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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
손정모
밤 11시다. 자명종을 맞춰 놓고 나는 잠자리에 든다. 새벽 4시 반에는 일어나야 한다. 누운 채 잠시 생각에 잠긴다. 창가의 커튼 자락이 펄럭인다. 귀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음향이다. 오히려 평온하게 느껴질 정도다. 항시 뭔가에 쫓기는 듯한 삶의 방식. 아무래도 이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도 몰래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러면서 점차 눈꺼풀이 감겨 내린 모양이다.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벌떡 침대에서 일어선다. 새벽 2시 무렵이다. 전화기를 들자 곧바로 음성이 밀려든다.
“우린 숙명적으로 만나야 할 모양이에요. 오후 2시 무렵에 돌섬 선착장에서 만나요. 안녕!”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긴 상태다. 황당한 느낌에 좌우로 고개를 뒤흔든다. 그래, 만나기는 만나야겠지. 만나야만 뭔가 결실이 있을 테니까.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마시고는 다시 잠자리에 든다.
자명종이 요란하게 울린다. 눈이 감긴 채 초인종을 눌러 끈다. 그리고는 침대에 일어나 앉는다. 귓전으로 째깍거리는 시계 바늘의 소리가 명료하다. 마침내 또 하루의 새벽이 열린 거다. 새벽을 만날 때마다 눈시울이 따끔거린다. 오늘은 어떤 결실을 얻을 것인가? 내가 남긴 행적이 우주의 시간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나는 잠시 고개를 뒤흔든다. 상념이 복잡해질 때마다 벗어나 보려는 나의 행동이다.
배아 줄기세포로부터 각종 장기로의 분화. 이 과정을 연구하는 데 이미 4년간의 시간을 보낸 나다. 줄기세포로부터 간으로의 분화에 대한 연구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태다. 국내 유수의 재벌 그룹인 W그룹 산하의 생명공학 연구소. 연구의 기밀을 유지하기 위함인 듯. 서해의 외딴 섬에 세워진 연구소다. 미국의 버클리대학에서 생명공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에 마련된 나의 직장이다. 한 때. 대학 쪽으로의 취업의 길을 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포화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 뒤엔 나의 마음을 호수처럼 가라앉히고 있다. 대학교수면 어떻고 책임연구원이면 어떤가? 과학자로서 연구만 제대로 하면 되리라 여겨진다.
내 나이 서른셋. 3년 전에 교통사고로 미국에서 아내를 잃은 뒤부터 독신이다. 다시는 아내만한 여인을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연구소 건물 곁의 주거용 아파트를 벗어나 해안으로 발길을 옮긴다. 돌섬은 원래 무인도였다. 지하수를 끌어올리고 자가발전소를 세우면서부터 면모가 바뀐 섬이다. 섬의 남쪽으로 ‘ㄷ'자 모양으로 열린 만에 선착장이 있다. 섬의 둘레는 10여 km에 이르고 해안가를 제외하곤 솔숲으로 뒤덮여 있다.
해안 길을 걸으면서도 새벽의 현지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우린 숙명적으로 만나야 할 모양이에요. 숙명적으로 만나야 할 사람이라?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뒤엉키는 기분이다. 연구소가 세워진 곳은 섬 중앙의 야산 정상이다. 연구소로부터 해변에 이르는 길은 잘 포장된 도로다. 하지만 차량의 출입이 거의 없어 적막하기만 하다. 시계를 잠시 들여다본다. 새벽 4시 50분이다. 북쪽 해안 도로를 산책하려고 나선 길이다. 북쪽 해안에는 해묵은 소나무들이 잔뜩 뒤엉켜 있다. 등걸마다 이끼에 휘감겨 자못 신비스러울 정도다.
6월이어서인지 사방이 훤하기만 하다. 어디를 둘러 봐도 시야가 훤히 뚫려 있다. 일찍 일어난 방울새 몇 마리가 가늘게 울음소리를 낸다. 나의 복장은 순백의 트레이닝복에 흰 운동화 차림새다. 남들의 눈에는 가뿐한 차림새로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잔뜩 마음이 신산하여 길을 걷는 감각마저도 없는 듯할 때. 슬그머니 과거의 상념이 밀려든다.
지난겨울. 폭설로 전국이 곤욕을 치를 때였다. 하루가 지나면 눈이 발목까지 차오르곤 하던 날. 변산반도의 격포에서 동계 국악 연주회가 있었다. 거문고와 가야금, 대금과 아쟁 등의 국악기가 골고루 선보였다. 굽이치는 빛살과 물결의 소용돌이. 연주회장의 주제였다. 연주회가 중반에 이르렀을 때였다. 비취빛 한복 차림의 여인이 가야금을 안고 연주회장에 들어섰다. 첫 눈에 감전이 될 정도의 빼어난 미모였다. 나이는 서른 안팎으로 여겨졌다. 여인의 미모에 도취가 된 듯. 여인이 현을 고르기도 전에 청중들은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여인의 손이 현을 가르는 순간. 귀 익은 영산회상곡이 연주되었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법화경 강론을 했던 정감이 선율로 굽이쳤다. 음률은 깊고 연주에는 사무치는 격정이 실려 있었다. 이전에 줄곧 들어오던 선율과는 대조가 되는 연주 기법이었다. 사람을 짧은 시간 내에 몰입의 경지로 끌어들이는 기분이었다. 군산의 G대학의 강사라는 여인. 그녀의 이름이 현지다. 아내와 사별한 뒤에 독신으로 지내던 터였기에 더욱 여인에게 매료되었는지도 모른다.
연주회가 끝난 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질 무렵이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여인에게 다가갔다. 명함을 건네며 여인의 의향을 물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 줄 수 있느냐고? 여인은 명함을 들여다보더니 가야금을 내게로 건넸다. 그녀의 승용차가 있는 데까지 내가 가야금을 날랐다. 트렁크에 가야금을 실은 뒤. 그녀는 나와 함께 인근의 카페에 들어섰다. ‘굽이치는 변산’이란 한글 상호의 간판을 건 카페였다.
