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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놀이의 잔영
손 정 모
바닷바람이 공사 현장에까지 달려든다. 소금기가 수시로 사방으로 흩날린다. 5층짜리 상가빌딩 건설 현장이다. 레미콘이 겨워내는 소리로 귀청이 얼얼하다. 벽돌을 싣고 오가는 지게차.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자갈을 들이붓는 덤프트럭. 레미콘과 불도저 등의 중장비가 어우러진다. 건물의 몸체는 전반적으로 갖춰진 상태다. 나는 인부들의 부산한 움직임을 둘러본다.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바람에 휩쓸린다. 바람의 소용돌이를 생각하자 가슴이 섬뜩해진다.
새벽잠을 앗아간 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937년에 완성된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샌프란시스코에서 마린반도까지를 연결한 현수교. 그 다리가 풍력을 못 견뎌 휘어지기 시작했다. 해풍이 심해지면서 교판(橋板)의 진동 너울이 점차 커졌다. 겹주름이 일시에 늘어나더니 툭하고 끊겼다. 바다엔 핵구름 같은 물보라가 아스라이 치솟았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한 정경이었다. 소스라쳐 일어나니 새벽 2시였다.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두 교축(橋軸)으로부터 비롯된 맥놀이의 섬뜩한 재앙이었다. 그러다가 잠을 잇지 못했다. 거실로 나가 약탕기를 들여다보았다. 지난밤에 달이던 약재가 남아 있었다.
리어카아를 끌던 인부들이 내게 목례를 한다. 쉰셋의 나는 건설 현장소장이다. 답례로 고개를 끄떡이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폴더를 여니 출장 떠난 사장이다.
“여긴 영동이오. 좀 전에 D사 사장으로부터 연락받았소. 인부 다섯만 즉시 D사로 보내주겠소?”
나는 쾌히 응답하고 주위를 둘러본다. 공사 일정상 나의 현장에는 경력자가 필요하다. D사로는 이틀 전에 신규로 들어온 인부들을 보내기로 한다. 거기에 준규도 포함시킬 작정이다. 준규를 생각하자 이틀 전의 아침이 떠올랐다.
찾아들어간 당구장에서였다. 실내는 오소리 굴처럼 담배연기로 뒤덮였다. 생수통 언저리에 준규가 있었다. 연기를 내뿜으며 비스듬히 벽에 기댄 자세였다. 나를 보고도 자세를 고치려고 않는다. 시간을 허비하는 준규를 타일러 보려고 카페로 데려갈 참이었다. 준규야, 나랑 같이 가. 자식 친구인 준규에게 인내하며 말했다.
“나 참. 아저씨가 웬 참견이세요? 나 좀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그러면서 빽 고함을 쳤다. 순식간에 열기가 올랐다. 나 딴엔 친구의 아들이기에 각별한 애정으로 찾아간 터였다. 어릴 적부터 지켜 본 녀석이었다. 게다가 내 막내아들과도 친구이지 않은가? 막내아들 못지않게 애정을 기울인 녀석이었다. 틈나는 대로 대화도 나누고 격려도 해 주었다. 그런 잔정을 일시에 무시해 버리다니! 녀석이 순간적으로 고깝게 느껴졌다. 당장 멱살을 쥐고는 밖으로 끌어내었다. 그 길로 데려온 데가 건설 현장이었다. 건설현장에서 삶이 만만치 않음을 깨우쳐 주고 싶었다. 녀석이 무단히 내버린 시간의 편절들.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불안정한 상태가 얼마나 덧없는지를? 틈틈이 알려주고 깨우쳐 주고 싶었다. 그랬던 준규였기에 각별히 마음이 쓰인다. 녀석을 불러 당부를 한다. 시키는 일에는 두려워하지 마. 덤벙대지 말고 지시에 잘 따르면 돼. 준규를 포함한 인부 다섯이 D사로 떠난다. 언덕을 내려서는 데까지 눈으로 전송한다. 준규를 보내고 나니 마음이 안쓰럽다. 고졸 이후에 실업자로 떠도는 녀석. 나의 막내아들 인호와는 고교 동기동창이다. 인호만 진학하고 녀석은 탈락하면서부터 좌절했다. 재수하라고 격려했어도 비뚤어지기만 했다. 준규는 나의 자식이나 다름이 없다. 절친한 친구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애정을 기울였다. 그랬는데도 길을 못 찾으니 안쓰럽기만 하다. 발걸음을 놀려 레미콘을 살펴본다. 콘크리트 반죽이 줄줄이 쏟아진다.
반죽의 어우러짐을 떠올리자 아내의 한약이 생각난다. 한약은 각종 약재로 어우러져 탕약을 이룬다. 아내는 탕약에 의해 연명되고 있다. 아내를 생각하자마자 마음이 불안해진다. 차량으로 현장에서 십여 분 거리에 나의 집이 있다. 거기엔 앓아누운 아내가 있다. 아침엔 아내가 눈물마저 비쳐 마음이 못내 불안하다. 게다가 입술마저 두어 번 달싹였다.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느낌으론 짐작이 간다. 좀더 곁에 있다 가라고. 근래엔 황달마저 들어 식사를 영 못한다. 야윈 얼굴이며 주름진 얼굴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쓰라림이 바람줄기가 되어 나의 가슴으로 밀려든다. 약탕마저 제대로 못 삼키는 아내. 그런 아내의 손을 조심스레 떼놓고 왔다. 입영한 아들 녀석들의 손길이 아쉽다. 그 녀석들만 있어 줘도 병구완이 한결 나을 텐데. 그렇대서 간병인을 붙일 형편도 못된다. 이래저래 가슴만 탈 뿐.
