져두면 새도 파먹고 짐승도 뜯어먹는 거예요. 인체를 이루던 원소들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거예요. 그 얼마나 순리적인 일이에요? 더 이상 내게 고리타분한 말은 하지 말아요. 듣고 싶지도 않아요. 어이구, 정말 치가 떨려 내가 못 살아!”

그럭저럭 넘기다가 결혼한 지 2년째 되던 봄날이었다. 아내는 자유로워지고 싶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당신은 며칠 밤을 설득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당신의 아내는 단호했다.

“의가 상하기 전에 이혼해 줘요. 무슨 남자가 이렇게 치근덕거려요?”

그래서 당신은 아내와 갈라섰다. 그 무렵에 당신은 작품전을 열었다. 들끓는 번민을 작품으로 잠재우고 싶었다. 작품전이 열리던 화랑에서였다. 당신은 유부녀인 그녀를 처음 만났다. 작품을 매개로 대화하던 중. 서서히 그녀와 마음이 통했다.

  인천공항에서 왕십리 모텔골목으로 들어서던 밤. 골목에는 하염없이 가랑비가 내렸다. 모텔 복도의 선반에는 포르노 테이프들이 즐비했다. 어차피 내용을 감상할 건 아니었다. 아무 거나 골라 비디오 데크에 넣었다. 비디오의 음향을 맞춘 후. 당신은 그녀랑 나란히 침대에 드러누웠다. 평온한 분위기에 취한 듯. 둘은 서서히 상대의 알몸을 어루더듬었다. 당신과 그녀에겐 한없이 아늑한 시간이었다. 취한 듯 여인이 입을 열었다.
   이 번 여행의 주제는 마음의 다스림이었어요. 제 불안한 마음이 화두였죠. 시기리야의 절벽에서 많은 걸 느꼈어요. 부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카샤파 왕이 있었어요. 그는 늘 심리적으로 불안했죠. 혹시 왕위를 빼앗기지는 않을까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200m 절벽 위에다가 궁전을 지었죠. 한 마디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죠. 그 궁궐을 짓고도 얼마나 불안했던지? 500명의 미인도를 그리며 마음을 달랬대요. 그랬어도 결국에는 이복동생인 목갈리나의 반란으로 자결하고 말았죠.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바라볼수록 요염한 여자였다. 마치 자결한 사람이 그녀 자신이라도 되는 듯했다. 카샤파의 불안한 마음이 미인도에서조차 물고기의 비늘처럼 파드득거렸어요.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절벽의 요새까지 세웠었는데두요. 모두 부질없는 일로 끝난 거죠. 이게 삶의 편린처럼 느껴졌어요. 그녀의 입술을 타고 스리랑카의 고대사가 물결쳤다. 당신은 가만히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젖가슴에 시선이 머물렀다. 온갖 상념의 근원인 곳. 거기를 더듬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봉긋하게 도드라진 젖무덤. 거기에선 강한 탄력이 넘쳐흘렀다. 뭉클대는 가슴을 주무르면서 그녀의 불안의 근원을 생각했다. 불안의 근원이라니? 생각할수록 묘한 부분이었지만. 남편과의 유별난 성격 차. 좁혀지지 않는 거리만큼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혼할지도 모른댔다. 그녀는 가끔씩 들려주었다. 남편과의 현저한 성격 차에 관한 얘기를. 당신은 끝까지 귀를 기울였다. 좋은 카운슬러의 전형처럼. 그러다가 문득 가슴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당신의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의 불안감에 여인의 소외감마저 겹쳐져 회오리쳤다. 갑작스레 당신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상실감과 불안감과 소외감의 소용돌이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중3 때의 봄날이었다. 곳곳에 꽃잎이 나비처럼 흩날리던 때였다. 여가 활동으로 태권도를 수련하던 중이었다. 사범이 잘 한다며 당신을 칭찬할 때였다. 급우 중의 하나가 질투의 감정으로 말했다.

“쟤는 아버지도 없는 놈이에요. 아마 그래서 독기를 피우나 봐요.”