레몬주스를 빨대로 들이키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책임 연구원이시군요. 제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네. 잠시 대화를 하고 싶어서요.”
찰나 간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나의 얼굴을 쓸고 갔다. 왠지 서늘한 느낌이 묻어났다. 나는 잠시 숨결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도 여인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도 몰래 긴장했다. 가까운 데서 보니 여인은 더욱 눈부신 미모였다. 나는 가만히 가슴을 억눌렀다. 그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여인과 대화를 신청한 건 외로움 때문인가? 사별한 아내를 잊으려는 발버둥질인가?’
스스로 생각해 봐도 대답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영산회의 석가의 설법에 무척 애조가 서린 느낌이 들었어요. 인생의 진리를 가르치면서 그렇게 슬퍼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했어요.”
내 말을 듣는 순간. 여인의 속눈썹이 떨리는 느낌이었다. 여인이 정색을 하며 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그녀의 눈빛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서로의 동공을 마주 들여다보는 찰나. 여인이 다소 도발적인 눈빛으로 말했다.
“어떻게 제가 감추려는 부분까지 읽어 내셨어요? 지금까지 없던 일이라 가슴이 떨리네요. 선생님도 국악에 조예가 있으신 게 틀림없겠군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응답했다.
“조예라니요? 그냥 느낀 점을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여인이 내게 진 토닉(gin tonic)을 추가로 시키자고 제안했다. 칵테일(cocktail)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면서부터 잠재된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하여 곧바로 여인에게 물었다. 나이는 얼마이며 기혼인지 미혼인지를? 여인도 세속에 초연한 듯.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의외로 서른다섯 살의 이혼녀라고 했다. 심한 성격 차이로 인한 결별이라고 했다. 그녀의 대답을 듣는 순간. 밖으로 나가서 정식으로 술잔을 나누자고 제안했다. 마음이 통한 듯 그녀도 기꺼이 응했다.
해송에 휘감긴 새벽안개가 깃털처럼 따사롭게 느껴진다. 해송의 뾰족한 잎사귀들마저도 포근하게 얼싸안는 느낌이다. 해송 사이로 넘나드는 안개를 볼 때다. 문득 줄기세포의 분화에 관여하는 촉진 단백질의 이미지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촉진 단백질은 성장하는 인근 세포와 부단히 정보를 교환한다. 그러면서 해당 장기 세포를 구축하는 기능을 가진다. 촉진 단백질은 이웃 세포들을 넘나드는 정보를 수용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이웃 세포들을 넘나드는 이미지가 안개를 닮았다는 얘기다.
격포에서의 첫 만남 이후의 지난해 연말. 현지는 비정기 여객선으로 돌섬에까지 찾아왔다. 나와 현지의 두 번째 만남의 날이었다. 돌섬은 솔숲이 무성하며 도처의 해안마다 낚시가 잘 되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낚시꾼들이 수시로 들락거린다. 그런 낚시꾼들을 위해 선착장에는 잡화점들과 여관까지 들어서 있다. 돌섬의 연구원들도 일과 후엔 낚싯대를 드리우곤 한다. 나도 낚시에는 상당한 흥미를 가진 사람이다. 연말이라 가슴이 울적하기만 했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는 터였다. 그래서 북쪽 해안의 벼랑에서 낚싯대를 바닷물에 담그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싫어 혼자 낚싯대를 드리운 상태였다. 헌데 누군가 내게로 다가서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놀랍게도 현지였다. 현지는 미소를 깨물며 반가움을 드러냈다.
“연구소를 거쳐서 여기까지 달려왔어요. 놀라게 해 드리려고 전화도 하지 않았어요.”
자주색 민소매 티에 보랏빛 미니스커트의 여인. 상기된 듯한 얼굴이 더욱 미태를 풍겨주는 느낌이었다. 단발머리 아래의 하얀 목덜미가 눈부실 지경이었다. 그녀가 돌섬으로 찾아오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전통 악곡보다는 가야금의 창작 악곡의 연주에 심혈을 쏟는다는 그녀. 그녀는 가야금의 국악 작곡자이자 연주자다. 나는 선율에 대해 깊은 지식도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국악의 물줄기에 흔들린 지 오래다. 음률에 대해 내재된 감응 현상이라고나 할까? 국악의 선율만 흐르면 전신이 평온해지며 머리가 개운해지곤 했다. 현지가 입을 열었다.
“나 보고 싶지 않았어요? 한 번쯤 찾아올 줄 알았어요. 피차 홀몸인 처지라 외로움이 깊지 않던가요?”
2살 연상인 현지. 그녀는 외관상으로는 숫처녀와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아리따운 얼굴에 생글거리는 미소. 호수의 수면을 닮은 듯한 고요한 눈동자. 그러면서도 별빛이 반짝이는 듯이 눈부신 시선. 그녀의 얼굴을 대하면 가슴부터 들끓었다. 하염없이 그리움을 향해 치닫는 격한 소용돌이를 느끼곤 했다.
‘내 가슴이 왜 이럴까? 현지를 안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럴까? 이 모든 게 아내를 잃은 뒤부터 생긴 처절한 공허감 탓일까?’
나는 현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세요? 그냥 마음이 끌리는 대로 편하게 대해 주세요.”
현지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등 뒤로 나를 껴안았다. 무척 따사로운 정감이 물씬 느껴졌다. 나 자신도 몰래 낚싯대를 놓고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생각 같아서는 그녀를 왈칵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동작이 멈춰 버리고 말았다. 처음 만난 날, 취기에 그녀가 신들린 듯 토해 내던 말 때문이었으리라.
