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난기류(亂氣流)
손정모
자세를 더욱 낮추며 가만히 숨을 멈춘다. 솔개는 점차 암벽을 향해 다가선다. 가늠자의 구멍을 통해 가늠쇠의 선단을 중심에 맞춘다. 가늠쇠의 선단에 솔개의 몸통의 중심을 일치시킨다. 가만히 방아쇠를 당긴다. ‘탕’ 소리와 함께 솔개가 날개를 퍼덕이더니 곤두박질친다. 떨어지는 위치를 눈여겨 바라본다. 날렵한 동작으로 사냥물에 다가선다. 제법 피가 많이 흘러내린다. 총알이 내장을 관통한 모양이다. 애틋한 마음은 일지만 애써 차가운 표정을 짓는다. 피를 흘리면서도 솔개는 여전히 날개를 퍼덕거린다. 면장갑을 낀 손으로 날렵하게 솔개의 목을 움켜쥔다. 2분쯤 지났으리라. 솔개는 축 늘어진다. 가방에서 신문지를 꺼내 솔개의 몸에서 피를 대충 닦는다. 서너 겹의 신문지로 솔개를 둘둘 만다. 그리고는 가방 속으로 가만히 던져 넣는다. 나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불을 붙이자 향긋한 냄새가 체내로 스며든다. 천천히 필터를 빨아들인다. 담배를 피우면 세상이 일순간에 편안해지는 느낌이 든다. 천천히 담배 연기를 주위로 내뱉는다. 생각 같아선 담배 연기마저도 체내로 흡수해 버리고 싶어진다. 그만큼 담배의 맛이 감미롭게 느껴진다. 담배 연기가 진하게 코로 스며들 때다. 별안간 의식계로 유리창이 바스러져 내리는 듯한 착시 현상이 인다. 귀에까지 선명히 들리던 유리창 깨지던 소리들. 잠시 온몸이 떨린다. 하필이면 유리창이 박살나다니? 생각할수록 영 께름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일렁이는 담배 연기와 더불어 상념은 과거로 흘러내린다.
“우측 안구(眼球)가 완전히 깨졌어요. 치료가 끝나 봐야 알겠지만 어쩜 실명할지도 모르겠군요.”
영등포의 안과병원에서 의사가 내뱉던 말이었다. 사내가 입원하여 수술이 끝나는 날까지 무려 두 달이 걸렸다. 3차례에 걸친 수술이 끝나고 1주일이 흐른 뒤였다. 병원에서는 사내의 시력 검사를 실시했다. 사내의 시력이 회복되지 못한다면?
“우측 눈이 실명하게 되면 좌측 눈도 곧바로 실명할 확률이 높아요. 공교롭게도 양쪽 안구로 이어지는 시신경 다발의 일부마저 손상되었기 때문이죠. 수술을 한다고는 했지만 결과가 어떨지 의문입니다.”
안과에선 세계적인 베테랑이라는 의사의 말이었다. 수술 종료 이후부터 시력 측정까지의 1주일간의 시간. 그 제한된 시간 동안. 나는 날마다 병원의 뒷마당에서 남 몰래 합장하여 기도를 했다.
“오, 신이여. 정녕 신이 있다면 제발 이 난관만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제발 그래만 준다면 이후부터는 무조건 매사를 남에게 양보하며 살겠습니다. 제발 사내의 눈이 실명되지만 않게 해 주십시오.”
점차 햇살이 따가워진다. 고개를 드니 해가 중천에 떠 있다. 가방을 열고는 파인애플 주스를 따라 마신다. 혀끝에서부터 감미롭게 휘감기는 맛이다. 천천히 엽총의 총신을 구부려 가방의 밑바닥에 꾸려 넣는다. 접었다가 펼 수 있는 독일제 엽총이다. 친구의 소개로 동대문에서 은밀히 구입한 총이다. 그랬기에 아직 소지 허가도 받지 못한 상태다. 적발되면 당장 범법자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워낙 마음이 심란한 상태라 다른 데까지 신경 쓸 계제가 못 된다. 오늘은 솔개 한 마리로 만족이다. 하루에 새 한 마리. 이게 나의 목표량이다. 목표만 채우면 총을 꺾어 가방에 숨긴다. 파인애플 페트병을 가방에 넣고는 오솔길을 걷기 시작한다. 소나무와 활엽수로 뒤엉킨 산은 나름대로 웅장한 멋을 안겨 준다. 강원도에 소재하며 바다를 굽어보는 산이라 풍광이 수려한 편이다.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채 서서히 능선 길을 밟는다. 편안하게 늘어진 능선만큼이나 마음도 잠시 평온해진다. 발에 밟혀 사각거리는 나뭇잎 소리에 휩쓸려 점차 의식은 과거로 미끄러진다.
