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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지대
손정모
팔월 중순의 화창한 날씨다. 햇살은 연신 눈부시게 사방으로 흩날린다. 군산에서 고속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사내는 잠시 시계를 들여다본다. 주말이라 고향집에 들렀다가 여자를 만나러 월출산으로 가는 길이다. 오전 8시 무렵이다. 서해안 고속도로로 두 시간이면 너끈히 목포에 닿게 된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빈 자리가 거의 없다. 그는 전망이 좋은 앞쪽에 앉아 주간지를 펼쳐든다. 광택이 나는 앞면에서부터 반라의 연예인들이 요염스런 자세로 웃고 있다. 책장을 넘기면서 그는 문득 여자를 떠올린다.
월출산의 천황사(天皇寺)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아가씨다. 제한 속도를 잘 지키며 고속버스는 원활하게 내달린다. 그녀를 떠올리자 이슬을 머금은 청초한 목련꽃이 연상된다. 그는 구운 오징어를 씹으며 차창 밖을 내다본다. 그에겐 전라도만큼 자연 경관이 잘 유지된 지역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지역들은 산업화란 미명 아래 기계로 난도질한 느낌마저 든다.
난도질이란 말을 떠올리자 그의 혈압이 급격히 치솟는 느낌이다. 올해에 광주에 있는 C대에 지원하려고 할 때였다. 그의 부모는 무조건 재수를 하라고 윽박질렀다. 명문 S대 출신의 대학교수인 부모라 외아들인 그에 대한 기대감은 이를 데 없었다. 지방대에 진학하려는 그를 도저히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폭언까지 망설이지 않았다.
“어디 돌대가리 같은 놈이 생겨 가지고 애를 먹여? 그렇게 평소부터 공부하라고 노래를 불렀건만 이게 뭐하는 짓이야, 엉? 잔말 말고 당장 학원에 가서 재수하도록 해. 실력도 없으면서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래?”
그의 어머니도 만만치 않았다.
“사내자식이 왜 이리도 못 났니? 필요한 학원이랑 전문 강사는 모두 붙여 주었는데 그 동안 뭘 하고 있었어? 어떻게 너 같은 놈을 내가 낳았는지 모르겠어!”
수능을 앞두고 여섯 달 동안은 죽어라고 공부를 한 게 240점이다. 이 점수로는 재수를 한대도 별로 희망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쨌든 대학에 합격하고 볼 일이었다. 그의 인생이 걸린 문제라 가슴이 탔다. 진작부터 공부를 좀 하고 싶었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던 일인가? 내면에 잠재된 나태해지려는 속성이 언제나 그를 지배해 왔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 지긋지긋한 진학 공부를 또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대학에라도 들어가야만 했다. 그가 미래의 취직과 연관시켜 선택한 학과는 건축공학과였다. 어느 시대이든 집은 반드시 지어야 하리라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그는 광주의 C대 건축공학과에 지원서를 내었다. 그가 가슴을 졸이다가 ARS로 합격자 명단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기쁨에 겨워 그의 어머니를 찾아 합격 사실을 얘기했을 때였다. 얼굴 가득 모멸감을 드러내다가 그의 어머니는 읽던 책을 덮어 버리며 소리쳤다.
“그래, 네 인생 너 마음대로 해.”
순간적으로 그의 가슴에 분노가 치밀었다. 극도로 자존심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부모 자식간이어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말없이 그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는 그 밤 내내 분노가 치밀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지난 세월을 줄곧 돌이켜 보았다. 은연중에 그의 부모가 S대 출신이라는 사실이 그를 주눅 들게 해 왔다. 부모가 명문대 출신이라고 해서 어떻게 자식마저 다 명문대 출신일 수가 있겠는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하여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는 터였다.
그의 뇌리에 처음으로 떠오른 일은 술을 마셔 보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비록 공부는 소홀히 했어도 엉뚱한 길은 걷지 않았던 모범생이었다. 대학에 합격할 때까지 술 한 잔 입에 댄 적이 없는 그였다. 술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곧바로 슈퍼로 갔다. 거기에서 맥주 2병과 땅콩을 1봉지 샀다. 조용히 챙겨 들고 그의 방으로 돌아온 뒤엔 소리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지난 세월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전라북도 교육청이 주최한 중고등부 미술 대회가 있었다. 거기에 출전하여 서양화 부분에서 교육감상을 수상하여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그가 교육감 상장과 부상을 그의 어머니에게 보일 때였다. 당연히 그는 어머니가 그를 크게 칭찬해 주리라 여겼다. 헌데 반응은 전혀 엉뚱한 데로 흘렀다. 그의 어머니가 눈 꼬리를 꼿꼿이 치켜세우며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널더러 그림을 그리라고 했어? 공부나 좀 제대로 하란 말이다, 공부를!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그래? 아빠한텐 아예 말도 꺼내지 마, 알았어? 아유, 속이 타서 못 살겠네 정말.”