“어지간하면 남편의 성품을 즐거이 감싸 안으리라고 마음먹었어요. 그것도 5년간이나 말이에요. 하지만 남편의 내부에는 독버섯의 균사 같은 게 뒤엉켜 있었어요. 걸핏하면 사람의 염장을 지르는 말을 마구 토해 내는 거예요. 살인적인 독설(毒舌)을 지닌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이 세상에 대한 저주인지 아니면 자신의 열등감인지를 알 수가 없는 거예요.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남편의 존재를 점점 알 수 없게 돼요. 이래서야 어찌 한 가족이라 할 수 있겠어요? 지난 5년 동안. 부단히 달래도 보고 수없이 눈물로 하소연도 해 보았어요.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느꼈어요. 오히려 나를 더욱 경멸하는 태도마저 보여 결국은 결별하기에 이른 거예요. 그렇다고 저만 잘 했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 날. 그녀의 고백을 듣는 순간. 솔직히 구역질이 날 정도로 속이 쓰렸다. 이전에 없던 현상이었다. 직장에 몸담은 이래로 아파서 병원을 찾은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읊조린 ‘독버섯의 균사’란 말이 비위에 거슬렸다. 엄청난 파장의 충격을 내 가슴에 몰고 왔다. 나라고 해서 그녀에게 ‘독버섯의 균사’를 내비치지 말란 법이 없겠기 때문이었다. 한 번 어떤 대상에 질린 사람은 정신 영역에 커다란 손상을 입는다고 들었다. 차후에 유사한 대상을 만날 때엔 충격의 정도가 더욱 심해진다는 거였다.
‘나라고 해서 그런 대상이 아니라는 보장이 있겠는가?’
그녀의 고백을 듣는 순간. 내 가슴엔 방어 본능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에서도 ‘독버섯의 균사’를 노출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싹텄다. 어떻게 사람에게서 격분의 요소를 말끔히 제거할 수 있겠는가? 노력하면 빈도야 줄일 수 있겠지만. 헌데 나의 긴장하는 마음과는 달리 그녀의 마음은 자유분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뭔가 그녀와 나 사이에도 코드가 안 맞는 듯한 느낌이 슬쩍 들었다. 비록 찰나 간이었지만 느낌이란 소중한 터였다. 그녀가 마음을 노출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오히려 긴장되기만 했다.
‘현지의 자유분방한 언행이 나의 내면에 있는 격분의 요소를 탐색하려는 건 아닌지? 일부러 함정을 파서 나를 시험해 보려는 수작일지도 모르리라.’
현지로부터 독버섯의 균사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 나는 나의 내면을 더듬어보곤 했다. 나의 성격은 평온하고 절제력이 있는 유형인가? 나 자신이 아닌 남으로부터의 평가는 어땠는가? 설사 공자와 같은 사람에게도 격분의 요소는 없었을까? 신이나 부처가 아닌 다음에야 격분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여겨진다. 다만 격분의 빈도를 어느 정도까지 조절할 수 있는가에 개인차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생각할수록 현지로부터 독버섯의 균사란 말은 듣지 않아야 즐거웠으리라. 그랬다면 내게서도 색다른 정감이 그녀를 향해 출렁였으리라. 그래서 한동안은 현지의 얼굴만 떠올리면 저절로 방어 본능에 빠져들곤 했다.
헌데 작년 연말의 석양 무렵에 현지는 나를 만나러 왔다. 북쪽 해안의 벼랑에 홀로 선 나를 만나러 온 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첫 만남에서의 감동은 별로였다. 고작 현지의 술주정에 가까운 고백을 들어주었다는 것 이외에는. 그 점이 그녀가 빼어난 미인이었어도 내게 감흥을 못 준 원인이었다. 당시에 그녀의 쓰라린 고백을 듣는 순간. 어지간했으면 둘은 동병상련의 신세라 어우러질 만도 했다. 하지만, 현지의 독버섯의 균사란 말 때문에 단절의 벽이 생긴 터였다. 심리적인 요인은 대단한 터였다. 아무리 마음을 털어 버리려 해도 헤어나지 못하기 십상이었다.
벼랑에 쭈그려 앉은 나를 뒤에서 껴안은 현지. 그러면서 나의 귓전에 감미롭게 속삭여 대었다.
“첫 만남에서 무척 마음이 흔들렸어요. 만약 댁이 나를 원한댔으면 끝까지 갔을지도 모를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가만히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왠지 그녀와 시선을 맞추기가 두려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미모로 봐선 첫눈에도 내가 충분히 반했을 터였다. 하지만 심리적 요인이란 게 적지 않게 작용했나 보다. 그녀가 내게 마음을 열었음에도 내 마음은 오히려 웅크려들고 말았으니까. 이래저래 신산한 마음이 들어 낚싯대를 거두어들이고는 그녀와 함께 해안도로를 산책했다. 해안도로의 양옆으로는 해묵은 해송들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해송이 빽빽하게 우거져 인적이 드문 해안가 풀숲에 둘은 앉았다. 풀숲 사이로는 하얀 모래가 수북이 쌓여 있는 곳이었다.
때는 석양 무렵이었다. 잘디잔 빛살들이 꽃잎처럼 풀숲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나란히 앉은 둘 사이의 거리도 가까웠다. 바닷바람이 노송의 잎사귀에서 잔 비늘처럼 부딪쳐 청아한 음향으로 휩쓸렸다. 편하게 내뻗은 그녀의 하얀 다리의 색채가 현란할 정도였다. 더욱이 미니스커트 아래로 노출된 정갈한 다리가 아니었던가? 마음에 조금이라도 욕정이 들끓었다면 그대로 함께 나뒹굴었을지도 몰랐다. 정말 그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현지와 나 사이엔 특별한 기류가 들끓지는 않았다. 그랬어도 현지는 달뜬 음색으로 연거푸 얘기를 풀어 놓았다.