계단 형성의 거푸집 상태를 점검한다. 물매나 각도에 있어서도 반듯해야 한다. 안전망의 강도도 잘 살펴야 한다. 어쩌다 인부가 떨어지면 망이 찢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비상상태가 야기된다. 사다리에 올라 안전망의 전역을 훑어본다. 최대한 꼼꼼히 살펴야 한다. 부주의에 의한 것으로는 기태의 사고가 대표적이었다.
기태는 내 친구이자 준규의 아버지다. 그와 나는 병영 동기다. 군수품을 싣고 양구를 지나 46번 국도를 탈 때였다. 아마도 둘은 식곤증에 눈이 가물거렸던 모양이다. 둔중한 충격과 함께 눈을 떴을 때였다. 화물차는 길 아래 밀밭에 뒤집혀 있었다. 벨트를 맨 나는 조수석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반면에 친구는 바퀴에 깔려 있었다. 무릎 관절 손상으로 친구는 중도에 제대를 했다. 그 날 이후로 친구는 다리를 절었다. 기태의 처는 중풍에 걸려 있다. 발병 2년짼데 겨우 혼자 걷는 정도다. 변을 볼 때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준규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자갈을 질까? 삽질을 할까? 아님 벽돌을 나를지 궁금하다. 혹시라도 불상사는 없어야 할 텐데. 현장의 특성상 잠시 염려가 된다. 외곽까지 한 바퀴를 도니 해가 중천에 솟아 있다. 태양의 경로를 떠올리자 가슴이 뛴다. 잠시 집에 가 봐야겠는데 불안하기 그지없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다. 그렇지만 워낙 중태라 집엘 다녀와야겠다.
아내가 퇴원하여 귀가한 지 겨우 두 달째다. 1년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주기적인 항암주사와 탈모증세로 고통이 극심했다. 아내의 간에 자리잡은 종양이 문제다. 회복의 가능성에 대해 의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독한 약물에 시달려 아내가 퇴원하자고 졸랐다. 시린 속내야 말은 않아도 알 터였다. 퇴원한 뒤엔 얼마간 편안한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며칠 전부터는 황달마저 들어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 눈두덩 밑이 검게 변하고 입술 주위가 노랗게 되었다. 숨결엔 힘이라곤 없었다. 그런 아내가 아침에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 가슴이 아리다. 건설과장인 최를 찾는다. 나의 눈빛을 보자 그가 먼저 입을 연다. 제가 있으니까 염려 말고 다녀오세요. 얼마나 걱정되겠어요?
안방 문을 여니 아내가 오도카니 앉아 있다.
“언제부터 앉아 있었어? 좀 누워 있지 않고?”
퀭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면서도 말이 없다. 벌써 대꾸마저 못할 상태가 되었는지? 가슴에 찬바람이 인다. 앉아 견디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기력이라곤 전혀 없는 몸인데. 나를 기다리느라고 일어난 건 아닌지? 잠시 콧등이 시큰거린다. 서둘러 아내의 등을 받치며 눕히려고 해 본다. 아내가 손을 젓는다. 동작을 멈추고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러다가 식사에 생각이 미쳐 밥상보를 들춰 본다. 아침에 차려놓은 그대로다. 수저도 대지 않은 터다. 슬쩍 콧물이 흐르면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밥술도 못 뜬 당신을 두고 내가 공사장을 순회해야 하다니?’
행주를 빨아 밥상을 닦는다. 가스레인지로 약탕기와 된장국을 데운다. 반찬은 단출하다. 멸치 졸임과 고추 절임에 콩나물 무침을 시원한 무채와 함께 내놓는다. 앙상한 몸피의 아내의 등을 부축한다. 아내의 손에 숟가락을 쥐어주며 말한다. 자, 조금만 먹어 두자고. 아내는 까칠한 입술로 들릴락말락하게 말한다.
“별 생각 없어요. 당신이나 좀 들어요.”
그리곤 인상을 찌푸린다. 통증을 견디기가 버거운 모양이다. 아기 달래듯 구슬려 된장국과 탕약만 몇 모금 먹이고 만다. 밥상을 물리고 아내를 부축한다. 아내가 물로 입을 헹구게 그릇을 받쳐준다. 팔과 어깨도 주물러준다. 쥐날까 봐 발목과 종아리도 주무른다. 아내의 시선이 나의 눈에 머물러 있다. 고통을 견뎌내기 힘들다는 표정이다. 나도 아내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초췌한 중년의 사내가 맥없이 매달려 있다.
아내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지 언제였던가? 신혼 초의 일이었다. 아내는 유람선으로 고향인 흑산 바다를 구경하자고 제안했다. 유람선은 흑산항에서 북상하여 돛대바위 쪽으로 향했다. 곳곳에 내깔린 기암과 바위섬. 그러면서도 탁 틘 바다와 눈부신 햇살. 석양 무렵이라 서해바다는 핏빛으로 타올랐다. 흑산도 너머로 홍도까지의 바다가 꿈결처럼 뒤설레었다. 수만 마리의 물고기 떼가 일시에 파드득거리는 듯한 장관이었다. 손잡은 채 갑판에서 함께 흔들리던 시간들. 별빛처럼 흐르던 아내의 눈빛. 아내와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가슴 설레었다. 그 때를 제외하곤 무척 오랜만인 느낌이었다. 아내의 눈동자를 차분히 들여다본 시간들이.
“오늘은 좀 일찍 들어오세요.”