그 때부터 그는 가슴이 외로울 때마다 그림을 그리곤 했다. 아무리 봐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그림의 소질이 전혀 안 보였다. 반면에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자타가 공인할 정도의 미술적인 재능이 있었다. 아마도 부모한테는 잠재되었던 소질이 그의 몸을 통해 발현된 모양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아버지 어머니마저 그를 무시하지 못할 영역은 그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소질을 타고 났더라도 갈고 닦지 않으면 경지에 이를 수 없는 터였다. 그리하여 그는 틈만 나면 즐거이 그림을 그리곤 했다. 차차 시야를 넓혀 국전도록(國展圖錄)에 실린 그림을 대상으로 부단한 연습을 했다. 그렇게 하려니까 점차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점을 그의 부모가 우려한 거였다.
여름 날 오전은 쾌청하기 이를 데 없는 날씨였다. 고속버스는 서김제를 지나고 있었다. 그 부근은 만경 평야와 연결되는 널브러진 곳이었다. 아득한 지평선이 펼쳐진 가운데 파란 하늘이 호수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파랗게 잠긴 하늘을 올려다보던 중에 그는 다시 과거의 상념에 잠겨 들었다.
맥주잔을 입술에 갖다대며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방대 합격에 따른 어머니의 과민 반응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대학교수라면서 어떻게 자식의 능력과 의사를 이다지도 무시할까 싶었다. 그는 일단 학비 문제로 어머니와 의견을 나눈 뒤에 그의 행동을 결정하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에 그는 부모 앞에서 학비 문제를 거론했다. 그러자마자 튀어나온 반응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방대학의 진학은 안 된다는 거였다. 그 날 그는 다시 그의 방으로 올라가 술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은 집을 나가 스스로의 인생을 살기로 한 거였다. 저녁에 부모가 들어오기 직전에 간단한 쪽지 하나를 남기고는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기 전에 그가 최종적으로 만난 사람은 그의 작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유일한 동생을 말함이었다. 작은 아버지는 두 말 않고 300만원을 선뜻 내놓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스스로 잘 해 보라고 격려까지 해 주었다. 그 날 저녁에 그는 친구의 집으로 짐을 꾸려 나갔다.
집 나간 지 한 달째 되던 날 그의 부모가 그를 찾으러 왔다. 그의 아버지가 흥신소의 도움을 받아 그의 거처를 알아낸 거였다. 일단 부모가 잡아준 광주의 하숙집에서 한 학기만 공부한 뒤에 재고해 보라고 했다. 많이 수그러든 부모의 자세에 그도 못 이기는 체하며 정해준 하숙집으로 옮겨갔다. 하숙집으로 들어간 날부터 그는 가능한 한 부모와 통화하는 걸 피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런 반면에, 틈틈이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서서히 과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중1 때였다. 학급에서 부반장으로 선출되어 임명장을 받은 날이었다. 그 때의 부모의 반응 역시 시큰둥하기만 했다. 공부도 못하는 녀석이 무슨 부반장이냐는 거였다. 간혹 영?수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어도 다른 만점자가 몇이 있었느냐는 질문이 뒤따랐다. 부모가 한 번이라도 그를 흔쾌히 축하해 주거나 인정해 준 기억이 거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인정을 못 받는 데 따른 사기 저하는 자신감의 상실로 이어졌다. 그는 자라면서부터 주변의 친구들의 부모들의 모습도 아울러 지켜보았다. 하다못해 둘이 달려 일등을 했어도 그렇게 자식을 끌어안고 기뻐해 주곤 했다. 각종 미술 대회에서나 학업 성취로 그가 받은 상장이 적지 않았다. 그랬어도 단 한 번이라도 칭찬다운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였다. 자라면서 그는 생각했다. 단 몇 번이라도 부모의 흔쾌한 축하를 받았더라면 싶을 때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의 결여가 점차 그를 자신감이 상실된 아이로 만들어 가고 말았다.
고속버스는 변산반도로 통하는 길목인 부안을 지나고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변산반도를 통하는 길목은 부안과 줄포의 두 군데이다. 거리가 가까운 관계로 인해 그는 변산에는 자주 가 본 편이다. 이북의 절경이 금강산이라면 이남의 명승은 단연 변산반도의 절경이라고 세인들은 말한다. 변산반도 쪽으로 시선을 던지다가 그는 이내 상념의 물결에 휩쓸리고 만다.