합기도 2단에 태권도 4단. 이게 공인된 나의 무술 실력이다. 태어날 때부터 역마살이 심한 천성 탓이었으리라. 연고지가 없는 객지로 떠나고 싶어 안달이었다. 실수라곤 전혀 없는 깐깐한 성질의 부모를 둔 탓이었을까? 때론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게 사람이라고 여겨졌다. 무슨 일에도 완벽함을 추구하던 부모의 성질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당신들의 완벽한 성정은 독자인 내게 휘몰리는 정신적인 억압의 유형이었다. 자라면서부터 부모와는 가치관이 영 달랐다. 한 마디로 부모의 슬하가 숨 막히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좀 모자란 듯해도 인간적인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수시로 마음이 들뜨곤 했다. 뒤설레는 마음 탓에 공부는 진작부터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편지 한 장을 남기고는 가출해 버렸다. 남의 시선이 아닌 나의 관점에서 세상을 살고 싶은 터였다. 그 때부터 떠돌이의 생활이 시작된 거였다. 아무 데도 오라는 곳은 없었지만 가고픈 데는 많았다. 한동안은 주유소의 주유 도우미로 뛰었다. 그러면서 점차 다른 영역으로 눈을 돌렸다. 중국집 배달원, 퀵 서비스 배달원, 이삿짐센터의 고용원 등등.
한동안은 목욕탕의 때밀이로도 일했다. 벌거벗은 중년 사내들의 때를 미는 일이란? 마땅히 자신이 밀어야 할 때가 아닌가? 그 때를 때밀이에게 밀게 하는 태도가 영 마음에 거슬렸다. 축 늘어진 사내들의 성기를 일상적으로 보는 것도 역겨웠다. 정서가 불안할 때면 다짜고짜로 알몸의 사내들을 짓밟아 버리고도 싶었다. 뭐가 잘 나서 몸을 그렇게 내맡기느냐는 역정 때문이었다. 마음이 그렇게 변하자 때밀이를 그만두어야 했다.
유랑을 시작하면서부터 꾸준히 도장을 다녔다.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기는 했어도 도장에서의 수련은 계속되었다. 무술의 유단자가 되면서부터는 무술의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섬광이 번쩍거릴 정도의 현란한 공중 발차기. 나는 도복만 차려 입으면 전신에서 신명이 났다. 무조건 내달리고 부딪히며 격파를 하고 싶었다. 남들과의 겨루기에서 느끼는 쾌감은 또 어떤가? 몇 대를 얻어맞더라도 상대에게 파고들어 결정타를 안길 때의 통쾌함이란! 무술의 쾌감을 전신으로 느끼는 게 묘미였다.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태권도가 공인 4단에 이르렀다. 이 때부터는 도장을 차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다가 3년 전부터 동해의 M항 부근에 태권도의 도장을 차렸다. 도장을 차린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봄철부터 자꾸만 시비를 걸어오는 폭력 조직이 있었다. 항구 도시라 주먹의 조직은 드세었다. 폭력 조직들간의 대결이 심심찮게 매스컴에 오르내렸다. 조직원들 중의 일부는 구속되기도 했지만 근원적인 대결은 좀체 종식되지 않았다. 한참 폭력의 물결이 술렁대더니 <불가사리>파에 의해 평정이 되었다. 불가사리파의 주먹들은 거구의 장신들로 이루어진 싸움패들이었다. 꽃잎이 바람결에 흩날리던 늦봄부터 불곰 일행이 찾아왔다. 불곰은 불가사리파의 부두목이었다. 신장 190cm에 체중 110 kg의 거구의 사내였다. 그 정도의 체격이라면 웬만한 상대는 힘으로 그냥 제압해 버릴 정도였다.
조직원 8명과 함께 나를 찾아온 첫날. 껌을 씹어대며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불곰이 내게 말했다.
“당신이 관장이요? 도장을 차리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용하네? 사업 자금 좀 얻으려고 왔는데 얼마나 주겠소? 우리 똘마니들도 먹고 살아야 안 되겠소?”
연신 눈을 부라리며 너스레를 떨다가는 이죽거리곤 했다. 이런 경우야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되도록이면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얼마면 되겠느냐고 물으니 매달 수표 10장은 달라는 거였다. 수표 10장이라. 100만원을 의미하는 거였다. 서서히 심기가 사나워지려고 했다.
‘이 자식들이 누굴 봉(鳳)으로 아는 거야?’
억지로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1년에 지원금 50만원을 내놓겠다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불곰이 씹던 껌을 나의 얼굴에 콱 내뱉으며 욕을 지껄였다.
“씨팔. 관장이면 다냐? 도장을 계속 운영하나 어디 한 번 해 봐? 개박살을 내 버려?”
서서히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런 중에도 사부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술에 있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절세적인 달인인 사부님이었다.
“무인(武人)에겐 감정 조절이 으뜸 항목이야. 감정의 조절에 실패하면 이미 무인이 아닌 게야.”