듣는 순간 당신의 열기가 치솟았다. 참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곧바로 급우를 걷어차려고 했다. 이 때였다. 사범의 말이 귓전을 울렸다.

“윤식아, 그 딴 일로 충격받지 마. 꼭 티를 내야 되겠어?”

순간적으로 귀가 윙윙 울렸다. 티를 내야 되겠느냐고? 아버지 없는 티를 내지 말라는 말이었다. 급우의 말보다 사범의 말이 더 냉혹하게 들렸다. 당신은 그 날 이후로 태권도를 접었다. 격해서 도장을 나오던 날. 애들의 킥킥거리던 웃음이 가슴을 찔렀다. 그 날 자전거로 집에 도착하던 순간이었다. 집 앞 부근에서였다. 옆집 친구가 그의 아버지와 손을 잡고는 산책을 나서고 있었다. 벚꽃 화사한 제방 길을 거닐던 친구 부자간의 모습. 그 모습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처럼 아늑하고 따사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부럽고도 서러운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면서 서슬 퍼런 슬픔이 북받쳤다. 흩날리는 꽃잎마저도 상실감을 들쑤시는 느낌이었다. 가랑비 내리던 왕십리 모텔. 갈증이라도 난 듯. 서로를 탐닉한 뒤였다. 그녀는 모텔을 나서며 말했다. 자신이 먼저 연락할 때까지는 아무 연락도 하지 말라고.

  당신의 손길은 목각의 우측 겨드랑이에서 허리까지를 다듬는 중이다. 여인의 갈비뼈가 은은히 내비친다. 여인이 느티나무가지를 쥐느라고 팔을 들고 있기 때문이리라. 중간 크기의 끌칼과 세모칼로 측면을 다듬는다. 고개를 드니 태양은 남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내비칠락말락하는 갈비뼈의 표현에 제법 신경이 쓰인다. 손놀림 하나에 작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연락을 받은 건 왕십리에서 헤어진 지 보름만이었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탐색하는 중이라고 했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제천의 의림지(義林池)라고 했다. 그녀는 1주일간을 의림지에서 노를 저었다고 했다. 의림지에서 만나 배 하나를 빌려 둘이 탔다. 30분 간격으로 번갈아가며 노를 저었다. 그녀가 노를 저을 땐 당신의 마음이 평온했다. 무척 안정된 자세였기 때문이다. 잔잔한 수면. 거꾸로 흔들리는 솔숲. 널브러진 수면을 스치는 바람결마저 감미로웠다.
   세상이 저수지의 물같이 여겨졌어요. 그녀의 고운 입술이 움찔대었다.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비쳤다. 노 젓느라고 열기가 오르는 모양이었다. 저수지 위에 뜬 배. 이걸 나의 인생이라고 비유해 봤어요. 노 젓는 방향에 따라 어디로든 자유로이 떠다닐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이에요? 선착장에 내려 음식점에 들렀다. 쏘가리탕에 매취순을 곁들여 술잔을 나누었다. 그녀가 방긋대며 속삭인다. 의림지에선 나름대로의 성취가 있었어요. 세상과 인생을 들여다본 계기가 되었어요.

  베란다 밖에 어스름이 진다. 조각상은 이제 유두와 유륜만 남겨져 있다. 정밀 작업이 필요한 부분이다. 좁은 폭의 창칼과 작은 반경의 둥근칼을 꺼낸다. 사진을 돋보기로 연방 들여다본다. 이럴 땐 모델이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의림지에서 헤어진 뒤엔 그녀로부터의 소식은 요원했다. 마지막 만남이 있던 지난겨울까지는. 유두와 유륜의 작업을 마치고 나니 밤이 깊었다. 도색은 뒷날로 미룬다. 당신은 마루 청소를 끝내고는 잠자리에 든다.
   당신은 아침부터 일어나 도색 작업을 한다. 래커(lacquer)와 시너(thinner)를 1:2의 부피비로 플라스틱 통에다 섞는다. 붓질을 하기 전에 조각상을 200호(No. 200) 사포로 문지른다. 잠시 숨결을 가다듬는다. 가는 붓으로 턴 다음 다시 400호 사포로 문지른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난 건 지난겨울이었다. 연말이 가까운, 눈 내리는 날이었다. 온 천지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여주의 남한강가에서였다. 당신은 그녀와 나란히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눈꽃송이가 강물에 부딪히면서 흔적 없이 스러지곤 했다. 그녀는 당신의 가슴에 기댄 채 속삭였다. 마침내 지난주에 이혼을 했어요. 더 이상은 견디기 어려웠어요. 연구소에도 1년간의 휴직을 허락받았어요. 당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니, 정말입니까? 그녀는 고개만 끄떡였다. 그녀의 시선은 수평선에 떠밀리고 있었다. 느닷없이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며 응석을 부렸다.