C대를 다니면서 그는 서서히 자신이 걸어 나갈 길을 닦아 나갔다. 불명료한 미래를 개척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사에 자신감을 잃은 상태의 그였기에 교우 관계도 쉽지 않았다. 각별한 노력이 없이는 한 사람의 친구도 제대로 사귈 수 없는 처지였다. 자신감의 상실은 대화에 임하는 그의 눈길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좀처럼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대화를 못하는 습성이 붙어 있었다. 남학생들간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여학생들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그의 부모가 교수라서 자기네들을 얕보는 걸로 오해하기 십상이었다. 일부의 여학생들은 간혹 참지 못하여 노골적으로 그에게 따지고 들곤 했다.
“너의 부모님이 교수면 교수지, 네가 교수냐? 좀 겸손할 줄도 알아야지 네가 뭘 잘 났다고 교만을 떨어? 재수머리가 없어 정말!”
점차 그에겐 이 모든 것이 인생 공부의 대상이라고 여겨졌다. 그는 과거의 정신적인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기로 했다. 일단 사회에 대한 부적응의 원인을 안 이상 고치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여겼다. 부적응 현상을 고치는 데에는 두 가지의 커다란 요건이 필요했다. 하나는 부단한 마음의 각오였으며 다른 하나는 일관성의 유지였다. 대부분의 변혁이 실패하는 요인은 앞의 두 가지 요건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발 디딘 대학에서의 생활도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그의 불안한 정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공부 이외의 뭔가에 심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인터넷에 관심을 가졌다. 인터넷 서핑을 하는 도중에 그는 화상 채팅을 하는 사이트를 발견했다. 10만원을 주고 컴퓨터에 채팅용 카메라를 장착했다. 사이트의 연간 사용료를 카드로 결제(決濟)한 뒤에 그는 자신의 고유 번호를 발급받았다. 중간 정도의 키에 훤칠한 용모를 지닌 그였기에 사이트에 얼굴을 내밀자마자 인기가 대단했다. 사이트에서는 백마(白馬)라는 별호로 알려져 여자 네티즌들에겐 적지 않은 인기가 있었다. 채팅의 취약점이라면 금세 상대에게 식상해 한다는 사실이었다. 인터넷의 생리로는 나날이 새로운 뭔가가 있어야만 했다. 상투적으로 쓰이는 유행어나 속어는 수명이 유난히 짧았다. 그래서 저마다 새로운 용어나 어휘를 개발하려고 안간힘을 쓰곤 했다.
채팅을 하다가 광주의 J대의 신입생인 버드 퀸(bird queen)을 알게 된 건 커다란 수확이었다. 그녀는 경영학 전공의 여대생이었다. 그는 버드 퀸을 여자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녀는 165cm의 키에 48kg의 체중을 갖는 늘씬한 미녀였다. 다소 이국적인 분위기를 주는 그녀의 얼굴형도 그녀의 주가를 높이는 데 한몫을 했다.
여자와 채팅을 시작한 지 한 달째였다. 그 동안에 그는 여자와 두 번을 만나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면서 가벼운 포옹 정도는 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 날, 그는 과내 회식이 있어서 새벽까지 학과의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주량이 약한 편인 그에게 술은 확실히 부담스런 존재였다. 새벽 두 시 무렵이 되어서야 택시로 집에 도착했다. 한계 주량을 넘긴 그로서는 집에 도착했어도 취기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을 켰다. 이내 컴퓨터 드라이버가 도는 소리가 들리며 컴퓨터가 작동되었다. 그는 채팅 사이트로 커서를 가만히 갖다대었다. 몇 번 전기 신호가 깜빡이더니 곧바로 채팅 전환 화면이 나타났다. IP와 비밀 번호를 넣자 채팅 화면으로 전환이 되었다. 그는 여자를 향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백마: 나는 오늘 정신이 뿅 갈 정도로 술을 마셨음. 버드 퀸! 혹시 안 자면 응답해 줄래?
그러자 커서가 깜박이더니 응답자의 메시지가 곧바로 날아들었다.
버드 퀸: 어머, 웬 일이야? 술 마시면 말 놓는 거야? 나도 지금부터 말 놓을게.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메시지가 수없이 오가던 어느 순간이었다. 메시지 화면에 충격적인 문자가 떠올랐다.
백마: 술을 마시고 보니 세상이 이렇게 부드럽고 편해 보여서 참 좋네. 근데 오늘 밤에 너의 가슴 좀 안 보여 줄래?
버드 퀸: 얘, 너 미쳤니? 아무리 술을 마셔도 그렇지 어쩜 그런 말을 함부로 해?
백마: 야, 임마! 나는 부모의 등쌀로 주눅이 들어 대인(對人) 부적응 환자가 되었어. 이런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네가 그리 잘 났어?