마음을 추스르면서 다음에 다시 만나 이야기하자고 말을 돌렸다. 내 말을 듣고 난 직후였다. 한없이 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불곰이 나를 비웃었다.
“이 새끼가 관장이라고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어디 손을 좀 봐 줘?”
불곰에겐 나의 덩치가 무척 왜소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신장 175cm에 체중 74kg. 이런 체격이었으니 거구의 눈엔 가소롭기 그지없었으리라. 무시당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서른한 살의 혈기가 내부로부터 끓어올랐다. 사부님의 근엄한 얼굴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하지만, 자존심에 침해당한 나의 의식이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리며 마지막으로 예의를 다해 말했다.
“오늘은 바쁜 일이 좀 있습니다. 다음에 얘기하기로 합시다.”
그랬더니 조직원 8명까지 비웃으며 일제히 욕설을 내뱉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폭력을 휘두르려는 듯한 분위기였다. 폭력배들과의 주먹 다툼은 끝까지 피하고 볼 일이었다. 같이 싸우다가 경찰에 연행되면 쌍방이 다 피해를 보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싸움을 피하려고 해도 굳이 싸움을 걸려는 불곰 일행이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아무래도 싸움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임기응변으로 경찰을 부르자고 마음을 먹었다. 핸드폰을 열어 112를 눌렀다. 막 통화를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낌새로 경찰을 부르는 줄을 알았던 모양이다. 느닷없이 고함을 질러대며 불곰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막 통화를 하려던 상태라 잔뜩 마음이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느닷없이 불곰이 달려들었으니! 찰나간에 위기감이 엄습했다. 나 자신도 몰래 몸이 치솟으며 발길이 날아갔다. 오른발 바깥 휘돌려 차기였다. 순식간에 ‘퍽’하는 소리가 나며 불곰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금세 얼굴을 타고 핏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얼굴이 찢긴 줄 알았다. 하지만 눈이 안 보인다며 절규하는 불곰의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하늘이 샛노래지며 불상사가 터졌음을 직감했다. 불곰의 우측 안구가 나의 발길에 맞아 터져 버린 거였다. 돌출된 구두의 옆구리가 사내의 안구에 적중한 모양이었다. 너무나 창졸간의 일이었다. 나의 인생이 끝나 버린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불곰의 눈이 실명된다면 나의 힘으로는 변상할 능력이 없는 터였다. 몇 년간을 뼈 빠지게 때밀이로 번 돈으로 도장을 차린 거였다. 번화가의 빌딩의 일부를 빌려 도장을 열었다. 그랬기에 모아 둔 돈도 별로 없는 형편이었다. 변상할 능력이 없다면 일생을 교도소에서 보내야 하리라고 여겨졌다. 찰나간의 일 치고는 너무나 끔찍한 상황이 벌어진 거였다. 불곰의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리자 불곰의 졸개들은 불곰 곁에 몰려드느라고 어수선했다. 일단은 긴급 상황이라 119를 불렀다. 곧바로 병원에 닿아 진찰을 받으니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진 터였다. 의사는 우측 안구가 깨어져 버렸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당장 수술을 해야만 한다고 했다. 불곰이 수술을 위해 병실에 든 직후였다. 불곰 졸개들의 신고 탓이었으리라. 경찰들이 들어서더니 나의 신원을 물었다. 그러더니 폭행 치상죄로 고발이 되었다며 파출소로 가자는 거였다. 경위야 어쨌건 결과를 두고서야 할 말이 없었다. 파출소에서 경위를 설명하고 경찰이 진술서를 작성했다. 진술서의 작성이 끝나자 불곰의 졸개들과 함께 경찰서로 넘겨졌다.
파출소와는 규모부터 달랐다. 경찰서라는 이미지가 가슴에 밀려들자마자 이를 데 없이 불안했다. 담당 형사가 정해지느라고 그런지 대기 의자에서 반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이윽고 담당 형사가 불곰의 졸개부터 불러 진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사무용 탁자를 사이에 두고 경찰은 격식에 따라 질문을 하고 졸개는 답했다. 졸개의 진술 내용을 경찰이 컴퓨터로 옮겨 쳤다. 졸개의 말은 처음부터 엄청나게 과장이 되어 있었다. 그랬지만 입을 꾹 닫고 나의 차례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침몰하는 선박처럼 암담하게 느껴졌다. 진술서를 작성하는 시간에도 곳곳에서 피의자들이 연행되어 들어오곤 했다. 다들 처참한 표정들이었다. 어쩌다가 나도 이런 대열에 낀 건지?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이윽고 형사가 눈을 부라리며 나를 불렀다.
“주민등록번호랑 이름부터 대 봐요.”
말을 듣는 순간. 전신으로 수치심이 끓어올랐다. 조사받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단숨에 경찰을 짓밟아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표정을 억누르며 차근차근히 응답해 주었다. 어느 정도의 골격이 갖춰지자 진술서가 출력되어서는 내 앞으로 제시되었다.