결혼 후 2년째에 접어들면서부터 현지에겐 남편의 성격이 견디기에 버거워졌다. 이전에는 신혼 초이기에 그런 대로 이해할 만한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참고 넘기기에는 버겁기만 했다. 그녀의 남편은 전자계열 회사의 광고 기획과장이었다. 새로운 광고에 대한 아이디어가 고갈되면 금세 표정이 달라지곤 했다. 특히 인근의 회사들과 경쟁이 치열한 상태였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회사의 업무를 집에까지 끌고 오곤 했다.
언젠가 밤 11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기를 현지가 은근히 종용했을 때다. 그녀의 남편의 눈가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안간힘을 쓰는 기색이 외부로 그대로 드러나는 상태였다. 현지의 말에 잠시 귀를 기울이는 듯. 남편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실내의 불을 끄고는 거실로 나서려고 했다. 그 때 현지가 말했다.
“자기야, 요즘 너무 힘들어 보여 안타까워. 너무 피로가 쌓이면.......”
현지가 막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됐다니깐 그래! 좀 모른 척해 달란 말이야!!”
그러면서 침대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방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플라스틱의 엉성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시계라 당장 박살이 나 버렸다. 현지에게 남편의 답답한 심정이 이해 안 될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남편의 고뇌의 정도도 충분히 이해가 되긴 했다. 하지만, 현지에겐 너무나 강하게 느껴진 남편의 반응이었다. 처음으로 당하는 충격적인 일이라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그 날 밤의 상황은 그랬다 치자. 그랬어도 사후의 반응이 더욱 현지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이전에는 남편이 화를 내었어도 곧바로 그녀의 마음을 풀어 주곤 했다. 그런데 점차 남편의 성향이 변하는 듯했다. 화를 낸 뒤엔 절대로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지 않았다. 남편의 습성의 변화는 관점의 변화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남편의 화를 내는 빈도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다. 일생을 함께 살아갈 부부였다. 사소한 감정 따위는 털어버리고 가족의 미래를 함께 설계해야할 배우자가 아닌가? 그 날 이후로 현지의 가슴에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를 타개해 보려고 현지는 몇 차례 남편과의 여행도 시도했다. 남편의 반짝이던 감성은 급격히 둔감해진 듯했다. 눈부시거나 현란한 경치를 대하여도 남편은 시무룩했다. 뭔가의 요인이 남편의 시야를 막아 버린 느낌이었다. 감성은 둔감해진 반면에 성깔은 말할 수 없이 날카로워진 남편이었다. 점차 벌어지는 틈새가 때때로 현지의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그런 신경 예민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현지의 마음은 뒤흔들렸다. 어떤 새로운 돌파구가 없이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 차에 현지가 나를 만난 터였다.
현지의 얘기에 한참 귀를 기울일 때였다. 현지가 상반신을 슬며시 나의 가슴으로 기대왔다. 순간적으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어떤 경우에서도 선명한 경계를 긋지 않은 방식의 접근은 탐탁치 않은 느낌이었다. 신발 끈을 점검하려는 듯이 내가 허리를 폈다. 그러자 현지도 이내 자세를 가다듬었다. 찰나 간이었으리라. 소리 없는 교감의 너울이 서로를 휘감는 듯했다. 서로가 쉽게 다가서지는 못할 듯한 느낌인 듯도 했다.
헌데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현지가 점차 고개를 숙이면서 훌쩍이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전신에 오싹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가슴을 졸였다. 뭐라고 말을 붙이거나 사유를 물어보기도 찜찜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잠시 그녀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볼 따름이었다. 한동안 그녀의 훌쩍임이 계속된 뒤였다. 그녀가 일어서서 바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도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그러면서도 착잡한 심정에 땅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굳이 왜 현지와 함께 걸어야 했는지? 단절된 대화의 근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가슴을 졸여야 했다. 말없이 둘이서 대략 50여 미터를 걸었으리라. 저녁 안개가 솔숲을 휘감아 섬 전체가 안개더미에 묻히는 듯했다. 지척을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차오르는 안개로 둘 간의 정서마저도 촉촉이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휘감기는 안개에 안절부절못할 때였다.
문득 모하비 사막을 지나 콜로라도 강으로 질주하던 날 밤의 안개가 떠올랐다. 사막이 끝나면서부터 짙은 초원지대가 펼쳐졌다. 안개는 그 초원지대에서부터 휘몰려들었다. 한낮에 콜로라도 강으로부터 몰려든 수증기가 응축되어 있다가 확산되는 터였다. 처음에는 금세 안개가 스러지려니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욱하게 휘감기는 게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차선이 안 보여 점차 속도를 줄이던 중. 둔탁한 충격음을 내며 승용차가 나뒹굴었다. 도로변에 세워둔 컨테이너 차량에 부딪힌 거였다. 잠깐 뒷좌석의 비닐봉지 안의 수건을 꺼내려고 아내가 안전벨트를 푼 직후였다. 그 날 밤이 아내와의 마지막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 날 이후로 안개가 진하게 흐르는 날이면 불안감을 느끼곤 했다.
‘그 날 차를 몰지만 않았어도. 길가에 컨테이너 차량만 세워져 있지 않았더라도. 아내의 제안에 따라 속도만 충분히 늦추었어도. 아내를 잃지는 않았을 텐데. 그리운 아내를 다시 어디서 만나랴?’
안개 눅눅한 석양 기운에 젖어 사별한 아내의 얼굴을 잠시 떠올렸다. 아내를 떠올리자 한없는 그리움에 취해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안개의 스멀거림은 이미 나의 체온과도 통하는 듯했다. 눈앞의 현지만 없다면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읽었음일까? 현지의 시선이 조심스레 나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현지의 눈매가 돌연 커지더니 나를 향해 다가서며 말했다.