버드 퀸: 얘가 여자의 마음을 찡하게 울리네? 나도 엄청 외롭고 서러운 여자라구 알았어? 너만 사연이 있는 게 아냐. 사내 녀석이 웬 엄살을 부리고 야단이야?
새벽 2시부터 시작된 채팅이 새벽 4시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그의 컴퓨터 화면으로 여자의 과거사가 줄줄이 흘러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 눈을 깜박거리며 모니터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10년 전 5월의 중순의 일이었다. 건축 공사장의 막노동꾼인 여자의 아버지가 변을 당한 건 오후 3시 무렵이었다. 시공 중인 건축물의 일부가 붕괴되면서 철골이 그녀의 아버지의 등뼈를 후려갈긴 거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척추를 다쳐 하반신 마비 환자가 되고 말았다. 그녀의 아버지의 당시 나이는 37살이었고 가족을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동갑인 그녀의 어머니가 그 때서부터 생계를 떠맡은 거였다. 중졸의 학력에 배운 기술마저 없는 가정주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파출부나 간병인으로 나서려고 해도 부르는 사람이 없어 줄을 설 지경이었다.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려고 해도 나이든 아줌마를 찾는 식당이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살 길이 막막하여 노래방에서 손님과 함께 노래를 불러주는 아줌마로 나섰다. 처음 며칠간은 오로지 노래만을 불러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손님들이 가만 두지 않으려고 했다.
노래방에서 노래 아줌마를 찾는 손님들은 대개 술 취한 중년의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술과 안주를 시켜 노래 아줌마에게 권하면서 아줌마의 몸을 수시로 더듬었다. 처음 몇 번은 치를 떨다가도 이내 아줌마들은 몸까지 내주기에 이르는 거였다. 오히려 나중에는 깔끔하게 노래만 부르게 하고 떠나는 사내들이 얌체족처럼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노래 아줌마들은 마음에 맞는 손님들에게는 개별적인 핸드폰 번호와 이름까지 알려주곤 했다.
버드 퀸의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팁을 후하게 주고 예절이 깔끔한 사람들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때때로 손님들에게 몸까지 내주면서 수익을 늘렸다. 일단 뒤탈이 없어 좋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면하게 되어 좋았다. 점차 귀가 시간은 늦어지고 있었다. 어느 때에는 몇 군데의 노래방을 거치느라고 새벽에 귀가할 때도 허다했다. 집에는 섬유 공장의 공녀로 취직되었다고 설명하면 그만이었다. 귀가가 늦어지면 잔업량(殘業量)이 많아 그랬다고 태연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힘겨운 표정을 짓기만 하면 가족들이 안쓰러워 못 견뎌하는 분위기로 휩쓸려 버린다. 간혹 회사가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을 받으면 공장지대를 간단히 얼버무리기만 하면 되었다. 적어도 버드 퀸은 대학 입학 직전까지는 엄마를 헌신하는 공녀로만 알았다. 그리하여 귀가가 늦어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포근히 안아주기까지 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사회적인 식견을 가진 뒤부터는 뭔가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공녀의 복장으로는 화려한 터였다. 그래도 그리 심각하게는 생각지 않았다. 그랬는데, 문중의 상가(喪家)에 서둘러 가느라고 어머니가 핸드폰을 집에 빠뜨린 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핸드폰을 버드 퀸이 발견하고는 외부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자신이 받아주기로 마음먹었다. 핸드폰이 울리기에 ‘여보세요’라고 응답하자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거침없이 밀려들었다.
“아줌마, 나요! 밤새 목소리가 더 젊어졌네? 아랫도리에 침을 맞으니까 젊어질 수밖엔 없겠지, 안 그래?”
“잠깐만요. 지금 좀 바쁘거든요. 나중에 통화해요.”
버드 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에 임기응변으로 대답하고는 가슴을 떨었다.
‘아니, 이럴 수가? 그럼 엄마가 지금껏 번 돈이 다...’
그녀는 갑자기 머리꼭지가 오그라드는 기분에 휩싸여 어쩔 줄 몰랐다. 갑자기 아랫도리가 쩌릿거리며 팬티에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고속버스가 함평에 접어들자 창 밖으로 파도치는 서해바다가 그의 시야로 밀려들었다. 바다는 무안군의 기다란 해제반도로 둘러싸여 마치 커다란 호수처럼 바라보이기도 했다. 그는 잠시 여자가 화상으로 보여주던 여자의 돌출된 젖가슴을 떠올렸다. 탄력이 느껴지게 봉곳하게 치솟은 젖무덤이 현란할 정도로 선정적이었다. 그가 먼저 팬티를 까 내리고 성기를 보여주었음에도 여자는 끝내 아랫도리는 보여주지 않았다. 굳이 보고 싶다면 만나서 직접 보라는 얘기였다. 취중에 돈키호테 격으로 던진 그의 제안에 대한 그녀의 반응으로는 대단한 것이었다.