아내의 입술은 금세 닫혀 있다. 그러면서 나의 눈을 오래도록 응시한다. 너무나 애절한 느낌이 실린 눈빛이다. 수천 음절의 말보다도 더 함축적인 눈빛이다. 나도 몰래 가슴이 뭉클 젖어든다. 입술을 깨물며 신중히 응답한다.
“그래, 알았어.”
왠지 꼭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이 때다. 핸드폰이 새된 소리로 울어댄다. 폴더를 여니 D사의 건설 현장 소장이다.
“소장님, 사고가 생겼어요. 곧바로 와 주실래요?”
더 물어볼 겨를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아니, 사고라고? 직감적으로 불안하다. 아내를 누비이불로 감싸주고는 곧바로 차에 오른다.
D사의 현장은 나의 일터와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바라보는 위치다. 대단위 쇼핑 상가의 10층 건물 공사 현장이다. 계단 조형 거푸집이 무너지면서 인부들이 깔렸다. 5층 외부 계단의 것이 무너진 거였다. 아래쪽에서 작업하던 십여 명의 인부들이 깔렸다. 현장에 도착하니 부상자들은 병원으로 옮겨지고 없었다. D사의 소장이 허둥대며 설명한다. 거푸집이 무너졌어요. 단단히 결체시킨 건데도. 본사 인부가 셋, 귀사 인부가 둘이 깔렸어요. 지금 시내 K병원으로 실려 갔어요. 일단 저랑 같이 가시죠. 말하는 그의 양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나는 윤 소장의 차에 합승하며 짜증을 부린다. 무슨 일이 이렇게 됐소? 제발 사망자나 없어야 할 텐데. 윤 소장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술만 깨문다.
응급실 간호사가 알려준다. 좀 전에 한 분이 운명하셨어요. 출혈이 너무 심했나 봐요. 나머지 분들은 모두 중환자실로 옮겨졌어요. 아직은 면회가 안 돼요. 아마 내일 새벽이나 되어야 가능할 거예요. 사망자는 D사의 한 인부였다. 자꾸만 가슴이 뛴다. H사의 둘 중엔 준규도 끼어 있다. 만약 준규가 잘못된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이 때. 환영처럼 U자형 진동자가 떠오른다. 한쪽이 울면 다른 쪽도 울게 마련이다. 진동수가 비슷한 소리가 어우러져 주기적인 높낮이를 형성한다. 이른바 맥놀이다. 하나의 진동자엔 아내의 얼굴이 비친다. 다른 하나엔 준규의 얼굴이 일렁인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게다가 새벽의 꿈마저 떠올라 마음이 불안하다.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기태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세 번째 울리다가 기태가 전화를 받는다. 무척 반기는 목소리다. 아니 자네가 웬 일이야? 한낮에 전화를 다 하고? 순식간에 밀려드는 그의 목소리. 평소였으면 무척 반가웠을 목소리다. 헌데 당혹스러워 나는 잠시 몸을 떤다. 이내 나는 숨결을 가다듬으며 묻는다. 마지못해 발악이라도 하는 심정이다. 그렇지 않고는 입조차 열기 힘든 상태다. 포장마차를 열 시간은 멀었지? 훅하고 밀려오는 그의 웃음소리. 초저녁이 되어야지, 이 사람아. 집에서 나오는 그를 승용차에 태운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인 기태. 그런 그에게도 뜸 들여야 할 때가 생기다니? 밤에 포장마차를 하여 생계를 영위하는 그. 그의 목 언저리가 애잔해 보인다.
병원에 닿아 중환자실의 상황을 묻는다. 새벽이 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얘기다. 환자들의 상태가 워낙 안 좋다는 얘기다. 핸드폰을 열어 건설과장 최에게 전화한다. 사장한테는 보고했어. 병원 쪽의 상황을 살펴야 해. 현장은 자네가 책임지고 잘 둘러봐. 내 목소리에 결기가 서렸음일까? 금세 최가 선선히 응답한다. 워낙 책임감 있는 최이기에 신뢰가 간다. 기태가 사고 현장에 가 보자고 한다. 현장은 사고 시점부터 출입이 통제된 상태다. 정황을 설명했지만 경찰관의 저지는 단호하다. 기태를 구슬려 차를 해변으로 몬다.
둘은 바다를 향해 나란히 앉는다. 해안선이 파랗게 드리워져 있다. 기태의 눈빛이 너무나 많이 흔들린다. 마음의 동요가 극심한 탓이리라. 만약 준규에게 중한 일이 벌어진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다. 너무나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H사의 나머지 한 명도 걱정거리다. 하필이면 지원나간 인부가 피해를 당하다니?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민다. 이렇게 일이 안 풀리다니? 거기다가 아내의 병세마저 목을 죈다. 가슴이 절로 터질 듯하다.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기태가 입을 연다. 일단은 내 잘못이 커. 못난 자식 얘기를 들려준 게 잘못이었나 봐. 잠시 연기를 멀리 내뱉고는 말을 잇는다. 나를 돕느라고 준규를 불러갔겠지. 너의 지기라는 내가 왜 모르겠냐? 그 놈에게 막노동 일을 시킴으로써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우려도 했겠지. 근데 정말 나쁜 일이 없었으면 해. 그래야만 영원히 즐겁게 만나지 않겠어?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제발 준규에게 큰 탈은 없어야 한다. 영원한 후유증을 수반하는 상처여서는 안 된다. 마음이 불안해질수록 기태를 잘 달래야 한다. 핏기 하나 없는 아내는 전화도 받지 못한다. 누비이불을 두른 채 지금은 잠들었을까? 일찍 들어오라고 했는데. 약속이 지켜질 가망이 희박해지는 기분이다.