“말한 데와 다름이 없는지 확인해 봐요. 수정용 볼펜은 이거야.”
경찰의 말투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진술서를 읽는 동안. 경찰 서넛이 자기네들끼리의 일상사를 이야기로 주고받느라고 야단이었다. 자녀의 학원비가 올랐다는 등의 주변의 생활 잡사에 대한 얘기들이었다. 얘기를 하다 말고 50대 초반의 경찰이 나를 지칭하며 빈정거렸다.
“관장이면 사람을 개 패듯 패어도 되는 거야? 어디 약한 사람은 무서워서 나다닐 수나 있겠어?”
하관이 쪽 빠진 형사가 말을 받았다.
“도장은 뭐 말라비틀어진 게 도장이야? 차라리 깡패 교습소라고 이름 붙이는 게 어때?”
못 들은 척하려니까 전신의 근육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참느라고 나 자신도 몰래 손가락 가득 기력을 싣기도 했다. 다시는 경찰서에 연행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연신 진저리를 쳤다.
재차 진술서의 내용을 확인하던 중에 불곰의 상해 진단서가 도착되었다. 안구 파열로 최소한 8주간의 가료를 요한다는 진단서였다. 4주를 넘기게 된다는 치료 기한으로 인해 나는 곧바로 구속되고 말았다. 참으로 세상이 막막한 느낌이었다. 불곰과 합의를 해야겠는데도 혈혈단신의 몸이라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불곰의 졸개들 중의 하나를 불러달라고 했다. 졸개를 통해 합의의 의사를 조용히 병원으로 전했다. 서너 시간이나 지나서야 병원에서 돌아온 졸개는 내게 말했다. 불곰은 전혀 합의의 의사가 없더라고 말했다. 실명될지도 모르는 판에 무슨 합의가 있겠느냐고 했다. 만약 실명된다면 나의 두 눈을 불곰에게 달라는 거였다. 그 외에는 일체 바라는 바가 없다고 했다.
한 마디로 가슴이 얼어 터질 지경이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 모양으로 된 건지?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 번에는 M시에서 사귄 무술 친구를 불러들였다. 그 친구는 합기도의 달인이었다. 매서운 눈매로 대번에 상대를 제압해 버리는 친구였다. 그 친구라면 뭘 맡겨도 신뢰가 되는 기분이었다. 친구를 매개로 하여 불곰과는 가까스로 7천만 원에 합의를 하고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이후에 불곰이 시력을 잃으면 나의 눈을 대신 주는 조건으로 하고서. 불곰의 마지막 시력 측정이 있던 날엔 새벽부터 합장 기도를 했다. 기도를 하는 과정에서는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거듭된 정신 집중으로 노곤해진 상태였어도 합장하여 경건히 기도를 했다. 정신적인 기력마저 떨어져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런 가물가물한 의식 상태에서였다. 간호사가 달려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일시에 체증이 풀리는 심정이었다. 불곰의 시력이 회복되었단 말을 듣는 순간에는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불곰과 악수를 나누고는 그 길로 곧장 M시를 떠나 버렸다. M시를 떠나오면서 문득 엽총을 사고 싶었다. 곧장 서울까지 가서 동대문 상가를 뒤졌다. 동대문 상가에 관해서는 빠꼼이인 친구를 통해 독일제 엽총을 샀다. 부품 별로 따로 사서 조립을 한 거였다. 엽총은 접었다가 펼 수 있는 기종이었다. 가방에 간단히 접어 넣어도 표시가 안 날 정도였다. 엽총을 사서 딱히 무얼 하자는 의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공허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엽총이 있었으면 했다. 엽총을 손에 쥐면서부터 망념이 끓어올랐다. M시로 되돌아가 불가시리파의 모든 조직원들을 사살해 버리고픈 충동도 이따금씩 일었다. 그 폭력배들만 아니었어도 버젓이 도장을 운영하고 지낼 터였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가 치미는 일이었다. 하지만 잠시만 마음을 가라앉히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밀려들었다.
그래도 무술을 수련한 무인이 아닌가? 단순한 싸움꾼이 아니어야만 했다. 무덕(武德)이란 무술로써 친구를 사귀는 데에 있는 터였다. 무술로써 약자를 억압하는 유형의 인물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는 무인의 풍도를 갖출 수가 없는 터였다. 분하기는 했지만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마음을 다스려야만 했다. 불곰과의 불상사도 인생의 귀중한 공부였음에는 틀림없는 일이었다.