“이제 나 혼잔데 날 버려 둘 거예요? 당신과 함께 살고 싶어요.”

당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신의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당신의 표정의 변화가 간파된 탓이었으리라. 당신의 가슴을 밀치며 그녀가 말했다.

“아이, 심하다 심해. 농담한 걸 가지고 그렇게 떠세요?”

당신의 얼굴이 왈칵 달아올랐다. 찰나적인 수치심 때문이었다. 남편과 이혼하기도 전에 당신에게 몸을 연 그녀였다. 재혼하고서도 다른 사내를 찾는다면? 살다가 당신과 마음이 안 맞는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여겨졌다. 당신은 판단했다. 그녀는 연인으로선 좋지만 결코 배우자는 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녀는 당신의 속내를 모를 터였다. 강물을 향한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연인인 당신도 날 붙들지는 못하는군요. 슬프지만 어쩌겠어요?”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녀는 나직이 속삭였다. 어쩌면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은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다며 외따로 걸었다. 그녀와 50여 미터 떨어진 강가에 앉았다. 강물에 손을 담그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도 독신이고 당신도 독신이다. 함께 맺어질 만한 명분도 있다. 게다가 마음과 취향마저 통하는 사이다. 결합 못할 이유가 뭔가? 생각해 보니 아내로부터 생긴 상실감 때문이었다. 더 이상은 아무에게나 마음을 주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준 만큼. 언젠가는 상실감을 느끼리라는 피해 의식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못난 자신의 모습에 두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그리고는 여인과 악수를 나누고 강변을 떠났다. 강변을 떠나는 내내. 안개더미가 당신을 옥죄는 느낌이었다.

당신은 조각상에 도색 작업을 한다. 그리고는 잔여 물기가 없어지게 응달에 말린다. 바싹 건조된 조각상에 도사(塗沙) 래커(sanding lacquer)를 1회 칠한다. 도사 래커는 조각의 가는 구멍을 메워 주는 역할을 한다. 창문을 활짝 열어 2시간쯤 건조시킨다. 잔여 수분이 없는 걸 확인한다. 조각의 표면을 1,000호 사포로 잘 닦는다. 당신의 조각 작업에는 여인의 도움이 컸다. 잡지사의 일로 외출할 때면 여인은 곧잘 당신을 찾았다. 그리고는 당신의 작업 모델이 되어 주길 즐겼다. 여인은 당신에 의해 구현되는 조각상에 곧잘 매료되었다. 1주일 전이었다. 북한산 기슭에서 여인은 제안했다. 상반신을 조각하려면 아예 큰 사진을 찍어 두세요. 그래야 모델이 없을 때도 작업이 가능하잖아요? 그래서 여인의 상반신을 대형으로 몇 장 촬영해 두었다. 당신은 그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작업하곤 했다. 작업 시간 내내 여인의 향기가 조각상에 둥둥 떠다녔다. 당신의 열정만큼 작품의 완성도도 높아진 터였다. 당신은 조각상의 붓질 작업에 들어선다. 투명 래커(clear lacquer)를 시너와 섞어 조심스레 3번 칠한다. 붓질을 해도 자국이 남아서는 안 된다. 이건 숨고르기 작업과도 같다. 고른 숨결로 붓질해 나가야 한다. 매번 완전히 건조시킨 후에 붓질을 한다. 투명 래커의 칠이 끝나자 조각에서 윤기가 흐른다. 황백색의 나뭇결이 잘 살아나 당신은 흐뭇해진다. 연이어 무광 래커(mat lacquer) 작업을 진행한다. 곱고 가는 붓으로 조심스레 1번을 발라준다. 이건 지나치게 번쩍대는 부분을 완화시키는 작업이다. 마침내 당신은 조각상의 작업을 완료한다. 잘록한 허리와 섬세한 겨드랑이. 봉긋한 젖무덤이 살아 있는 듯하다. 만지면 금방 튈 듯한 탄력마저 느껴진다. 당신의 1주일간의 노력의 결정판이다. 감격에 벅차 마구 외쳐대고 싶을 정도다. 한나절을 감격에 취해 지낸 뒤다. 문득 조각상이 당신을 향해 절규하는 듯한 느낌에 휩싸인다. 예상치 못한 현상으로 당신은 기급을 한다. 누적된 피로로 당신이 잠시 소파에 기댄다. 이내 당신은 코를 곤다.