여자는 처음에는 어머니에 대해 환멸감을 느껴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런 어머니에 대한 희생의 대가를 생각하고는 처절하게 오열했다. 여자의 식견으로는 단순히 환멸감을 느낄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희생을 감수하고 그녀를 대학에 진학하도록 해 준 어머니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여자는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어머니에 대한 일체의 내색을 않기로 했다. 오히려 어머니를 안쓰러워하며 어머니의 건강에 신경을 더 쓰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학비는 그녀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다. 그녀가 당당히 해낼 만한 아르바이트는 학원 강사였다. 그녀는 야간 시간에 학생들을 지도하는 강사로 계약을 체결했다. 그녀는 학원에서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 영어 강사가 되었다. 낮에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밤이면 학원에 나가 강의를 했다. 그러다 보니 점차 피로가 쌓이고 몸이 말할 수 없이 나른해졌다. 또한 그녀가 버는 금액만으로는 학비의 조달이 어려웠다. 그리하여 그녀는 잠시 휴식을 취하며 온당한 대책을 세워 보려고 했다.
어느 날 친구들과 교정의 벤치에 앉아 있을 때였다. 뭔가 조심스럽고 은밀한 대화가 진행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여자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어떤 대학 통합 서클에서 여대생 사진 누드모델을 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한 시간 가량의 한 번 출연에 60만원을 번다고 했다. 자연히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장 응하기에는 뭔가 많이 생각해 봐야만 될 여지가 많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1시간가량의 출연에 그만한 금액이 주어진다는 건 확실한 매력이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계산했다. 한 달에 네 번만 벗으면 학비 조달과 용돈이 아주 원활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 네 번만 홀랑 벗으면 모든 일이 다 풀릴 것만 같았다.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알몸으로 거울 앞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면서 자동 사진기를 구입했다. 자신의 알몸을 자동으로 맞추어 촬영하여 필름을 사진관으로 가져갔다. 사진을 찾을 무렵이었다. 가슴을 졸이다가 사진관에 들어서니 사진사가 알아보고는 금방 사진봉투를 건네준다. 마침 다른 손님이 없었기에 몇 장을 꺼내 보고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사진사가 마주 웃으며 직업 누드모델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살짝 미소만 짓고 사진관을 나서려고 했다. 그랬더니 사진사가 잠깐만 기다리라며 그녀를 되돌려 세웠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명함을 건네면서 말을 덧붙였다.
“손님의 몸매가 아주 좋아요. 이건 내가 잘 아는 화가의 연락처인데요, 몸매가 좋은 누드모델을 찾고 있는 중이래요. 손님 같으면 충분히 요건에 부합될 것만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틈나는 대로 전화 한 번 해 보세요.”
그녀는 가벼운 목례를 남기고는 곧장 사진관을 벗어났다. 그녀는 대학 연합 서클인 사진 동호회 사무실을 찾아갔다. 대학 내 어느 서클룸쯤 있으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무실은 광주 도심지의 대형 빌딩 내부의 공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구비 서류인 채용 신체검사서와 재학 증명서에 몇 장의 누드사진을 내밀었다. 접수 담당자는 서류를 꼼꼼히 점검하더니 연락 전화번호를 옮겨 적고는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일주일 이내로 당락 여부를 개별 통지하겠다고 했다.
일 주일만에 합격 통지서가 그녀에게로 날아들었다. 예상 외로 지원자가 과잉으로 몰려드는 서클이라고 했다. 계약 기간은 1년이며, 한 번 출연할 때마다 무조건 60만원이라고 했다. 공식 촬영은 한 달에 한 번씩이고 비공식적으로 두어 번 더 있다는 거였다. 서클은 생각보다 건전했으며 사진 동호회의 회원들은 누드모델의 신분을 비밀로 지켜주었다. 그렇게 학비 문제와 용돈은 해결책이 섰지만 문제는 그녀 가슴속의 그늘이었다. 그들 모녀의 생활 방식이 모두 옷을 벗는 거라는 게 마음에 걸리곤 했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 당분간은 어려움을 딛고 살기로 마음먹은 그녀였다.