아들 녀석들의 학비 문제로 부대낄 때였다. 두 달째 아내가 보험 설계사로 뛰던 날. 집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나른한 신색으로 아내가 식탁에 엎드려 있었다. 더럭 불안해졌다. 말하는 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디 아파? 많이 아픈 거야? 당황한 듯. 아내가 정신을 차리느라 애쓰며 일어섰다. 얼굴이 영 말이 아니었다. 아니에요. 남의 마음을 열기가 조금 힘들 뿐이에요. 그 말을 듣고선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낌으로 와 닿는 부분이었다. 사람은 좋으면서도 한없이 여린 심성의 아내. 그런 아내가 안쓰러워 어깨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 때부터라도 내가 아내의 건강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기태의 관자놀이가 펄떡인다. 실핏줄들이 예민한 센서가 된 듯하다. 그의 눈빛이 이따금씩 바닷물에 휩쓸린다. 나이답지 않게 선명하고 깔끔한 눈빛이다. 기태는 계속 담배를 피워댄다. 연기가 부단히 허공을 선회한다. 나도 한 때는 담배를 피워댄 적이 있다. 현장에서 사고가 터졌을 때. 해결은 해야겠는데 길이 안 보일 때. 이럴 때에 담배보다 위안을 주는 건 없다. 일단 한 대를 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마음이 누그러지면 해결의 실마리도 생각나게 되는 터였다. 그래서 지난날엔 더러 담배를 피워댔다. 기태의 주변으로 휩쓸리는 담배 연기. 연기가 내풀리듯 제발 별 일이 없었으면 싶다.
병원에선 아무런 기별도 없다. 석양이 지고도 7시가 되도록. 기태와 함께 식당으로 차를 몬다. 숯불갈비 집에 들어선다. 돼지갈비와 소주를 시킨다. 근심으로 소주잔을 부딪치지도 못한 채. 마음속으로만 환자들이 무사하기를 빈다. 무사해야만 하는데 왠지 두렵기만 하다. 새벽의 꿈마저도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다. 고기가 익어가자 더럭 아내가 생각난다. 방에 불은 켰는지? 혼자 몸으로 일어날 수는 있는지? 화장실에나 다녀왔는지? 마음 같아선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싶다. 지기의 사이라 더욱 말하기가 어렵다. 자칫하면 욕을 듣기 십상이다. 준규가 생사를 헤매는데도 자기 마누라밖엔 모르는 놈이라고.
넓디넓은 바다를 향하여. 해변에서는 기태가 무한히 마음을 다스렸을 것이다. 그의 관자놀이의 혈관이 입증해 주었다. 꼭 다문 입술이 말해 주었다. 그의 모공을 넘나들던 바람결이 일러주었다. 기태가 마냥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고.
이제 장소는 바다가 아닌 식당이다. 다정한 친분 관계가 이처럼 멀게 느껴지다니. 세상의 허다한 고비쯤이야 약과라는 듯 그의 머리카락들이 치솟아 있다. 그의 입술에서 술잔이 일렁인다. 덩달아 나의 술잔도 흔들린다. 술잔에 일렁이는 그의 공허감이 수시로 나의 심장으로 밀려든다. 길 잃은 바람결마저 술잔에서 허청대는 듯하다. 마음이 공허해질수록 술빛마저 바래지는 느낌이다. 내 손의 컵이 방향을 잃고 표류한다. 손과 입술 사이. 거기엔 단절된 세계가 드러누워 있는 듯하다.
기태의 굳은 표정. 위로할 수 있는 어떤 언어도 없을 듯하다. 젓가락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할 뿐. 어쩌다가 시선이 마주쳐도 슬며시 피한다. 둘 사이에 고적한 정서가 떠다닌다. 어쩌다 같은 접시에 젓가락이 닿아도 기태가 젓가락을 놓는다. 기태는 술잔마저 기울이려 않는다. 평소엔 얼마나 잘 마셨던가? 나도 술잔을 들 계제가 못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묵묵히 기태를 바라본다. 그의 시선도 나의 콧잔등에 뒤엉킨다. 그것도 잠깐일 뿐. 갇힌 물속인 듯. 그와 나 사이에 서러움이 피어오른다. 서러움의 감정이 그와 나 사이를 부유하고 있다. 아무래도 형언할 수 없는 서러움이다. 준규가 잘못되면? 그 탓이 내게 있다는 게 서러운 게 아니다. 아내가 잘못된다면? 그 탓도 나 때문이란 걸 애석해하지 않는다. 보다 서러운 건 나의 번민과는 아랑곳없이 일이 벌어질 형세라는 점이다. 마음을 비워서 피할 수 있다면? 욕심을 버려서 피하기라도 한다면? 그 어떤 길이라도 밟고 싶다.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압박감. 압박감이 점차 커다란 파장으로 너울지려 한다. 숯불을 뺀 지는 이미 오래다. 대부분의 고기가 타 버렸다. 검게 그을려 못 먹을 지경이다. 그와 나의 술잔에 안타까움이 괸다. 둘 사이를 서러운 감정이 치솟아 배회한다. 마주보는 가슴으로 애잔함이 서릿발처럼 차갑게 엉겨든다. 어둠의 자락이 천정에 매달려 떤다. 불빛에 의해 밀려나 있지만. 언제 휘몰릴지 모를 일이다. 침 삼키는 소리마저 명료한 밤. 아내는 밥술이나 떴을까? 일찍 돌아오라는 말이 자꾸만 가슴에 걸린다. 이제라도 말을 꺼내고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다.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세 번만 뒤집기로 한다. 기태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래, 딱 세 번까지만. 그런 뒤에 말을 꺼낼 참이다. 천천히 세 번을 막 돌리고 났을 때다.