조각상의 젖무덤이 갈라지며 그녀가 당신의 거실로 들어선다. 당신의 눈이 동그래진다. 너무 반가워 숨이 질 지경이다. 당신은 왈칵 달려들어 그녀를 껴안는다. 마냥 황홀해 그녀가 훌쩍인다.

“당신은 언제쯤 날 데려갈 거예요?”

또다시 당신의 관자놀이가 펄떡인다. 그녀의 통곡소리에 조각상이 바스러져 버린다. ‘억’ 소리를 지르며 당신은 눈을 뜬다. 풋잠에 식은땀이 맺힌다.
당신은 꿈을 골똘히 분석한다. 이성과는 달리. 당신의 감성은 그녀를 그리워했음이리라. 부질없는 그리움은 가슴에 설움만 키울 뿐이다. 조각상을 완성한 직후에 결심했듯. 당신은 재차 마음을 다진다. 그녀와 헤어진 남한강변. 거기에서 조각상을 태우기로 재차 다짐한다. 그리하여 그리움을 승화시켜 그녀의 마음을 달래기로 작정한다.
당신은 종이 박스에 싼 조각상을 펼친다. 아름다운 여인의 흉상이다. 도드라진 젖가슴과 갈비뼈가 내비치는 갸름한 살결. 조각상 전체에 체온이 실린 작품이다. 당신은 그녀와 머물렀던 남한강변에 선다. 눈 내리던 겨울을 떠올린다. 그 날 온종일 쏟아지던 눈발들. 실의에 찬 그녀의 목소리가 밀려들었다.

“이제 나 혼잔데 날 버려 둘 거예요?”

당신은 고통스러워 도리질을 한다. 당신은 입술을 깨물며 수면을 응시한다. 마음을 닦으려 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조각상을 다듬으며 마음을 삭인 시간들. 생각할수록 가슴에 설움이 괸다. 사흘 전에 걸려온 전화 목소리도 되살아났다. 여긴 카사블랑카예요. 모로코 서해변의 항구예요. 지금 막 해가 지려고 해요. 대서양으로 스러지기 직전의 일몰. 한 마디로 불타는 석양이에요. 불타는 석양이라? 그 말을 떠올리자 당신은 슬픔이 북받친다. 모든 스러지는 것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스러짐의 색채가 붉은 색이라면 더욱 처연하다.
당신은 조각상을 너럭바위 위에 올린다. 조각상 주위로 마른 나무 등걸을 모은다. 당신은 조각상을 태울 준비를 한다. 정성을 기울인 조각상을 태워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다. 그리움을 자아내게 하는 젖가슴의 조각상을 태울 작정이다. 당신에겐 최상의 걸작이라 여겨지는 조각상이다. 그 조각상을 태우려고 남한강을 찾았다. 그 조각상엔 많은 의미가 스며 있다. 그녀의 불안감과 여인의 소외감. 게다가 당신의 어머니의 공허감도 깃들어 있다. 그뿐이랴? 당신의 상실감마저 녹아 있다. 이런 작품을 당신이 태우려고 한다. 아끼던 작품을 태움으로서 거듭나려고 하는 터다. 사흘 전의 국제 통화에서였다. 설움에 잠긴 그녀의 목소리가 밀려들었다.