“어머, 눈물이 비치네요. 무슨 속상하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고개를 흔들어 부인한다고 했지만 어설프기 그지없었던 모양이다. 현지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나의 눈시울을 닦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녀는 어느새 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는 나의 동공을 들여다보았다. 순간적으로 비밀을 폭로당한 듯한 심정에 휩싸였다. 상대의 슬픔의 틈새를 기민하게 파고드는 현지. 순간적으로 내겐 그녀가 두려웠다. 마치 신이 내린 무녀와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눈빛에선 차디찬 얼음 알갱이가 느껴졌다. 차가움이 가슴을 적시다가 심장마저 냉동시킬 듯했다. 무의식적으로 현지를 밀쳐내며 나는 두어 걸음을 물러났다. 현지가 무척 곤혹스런 눈빛으로 잠시 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차가운 한숨을 뱉어내며 신음처럼 중얼댔다.
“우리를 막아서는 요인이 뭐죠? 조금만 마음이 열리면 곧바로 연결될 텐데 무척 아쉬운 생각이 드네요.”
마침내 내가 즐겨 다니는 북쪽 해안에 이른다. 발아래를 굽어보니 짙푸른 바닷물이 길길이 벼랑에 부서지고 있다. 해수면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새벽 공기가 한없이 싱그러움을 주는 시각이다. 나는 취한 듯 눈을 가만히 감아본다. 사방이 정적 속에 잠긴 중에도 파도소리만이 들끓고 있다. 발길을 연구소로 되돌리며 마음을 평온히 가져본다.
오전 9시를 넘기는 시점이다. 생명 공학관 2호 연구실로 들어선다. 거기가 나의 전문 연구실이다. 2호실의 구성원으로는 나와 김은진 연구원이 구성원의 전부다. 은진은 미국 MIT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선임연구원이다. 39살이 되도록 결혼을 못한 노처녀다. 은진은 노처녀의 히스테리 증상은 좀체 드러내지 않는다. 아마도 교육을 받은 만큼 자신의 인격 관리에 최선을 다하는 눈치다. 그랬기에 그녀와 함께 연구를 진행하는 일은 마음이 편하다.
분화과정에 있는 주변 세포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는 촉진 단백질. 촉진 단백질은 세포들 간의 물질 이동의 정보를 수시로 교환하는 단백질이다. 촉진 단백질에 의한 정보 교류의 결과에 의하여 고유한 장기로의 분화가 이루어진다. 수송 단백질은 촉진 단백질을 이웃 세포로 수송하는 역할을 하는 단백질이다. 촉진 단백질과 수송 단백질의 결합과정은 분화과정의 강력한 추진력이다. 촉진 단백질과 수송 단백질의 결합 상태를 촬영한 사진을 분석하려고 은진과 마주 앉는다. 전자현미경 사진의 초점이 선명히 맞춰진 경우다. 촉진 단백질들 중에서도 4종의 단백질의 작용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은진이 내게 말한다.
“일단 핵막을 벗어나면서부터 수송 단백질이 엉겨드는 장면들이죠? 어쩜 이렇게 규칙적인 특성을 보여줄까요? 결합한 위치라든가 뒤엉킨 정도가 다들 아주 유사해요.”
“맞아요. 이런 규칙성이 있기에 연구의 실마리가 잡히는 게 아니겠어요? 사진에서 조금 검게 나온 이 부분을 좀 보세요. 여기에서 단백질이 뒤엉키기 시작하잖아요?”
눈이 피로한 듯. 은진이 연구실 남쪽면의 유리창을 내다본다. 나도 덩달아 유리창 밖을 내다본다. 4층 아래 해안으로 굽이치는 노송들의 군락이 눈으로 밀려든다. 언제 보아도 싱그러운 느낌이 드는 솔숲이다. 솔숲이 끝나는 자락에 바다가 처연한 모습으로 드리워져 있다. 바다 위로는 몇 척의 배가 떠다닌다. 연구소가 들어선 이후로 10여 가구에 달하는 사람들이 외지로부터 주민으로 정착했다. 바다 위를 떠다니는 배는 대개 주민들의 어로선이다. 주민들 중에서 나와 친한 사람은 ‘서해’호의 선주인 현수다. 현수는 40대 중반의 노련한 어부이며 횟집의 주인이기도 하다. 현수와는 낚시를 하다가 몇 차례 술잔을 나눈 적이 있다. 가식이 없는 진솔함이 내 마음을 끈 상대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현수처럼 진솔하다면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현지의 모습이 잠시 물결에 휩쓸리며 떠오른다. 만남에 숙명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현지.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런 마음이 들게 했을까? 아리따운 얼굴에 근심이 서린 눈빛으로 그녀는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그녀가 바라보는 세계는 이 세상의 극점일까?
점차 바다의 물색이 연해질 무렵. 연구소 바깥 광장으로 사람들의 소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흘깃 시계를 들여다본다.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신 선생님, 식사하러 가시죠.”
은진이 나를 향해 입을 연다. 나도 그녀를 따라 가운을 벗고 잠자코 실내를 나선다. 잠시 후에 외곽 광장을 지나 별관인 구내식당으로 들어선다. 70여 가구에 이르는 연구원 가족들이 식당으로 몰려든다. 차례차례 식판을 들고 밥을 푼 다음 반찬과 국을 타러 줄지어 순서를 기다린다. 구내식당의 식비는 해변의 식당들의 식비의 절반 수준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연구소 식구들은 구내식당을 찾는다. 잠시 후에 은진과 식탁에 마주 앉는다. 허여멀쑥한 살결에 갸름한 얼굴을 지닌 은진이다. 은은한 아름다움이 깃든 얼굴형이다. 은진이 입을 연다.
“요즘도 밤낚시 계속하세요? 저도 같이 끼워 주면 안 될까요?”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발길을 옮겨 광장을 거쳐 그녀와 함께 연구실로 올라간다.