가슴속이 답답하여 그녀는 친구와 함께 고창의 선운사를 다녀온 날 밤이었다. 동백꽃의 잔영을 먼발치로 바라만 보다가 돌아온 아쉬움이 컸던 밤이기도 했다. 절 뒤에 둘러쳐진 철책으로 인하여 그냥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동백 숲이었다. 그런 동백꽃의 잔영에서 어머니에 대한 아쉽고도 서글픈 마음을 읽어내며 훌쩍이던 새벽이었다. 느닷없이 컴퓨터의 화상 사이트에서 커서가 깜빡이더니 백마가 메시지를 전해 왔다. 백마와 교류를 한 지 한달만의 일이었다. 시계를 얼핏 보니 새벽 2시 무렵이었다. 동백꽃에 내재된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상념에 잠겨 눈시울을 적시고 있을 때였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울적하여 채팅에 응하였더니 그녀의 가슴을 보여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정신 이상 증세를 지닌 사내이려니 싶었는데 차츰 그게 아니다 싶었다. 그리하여 사내의 대인(對人) 부적응 증세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만 내재된 모성애가 흘러나온 터였다. 주린 애기에게 젖을 물리듯 화상 카메라를 통해 덩그렇게 돌출된 젖가슴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왠지 사내와 자신의 신세가 한없이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왠지 버림받은 미아의 신세같이 여겨졌다. 그래서 채팅을 하면서 끌리듯 서로의 마음을 열게 되었다. 헌데 그녀의 아랫도리까지 보여 달라는 제안에서는 몸에 한기가 일었다. 그래서 반발심을 드러내며 사내의 성기를 보여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의외로 사내는 선선히 바지를 벗고는 선뜻 팬티까지 내렸다. 노출된 사내의 성기가 발기되어 화면에서 끄떡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내면으로 안개가 차오름을 느꼈다. 이건 필시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운명이라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녀는 간결한 메시지를 덧붙인다. 네가 날 원한다면 만나기로 해. 그 후에 시간을 맞추어 보다가 그들은 영암의 월출산 천황사(天皇寺) 부지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전 10시가 좀 지나자 그가 목포에서 내려 영암 행 시외버스로 갈아탄다. 버스는 2번 국도를 따라 월평까지 가서는 13번 국도에 올라 영암으로 내달린다. 그가 영암에 닿으니 점심 무렵이다. 그는 여행 지도를 펼쳐 우선 월출산의 동쪽 매표소로 찾아가기로 한다. 거기서 등반을 해야만 천황사가 가깝기 때문이다. 그가 매표소에 닿아도 여전히 점심 무렵이라, 부근에서 갈비탕을 시켜 먹기로 한다. 식사를 하면서 그녀를 만나 보낼 시간 계획을 머릿속으로 떠올린다. 산사 부지에서의 첫 대면이라 특별한 계획이 따로 없어도 그는 무관하다고 여긴다.
그에게 그녀와 시간을 보낼 계획보다 중요한 건 그의 진로의 결정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버스 안에서부터 줄곧 C대를 계속 다닐 것인지 재수할 것인지를 두고 갈등했다. 이러한 결정은 그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 결정이기도 하다. 아무리 곰씹어 보았어도 재수를 하기에는 심신 양면으로 너무나 부담이 크게 느껴진다. 그는 말없이 계속 갈등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대다가 간간히 한숨을 내쉬곤 한다. 만약 재수를 하겠다면 학원을 정해 놓고 전력을 기울여 공부에 매진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C대에서의 학업을 착실히 다져 나가야 할 판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의 학벌이 취업을 많이 좌우함도 확실한 현실이다. 그러기에 재수에 대한 미련 역시 간단히 접을 수 없는 성질이다. 갈등의 골은 그래서 깊어지기만 하는 모양이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그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아무래도 부모님의 조언이 타당하리라는 생각은 들지만 재수를 하기가 끔찍스럽기만 했다. C대에 계속 다닌다면 당장은 그에게 편하리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학벌로 인한 불평등한 대우를 받을 일이 끔찍스럽게 여겨진다. 불평등한 일에 그치면 그만이지만 취업이 안 될 경우가 심각한 일이리라. 그는 이러한 중대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두고 내내 가슴을 졸였다. 그에겐 부모님의 일방적인 조언보다는 다른 누군가의 견해가 더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만나 대화를 통해 중대한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마침내 오후 2시 무렵에 그가 매표소를 통과하여 월출산 등반을 시작했다. 