“마음 비우기가 이리도 버겁군요. 자꾸 당신을 그리워하다가는 지레 숨질 것 같은데 어쩌죠? 내가 왜 이렇게 됐죠?”

가슴이 마비되는 듯한 속삭임이었다. 그래서 사흘간을 당신은 울먹였다. 그러다가 숱한 상념의 정립을 소실점에서 재현하고픈 욕망이 일었다. 마음을 다잡자 당신은 작업을 서둘렀다. 조각상의 작업을 말함이었다. 완성된 작품을 대하는 순간이었다. 당신은 온 몸으로 휩쓸리는 환희에 젖었다. 발광하고플 정도로 벅찬 감정이었다. 환희의 감정이 스러질 무렵이었다. 느닷없이 무엇에 대한 환희였던가를 반문하고 싶었다. 이건 환희에 대한 자성의 물음이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왜 이렇게 됐죠?”

그 때 당신에게 소실점이 연상되었다. 일체의 현실이 소실점으로 휩쓸리는 느낌이었다. 진정 당신이 그녀를 슬프게 만든 건지? 그녀가 당신의 가슴을 울린 건지? 그녀의 질문에 그만 설움이 들끓었다. 왜 여인들로 인해 당신이 서글퍼져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현실의 중량감으로 버거웠다. 아득한 현실의 끝은 어디인가? 버거운 현실의 극한은 어디일까? 모든 정서가 일탈하는 곳. 거기를 찾아 변신하고 싶었다. 그래서 최상의 작품이라 여겨지는 조각상을 태우기로 했다. 조각상에 응결된 숱한 탐욕과 집착. 이것들을 태움으로써 더 많은 성취를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설움에 잠긴 그녀의 마음도 달래주고 싶었다.
당신은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해외에서도 사용 가능한 그녀의 핸드폰이다. 금세 그녀의 목소리가 밀려든다. 어쩐 일이세요? 엄청 반갑네요. 당신은 잠시 마음을 추스른다. 꼭 해야 할 말만을 들려줄 작정이다.

“목각을 태워 영혼을 실어 보낼게요. 타오르는 영혼이 느껴지거든 그립다고 말해 줄래요? 때가 되면 과거는 아름다운 잔영으로 스러지겠죠?”

말을 마치기도 전이다. ‘흑’하고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린다. 당신의 눈에도 눈물이 핑 돈다. 일시에 당신의 머릿속이 윙윙거리며 울린다. 쓰러진 어머니의 얼굴이 창졸간에 밀려든다. 체념한 여인의 얼굴이 연이어 떠오른다. 금세 그녀의 고뇌하는 얼굴이 다가선다. 당신의 눈가에 차츰 이슬이 맺힌다. 당신은 글썽이는 눈으로 강물을 바라본다. 결심한 듯 너럭바위 위로 다가선다. 가스라이터로 불을 켠다. 바싹 마른 조각상이라 금세 불결에 휩싸인다. 불길이 거세어지자 당신은 가만히 고개를 숙인다. 불기운이 얼굴까지 닿자 당신은 눈을 감는다. 궤도를 이탈한 일체의 정서가 평온해지기를 빈다. 어머니든 여인이든 그녀이건 혹은 당신 자신이건간에.
바람결이 사나워진다. 너럭바위 위라 주위로 불길은 번지지 않는다. 스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조각상. 조각상이 불길에 스러질 동안. 당신은 일렁이는 불길을 응시한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꽃송이들. 매캐한 실연기에 휩싸여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지향점을 알 수 없는 심연. 그 어디쯤에 당신의 울음소리도 실려 있는 듯하다. 치솟는 연기 속. 당신의 실루엣마저 밤의 암막 속으로 서서히 잠겨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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