오후부터는 배양 용기 내의 반응 상태를 주기적으로 관찰하기로 되어 있다. 줄기세포로부터 장기세포로의 분화에 따른 세포 증식을 지켜본다. 10분마다 시료를 채취하여 세포 증식의 비율을 점검한다. 아울러 장기세포로의 변환에 관여한 조절유전자의 역할과 변환 기여도를 측정한다. 조절유전자는 붉나무 잎에서 채취한 염료로 착색시킨 상태다. 조절유전자만 선택적으로 진한 갈색으로 착색되어 있다. 확대된 영상을 컴퓨터 모니터에 연결시켜 들여다본다. 10분 간격으로 진행되는 세포 내의 변화는 확실히 다채롭다. 일정한 방향으로 치닫는 변화의 영역이 확실하다. 이것을 보다 자세히 파헤쳐 연구의 기틀을 쌓아야 한다. 너무나 실현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세계의 연구진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다.
백색 가운으로 갈아입은 은진과 나. 둘은 호흡을 잘 맞춰 연구에 가닥을 잡아 나가는 중이다. 은진의 옆모습을 바라보자 슬며시 현지가 떠오른다. 두 번째의 만남에서 홀로 돌섬의 여관으로 돌아가던 현지가 생각난다.
그 날. 현지는 보다 서로의 마음을 열려고 안간힘을 썼다. 기탄없이 대화하자고도 제안했다. 헌데 현지가 다가서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만큼 내 마음은 얼어붙었다. 현지의 진정한 마음의 실체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마음을 열기란 용이하지 않았다. 그 때 나는 생각했었다. 현지가 그녀의 남편과 이혼한 사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 세상에 성격이 유사한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고? 성격 차이를 내세워 이혼을 결심하는 사람들은 어떤 심리를 가지고 있는지도 의아스러웠다. 그런 시각으로 현지를 바라보는 나에게 마음을 열려고 하다니! 부질없는 짓이라고까지 생각되었다. 하도 현지가 내게 마음을 열라기에 그녀에게 물었다.
“제겐 선생님과 성격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하세요? 제게서 성격 차이를 발견하면 또 이혼할 건가요? 결혼이란 신성한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요인을 근거로 쉽게 이혼을 결정할 성질이 아니라고 봐요.”
그랬더니 현지가 나의 팔을 끌고는 해변의 포장마차로 향했다. 초저녁부터 밤이 이슥할 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눴다. 어지간했으면 둘이 한 몸으로 어우러질 수도 있었던 밤이었다. 주기(酒氣)와 여인의 체취가 내 마음의 빗장을 벗기려고 했다. 아내와 사별한 나는 자식조차 없는 몸이었다. 한 마디로 총각과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언제든 처녀장가를 들 수도 있는 조건이었다. 아마도 이런 점들이 내 마음을 끝내 열리지 않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떤 순간부터였다. 나의 의식에는 현지가 적극적으로 나를 유혹하려는 것으로 비쳤다. 이런 느낌이 드는 순간. 나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가 버텨내기에는 엄청나게 버거운 상대를 만난 듯했기 때문이다. 내가 심적 갈등으로 허덕일 때였다. 현지가 돌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당신한테만 딸린 자식이 없는 게 아니잖아요? 나도 입장이 같단 말이에요. 그런데 왜 우리가 함께 하면 안 되는 거죠?”
그녀의 말에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어졌다. 바로 그 때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의 적극적이며 도발적인 자세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 거라고. 결코 그녀더러 얌전하게 굴라는 뜻은 아니었다. 너무 노골적인 접근이 부담스러웠다는 뜻이었다. 남녀간의 관계가 얼마나 까다로운가? 사소한 일에도 쉽게 마음이 얼어붙게 되는 터였다.
너무 술에 취한 듯하여 그 날은 내가 현지의 여관방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여관을 빠져 나왔다.
“이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살펴봐요. 구형인 바로 이 부분에서 세포에서 몰려나온 물질들과 뒤엉키는 모양이에요. 단백질 주변으로 물질들이 밀려드는 원인은 단연 수소결합 때문이겠죠?”
은진의 말이 단숨에 나의 상념을 깨뜨린다. 나 역시 단백질 주변으로 몰려든 물질들을 바라보던 순간이다. 그래서 얼른 응답한다.
“촉진 단백질의 기능으로 따져 보면 효소의 기능과 유사하다고 여겨집니다. 효소도 단백질로 이루어졌잖아요? 문제는 단백질 주변에 밀집한 물질들의 존재가 뭔가하는 점이에요.”
은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굴이 환해지며 눈빛이 따사로워진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흔들며 창 밖을 내다본다. 즉시 파란 바다의 수면이 동공으로 빨려든다.
“신 선생님! 잘 하면 우리도 이내 커다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신명이 난 목소리로 은진이 얘기를 꺼낸다. 대화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얼핏 든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절제하는 게 좋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약간의 날카로운 안광을 섞어 배양 세포를 들여다본다. 이렇게 하기만 해도 금세 분위기가 바뀐다.
금세 달라지는 은진의 표정을 바라보자 3주 전의 일이 떠올랐다. 나는 낚싯대를 챙겨들고 북쪽 해안 벼랑으로 갔다. 북쪽의 벼랑에는 평시에도 인적이라곤 거의 없는 곳이었다. 대신 잡히는 물고기의 수량은 풍부한 편이었다. 그런 재미로 즐거이 북쪽 벼랑을 찾곤 했다. 그 날은 토요일이며 오후 4시 무렵이었다. 우럭 한 마리를 막 잡아 올리는 중이었다.
“신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저도 동참해도 되죠?”