엽총을 사고서도 한동안 마음이 공허했다. 모처럼 서울에 들어선 마당이었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뭔가를 추억거리로 만들고 싶었다. PC방을 들락거리며 채팅 사이트를 뒤졌다. 번개팅을 원하는 20대 초반의 여자들만을 골랐다. 만나는 여자마다 자신을 여대생이라고 속였지만 눈매만 보면 거짓임이 드러났다. 학비를 조달하려고 보름 동안만 뛴다는 여자도 있었다. 여자들은 학번과 학생처장의 이름만 물으면 슬그머니 화제를 돌려 버리곤 했다. 그들 중에는 엉터리 이름을 댄 여자도 있었다. 장난삼아 핸드폰으로 확인해 보니 엉터리 이름으로 밝혀졌다. 혹시라도 여대생을 만날 수 있다면 장거리 여행을 함께 떠나고 싶었다.
마음이 공허해진 3개월 동안. 스물세 명째의 여자를 만나 직업을 물었다. 대뜸 티켓 다방 호스티스라고 밝혔다. 헌데 묘한 건 첫 인상이었다. 현민지. 이름만큼이나 깔끔하며 맵시가 있어 보였다. 그녀가 모텔로 배달해 온 헤이즐럿 커피를 마신 뒤였다. 눈웃음을 흘리며 그녀가 옷을 벗고는 욕탕으로 들어갔다. 문득 그녀의 손가방이 침대 머리에 얹혀 있었다. 창졸간의 생각이었다. 손가방 속을 열어보고 싶었다. 좀도둑이나 하는 일이라지만. 엽총을 지닌 나는 정처 없는 떠돌이 신세였다. 손가방을 열다가 그녀에게 들켜 무안을 당하더라도 뻔뻔해지기로 작정했다. 혼란한 마음이라 가만히 있으면 정신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욕실문은 제대로 닫혔는지를 잠시 점검했다. 문은 그녀가 꽉 잠근 상태였다. 가벼운 심호흡을 한 뒤였다. 그녀의 손가방을 여니 접는 형의 갈색 지갑이 나왔다. 지갑을 펼치니 현금 카드 2장과 신분증이 드러났다. 그 외에도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이 들어있었다. 신분증을 펼쳐드니 주민등록증과 학생증이었다. 두 신분증의 주민등록번호와 사진의 얼굴이 일치했다. J대 식품 영양학과 03학번의 2학년생으로 되어 있었다. 나보다도 11살이나 연하인 스무 살의 그녀였다. 신속히 손가방과 지갑을 원래의 모습대로 되돌려 놓았다. 그런 뒤에 알몸으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내 그녀가 침실로 들어섰다. 좀 전에 샤워를 마치고 기다렸다며 그녀의 사타구니에서 타월을 걷어냈다. 눈부시게 하얀 여인의 속살. 치부에 드러난 적당한 길이의 거웃의 모습. 서서히 나의 사타구니가 달아올랐다. 미풍에 휩쓸리는 꽃잎들처럼 평온한 마음으로 서로의 알몸을 탐닉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등줄기와 이마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내며 함께 욕실로 들어섰다. 서로의 몸에 비누칠을 하다가 그대로 뒤엉켜 거친 숨결을 내뱉었다. 이윽고 냉장고 속의 음료를 꺼내 마시고는 그녀를 먼저 돌려보냈다. 천천히 핸드폰을 열어 J대 학과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여직원에게 그녀의 이름을 대니 2학년에 재학 중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핑계를 대고 생일까지를 확인해 보니 주민등록증의 것과 일치했다. 그녀는 틀림없는 여대생이었다. 나도 몰래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혹시나 하고 여대생과의 섹스를 바라던 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한 달 동안. 그녀와 숙식을 함께 하면서 서울 근교로 나다녔다. 한 달간의 교제비로 애초부터 그녀는 100만원을 요구했다. 적어도 200만 원은 받아야겠지만 마음에 들기에 절반만 받겠다고 했다. 그런 그녀에게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어차피 돈을 움켜쥐고 죽을 삶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힘들게 모아 둔 금액이었지만 선선히 그녀에게 내 주기로 했다. 놀라운 건 그녀가 틈틈이 전공 서적을 펴든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육체가 자유로워도 지식의 물줄기는 말라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북한산 백운대를 함께 올랐던 날 밤에도 그녀는 모텔에서 책을 펴들었다. 그것도 몇 차례나 정액이 주입된 뒤였다. 그 때 내게도 커다란 일깨움 같은 게 느껴졌다.
‘저 여자는 단순한 색녀(色女)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쩜 대자연이 나를 일깨우기 위해 보낸 영혼의 사신인지도 모르겠어.’
그녀가 책을 펼쳐들면서부터 나는 코를 골며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밤이 이슥하도록 책을 읽곤 했다. 잠깐씩 의식이 깨는 잠결마다 그녀의 책 읽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혼란스런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의 소용돌이는 거세어졌다. 하루 바삐 안정된 생계를 꾸며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러면서도 현실적으로 텅 빈 가슴을 좀체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아무래도 단 기간으로는 어려울 듯했다.
약속된 한 달이 사흘 남은 날 밤이었다. 내가 잠든 후에 그녀는 여전히 독서를 했다. 새벽 무렵에 눈을 떴을 때였다. 그녀가 소리 없이 훌쩍이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놀라 일어났다.