나의 핸드폰이 울어댄다. 그럴 리가 없겠다 여겨지면서도 가슴이 떨렸다. 영혼이 통하여 아내가 한 건 아닐까하고. 폴더를 여니 시각이 나타난다. 밤 11시 43분이다.
“병원인데요. H사 소장님 맞으시죠? 두 분 다 소생했습니다.”
“아, 그래요. 정말 감사합니다.”
내 말에 기태의 눈빛이 반짝 빛난다. 일단 병원에 들러도 좋다는 얘기다. 부리나케 둘은 병원으로 달린다. 중환자실에 면회 가기 직전이다. 수술 담당의사가 말한다.
“두 분 다 생명엔 지장이 없는데요. 복잡하게 됐군요.”
기태와 나는 놀라 마주본다. 한 분은 발목과 무릎관절이 나갔어요. 다른 분은 척추를 많이 다쳤어요. 둘 다 정상인이 되기는 틀렸다는 말이다. 뒷머리가 무거워지면서 현기증이 인다. 기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척추를 다친 사람이 누굽니까? 혹시 준귭니까? 의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한다. 이름은 모르겠는데 대학생 같아 보였어요. 이런! 기태가 고함을 치며 주먹으로 문짝을 후려친다. 돌기 직전의 상황인 듯하다. 그와 함께 허둥대며 중환자실로 들어선다. 준규의 침상에 다가선다. 준규는 척추만 다친 게 아니었다. 목뼈에도 금이 갔다고 한다. 붕대에 감겨 준규가 힘겹게 입을 연다.
“아저씨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요? 이제 나는 어쩌죠?”
일시에 한기가 전신을 엄습한다. 자신도 몰래 떨리는 목소리로 응답한다.
“정말 너무 미안하구나. 뭐라고 말해야??”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순간적으로 눈에서 불이 번쩍이는 듯했다. 기태의 주먹이 나의 얼굴을 갈겼기 때문이다. 그대로 광대뼈가 바스러지는 느낌이다.
“가증스럽게도 뭔 말을 지껄여? 네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래?”
격분한 기태의 목소리가 병실을 뒤흔든다. 눈앞이 캄캄하다. 육신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참담했기 때문이다. 준규 옆의 침상을 둘러볼 때다. 험악한 인상의 사내 둘이 고함을 친다.
“당신이 소장이야?”
시인하자 그들이 곧바로 나의 멱살을 거머쥔다.
“야, 이 양반아. 내 동생을 병신으로 만들어?”
말과 동시에 나를 벽으로 밀친다. 할 말이 없다. 회사의 직원들이 보호자들을 떼 낸다. 할 말은 없지만 억울하다. 그러면서 눈물이 핑 돈다. 일단은 보호자들을 달래야 한다. 무조건 보호자들을 달래는 수밖엔 없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당장 요절을 낼 기세다.
“정말 죄송합니다. 최단 시간에 조처해 드리겠습니다.”
발악하듯 내 입에서 고함이 터진다. 말하다 말고 정신이 얼얼해진다. 기태가 나의 뺨을 후려쳤다. 입술이 터진 모양이다. 핏방울이 병실 바닥으로 떨어진다. 순식간에 가슴에 찬바람이 인다. 기태도 이제 우호적인 사람이 아니다. 현실에서 그도 엄연한 보호자일 뿐이다. 보호자들은 완전 찰거머리 같다. 하도 달려들어 숨쉬기조차 어렵다. 정신이 어릿어릿하다.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당할 때에는 설움이 치민다. 예방한다고 했는데도 사고가 터질 때가 있다. 불가항력적인 요소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변명이란 안 통한다. 무조건 안전 대책의 결여라고 간주된다. 이럴 때가 가장 가슴 답답하다. 이 때마다 설움이 치솟는다. 일단은 D사가 원망스럽다. 시멘트의 조성비는 제대로 되었던가? 콘크리트의 주입 시점은 적절했던가? 생각할수록 D사의 현장 감독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감독만 제대로 했다면? 안전 대책만 제대로 세웠더라면? 나중에 조처하더라도 일단은 병원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 이젠 기태로부터도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가 나일지라도 머리가 돌 판이다. 자식이 병신이 되었는데 친구라고 이해하겠는가? 일단은 재주껏 벗어나야만 한다. 본사로 전화를 해야 한다고 둘러댄다. 음감이 나빠 잘 안 들린다며 장소를 옮긴다. 험악할 정도로 인상을 쓸 일이다. 그래야 꼬투리를 잡히지 않는다. 화장실에 들르는 듯하다가 비상계단으로 내달린다. 달리는데도 눈물이 흐른다. 병원을 벗어나면 사고 처리 담당 부원들이 떠맡는다. 보호자들과 전문적으로 면담하는 일은 그들이 한다. 상습적으로 밀고 당기는 팽팽한 일이 남겨진다.
차에 올라 얼마간 숨결을 가다듬는다. 그래야 차를 모는 데 안전하다. 일단은 집으로 내달릴 작정이다. 한 시간은 달려야 할 거리다. 차의 시동을 막 켜려는 찰나. 도로의 가로수에 기대어 흐느끼는 사내를 본다. 울음소리가 너무나 처절하다. 차림새를 보니 기태다. 내가 숨을 고를 때 거기까지 내려간 모양이다.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에 창자가 찢기는 듯하다. 헉하고 내게서도 울음소리가 터진다. 한 마디로 미칠 지경이다. 열쇠를 차에 꽂기는 했지만. 시동을 켤 수가 없다. 밤이어선지 바람결에 소금기가 느껴진다. 도심에까지 해풍이 밀려드는 모양이다.