7∼8m 길이의 대나무에 낚싯줄을 맨 낚싯대였다. 갯바위 낚싯대로는 손색없는 도구였다. 노래미 4마리에 우럭 1마리의 비율로 잡히는 추세였다. 벼랑 아래쪽이라 수심도 깊은 편이었다. 낚이는 물고기의 씨알도 굵은 편이었다. 대략 십여 분마다 한 마리씩 낚이는 꼴이었다. 오후 6시까지의 대략 2시간 동안 둘은 낚시에 골몰했다. 낚시 도구를 챙겨 들고 둘은 벼랑 아래로 내려섰다. 탁 틘 공간에 냄비와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설치하여 은진은 매운탕을 끓였다. 첫 숟가락에 음식 솜씨가 보통이 아님이 드러났다. 매운탕에 곁들여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취미라든가 기호 식품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영역까지 화제로 삼았다. 지나치게 상대를 고르다가 노처녀가 된 은진의 처지가 애석하게 여겨졌다. 은진은 과욕을 부리다가 노처녀로 밀려난 세월을 아쉬워했다. 스러져 간 시간이 화제로 떠오르는 순간. 급기야 은진은 훌쩍이며 눈물을 쏟았다. 그녀에게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건만 괜히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녀의 눈물을 보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대책이 안 섰다. 가슴이 울적한 나머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은진이 상반신을 나의 가슴에 묻었다. 그러면서 나를 꼭 포옹했다. 순간적으로 어째야 좋을지 암담한 심정이었다. 더구나 미혼 여성의 강렬한 체취와 향수 냄새가 전신으로 휩쓸려들었다. 잠시 정신이 아뜩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잠재된 의식이 번쩍 머리를 들었다. 어떤 경우에도 순리적인 정감의 흐름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우발적인 접근은 결코 서로에 대한 슬기로운 접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정신을 가다듬어 은진을 슬며시 밀어내었다. 은진이 무안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을 썼다. 하지만 은진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순간 분출되는 그녀의 강한 눈빛에 가슴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곧바로 은진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제가 선생님의 마음에 영 안 드세요? 저의 어떤 점이 부족하게 느껴지세요?”
나는 잠시 주춤거리며 응답했다.
“천만에요. 누가 감히 선생님을 부족하다고 여기겠어요? 오로지 저는 ......”
얼굴 가득히 노여운 기색을 드러내며 은진이 내뱉었다.
“나이가 젊다고 너무 뻐기지 마세요. 겸손을 위장하지 마세요. 구역질이 날 정도예요.”
그러더니 일어나 아파트 건물로 총총히 달려가 버렸다.
막상 은진이 해변을 떠나 버린 뒤였다. 모순스레도 내 가슴이 마구 들끓었다. 마치 뭔가를 꽉 붙잡으려다가 놓쳐 버린 심정이었다. 문득 나의 정체가 의심스러웠다. 어디까지가 나의 영혼이며 정신세계인지를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문득 풀 섶의 민들레 홀씨가 보였다. 수없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려는 홀씨들. 홀씨들에 휩쓸리는 바람결에 생각이 미치자 울고픈 심정이었다. 헤어나갈 방향이나 돌파구마저 의식 밖으로 스러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냥 아무 곳에나 몸을 내던져 버리고픈 마음까지 들었다. 이런 마음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부터 가슴이 답답해졌다. 찰나 간에 폐인이 되어 버리고 말 듯했다. 이런 감정의 회오리에 빠지기는 드문 일이었다. 그리하여 허탈한 심정으로 해변으로 내달았다. 해변으로 내달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나만의 정신 영역도 갖추지 못한 존재라? 무엇 때문에 삶을 사는지? 애달픈 생각이 길길이 치솟았다. 누구에게 어떤 의미로 비쳐질 것인가? 과연 나에게 의미를 둔 대상이 있기나 할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울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하여, 정신없이 해변을 향해 내달았다. 마침 해변에는 관광객을 위해 40대 중반쯤의 아주머니가 조개와 생선회를 팔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의 여인이었다. 이미 관광객의 발길은 뜸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장소를 옮기지 않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반기는 얼굴이었다. 대뜸 나를 향해 여인이 말했다.
“신색을 보니 마음이 아픈가 봐요. 그것도 무척이나. 그럴 땐 회에 곁들여 소주가 제격이에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나는 여인이 펼친 자리에 앉았다. 주문을 하기도 전에 광어회와 소주병이 내 앞에 놓였다. 고추장이 담긴 플라스틱 찬통을 꺼내들며 여인이 나와 마주 앉았다. 어스름이 지는 해변을 흘깃 바라보며 여인이 술잔을 내밀었다.
“제게도 한 잔 주세요. 더 올 손님은 없는 모양이니까요.”
고개를 끄떡이며 여인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여인이 당당히 술잔을 받았다. 서너 순배 술잔이 돌고난 뒤였다. 불콰한 얼굴로 여인이 말했다. 혹시 여체가 생각나면 섹스도 가능하다고 했다. 술과 몸까지 파는 여자. 여인은 행락지의 작부일 따름이었다. 아무리 여체에 환장했더라도 작부나 창녀와는 성교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취향인 터였다. 취기에 몸을 못 가누는 여인에게서 발걸음을 옮겼다. 더욱 마음이 애잔해지는 느낌이었다.
돌변하는 은진의 눈빛을 무시해 버리고는 다시 줄기세포의 영상을 들여다본다. 둘은 은연중에 호흡을 맞춰 분화과정에 관심을 기울인다. 연구가 좋은 것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연구의 세계에 있어서는 모든 잡념으로부터 허허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실험대에서 허리를 펴고 실험 자료의 정리를 끝낸 뒤다. 연구실 창 밖을 내다보니 저녁 햇살이 따갑게 밀려든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 무렵이다. 퇴근해야 할 시간이다. 실험대와 자료 정리를 마친 뒤에 손을 씻고는 연구실을 벗어날 작정이다. 이 때 은진이 내게 입을 연다.
“아까부터 눈빛이 누구를 기다리는 듯했어요. 혹시 무슨 약속이 있나 봐요?”
되도록이면 말을 줄이기 위해 가볍게 고개를 끄떡인다. 잠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밝은 표정으로 말한다.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내일 봐요.”
그녀도 맵시 있게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하고는 연구실을 나선다. 잠시 스쳐가는 그녀의 눈빛에도 짙은 우수가 서린 듯하다. 그녀의 옷자락에 휩쓸리는 바람결을 볼 때다. 문득 현지의 행방이 궁금해진다. 그녀는 지금쯤 선착장의 방파제와 와 있을까? 언제 봐도 빼어난 미색의 얼굴이 먼저 가슴에 밀려든다. 그러면서 현지와는 쉽게 어우러질 수 없는 공허감이 가슴으로 밀려든다.