“이 봐! 무슨 일이 있어? 왜 한밤중에 눈물을 질질 짜고 그래?”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잠을 깨게 해서요.”
민지가 잠옷을 입고 있었기에 나도 팬티만 걸치고는 마주 앉았다. 빛살이 어지러운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동안 입술만 달싹이며 그녀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엔 시린 안개 같은 침묵이 둘러싸였다. 근 한 달간을 같이 지내면서도 개인적인 과거는 일체 말하지 않았다. 일종의 불문율과도 같았다. 그랬는데도 그 날 밤은 그녀가 먼저 과거를 털어 놓았다. 나날이 스러지는 시간이 안타까워서라고 했지만. 진정한 속내는 알 수가 없었다.
중학교를 마치면서부터 그녀는 보육원을 나와야 했다. 험한 세상 속으로 몸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번이나 LG 25시를 기웃대던 결과였다. 주인 사내의 마음에 들어 야간 아르바이트 학생으로 채용되었다. 주인의 아내는 지방에 근무하는 교사였다. 주인 사내와는 주말 부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40대 중반의 주인 사내의 눈에는 언젠가부터 욕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손님이 없을 때면 틈틈이 주인은 민지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그러다가 팬티에까지 손가락을 디밀기 시작했다. 민지로선 당장 근무처를 벗어나면 생계의 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내의 애무를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사내는 민지에게 인근에 값싼 자취방을 얻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사내는 틈틈이 민지를 침실로 불러들여 발가벗기곤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3년간을 힘겹게 다니다가 여고를 졸업했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 J대에 합격하게 되었다. 주인 사내의 배려로 등록금까지는 댈 수 있었다. 대학에 붙으면서부터는 LG 25시도 머물 데가 못 되었다. 더 많은 용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길로 티켓 다방의 호스티스로 취업을 했다. 사내들을 상대하면서부터는 소득이 눈부시게 늘었다. 자취방을 벗어나 어느새 원룸을 얻기에 이르렀다.
사내들과 원치 않는 성교를 나눌 때마다 점차 정신이 쇠락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러다가는 종래에 폐인이 되지는 않을는지?’
생각지 않으려고 해도 문득문득 자신의 존재가 두려워졌다. 이대로 방탕에 젖어 시간을 허비하다가는 스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대학만 졸업하게 된다면! 학업만 마무리되면 제대로 된 직장을 찾아 나설 작정이었다. 언제까지나 아랫도리를 팔면서 인생을 보낼 수만은 없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자나 깨나 하루 속히 세월이 흘러가 주기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어쨌든 역경만 넘어서면 새로운 지평이 열리리라고 여겨졌다.
“어쩜 주인과 섹스를 하면서부터 제 인생이 뒤틀려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에요. 처음엔 그 충격으로 한동안 주인이 무서웠어요. 하지만, 주인에게 혹시 다른 아르바이트 여고생이 생길까 봐 이내 두려워졌어요. 왜냐 하면, 그 날이 제가 내쫓기는 날이 될 거니까요.”
민지가 담배를 꺼내 들며 입술을 달싹인다.
“담배 태우실래요?”
나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뽀얀 연기 사이로 이따금씩 민지가 한숨을 내쉰다. 담뱃재를 탁탁 털어대며 그녀가 입을 연다.
“어때 제가 너무 한심하죠? 저도 그 때문에 때때로 눈물이 나요. 마음을 웬만큼 비웠다 싶으면 어느새 번민에 빠져 있고는 해요.”
생각해 보니 그녀의 처지와 나의 처지가 다를 바가 없었다. 비록 수렁에 빠진 그녀였지만 나날이 반성하는 그녀였다. 언젠가는 스스로의 의지로 벗어나리라는 확신마저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신세였다. 일시의 혈기로 생활의 터전을 상실한 터였다. 다음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억눌렀던 혈기가 재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중졸뿐인 학력도 문제였다. 세상이 변하여 독학사를 배출하는 시대였지만. 그 어느 직장에서도 독학사를 받아들이는 곳이 없는 현실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나 같은 학력으로서야 어떻게 살아나갈 건가? 생각할수록 앞이 암담해지기만 했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가 본들 시기가 늦은 터였다. 과거를 되돌릴 수도 없는 현실이었다. 이 나이에 앞으로의 여정을 어떻게 계획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현실의 고뇌가 그처럼 심각할 줄이야 이전엔 몰랐다. 그저 역마성에 지배를 받던 당시의 마음을 탓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모처럼 마음을 열고서도 내게서 위로를 받지 못하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이 터져라 꼭 깨문 그녀. 그녀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인 듯하여 설움이 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의 속박. 이들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어떤 것일까? 생각할수록 가슴이 착잡해졌다. 마음을 열기 전에는 서로가 안쓰럽게 여겨지지 않았다. 마음을 연 이후에는 처절할 정도로 서로의 신세가 애처로웠다. 헤어져야 할 시점에 이르렀음을 느낀 밤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해 줄 일은 정성스레 그녀를 애무해 주는 일뿐이었다.