휩쓸리는 바람결에 양구의 밀밭이 떠올랐다. 아마도 가축의 사료용으로 재배된 것이리라. 푸릇푸릇한 줄기마다 휘감기던 바람결이었다. 아늑하기만 한 양구의 밀밭에서 기태가 관절을 다친 거였다. 차바퀴에 깔려 운신할 수가 없었다. 비명을 내지르며 절망하던 기태였다. 지나던 택시에 연락하여 견인차와 부대원들이 도착했다. 그 때 출혈마저 심했기에 자칫했으면 생명마저 잃을 뻔했다. 그 때부터 기태는 나를 평생의 지기로 여겼다. 틈만 나면 고마움을 잊지 못했다. 그런 기태가 피울음을 울고 있다. 당장 아내 곁으로 가야 하지만 망설여진다.
기력이 떨어져 일어나지도 못하고 눈으로만 배웅하던 아내였다. 온 기력을 다해 속삭이듯 들려주던 말. 오늘은 일찍 들어오세요. 퀭한 눈에 물기가 번들거렸다. 평생을 함께 살아온 그녀. 그녀가 하는 마지막 부탁일지도 모른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몰래 시동을 켠다. 금세 엔진음이 들리며 속도계의 바늘이 움직인다. 일단은 차를 움직인다. 차는 기태의 가로수에게로 점차 다가간다. 기태의 흐느낌은 너무나 처절하다. 애간장이 타는 듯하다. 울음소리를 듣고는 외면하기 어려울 정도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결단의 시기가 임박한 것이다. 더는 망설일 수가 없다. 그랬다간 아무것도 안 될 것 같다. 후회하지 않을 결단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가치로울 것이다. 절망한 친구를 지나쳐 간다면? 그래서 절교라도 하게 된다면? 나는 고개를 흔든다. 그렇게 속 좁은 그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왜 그리 꾸물거렸느냐고 외려 따질 것도 같다. 그는 나의 마음을 읽는 친구다. 나 역시 그의 마음을 잘 안다고 믿는 처지다. 자꾸만 머릿속에 섬광이 인다. 위기감이 자꾸만 엄습한다. 내달려야만 할 것 같다.
‘그래, 일단 준규는 살았으니까 두고두고 속죄하면 된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아내한테로 먼저 가자.’
잠시 눈을 질끈 감는다. 이내 번쩍 뜨곤 가속페달을 밟는다. 1차선으로 위치를 옮긴다. 차내 시계를 흘낏 본다. 자정 무렵이다. 속도감에 취할 정도로 도로는 한산하다.
석 달 전. 내가 기태의 포장마차를 찾았을 때였다. 지속적인 우정을 위해 가끔씩 찾는 편이었다. 손님들이 떠난 밤늦은 시각. 그와 나는 장어구이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다리를 절면서도 얼굴은 언제나 환했다. 신체장애자라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맑은 표정이었다. 잔을 채우며 그가 입을 열었다. 너는 어때? 직장이 있으니까 그래도 낫지? 나는 무슨 영문이냐는 듯 그를 바라본다. 하루 종일 서서 지내다 보니 보통 힘들지 않아. 새벽 무렵이면 희연이 생각이 가끔씩 난다? 너도 생각나지?
눈이 번쩍 띄는 얘기였다. 한 때. 부대 주위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유곽의 아가씨였다. 귀여우면서도 서비스를 잘 하기로는 소문이 난 터였다. 그래서 기태와 나도 이따금씩 그녀를 만났다. 지루한 시간을 잊게 해 주는 청량제였다. 기태와 나는 휴가도 함께 나왔다. 기태가 의견을 물었다. 우리, 희연이랑 강 낚시나 할까? 희연은 매운탕을 끓이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유곽 주인이 허락할까?”
나의 입을 막으며 그가 말했다. 야, 그건 내게 맡겨. 방법이 있으니까 얘기했지. 텐트와 낚시 장비를 갖춰 동강으로 갔다. 마침내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다. 매운탕으로 저녁을 먹고 나니 밤이 이슥했다. 이색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아? 기태가 의견을 물었다. 어떤 건데요? 희연이 궁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다들 나를 따라 와. 기태가 앞장을 섰다. 일제히 알몸으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기태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렇게 대충 삼각형으로 서 있어 보자구. 5분쯤 있으면 감각이 올 거야. 물살은 약간 센 편이었다. 십여 분쯤 지나면서부터였다. 감촉이 까칠까칠한 것이 허벅지에 와 닿았다. 어머, 뭐가 자꾸 달려들어요. 희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내 기태가 입에 손을 갖다댄다. 쉬잇! 조금만 더 있어 봐. 보리 까끄라기 같은 게 자꾸만 허벅지와 엉덩이에 와 닿지? 이게 바로 민물 새우라는 거야. 이런 경험을 아무데서나 하지는 못해. 기태의 말이 끝나자마자 셋은 간지럽다며 낄낄거리다가 강가로 나왔다.