오후 6시 반쯤. 솔바람이 나부끼는 해변으로 내려선다. 선착장에서 가까운 솔숲이다. 이전에 현지가 빼어난 풍광이라고 격찬하던 곳이다. 돌섬에서 2번째의 발자취를 남기고 떠나던 날. 현지의 눈시울 깊숙이 드리워진 돌섬의 정경은 솔숲이었다. 불현듯 그 때 어떤 영감에 가까운 느낌이 밀려들었다. 만약 현지가 다시 섬을 찾게 된다면 솔숲을 찾으리라는 느낌이었다.
나는 숨결을 고르며 석양에 휩쓸리는 솔숲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왈칵 갯냄새가 후각으로 밀려든다. 생명을 잉태했던 원시 상태의 바다의 정경이 느껴질 정도다. 뽀얀 색채로 잔설처럼 내리깔린 해변의 모래톱. 그 언저리엔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며 현지가 서성이고 있다. 먼발치로 바라봐도 틀림없는 현지의 맵시다. 마음을 추스르며 발길을 서서히 현지에게로 옮긴다.
마침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 현지의 얼굴에 순간적인 서글픔의 색조가 서린다. 저녁안개 때문인지 눈시울엔 물기마저 촉촉이 서린 듯하다. 한 발자국의 거리만큼의 공간에서다. 둘의 세계는 융화의 실마리를 못 찾아 결빙하는 느낌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언어로서도 둘의 정서를 융화시키기는 어려울 듯하다. 근원적인 이유와 배경적인 요인마저 찾을 길이 없어 보인다. 가뭄에 논바닥이 균열지듯. 한 걸음의 거리에서도 단절의 장막이 사방으로 드리워지는 느낌이다.
“정녕 그렇게도 마음을 열 수 없어요?”
스러져 가는 기력을 가까스로 다잡듯 현지가 내게 묻는다. 나는 절망감으로 진저리를 치며 묵묵히 고개만을 좌우로 뒤흔든다. 마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질식할 것만 같은 분위기 때문이다. 한동안 정적에 휘감긴 채 마주 섰다가 둘은 선착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석양의 잔영이 다시 한 번 짙게 드리워진다. 붉은 공작의 깃털처럼 석양의 햇살이 휩쓸리는 느낌이다. 파리한 신색으로 현지가 선착장의 난간에 몸을 기댄다. 동공을 통해 허탈한 심정이 역력히 드러나는 듯하다. 개인의 의식을 좌우하는 관념이 뭔지? 흔쾌히 현지와 마음을 연결시킬 수 없는 내 마음이 공허할 따름이다. 현지가 대절한 발동선은 아직도 다가오는 기척이 없다. 석양의 놀에 현지의 눈시울마저 발그레 물들어 보인다. 감응하는 정서가 아닌 상태의 대면만큼 괴로운 것이 또 있을까? 형언 못할 애잔함이 자꾸만 가슴을 저리게 한다. 눈부신 석양과는 대조적으로 초췌한 현지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인다.
낙조의 붉은 자락이 점차 자줏빛으로 변하는 시점이다. 조금만 지나면 땅거미가 지리라. 나는 애틋한 마음으로 시계를 들여다본다. 7시를 갓 지난 시점이다. 잠시 후에 멀리서 선박의 엔진 소리가 들려온다. 통통통 통통통통!! 이제 확연히 작별의 시간이 다가온다. 자꾸만 가슴에 아픔이 인다. 현지에 대해 왜 가슴이 저려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점차 해면에는 물안개가 서리며 음영이 짙어만 간다. 서글픈 심정으로 시간을 헤아리던 현지. 마침내 마음을 굳힌 듯. 내게로 다가서며 입을 연다.
“제가 여러 모로 부족하겠죠? 하지만 이것도 운명으로 여기고 말없이 물러갈게요. 어쩌면 산다는 자체가 환상에 불과할진대 너무 큰 의미는 두지 않을래요. 마음에 안 맞는 자체가 운명일 수도 있으니까요.”
나도 곧바로 궁색한 응답을 한다.
“아뇨. 선생님한테는 너무 훌륭한 점이 많아서 제가 버거운 심정이에요. 부디 훌륭한 분을 만나 아름다운 인연을 맺으시길 바랍니다.”
더 이상 장황해지다가는 실수를 범할까 봐 가만히 입술을 닫는다. 이 때 발동선이 선착장에 닿는 기척이 난다. 현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손을 내민다. 이별의 악수를 하자는 뜻이리라. 말없이 나도 손을 내민다. 손을 잡아도 전혀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유령의 손이라도 잡은 듯하다. 이에 감전이라도 된 듯. 내 마음도 이를 데 없이 스산스럽다. 마치 가슴에 구멍이 펑 뚫린 심정이었다. 재촉하는 듯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린다. 현지가 공허한 눈빛으로 잠시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이내 몸을 돌려 발동선에 몸을 싣는다. 배가 선착장을 떠날 무렵에야 잠시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그러더니 이내 선실 안으로 몸을 감춰 버린다. 왠지 콧등이 시큰거리며 눈시울에 눈물이 괸다. 서슬 퍼런 슬픔이 나의 내면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인연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저물어가는 하늘을 향해 하염없이 중얼댄다. 어느새 발동선은 수평선을 넘어가고 보이지 않는다. 착잡한 심정에 냅다 고함이라도 내지르고 싶다. 몇 번을 망설이다 크게 고함을 내지른다.
“어쩔 수 없었어. 나로선 정말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이제 주위는 온통 물안개가 서려 자욱하다. 고함소리의 음절들이 방향을 잃고 추락하는 새처럼 주위로 흩날린다.
(200자 원고지 100장)