등산로 초입에 월출산에 대한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었다. 그가 시비를 지나 산길을 오르니 경사가 서서히 가팔라졌다. 오리나무와 소나무 이외에 군데군데 동백나무가 무리지어 있었다. 그는 산을 오르며 여자를 떠올렸다. 화상으로 보여 주던 덩그렇게 돌출된 탄력적인 젖무덤이 연상되었다. 그녀가 블라우스를 벗고 브래지어를 걷어낼 때부터 탄력적으로 흔들리던 젖무덤이었다. 그 날 새벽에 그녀의 젖가슴을 본 뒤부터 그는 여자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더러 포르노 사이트를 뒤져 봐도 그녀만큼 완벽한 젖가슴을 지닌 여인은 드물었다. 하필이면 월출산의 천황사 부지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근의 사자 저수지에서 치솟는 습기로 뒤덮인 덤불숲에서 일어나는 산안개 때문이었다. 여름철이면 수시로 산안개가 피어올라 도원경을 방불케 한다. 그래서 천황사 주변의 덤불숲은 꽤나 신비스러운 경관을 보여주곤 한다. 그는 여행에 앞서 문헌을 통해 가능한 한 자세한 정보를 입수해 둔다. 흡수한 정보만큼 여행의 묘미를 즐길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암의 명물인 월출산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문헌을 통해 연구를 해 온 그였다. 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지형적으로 특이한 점도 그의 관심의 영역이었다. 이전에 그가 월출산 등정을 하면서 산안개가 우물처럼 치솟는 발원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월출산 동쪽의 매표소에서 도보로 20여분 정도의 거리만큼 떨어진 천황사 부근이었다. 이전에 천황사는 대가람이었을지라도 소실되고 사찰 터만 남아 복원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찰 부지의 상부에는 평원을 이룬 덤불숲이 있는데 바로 거기가 산안개의 발원지였다. 덤불숲은 사자 저수지에서 휩쓸려 드는 물기를 머금고 있다가 안개를 피워 올리곤 했다. 수차례의 월출산 등반을 통해 확인한 산안개의 발원지라 그에겐 각별히 애정이 가는 장소였다.
산안개와 더불어 그는 우윳빛처럼 뽀얀 속살의 그녀의 상체를 떠올린다. 어쩌면 피부가 그렇게도 고울 수가 있는지 황홀할 지경이었다. 그는 산안개가 잔뜩 피면 어쩜 그녀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안개가 피면 지척을 분간키 어려우므로 설사 여자가 옷을 벗는대도 모를 일이라 여겨졌다. 그녀 또한 월출산을 좋아하여 월출산의 지세에는 통달해 있었기에 천황사의 부지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는 목이 말라 륙색에서 칡차를 꺼내 종이컵에 따라 들었다. 플라스틱 음료 병 가득 채운 칡차가 주는 서늘함이 가슴으로 전해져 왔다. 그는 종이컵에 든 칡차를 마시며 천천히 시계를 들여다본다. 약속 시간인 오후 3시가 가까워오고 있다. 그는 다시 한 번 천황사(天皇寺)의 소실된 건물터를 훑어보며 차가운 감회에 젖는다. 분명 예전에는 번창했을 산중의 대가람이었으리라. 복원을 준비하는 기왓장만 널브러진 폐허를 보자 가슴이 먹먹하게 젖어든다. 흥망에 따른 비애가 생각할수록 가슴속을 마구 뒤흔든다. 잠시 후에 그녀는 실제로 나타날 것인가? 여름 한낮을 조금 비낀 시각인데도 부근의 음습한 덤불숲으로부터 산안개가 일기 시작한다. 산 아래 사자 저수지로부터 습윤한 바람이 연신 덤불숲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그가 거의 칡차를 다 비울 때다. 옷깃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요염한 얼굴의 아가씨가 생글거리며 천황사 부지에 들어선다. 그는 화상(畵像)에서뿐만 아니라 두 번이나 만났던 여자임을 알아차리며 그녀에게로 다가선다. 여자는 친밀하게 손을 내민다. 그는 그녀와 악수를 하고는 천황사 부지를 지나 덤불숲에 나란히 앉는다. 덤불숲은 억새풀과 산죽(山竹)으로 잔뜩 어우러져 있다. 억새풀잎과 산죽의 잎새마다 물방울들이 줄줄이 매달렸다가 증발되면서 산안개로 변하고 있다.
여자는 자주색 등산복으로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다. 그도 카키색 등산복 차림새다. 시간을 정확히 잘 맞추어 왔다는 얘기부터 그는 꺼낸다. 여자도 연신 미소를 지으며 동의하는 표정이다. 채팅을 한 기간에 비해 놀랍도록 친근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들이 자리잡은 곳은 등산로를 비껴 있기에 등산객들의 눈에는 띄지 않을 위치다. 여자를 만나면서부터 그의 마음에는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한다. 성적 충동에 의한 뒤설렘이 아닌 마음의 갈등에서 오는 소용돌이다. 왠지 여자를 만나자마자 여자가 어머니와 대비가 되어 보이기 시작한다. 차라리 여자가 어머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일 정도다. 그에겐 아무리 봐도 여자가 귀염성스런 얼굴형이라고 여겨진다. 이목구비가 선명한 얼굴의 여자를 대하자 그의 내면의 갈등도 증폭되는 느낌이다. 아마도 흑백이 선명한 그녀의 수정처럼 맑은 눈 때문인 듯도 하다. 깔끔하게 구획된 경계가 그의 복잡한 상념들을 정리하게 촉진한 모양이다. 서로의 영혼이 통하는지 이 때 여자가 말한다.