물기를 닦은 후엔 텐트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 오늘은 영락없이 2:1이네요. 비디오에서나 봤지 이럴 줄은 몰랐어요. 혹시? 오빠들 변태 맞죠? 호들갑을 떨며 희연이 사내들을 맞았다. 사정이 끝나고 셋이 나란히 누웠을 때다. 기태가 말했다. 세상이 아무리 고달파도 오늘 이 순간을 추억하면서 살자꾸나. 결국 죽으면 흙으로 사라질 몸이잖니? 희연이 너도 유곽을 벗어나 안정을 찾기를 바래. 때가 되면 우리가 최선을 다해 도울게. 동의를 구하듯 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나도 의연히 고개를 끄떡였다. 텐트의 비닐 창 밖으로 밤안개가 굽이쳤다. 셋은 하나같이 숙연한 자세로 밤의 정취에 젖었다.
그렇게 한동안. 나란히 드러누워 있을 때였다.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환희가 밀려든 다음에 내닫는 공허감. 그런 공허감의 실체를 느낀 밤이기도 했다. 내가 취한 즐거움만큼 희연에게는 회한으로 되돌려질 게 두려웠다. 즐거움이란 쌍방이 함께여야 하는데. 이건 결코 즐거움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어쩔 수 없이 즐거워하는 척할 뿐이리라. 세상이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귓전으로 밀려드는 건 흘러내리는 강물소리일 뿐. 갑자기 서러운 마음으로 코끝이 찡하니 울렸다.
포장마차에서 나는 기태를 향해 말했다. 희연은 삭막한 현실에 내린 감로수였어. 지난번에 통화해 보니 행복한 가정의 주부 티가 나더군. 제대 직후였으리라. 기태와 나는 저축통장을 털어 희연을 유곽으로부터 빼주었다. 그 일은 기태와 나의 공동의 추억거리였다. 기태와 나는 인간적인 희연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현실의 어려움은 그 날을 떠올리며 잊어버리자구. 우정을 확인하듯 서로의 어깨를 얼싸안으며 현실의 삭막함을 달랬다.
차창 밖으로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집이 가까워 오면서 서서히 불안해진다. 죽음 자체가 두려운 건 아니다. 죽음과 함께 스러져 갈 추억이 안타까운 것이다. 아직도 승용차로 20여 분쯤 남은 거리다. 아내와 영결하면 무엇이 가장 가슴에 응어리질까 생각해 본다. 한 마디로 그리움일 것 같다. 언제 어디서든 그녀는 내 그리움의 원천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우체국의 정경이 떠올랐다. 우편물이 가득 실린 카터. 계단에서 우편물을 안아 실내로 옮기려는 발랄한 처녀가 보였다. 수량이 많기에 나도 거들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도 우편물을 붙이려던 참이었다. 동일한 크기의 우편물 봉투가 책으로 느껴졌다. 책이냐고 물었다. 생각지 않은 나의 반응이었다. 매력적인 여인에 대한 반응이었으리라. 여인은 대뜸 고개를 까딱였다. 우편물 접수를 마치고는 그녀와 자판기 커피를 나눠 마셨다. 초면이기에 자판기 커피로 족했다. 벽지 마을문고에 보낼 책들이에요. 뭐라도 베풀어야만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아서요. 그녀의 가지런한 치아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매혹적이었다. 그녀의 맑은 눈빛과 가지런한 치아가 그리움의 원천이 될 줄이야? 그 때부터 1년간을 연애하다가 그녀와 결혼했다. 살면서 보니 마음이 아주 따스한 여인이었다.
그런 아내에게 해 준 건 뭐였던가?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리다. 나는 어차피 공사판을 떠도는 인생이다. 공사판이 정해지면 거기로 이동해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삶의 상당 부분은 이별이었다. 주말에나 만날 수 있는 부부. 아내가 몸져눕고서부터 현장 가까이에 주거를 정했다. 그 동안 빈한한 가정을 돕겠다고 아내는 보험 설계사로 일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시름시름 몸이 허약해진 거였다. 평소에 관심 있게 살폈더라면? 아마도 그 지경은 아니었으리라 여겨진다.
도로가에 버려진 휠체어가 보인다. 망가질 대로 망가져 뒤집혀져 있다. 휠체어를 보는 순간 준규의 얼굴이 떠오른다. 망가진 척추로 평생을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할 녀석. 이게 어디서 맺힌 업인지 모르겠다. 녀석의 휠체어를 볼 때마다 나는 죄인이 되어 고통을 받을 것이다. 탁월한 현대 의술로도 길이 없는가? 생각할수록 가슴 아릴 뿐이다. 휠체어를 탈 때마다 쓰라릴 녀석의 마음은 어떻게 보상해야 할까? 다만 그게 문제다. 한창 인생을 열 나이의 녀석이 너무 안쓰럽다.
준규의 얼굴에 겹쳐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준규는 휠체어로 인생을 살아야 하지만. 수족이 건강한 아내에겐 얼마나 구경을 시켜 주었던가? 제대로 여행다운 여행마저 못 시킨 느낌이다. 아등바등 생활고에 시달려 쩔쩔 맨 게 전부인 듯하다. 아내가 기운만 좀 차린다면? 의식만 맑아지면? 명승지를 찾아 구경시켜 주고 싶다. 비록 시한부의 생명이지만. 다시는 못 태어날 인생이 아닌가?