그녀와 작별한 이튿날 아침이었다. 급격히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당장 달려가 그녀를 붙들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하지만, 서로 마음을 연 아픔 때문에 그녀와 더 이상 만날 수는 없었다. 헤어진 후. 며칠 동안을 빈 방을 지키며 콧물을 훌쩍였다. 내 마음을 휩쓰는 역마성의 근원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왜 한 곳에 머물러 있기가 그리도 힘든 걸까? 마치 정지한다면 그대로 화석이 되어 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울 정도였다.
그녀와 헤어진 지 3주째였다. 나는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어려워 한강의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정작 배에 오르니 유람선만으로는 어림이 없다고 여겨졌다. 바다로 가서 배를 타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강화에서 석모도행 배에 올라서는 천천히 바닷물을 굽어보았다. 그렇게 사흘쯤 배를 타고 다닌 연후였다. 아무래도 배를 타는 정도로는 역마살이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내심으로 작정했다. 당분간 정처 없이 전국을 승용차로 떠돌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서 슬기로운 생각을 주워 담기로 했다. 아무리 어리석은 생각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슬기로운 빛깔로 채색될지도 모르리라 여겨졌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강원도 동해변의 산맥을 향해 차를 몰았다. 하릴없이 시골의 산야를 떠돌며 야생 조류를 사냥하기로 작정했다. 우선 창공을 자유롭게 비상하는 자체가 나의 자존심을 구겨 놓는 듯했다. 새의 주제에 겁도 없이 자유롭게 비상을 하다니? 누구 주눅 드는 꼴을 보려고 그러는가 싶어 노여웠다. 이왕이면 날개 길이가 크고 덩치가 클수록 좋다고 생각되었다. 시골의 산야를 찾으니 의외로 솔개나 매가 많았다. 날개 길이도 길고 무척 교만스러워 보였다. 꼬인 내 정서 앞에선 교만을 부리는 무리는 마땅히 제거 대상이 되었다. 총으로 잡은 새는 불을 지펴 구워 먹기로 했다. 소금만 넉넉하면 다른 건 필요가 없었다.
멀리 바다를 굽어보며 태백산 줄기를 타고 남하하기로 했다. 하루에 새 한 마리면 양식으론 풍족한 터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명사수였기에 내게 실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탄환 1발과 새 한 마리의 목숨을 맞바꾸는 거다. 준비된 탄환을 감추는 일도 고역이다. 언제 어디서든 검문을 받게 될 때를 대비해야 한다. 불시 검문에 걸리기만 하면 완전히 끝장이다. 어떤 죄목으로 몰려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휴대용 트랜지스터를 튼다. 금세 전파가 잡히면서 뉴스 속보가 흘러나온다. 라디오 소리를 외부로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리시버를 귀에 꽂는다. 새벽에 무장 탈영병이 태백산으로 잠입했다고 한다. 군경 합동 수색대가 수색견을 몰고 활동에 나섰다고 한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저려 온다. 하필이면 탈영병이 태백산 줄기로 파고들다니? 태백산 줄기를 타고 남하하면서 바다도 바라보며 구름도 감상하며 인생을 되돌아볼 작정이었다. 그랬는데, 그런 기회마저도 차단된 느낌이 들어 울화가 치민다. 일단 뉴스에 따라 태백산을 벗어나고 볼 일이다. 직장도 없는 처지에 수색대에 검문을 받는다면 좋을 일이 하나도 없다고 여겨진다. 태백산을 벗어나려고 마음먹은 순간이다. 광활한 태백산 줄기였지만 지형이 한없이 좁게만 여겨진다. 금방이라도 탈영병이 총기를 들이대며 나타날 것만 같다. 탈영병의 눈에 띈다는 건 바로 죽음과 통할 것이리라.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인가? 재차 가슴이 떨린다. 수중에 지닌 지도도 없고 나침반도 없다. 다만 감각으로 남쪽을 향해 타 내려간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태백산을 빨리 벗어나려면 남쪽이 아니라 서쪽이 빠를 것 같다. 동쪽은 바닷가라 이미 경찰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으리라. 어쨌건 서쪽으로 가야 한다. 마음을 다잡으면서부터 가슴이 자꾸만 펄떡거렸다. 뉴스를 듣기 전까지는 새 소리와 바람소리가 평온한 선율로 느껴졌다. 하지만 뉴스를 듣고 난 뒤엔 일체의 소리가 무섭게 느껴진다. 차라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게 편안하다. 일체의 소리라곤 사라져 버린 공간이 그리워진다.