“백마, 너의 맑은 얼굴을 보니 내 마음이 개운해지는 것 같다. 너랑 대화를 하면서 내 마음을 정리해야겠어.”
“그래, 나도 방금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는 지방 C에서 끝까지 학업을 마칠 작정이라고 하면서 잠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도 그의 눈을 마주 들여다본다. 그녀도 지방 J대에서 학업을 마치겠다고 한다. 그는 아무래도 집을 나와야 할 형편임을 설명한다.
그녀가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짓자 그는 부연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의 부모는 무조건 그가 재수해 주기를 바랐다. 그랬음에도 그의 단호한 의지 때문에 일시적으로 부모의 뜻을 양보해 주었다고 설명했다. 만약에 2학기 때에도 그가 재수하지 않으면 부모와의 마찰이 생길 건 뻔하다는 거였다. 단순 마찰이 아니라, 그가 고향인 군산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라고 부언 설명했다. 그의 부언 설명을 듣고 난 뒤에야 그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했다.
잠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그녀도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그녀도 당분간은 누드모델을 계속해야 할 거라고 밝힌다. 그녀의 눈에 그가 어떻게 보이느냐고 그가 묻는다. 그녀는 생글거리며 말한다. 충분히 사귀고 싶은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서로 연인이 되면 어떻겠느냐고 그가 조심스레 제안한다. 여자는 좋다면서 방 하나를 구해 동거하자고 응답한다. 동거는 결혼을 전제로 하는 거냐고 그가 묻는다. 물론이라고 그녀가 답한다. 그는 잠시 깊이 생각하는 눈치다. 여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충분히 기다려 주겠다는 자세다. 다시 한 번 그가 그녀에게 묻는다. 결혼 전에 동거하더라도 후회는 없겠느냐고? 동거를 결혼처럼 생각해 주기만 한다면 언제든 기꺼이 응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좀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며 고뇌에 찬 표정을 짓는다. 왜냐하면 결혼한 여자가 누드모델을 지속한다면 웃기는 일이 아니냐는 의견이다. 이에 여자가 말한다. 둘의 학비까지 고려한다면 누드모델이 아니고는 대책이 안 선다고. 그의 생각으로도 그 이외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인다고 덧붙인다. 여자는 다시 말끄러미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여자는 화상으로 상체는 보여 주었어도 하체는 보여주지 않은 이유를 알겠느냐고 그에게 묻는다. 그는 잠자코 고개를 끄떡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문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다는 느낌이 배어나온다. 그러다가 그가 그녀를 향해 묻는다. 내가 만약 너랑 동거를 원한다면? 그녀는 흔쾌히 대답한다. 화상이 아닌 직접적으로 하체를 보여주겠다고. 그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떡이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그녀는 말없이 풀꽃을 뜯으며 기다린다.
그녀는 풀꽃을 뜯으면서도 산 아래 사자 저수지의 푸른 물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인다. 처녀가 뭇 남자들 앞에서 발가벗으며 생계를 유지하려는 자체가 설움의 덩어리였다. 게다가 결혼도 하기 전에 남자와 동거 생활을 꿈꾸는 현실이 한없이 비감스러웠다. 그녀가 저수지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을 때였다.
천년 세월의 저 쪽에서 들리는 음성인 듯. 그의 목소리가 천천히 그녀의 귓전으로 흘러든다. 만약 우리 부모님이 너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어떡하지? 그녀의 차디찬 응답이 뒤따른다. 결혼은 우리가 하는 건데 굳이 인정을 안 받으면 어때? 그럼 우리네 부모님이 너를 사위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넌 어쩔 거니? 그의 서늘한 목소리의 대답이 이어진다. 어차피 살을 섞고 사는 건 우리이잖아?
점차 두 남녀의 눈빛이 농밀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껴안더니 그대로 덤불숲으로 나뒹굴기 시작한다. 한 번 뒹굴 때마다 눈송이처럼 옷들이 벗겨지며 그들은 점차 서로를 탐닉하기 시작한다. 한동안 알몸으로 뒤엉켰던 남녀가 가쁜 숨을 추스르며 다시 일어나 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남녀의 얼굴은 발그레 물들어 있었고 그들의 눈빛은 우주마저 포용할 듯 따사롭기만 하다. 때마침 덤불숲에서 치솟은 산안개가 그들을 솜이불로 다독이듯 휘감아 흐른다.
(200자 원고지 78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