사장하고는 유대가 깊으니까 며칠의 시간은 주리라고 여겨진다. 그렇게만 되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에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자신이 원망스럽다. 제발 아내가 무사하기만 하다면. 먼발치로 아파트 단지의 입구가 보인다. 입구엔 대형 원예점이 있다. 아파트 주민들을 상대로 다양한 꽃들을 파는 곳이다. 문득 아내가 좋아하던 꽃에 생각이 미친다. 소담스런 국화꽃이다. 만개한 대국을 아내는 유별나게 좋아한다. 지금껏 국화 꽃다발을 사 준 적이 있었던가? 낯이 화끈거린다.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엔 외식만을 즐겼을 뿐. 국화꽃 한 다발도 사 준 적이 없다니. 참으로 부끄럽고도 미안한 마음이다. 가게의 불만 켜졌다면 한 다발쯤 사고도 싶다. 하지만 경황이 없는 오늘은 아니다.
길가 건물의 담에 기대어 취객이 토악질을 해댄다. 취객을 보자 기태의 얼굴이 밀려든다. 기태의 마음만큼이나 나도 애가 탄다. 기태를 위해선 내일 당장에 시간을 내리라. 지기란 어디까지나 영원한 관계이다. 결코 기분에 좌우되는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준규는? 할 말이 없다. 그저 가슴만 애달플 뿐이다.
핸드폰이 울어댄다. 운전관계로 잠시 폴더만 열었다 닫는다. 기태의 전화번호다. 받아야 할 전화다. 하지만 운전 중이라 위험하다. 일단 나중에 통화할 작정이다. 룸 미러에 실린 나의 얼굴을 힐끗 본다.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이다. 정신적인 압박감에 시달린 행색이 역력하다. 거울 속의 내가 한없이 가엾게 느껴진다. 어쩌다가 이렇게 압박감에 시달려야 하는지 어지럽기만 하다.
언제부터 말굽진동자의 맥놀이가 시작된 건지 알 수는 없다. 진동수가 비슷한 파동이 합성되어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파동. 맥놀이의 파원(波源) 중의 하나를 준규라고 하면 다른 하나는 아내다. 불시에 형성된 맥놀이로 갈피를 못 잡겠다. 파원이 하나일 때는 맥놀이가 안 생긴다. 오로지 단일한 파장으로 진동하는 파동만 있을 따름이다. 현재로선 두 파원이 다 애처롭다.
은혼 기념일을 맞은 올해. 생이 너무나 고달프다고 여겨졌다. 지난날들이 구름송이처럼 펼쳐졌다. 사내애들만 둘을 낳아 행복감에 취한 날들. 녀석들이 대학에 들어가 만족스럽던 날. 온전한 외출복 하나 없어도 나들이에 행복해 하던 아내였다. 입영한 자식들 얼굴마저 못 본 채 신음하는 아내. 과연 오늘이 어떤 의미로 남을지 불안하기만 하다. 두 달 전이었으리라. 휴가 나온 두 녀석을 안고 얼마나 흐느끼든지. 애간장이 타는 듯한 울음이었다. 귀대하던 날. 두 녀석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혔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날 어머니에 대한 애달픔 때문이었으리라.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손을 흔들던 녀석들이었다. 어쩌다 간암에 걸렸던지? 마냥 착잡할 뿐이었다. 녀석들이 떠나 버린 날. 나는 밤을 지새워 아내를 달래야만 했다. 세상의 만남이란 언제나 허망한 법이라며 달래고 또 달랬다. 탈진하여 제대로 울지도 못한 채. 하릴없이 내 가슴만 두드리며 어깨를 들먹이던 아내였다. 먹먹한 아내의 눈빛을 떠올리는 순간. 콧등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핑 돌았다.
저녁부터 끼기 시작한 먹구름 탓인 듯. 차창에 빗물이 듣는다. 세상의 분진을 다 쓸어버리기나 할 듯. 비까지 내려 더욱 마음이 암울하기만 하다. 신산스런 마음의 일각에 빗속을 나뒹굴 기태가 떠오른다. 그의 성질이라면 비를 피할 그가 아니다. 빗속에 절규하다가 폐렴이라도 걸릴까 염려스럽다.
마침내 나의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다. 수위실엔 아무도 안 보인다. 승강기에 올라 7층에 내린다. 열쇠로 문을 바로 연다. 마음을 잠시 추스른다. 안방 문을 연다. 누비이불을 깐 채로 아내가 쓰러져 있다. 창문에 몸을 기대어 엎드린 채다.
“여보! 여보오!!”
아내의 몸을 흔들어 본다. 목이 옆으로 휙 돌아간다. 아니, 이럴 수가? 일시에 흑하고 흐느꼈다. 기다리다 못해 창으로 내다보려 했으리라. 흐느끼면서 누비이불과 함께 아내를 방바닥으로 눕힌다. 누비이불을 펴고 아내를 반듯이 눕힌다. 시린 아내의 뺨에 천천히 입맞춤을 한다.
“여보, 미안해. 내가 약속을 못 지켜서. 좀더 일찍 와야 했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슴이 저려 온다. 자꾸만 아내의 뺨에 얼굴을 비빈다. 아내의 뺨에 내 눈물방울이 줄지어 흐른다. 그러다가 아내의 어깨를 안아 일으킬 때다. 접힌 종이가 떨어진다. 종이를 펼쳐 본다. 몇 줄의 글자가 씌어 있다.
오늘까지도 바빴던 모양이네요. 핸드폰 전원은 계속 꺼져 있었구요. 마지막으로 얼굴만 좀 보았으면 했는데. 이것도 운명이군요.
왈칵 설움이 인다. 경황이 없어 배터리가 닳은 줄도 몰랐나보다.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는다. 어찌 오늘처럼 시련이 가혹한지?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에 울컥 울음이 터진다. 서슬 퍼런 설움이 불길처럼 치솟는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으로 말굽진동자의 맥놀이가 밀려든다. 그러면서 의식의 끈을 놓쳐 버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