서쪽의 능선을 향해야 한다. 아무리 마음이 흔들려도 내닫는 발길의 방향만은 서쪽으로 향해야 한다. 연속적으로 마음을 다잡으면서 쉬지 않고 발걸음을 옮긴다. 바위가 험준하게 치솟은 능선에 이르렀을 때다. 잘못 들었을까? 낙엽을 밟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린다. 때로는 돌 구르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벌써 수색대가 여기까지 다가온 걸까?’
숨결이 급격히 가빠진다. 가방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방 속에는 엽총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한 편. 끝까지 가방을 지켜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인다. 엽총은 떠돌이인 내게는 생명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엽총을 잃으면 사냥이 어렵고 사냥이 안 되면 생계의 길이 막힌다.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떤 최후를 맞을지라도 일단은 살아야 할 때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일시에 내쫓기듯 새들이 하늘로 치솟는다. 뭔가 이동 물체가 있다는 뜻이다. 새들이 날아오르는 부근에서는 희미하게 돌 구르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점차 혈관이 저려 오는 느낌이다. 이쯤에서 엽총을 꺼내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대책이 안 선다. 잠시 바위에 몸을 숨겨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에 귀를 기울인다. 저벅버벅! 확실히 산중에 쌓인 나뭇잎을 밟는 발소리다. 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도 더욱 명료하게 들린다. 가슴이 불안해지면서도 소리의 근원이 한없이 궁금하다. 그냥 야생 산짐승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저벅버벅!! 좀더 소리가 커진 듯하다. 휘이익! 이 번에는 한숨 소리까지 들린다.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마침 앞에는 가파른 바위가 병풍처럼 치솟은 곳이다. 바위 저쪽의 정경을 살피려면 숲을 헤치고 치솟은 바위까지는 다가서야 한다. 10여 m의 거리일 뿐이지만 발걸음이 안 떨어진다. 그냥 살며시 뒤돌아설까하는 생각마저 인다. 일단 무성한 오리나무 숲에 가만히 몸을 숨긴다. 잠시 숨을 추스르는 찰나. 확연히 누군가 병풍바위를 넘어 골짜기로 달려 내려오는 소리가 난다. 고개를 들이밀고 살피려다가 잠시 생각을 바꾼다. 잠시 가방부터 나무 등걸 밑에 숨긴다. 가방을 숨기고 오리나무 사이로 얼굴을 막 내민 순간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다. 어느 틈엔가 빛바랜 얼룩무늬의 군복바지가 먼저 눈에 띈다. 3∼4m쯤 떨어진 거리에서 등을 돌린 채 땅을 파고 있다. 머리엔 하얀 중절모를 썼지만 스포츠형의 짧은 머리카락임에 틀림이 없다. 상의는 캐주얼형의 자주색 잠바다. 영락없는 탈영병이라고 여겨진다. 지금 뭘 파고 있는 걸까? 땅을 파는 사이에 가방에서 총을 꺼내 사살해 버릴까하는 생각이 잠시 든다. 상대를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운 나쁘게 탈영병이 나를 먼저 발견한다면? 나는 곧바로 화풀이의 상대가 되어 사살될지도 모른다. 생각할수록 진땀이 흐른다.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조금만 소리를 내어도 끝장이라고 여겨진다. 머리를 조금 더 낮춘 채 상대를 노려본다. 상대는 뭔가 손으로 쭉쭉 뽑아내고 있다. 약초 같은 느낌이 들며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든다. 애초에는 무기(武器)를 묻든가 파내려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헌데 놀라운 정경이 벌어진다. 상대가 손을 털더니 바지춤을 까 내리고는 용변을 보기 시작한다. 허연 엉덩이 살이 여자 같다고 생각된다. 소피보는 소리조차 영락없는 여자의 것이다. 그럼, 탈영병이 여자인가? 여자든 남자든 총기 앞에서는 평등한 상황이 아닌가? 찰나간의 생각이다. 위기를 벗어나려면 지금이야말로 호기라는 생각이 든다. 기습만이 상황을 역전시키리라고 확신한다. 생각과 동시에 몸을 솟구치면서 뒤쪽에서 군복의 목을 팔로 껴안아 쓰러뜨린다. 그러자마자 스포츠형의 단발머리의 여인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버둥거린다. 눈엔 공포의 빛이 역력하다. 직감적으로 잘못 짚은 느낌이 든다. 바지춤을 추스르며 20대 초반의 여인이 흐느낀다. 심마니 생활만 10년째 해 오며 생계를 연명해 왔다고 한다. 신변 보호를 위해 일부러 사내들처럼 꾸민 터였다. 허름한 군복 바지라든가 스포츠형의 머리 모양새마저도. 그랬음에도 이처럼 날벼락을 맞은 경우는 처음이라며 통곡을 해댄다. 어쩌면 삶이 이리도 꼬이는지? 나는 겸연쩍기도 하고 울화가 치밀기도 하여 맞은 산을 향해 냅다 고함을 내지른다. 내 목소리가 갈라지면서 주위로 난기류가 들끓는 듯하다.
(200자 원고 80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